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마을에서 아시아의 골목을 걷다
골목의 단어들
2017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의 주제는 〈도시와 골목〉이었다. 초겨울 아시아 작가들과 서울의 골목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고 주제 발표를 하는 워크숍에 참여했다. 첫째 날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둘째 날은 베트남, 네팔, 팔레스타인, 인도네시아, 태국의 작가들과 성북동 북정마을의 골목을 걸었다.
와룡공원에서 시작해 한양 도성의 성곽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니 성북동의 두 동네가 한눈에 보였다. 한쪽은 마당이 널찍하고 집들이 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부촌이었고, 또 한쪽은 마을버스가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는 달동네였다. 한눈에 보이는 두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달동네’라는 단어가 선택되었다.
“달똥네?”
“응, 하늘 아래 가장 가까운 동네.”
“달도네?”
“달이 가장 크게 보이는 동네. 문타운, 문빌리지.”
“아, 달동네.”
함께 걸었던 아시아의 작가들은 ‘달동네’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달동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성곽길을 내려오자마자 연탄을 나르는 트럭이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연탄’이라고 외쳤다. 자 응언 선생은 베트남에도 연탄이 있다고 했다. 네팔의 나라얀 와글레는 연탄을 수박처럼 똑똑 두드렸다. 건물 외곽 계단에는 속이 빈 화분들이 놓여 있었고, 한 줄로 서서 지나가야 하는 골목을 따라 걷다 길이 막혀 되돌아오기도 했다.
북정마을 언덕에는 허름한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널빤지와 천막으로 지은 작은 공간이었다. 문 앞에는 그 집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시간이 건너간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멋진 카페들이 많을 테지만 이 카페는 이번에 처음 읽은 네팔의 소설 『팔파사 카페』(문학의숲, 2010)를 연상시켰다. 그 앞에서 네팔의 작가에게 “여기 팔파사 카페 같지 않냐”고 물었다. 사실은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정치적 혼란기에도 연애편지가 쓰여지고 한 번도 춤을 춘 적이 없는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당신이 그린 팔파사 카페 같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손짓과 몇 개의 단어로 말한 무엇이 전달된 것인지 네팔의 작가는 웃으며 ‘북정카페’라는 이름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카페 앞에 서니 카페 문보다 작가의 키가 더 커서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골목을 내려오며 집집마다 서 있는 주홍의 열매를 단 나무를 보며 누군가 “감, 감나무”라고 말했다. 내 옆을 걷던 베트남 작가는 우리를 따라오듯 자꾸 보이는 주홍의 열매를 가리키며 “감나무, 감나무”라고 따라했다. 감나무 사이로 까치가 날아와 앉았다. 버려진, 잃어버린 단어들을 훔치다 이곳까지 온 팔레스타인의 아다니아 쉬블리는 전날 숙소에서 접한 단어라며 “까치, 까마귀, 참새” 하며 움직이는 것들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곁에 늘 있었던 단어들, 달동네, 까치, 까마귀, 참새, 그리고 감나무들이 동네를, 골목을 지키고 있는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아시아의 작가들과 함께 걷는다는 건 새로운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단어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단 몇 시간의 동행만으로도 너무 익숙해서 낯선 골목의 단어들을 줍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시아의 골목들
저녁이 오기 전 〈상실의 길목에서〉라는 주제로 골목길을 함께 걸은 작가들과 대담을 진행했다. 14세 때부터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자 응언 선생은 “작가에게 국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전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선생은 말했었다. 당신에게 아침이 어떻게 오는지. 총소리와 총의 향기로 왔다고 했던가.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속해버린 세대라고 했다. 총의 향기! 세포에 총의 향기가 새겨진 사람과 나는 지금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자 응언 선생은 당신이 껴안고 있는 베트남의 비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지금도 전쟁이 슬픈 건, 우리는…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녀도 베트남 사람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슬픔은 번역되지 않아도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울음은 어깨에 있는지 여기저기서 어깨가 울컥이며 솟았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최근에 단어들이 식물처럼 자라는 꿈을 꿨다고 했다. 이 식물들은 “땅에서 나와 하늘을 향해 자랐고 비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가뭄 때문에 단어들이 마르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고 했다. 파도의 서사시처럼 반복되는 물음을 통해 소설 속 인물에게 바다를 돌려주는 아다니아의 소설은 국내에서 곧 출간될 다른 작품들을 기다리게 만든다. 아다니아는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어릴 적 경험을 하나 소개했다. 학교에 가기 싫어서 자기가 다니는 학교가 폭파됐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아침마다 아빠한테 확인했다고도 했다. 동네에서 놀 때는 폭파된 집에서 테이블이 있었던 자리에 테이블을, 의자가 있던 자리에 의자가 있다고 상상하며 친구들과 놀았다고 했다. 그녀는 골목 하면 생각나는 그런 경험들, 허구의 세계를 상상하며 노는 것이 집이 폭파되는 현실에서 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다고 덤덤히 말했다.
네팔의 작가 나라얀 와글레는 어린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어린 딸이 그가 지어낸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며 기자로서 사실을 전달하는 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고. 그의 작품 속에도 사실과 허구의 이야기가 갈등하고 부딪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는 이야기꾼의 즐거움을 유쾌한 말로 풀어내며 사람들을 웃겼다. 서울의 골목도 네팔과 다르지 않지만 왜 이곳은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걸었던 곳에서는 개들이 짖지 않았다. 개들뿐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걸을 때 보폭을 맞추기 위해 스케이트를 타듯 걸었는데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사는 환경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겨울 북정마을의 골목에는 잎 떨어진 나무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놀고 있었다. 도시의 성곽도 골목의 벽들도 뭔가 지켜야 한다는 듯 웅크리고 더 단단해 보였다. 베트남의 골목길은 어떨까. 네팔의 언덕은 더 크고 넓겠지. 팔레스타인의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상상의 놀이를 하고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발리는, 태국은 어떨까. 집으로 돌아온 걸음이 계간 『아시아』에 실린 작가들의 작품들을 하나씩 넘긴다. 책 속에는 가라앉는 골목, 변화를 이끄는 골목, 카트만두의 골목, 아르메니아 지구의 골목, 태국의 골목이 펼쳐져 있다. 골목은 책 속에도 있다. 북정마을을 돌아나온 걸음은 “어느 한 쪽이 현관 문을 열면 다른 한 쪽은 조심스럽게 자기 문을 닫”(181쪽)는 익숙하면서도 다른 아시아의 골목을 걷는다. (<작은책> 책여행 201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