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빼기-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읽기
드디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가라타니 고진을 처음 안 것이 1999년이니까 벌써 9년, 내 결혼기간 정도 된다. 물론 그동안 고진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동안 그와 같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읽어줘야만 할 것 같은 유혹의 순간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첫번째는 내가 편집한 책의 저자에 의해서였다. 저자가 말하길, 국내 권위 있는 비평가가 고진의 글을 그대로 베껴먹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는 자기 파를 형성할 만큼 탄탄한 젊은 후학을 거느린 비평가였다. 두 번째는 거의 십년 만에 고운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그녀의 이메일주소가 가라타니였다. 그녀는 철학을 전공했고 그때는 국문과에 편입해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아마 그녀를 균열시킨 인물이 가라타니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와 같은 길을 걸었다면 경제학을 전공하고 문창과로 전과하여 가라타니를 만났을 수도 있다. 대학교에 갈까를 고민할 때 내가 왜 '경제학'을 선택했었는지는 아직도 아이러니이다. 가장 큰 동인은 내가 전혀 모르는 불모지였기 때문일 듯하다. (물론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세 번째는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行人』 때문이다. 소세키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심리는 그의 작품 제목을 통해 더 확연해지곤 하는데 내겐 '코(우)진'이 그랬다. '코(우)진' '코(우)진' 발음하다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라타니는 소세키 작품에 영감을 얻어 '고진行人'이라는 멋지구리한 명名으로 개명했다 한다.
일본인의 이름은 엄밀히 말해 명자名子와 명名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메이지 8년(1875)에 '평민명자의무령'이 내리면서 국민國民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대충 불러오던 성(여기서 '성'은 천황이 하사하는 '성'과는 달린 평민들 사이에 이름처럼 불리던 것을 뜻한다)을 폐지하고 명자를 가져야 한다는 호적부 정리를 통해 구축된 것이다. 고진이 그랬던 것처럼 명자는 그대로 두고 자주 불리는 명만 바꾸는 예는 흔한 경우이다. 한국의 성씨가 300개 가량 있고 10억 인구의 중국은 500개인데 비해 1억 2천 인구의 일본의 성씨가 29만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성이 아니라 명인 것이다. 〈늑대와 춤을〉에서 지금껏 남아 있는 기억은 '주먹쥐고 일어서'와 같은 인디언의 이름인데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의 이름도 샘터 옆에 사는 고이즈미(小泉), 마을 중간에 사는 나카무라(中村), 산속에 사는 야마모토(山本), 기러기 가게에 사는 '맛의 달인' 카리야(雁屋), 메이저리그의 장남 이치로(一郞) 등 재미있지 않은가. 중국에서라면 학자를 칭하는 장자, 노자, 맹자에 붙는 '자'자가 한국에서는 산야에 흔한 명자, 화자, 말자로 일본에서는 아키코明子, 하나코花子, 미즈코末子로 불리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서양에서도 라스트 네임, 즉 성은 그 집안의 내력을 알려주는데 방앗간이나 제분공 집안은 밀러Miller, 대장장이나 금속세공인 집안은 스미스Smith, 금만 세공하는 집안은 골드슈미트Goldschmidt, 벽돌공 집안은 아인슈타인Einstein, 직조공 집안은 베버Weber, 유대인 상인 집안은 크레이머Kramer, 빵집 집안은 베이커baker 등 다양하다.
가라타니 고진처럼 내게 '이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인물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앙 네포무세뇨 크리스핀 크리스피뇨 드 라 상띠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Pablo Diego Jose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Crispin Crisp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Ruiz y Picasso'이다. 번역하면 나 파블로 피카소는 "백부인 파블로, 할아버지인 호세, 아버지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 외할아버지인 후앙 네포무세뇨, 대부인 크리스핀, 대모인 크리스피뇨, 그리고 어머니인 루이스 이 피카소에 의해 태어났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름에 대해 길게 얘기한 것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진의 철학과 서양 철학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있었던 장부 정리법 중에 꿔준 돈을 갚으면 막대기를 버리는 식의 셈식이 있었다. 갚았으니 계산하고 할 것 없이 빚이 없어졌다는 거래방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수학자들이 이 셈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가 있는가 하면 원시적인 방식이라고 멸시하는 두 부류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감명을 받은 사람은 실용학문인 수학에서 빼기의 합리성을 발견했다. 빼기가 실제 생활에서 쓰일 때는 거래의 철학으로 꿔준 돈이 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빼기의 합리성을 발견한 부류는 학문의 유용성을 현실에서 찾는 유물론자였다고 할 수 있고, 거래 내역을 회계장부에 남겨 이자를 계산하거나 돈을 꾼 사람의 내력을 이후에도 관리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사고, 즉 더하기 사고를 비판하는 자리에 있게 된다. 문제는 막대기를 버리는 방식이 미개하다고 보는 측의 사고가 지배층의 사고를 내포 내지 은닉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변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미개하다고 본 것에는 '학문의 발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순수학문에 대한 미래 지향적인 사고가 깔려 있다. 즉, 학문이란 빼는 것이 아니라 더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변증법적인 사고는 사실은 유물론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고래의 관념론자들의 사고 방식이었고 서양 철학사의 근간이 되었던 사고방식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서양인의 셈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핀란드의 한 생선가게에서 청어가 1,700원이라고 하자. 잔돈이 없어서 2,000원을 줬다. 우리 식으로라면 주인은 머릿속으로 또는 손으로 2000-1700=300을 계산한다. 그리고 거스름돈 300원을 건네준다. 받은 돈에서 물건값을 빼면 거스름돈이 나온다는 (당연한, 그러나 서양인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셈식이다. 반면 핀란드인 가게주인은 2000=1700+300이라는 도식이 머리에 그려진다. 우선 1700원을 꺼내 옆에다 놓고 내 손에 100원, 100원, 100원 합해서 300원을 주면 1800원, 1900원, 2000원이 된다. 그러고 나서 옆에 있던 1700원은 다시 가게주인 앞치마로 들어간다. 받은돈을 채우려면 물건값에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더 더해서 받은돈이 채워지면 그만큼을 준다. 이러한 셈식에는 '거스름돈'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물건값은 원래 확고부동한 것이고 거기서 내것을 더해주는 것(돌려주는 것이 아니라)이 그들의 방식이다. 더하기의 복잡성은 사실 필요할 때 빼기를 못하기 때문에 형성된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아닐까, 못한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화적 패턴이다. 즉 관습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손님과의 거래는 요즘 유행하는 '타자와 주체'의 문제로 확대해볼 수도 있다.) 이는 퍼스트 네임, 미들 네임, 라스트 네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계, 직업, 종교와 연관시키켜 계속 더해나가는 그들의 관습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관습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는 고진과 서양인의 '철학하는 방법'상의 변별점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가라타니 고진이 흥미로운 것은 고래의 학문이 앞선 학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덧대어 자신의 학문을 특화시켰다고 한다면, 그는 거기서 한걸음 나아가 과감하게 학문에서 가지치기(무식하게 말하면 '합리적인 빼기', 성급하게 말하면 '중심 읽기―세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와 반칸트주의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헤겔과 마르크스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선행되는 정신적 문화를 읽고 그들의 공통점(중심/가능성)을 취한다. 내 식의 간단한 도식으로 만들면 이렇다.
●칸트-칸트의 가능성(세계의 보편종교로서의 '윤리')=(덜칸트)/반칸트/(비칸트).
●데카르트-데카르트의 가능성(세계 내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덜데카르트/반데카르트/비데카르트(스피노자).
●헤겔-헤겔의 가능성(세계의 '운동')=덜헤겔/반헤겔/비헤겔(마르크스).
물론 이것은 앞서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대입할 수도 있다.
●칸트=칸트의 가능성(세계 보편종교)+덜칸트/반칸트/비칸트.
●데카르트=데카르트의 가능성(세계 내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덜데카르트/반데카르트/비데카르트.
●헤겔=헤겔의 가능성(세계의 운동)+덜헤겔/반헤겔/비헤겔.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우선 각 가능성에 대한 중심잡기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칸트의 가능성(세계 보편종교)=칸트+(덜칸트)/(반칸트)/비칸트(마르크스).
●데카르트의 가능성(세계 내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데카르트+덜데카르트/반데카르트/비데카르트(스피노자).
●헤겔의 가능성(세계의 운동)=헤겔+덜헤겔/반헤겔/비헤겔(마르크스).
우스운 말이지만, 내가 고진을 읽으려고 작정하고 훑어보기 시작한 네 번째 계기는 그가 십수년간 피워온 담배를 끊었기 때문이다. 트랜스크래틱 때문이란다. 에릭 호퍼가 자살에 실패하고 목적지도 없이 그저 길을 걷다 얻어 탄 차에서 듣게 된 충고 때문에 괴테의 희망이 아니라 용기를 발견했듯 나도 목적 없이 올라탄 그에게서 뜻밖의 무언가를 주울 수 있을까. 시대 부적응자인 나를 그가 조금은 안착시켜줄까. (2007. 11)
1.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이산, 1999
『マルクスその可能性の中心』(講談社, 1978 / 講談社学術文庫, 1990)
2.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1980)
『日本近代文学の起源』(講談社, 1980年 / 講談社文芸文庫, 1988年
『隠喩としての建築』(冬樹社, 1979年 /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89年)
『批評とポストモダン』(福武書店, 1985年 / 福武文庫, 1989年)
3. 탐구 1, 송태욱 옮김, 새물결, 1998(1986)
『探究I』(講談社, 1986年 / 講談社学術文庫, 1992年)
4. 탐구 2, 권기돈, 새물결, 1998(1989)
『探究II』(講談社, 1989年 / 講談社学術文庫, 1992年)
5. 언어와 비극, 조영일, 도서출판b, 2004(1989)
『言葉と悲劇』(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3年)
『ヒューモアとしての唯物論』(筑摩書房, 1993年 /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9年)
『終焉をめぐって』(福武書店, 1990年 /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5年)
『反文学論』(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1年)
『漱石論集成』(第三文明社, 1992年 / 平凡社[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1年)
『坂口安吾と中上健次』(太田出版, 1996年 / 講談社文芸文庫, 2006年)
『差異としての場所』(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6年)
6. 윤리21, 송태욱, 사회평론, 2001(2000)
『倫理21』(平凡社, 2000年 / 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3年)
『〈戦前〉の思考』(文藝春秋, 1994年 /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2001年
7. 일본정신의 기원-언어, 국가, 대의제 그리고 통화, 송태욱, 이매진, 2003(2002)
『日本精神分析』(文藝春秋, 2002年)
8.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도서출판b, 2006(2005)
9.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송태욱, 한길사, 2005(2001)
『トランスクリティーク――カントとマルクス』(批評空間, 2001年)
10. 세계공화국으로世界共和國, 조영일, 도서출판b, 2007(岩波新書, 2006)
『世界共和国へ――資本=ネーション=国家を超えて』(岩波書店[岩波新書], 200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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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편이다. 이건 뭐 그냥 기질이다. 나는 유행보다는 그 유행이 지나간 뒷자리가 더 궁금한 사람이니까. 해서 가라타니가 한창 유행하던 1999년에는 슬쩍 그를 비껴나 있었고 어느 날 그가 궁금해졌을 때는 거의 십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번역된 그의 텍스트를 우선은 전부 읽어보았다. 그가 궁금했을 때는 이미 그는 거론되지 않고 있을 때였고, 간간이 그의 텍스트를 누군가 도용하고 있다는 식의 소문만 들리던 때였으므로 그가 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의 텍스트를 읽으려면 또 어마무시한 서양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헤겔과 데카르트와 칸트를 알아야 했고, 중심을 잡으려면 마르크스를 더 알아야 했다. 따라갈 수가 없어서 그의 사고방식(빼기의 합리성)만 메모해 놓은 것이 다시 칠팔 년 전이다. 어떤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식하지만 내겐 늘 이런 식이다. 정말 무식하다. 무식해서 뭔가를 말할 수가 없다. 근데 책을 읽는다는 게 원래 그렇다고 말해주는 책을 만나면 반갑다. 모르니까 자꾸 보는 거지. 내가 뭘 모르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다 알면 미쳐버리겠지. 그러니까 자꾸 모르는 것들에 접근하는 그것, 그것이 읽기 아닌가라고. 이런 책들을 만나면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 아무튼 텍스트도 이런데 사람은? 말이 난무하는 곳을 기웃거리다 접어버린다. 그냥 하던 대로 가던 길이나 가지 뭐. 읽던 책을 놓으니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 그런 거지 뭐. 새벽에 깨버려서 일기장을 뒤지다.(201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