러일전쟁 1 - 기원과 개전 한길그레이트북스 163
와다 하루키 지음, 이웅현 옮김 / 한길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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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대작 《러일전쟁》을 힘들게 읽었다. 청일전쟁에 이르는 전반부는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지루한 외교전을 서술하고 있는 후반부에 들어서자 지쳐 한동안 책을 던져놓았다가, 설을 쇠면서 들어앉아 다시 붙잡고 후딱 읽어치웠다. 덕분에 다수의 논문과 연구동향도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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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메이지 37)년 2월 6일 토요일 오전 9시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함대의 제3전대가 사세보 항에서 출격했다. 연합함대 사령관에게 내려진 명령은 “신속하게 발진해 우선 황해 방면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라”는 것이었다. 목표는 뤼순이었다.

오후 4시 진해만에 정박해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제3함대 제7전대의 포함 ‘아타고’는 마산항에 입항했다. 함장은 마산 주재 미우라 영사와 협의하고 바로 한국 전신국을 점령했다.

이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또 다른 조선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진해만 점령과 부산 및 마산의 전신국 제압이 러일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에서 최초로 수행된 군사행동이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침략행위였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의 전사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무시되어 왔다.

위의 책 pp1095~1099.

러일전쟁은 조선전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전시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의 영내에 침입해 진해만, 부산, 마산, 인천, 서울, 평양을 점령하고, 대한제국 황제에게 사실상의 보호국화를 강요하는 의정서에 조인하게 했다. 인천과 뤼순에서 러시아 함선에 대한 공격이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이 공격은 무엇보다도 대한제국 황제에게 러시아의 보호는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결정타를 날려 황제를 체념시키는 역할을 했다. 조선 장악이 끝나자 전쟁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서 본격적인 러일전쟁으로 진화해 간다. 일본은 선전포고에서 “한국의 보호”를 위해서 러시아와 싸운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지배하에 두고 보호국으로 삼고 나서, 러시아에게 그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추진했던 것이다.

위의 책 p1187.

2.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국제전인 ‘조선전쟁(1차 청일전쟁, 2차 러일전쟁, 3차 한국전쟁)‘을 통해 동북아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와다 교수는 러시아사가 전공이지만 북한현대사와 한국전쟁에 대한 저작까지 남기고 있다. 하라 아키라(原朗) 교수 또한 청일·러일전쟁을 일으킨 근본 목적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 획득에 있었다는 점에서 두 전쟁은 실제로 ‘제1차, 제2차 조선전쟁’인 셈이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연결해서 '청일·러일전쟁'이라고 일컫는 순간 한반도의 중요성이 퇴색되면서 '메이지의 영광'이 전면에 부각되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2015)

러일전쟁을 "서구와 아시아를 묶는 ‘지(知)의 결절 고리’로 나타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는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의 시각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러일전쟁의 세기, 2010)

3. 청일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하여서도 와다 교수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결코 ‘청일전쟁’의 원인이 아니고, 오히려 ‘청일전쟁’으로 인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즉 1차 기포는 내정개혁을 위해 일어난 혁명으로서 내정 문제였고, 2차 기포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벌인 조선의 주권 침탈 만행에 저항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안외순, 2020)

4. 최근 러일전쟁 연구의 새로운 경향 중 하나는 전쟁을 결정하고 수행한 국가나 정부, 군부 지도자의 정책이 아니라 전투에 직접 참여한 병사나 피해지역 민중의 삶 등 전쟁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전쟁의 사회사를 복원하는 경향이다. 또한 방법론적으로도 외교문서나 정부문서와 같은 공문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戰史 등에만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회고록이나 견문록, 종군기자의 보고 등에 의거하여 전쟁의 참화 속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다. 물론 민중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다는 점은 한계이지만, 전쟁의 실제 현장과 피해지역의 참상을 좀 더 가까이에서 기록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 연구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의가 있다.(서영희, 2016)

예컨대 이인직의 《혈의 누》를 다시 읽으며 청일전쟁에 대한 지식인의 시선을 돌아보고 있는 논문(정선태, 2015)이라든가, 일본 측의 전쟁견문록과 청일전쟁을 보도하기 위해 특별히 전쟁기간에만 간행된 잡지 및 통상휘찬 등을 이용하여 청일전쟁 당시 조선 전쟁터의 실상과 민중의 삶을 살피고 있는 논문(차경애, 2006, 2008), 모리 오가이(森鴎外)라는 군의의 종군 일기를 중심으로 러일전쟁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는 논문(박영선, 2015) 등이 그렇다.

5.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의 연구동향을 좀 더 살펴봐야겠다. 그들의 연구엔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 있을테고 거기에서부터 변별력을 키워나갈 수 있지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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