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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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사 연구자로 출발하여 동·서양의 경계를 넘는 역사가를 꿈꾸던 임지현은 이제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의 기억 활동가로 이동하고 있다폴란드 근현대사와 유럽 지성사에서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로 학문적 관심을 넓히며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국사의 해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해온 그는 기억 연구를 통해 진짜와 가짜가해자와 희생자 사이의 회색지대를 누비며 전후세대의 역사적 책임을 돌아본다민족주의 기억을 탈 영토화해 국경을 넘어서는 기억의 연대를 지향하며 서구 중심의 기억 연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차원의 기억 문화를 탐색하는 데 학문적 주안점을 두고 역사가에서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는 바우만(Zygmunt Bauman) 세습적 희생자 의식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예컨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Gayatri Spivak)의 질문을 역사가는 들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되묻는다홀로코스트 생존자나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들의 증언을 보면서발턴이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듣지 못한 것이어서제노사이드나 일본군 성노예 같은 트라우마를 겪은 증인들과 만나는 장은 문헌 증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증인들을 취조하는 역사의 취조실이 아니라사실과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증인들이 드러내는 깊은 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진정성을 복원하는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적인 태도라는 것이다요컨대역사가들의 작업은 곧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만드는 작업이며이 점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가 기억 활동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3. 10년 이상 다국적 아카이브에서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를 그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제시하고 있다이는 후속 세대들이 앞 세대가 겪은 희생자의 경험과 지위를 세습하고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들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서사이다기억 서사로서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가해자 민족을 선험적으로 전제한다가해자가 없는 희생자를 생각하기 어렵듯이가해자 민족 없는 희생자 민족은 상상하기 어렵다그에 의하면 가해자 민족과 희생자 민족이 함께 구성하는 부정적 공생(negative symbiosis)의 인식론적 프레임은 20세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지구사를 구성하는 연쇄 고리다.

 

이 책의 초점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역사보다는 그것을 구성하고 재현하는 기억의 역사에 놓여 있다사람들의 생각과 실천을 유도하는 문화적 기억은 문서자료의 실증적 보조 수단이 아니라과거를 재현하고 역사를 구성하는 인식론적 정치의 중요한 장치라는 것이다하여 이 책은 동아시아의 기억 체제에 대한 담론적 문제제기로 읽힌다.

 

저자는 21세기 민족주의를 포착하는 개념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통찰함으로써 지구적 기억의 윤리를 모색하고 있다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천차만별의 모습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중심의 문화적 기억이 그것에 도덕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21세기의 지구화 조건에 맞게끔 민족주의를 재구축한다는 것이다궁극적으로 그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전제하는 가해자와 희생자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는 식민주의제노사이드홀로코스트 등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고 본다. 세습적 희생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성찰이 21세기 문화적 기억의 서사적 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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