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희의 소설집 《불편한 온도》(강)를 들고 불쾌한 온도를 이겨보려 애썼다. 이미 읽었던 작품들도 많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출구 없는 삶의 갱도 안에서 어떻게든 헤어나 보려고 버둥대는, 그런 와중에 받은 상처를 스스로 어떻게 핥아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래서 더 서럽고 가여운 작중인물들의 뒤를 쫓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을 참 힘겹게도 쓰는구나,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고 하는 식의 고상한 말씀들이야 널리고 널렸다. 그런 말씀들로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지금 이렇게 끔찍한 더위 속에서 누구는 굴뚝 위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누구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있겠는가. 40도를 넘는 폭염보다도 무서운 게 있다는 걸 확인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 고개 돌리고 외면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도 언제 어떻게 화탕지옥 속으로 끌려갈지 모르니까... 하명희는 화탕지옥을 들여다보며 수없이 심호흡을 했을 거다. 휙 돌아서고 싶기도 했을 거다. 소설을 쓰고자 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닐 테니... 소설집 뒤에 실린 <저녁의 목소리>와 <눈의 집>은 환상 풍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다소 이색적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아름다우면서 슬픈, 즉 ‘아․픈’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명희의 소설들이 끝까지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맨 앞에 실린 <꽃 땀>에서 택배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그리면서도 그들이 흘린 땀에 제목처럼 꽃향기를 얹어주는 것, <까막편지를 읽는 법>에서 베트남어로 쓰여 있어 읽을 수는 없으나 그 편지에 꾹꾹 눌러 담았을 동수 엄마의 마음, 그리고 이주노동자로 간병인 노릇을 하는 알람의 유쾌한 헌신은 작품이 아득한 벼랑 아래로만 향하는 걸 막아준다.
얼마 전 하명희는 쌍차 분향소 앞에서 진행한 낭독회에서 <불편한 온도>의 한 대목을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읽었다. 이 작품을 《황해문화》에서 먼저 접했을 때 ‘아, 하명희가 이런 소설가였구나’ 하고 놀라며 그와 내가 같은 모임 공동체 안에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이시대가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인 ‘사랑’ 그리고 ‘연대’의 힘을 이토록 곡진하게 그려낸 작품이 있었던가 싶었다. 추운 겨울에 새들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즉 ‘살기 위해서’ 한 발로 서서 잠들며 불편한 온도를 견딘다는 은유는,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면서도 생명을 빼앗는 조건 앞에서 스스로 생존의 방법을 찾아가는 능동태의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불쾌한 온도와 불편한 온도 사이에서 나는 지금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내 옆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프로펠러에게 물어본다.(박일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