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의 290쪽

 

"어두운 마을의 거리를 지날 때,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가 많은 길을 달릴 때,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들이 밝은 빛처럼 어둠을 가른다. 간접적으로 경험한 현실이 텅 빈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흩어진 연장 사이에서 한 수녀가 공허한 눈으로 위를 쳐다보며 누워 있다. 소녀들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수녀의 눈을 감긴다. 그들은 수녀복과 신발에 묻은 톱밥을 털어낸다. 소녀들은 가서 자기들이 본 것을 말한 뒤에 하얗게 칠한 창문을 닦고 땔감을 모은다. 그들은 머릿속에서 금지된 노래를 부르며, 자기들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한다. 차의 앞 유리창 와이퍼가 빗속에서 물을 튀기며 움직이고, 한 남자가 집에서 나와 상자를 옮긴다. 마당에 그 자리가 있다. 기억을 사로잡는 6월의 날들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연민을 고결하다고 하지 않고, 경솔한 연인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채소를 키우고 달걀을 모은다.

밝아오는 새벽에 말들이 뛰어가고 눈앞에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올드 킬메이넘, 아일랜드브리지가 보인다. 갈매기들이 강가의 담장에 앉아 있고 홉 열매 냄새가 대기를 풍성하게 채운다.

들리는 것은 엔진 소리뿐, 바다는 고요하고 가을 아침의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다.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다시 열쇠가 판석 위로 떨어진다. 다시 길에서 그녀의 발소리가 들린다.

아일랜드의 마지막 모습이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곳의 바위와 가시금작화 덤불과 작은 항구와 멀리 선 등대까지. 그는 육지가 사라지고 바다 위에 춤추는 햇살만 남을 때까지 그곳을 계속 바라본다."--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290~291쪽

 

고요하다. “육지가 사라지고 바다 위에 춤추는 햇살만 남을 때까지” 그곳, 라스모이의 시간과 그 여름의 끝을 계속 바라보며 첫장을 다시 넘기게 하는 여운. 18권의 장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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