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속에 박힌 씨앗처럼
하명희(河明熙)
릴케의 말이던가요. “나의 고독은 마침내 완전히 닫힌 상태가 되고, 나는 그 고독 속에서 과일 속에 박힌 씨앗처럼 작업하고 있다”고.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쓰고 싶었나봅니다. 요즘 뭐하냐는 말라 비틀어진 말들 대신 어때, 너의 고독은 괜찮은 거니 묻고 싶기도 합니다. 내 고독이 얼마나 단단한지 보려면 씨앗이 땅을 뚫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호기롭게 얘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어느 나라의 문예지가 결호 없이 500호를 낸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독들이 과일 속의 씨앗처럼 작업을 해왔을지, 또 그 과일 열매들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과 만났을지 상상하게 합니다. 제가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것이 441호였고, 문학사상의 첫호는 내가 나기 한 해 전에 나왔더군요. 제 나이보다도 한 살을 더 먹은 잡지에 글을 쓰는 일은 중년의 벗을 곁에 둔 것처럼 든든하네요.
저는 올해 1년 공부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붙잡고 있습니다. 원문 번역이 다 나온 책을 굳이 힘들게 원서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런데 보세요.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나온 열 권짜리 원서를 읽겠다고,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돌아오기 전까지 저린 다리 주물러가며 원문 읽기를 즐기는 아줌마들이 이렇게나 많다니요. 대학원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2000년 전의 역사책을 온전히 제대로 읽어보겠다는 결사는 얼마나 짜릿한지요.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에 저를 가장 흥분시켰던 책읽기는 일본의 젊은 사상가인 사사키 아타루(佐々木中)를 만난 일이었어요. 이 사람 저랑 나이가 같더군요. 문학사상보다도 어린 셈입니다. 그런 그가 하는 도발적인 발언들을 보셨나요. 20만 년의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문학의 나이는 고작 5000년밖에 안 됐다는 것이지요. 여든 살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문학은 고작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요. 그는 이런 어린 아이가 문학은 죽었다, 문학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묻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저는 요즘 제대로 읽기 위한 몸풀기를 하고 있어요. “읽히지 않는 책이란 아직도 쓰여지지 않은 그 무엇이다. 읽는다는 것은 책을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책이 쓰여지게 하는 작업, 혹은 쓰여진 것이 되도록 하는 작업”이라는 모리스 블랑쇼의 방식을 다시금 새기는 중이에요. 작년에 아버지와 이별하고 마음 속의 아버지를 쫓다 만나게 된 한 분은 이런 읽기의 혁명성을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일흔다섯을 훌쩍 넘으신 이분의 호기심은 벽이 없습니다. 그저 니체를 제대로 읽고 싶어 철자도 모르는 독일어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하신 것이지요. 저는 그저 그분을 책을 읽듯이, 읽고 또 읽듯이, 밑줄을 치듯이 꾹꾹 바라만 봅니다. 보기만 하는데도 그분을 보며 글이 책을 넘어 앎이 되고 책이 담을 넘어 글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혁명인가요. 카프카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두 가지 주된 인간의 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조바심과 부주의”라고 했습니다. 사사키는 카프카를 읽어내며 이렇게 인용하지요. “초조함은 죄다.” 그래요, 문학을 하겠다는 고독 속에는 초조함 따위는 애당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는데, 저는 그 초조함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던 거예요. 뭐, 괜찮습니다. 저는 방금 초조함을 버리기로 했으니까요.(<문학사상> 201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