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바이칼의 게세르 신화, 일리야 N. 마다손 채록, 양민종 옮김(, 2008)

게세르Geser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의 영웅서사시의 이름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게세르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바이칼 호수에서만도 백여 개의 판본이 있다고 한다. 서양에 오뒷세우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게세르가 있는 셈이다. 번역된 책은 서사시의 형식이지만 번역자는 이야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산문으로 풀었다. 번역된 판본은 바이칼의게세르:부리야트-몽골인의 영웅서사시(1941)로 부리야트의 전설적인 이야기 낭송자(전기수)인 페트로프의 낭송을 마다손이 채록하여 활자화한 것이라고 한다.

 

부리야트의 하느님은 후헤 문헤 텡그리(영원한 푸른 바다)로 역할보다는 '뜻을 가진 자', '말씀'으로 보인다. 에세게 말리안 텡그리(현명한 할아버지 하늘님)는 영원한 푸른 하늘과 하늘신들을 매개하는 신인데 내가 보기에는 산신령이나 장승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것 같다. 하늘신 중에 중요한 인물은 <지혜운명의 책>을 해독할 수 있는 만잔 구르메 할멈이 있는데 주인공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 할멈을 찾아간다. 아마 모계의 영향을 받아 삼신할멈이 생명뿐 아니라 지혜의 정수가 되는 보다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옛날 옛날 하늘은 동서로 나뉘었는데 동으로는 44명의 악신이 있고 서쪽에는 55명의 선신이 있었다. 서쪽의 선신은 흡사 제우스와 같은 번개와 불의 신인 한 히르마스의 가계가 중심이 되는데 한 히르마스의 세 명의 아들 중 둘째가 암흑을 물리치는 영웅 아바이 게세르('아바이'는 함경도 지역에서 말하는 아바이로 선조, 아저씨, 아버지라는 뜻이다)이다. 하늘을 차지하는 신들의 싸움에서 진 동쪽 신들은 각각 사람의 머리, 왼손, 오른손, 가슴, 왼쪽 허벅지, 오른쪽 허벅지와 종아리, 엉덩이에 해당하는 지상에 떨어진다. 십만 개의 눈동자를 갖은 마법사 갈 둘메는 머리에 해당하는 호닌 호토 땅, 숲의 괴물 오르골리 사간은 왼쪽 알타이 산백이 있는 벨루하 산의 숲, 오른손 쪽은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쉬렘 미나타, 심장에 해당하는 중앙에는 만가트하이(괴물, 몽골의 망구스)인 아바르가 세겐, 왼쪽과 오른쪽 허버지와 종아리 쪽은 인간의 영혼을 보관하는 엔호보이 세 자매, 그리고 엉덩이 쪽은 엔호보이 자매의 남동생 로브소고이 만가트하이가 차지한다. 이들로 인해 지상의 인간들이 가뭄, 홍수, 기근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에 하늘을 차지한 서쪽 신들은 신들의 회의를 열어 한 히르마스의 둘째 아들 아바이 게세르를 지상으로 내려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때 나란 고혼(Naran gohon, 태양의 영광)을 딸려보내는데 그녀는 종달새로 변신해 게세르의 지상에서의 어머니가 된다. 게세르의 아버지는 '행복을 주는 자'라는 뜻의 센겔렌이지만 게세르는 어려서부터 센겔렌의 큰형인 사르갈 노욘의 양자로 길러진다. 사르갈 노욘은 부리야트족의 시조이자 지혜를 갖고 있는 자로 통한다. 사르갈 노욘에게는 센겔렌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은 동생 하라 소톤이 있는데 게세르는 하라 소톤이 찍어놓은 세 명의 여자들을 지략으로 가로채 자신의 아내로 맞음으로써 후에 하라 소톤의 복수극이 펼쳐진다. 게세르의 세 명의 아내는 차가운 아름다움을 갖은 야르 갈란, 지상의 출산의 신인 우르마이 고오혼(게세르가 우르마이 고오혼을 구하는 이야기는 <눈의 여왕>과 비슷하다), 용황 우가 로손의 딸로 여전사로 키워진 평생의 반려자 알마 메르겐이 있다.

 

이름을 익혔으니 다음에 책을 볼 때는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몽골신화가 한대 이후에 재번역되면서 불교적 도덕관이 강제되었다고 한다면 게세르 신화는 전사의 여행기와 같은 느낌이다. 오뒷세우스가 신들에게 버림받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비난하며 비극을 극화시켰다면 게세르는 신들의 호위를 받고 지상에 태어났으나 인간들의 간교와 하늘에서 쫓겨난 악신들에 의해 기억을 잃고 당나귀가 되어 밭을 갈아야 하는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자이다. 게세르는 처음부터 악신을 하나씩 물리쳐야 하는 운명의 전사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게세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만잔 구르메 할멈이 도움을 주는데 여기서 <지혜의 책>은 예언서로서 박혀 있는 내용이 아니라 환타지 소설에서처럼 현실에 따라 결과가 바뀌며 계속해서 새롭게 쓰여지는 책이다. 천신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것은 현실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해석의 문제를 던져준다. 또 하나, 아바이 게세르가 하늘신이었을 때 그의 별명이 '부헤'였다고 한다. 주석을 보면 부헤는 부리야트어로 '장사'를 뜻하며 확장하면 '해결사'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서사 내용 중에 부헤는 지상의 인간들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존재로 "투정하는 어린이들도 부헤라는 말을 들으면 울음을 멈추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는 부헤의 무용담을 이야기해달라고 조른다"는 부분이 나온다. 짐작컨대 '부헤'는 우리의 '망태할아버지' 정도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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