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물의 신, 마르셀 그리올(영림카디널, 2000)
책은 신화학자 마르셀 그리올이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아프리카 도곤족 마을을 탐사하다 외부 세계와 거의 접촉이 없었던 반디아가라 절벽 지대를 지나 상가Sanga에 도착해 사냥꾼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후 장기간의 조사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새로운 조사 작업을 하던 중 만난 도곤족의 한 장님으로부터 들은 33일간의 이야기이다. 차례만 보고는 이 사람이 제임스 프레이저를 흉내내고 있구나 싶었다. 특히 마지막 33일의 제목 "오고트멜리여, 안녕"은 『황금가지 』의 마지막 장 "안녕, 네미여"를 떠올리게 했다. 더군다나 학자들이 쓴 소설틱한 이야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의 신화를 신비하게 포장하기 위한 가장된 순수함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최고, 최초와 같은 수식어구는 찬사라기보다는 덜난 내용을 보충하는 포장지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책머리에 그의 아내임직한 즈느비에브 칼람-그리올이 쓴 글을 보고 혹하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에 장님 오고트멜리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십 년 뒤 마르셀 그리올도 죽었다. 그들의 죽음 이후 그들을 곁에서 보았던 가장 가까운 이는 이렇게 말한다.
"도곤족은 자신들의 문화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이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자 자신들의 의식에 따라 그의 장례식과 탈상을 거행했다. 그를 본떠 만든 장례용 허수아비는, 그리올의 권유로 건설하여 결국 그 상가 지역에 풍요함까지 가져다 주었던 댐 근처 동굴에 눕혀졌다. 죽은 자가 이 땅에 했던 노동이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죽은 자의 괭이를 부러뜨리는 의식의 감동적인 마지막 순간에 의식 집행자들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장님의 이야기를 듣던 그의 손에 항상 들려 있던 도구를 부러뜨렸다. 그 도구는 바로 연필이었다."
'연필'에 대한 이렇게 아름다운 찬사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오고트멜리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혹은 질문하며 연필을 입에 물었을 그리올의 모습이 도곤족에게는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노동으로 비쳐졌겠구나. 그를 영원히 쉬게 하기 위해서 도곤족은 학자의 노동 연장이었던 '연필'을 부러뜨린다. 정리하기는 벅찬 내용들이 많고 앞 못 보는 이방의 한 늙은이가 자신에게 부여된 구전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물들과 체계들이 놀라웠다. 당시 이 책이 서방에 준 충격은 더 컸으리라 짐작한다.
말에 향기가 있다는 믿음은 이뉴잇들이 목소리에도 의미가 있다고 한 것과 맞닿아 있다.
"나쁜 말은 귀로 들어가 목구멍을 거쳐 간으로 갔다가 마지막으로 자궁에 이릅니다. 여성 성기에서 나는 나쁜 냄새는 귀로 들은 나쁜 말이지요." "반대로 좋은 말은 귀에서 모아져 곧장 성기로 간다. 거기서 나선형 구리가 태양 주위를 돌듯 졸은 말은 자궁 주위를 돈다. 이 물의 말은 수태에 필요한 습기를 가져오는데, 노모는 이러한 방법으로 자궁에 물의씨앗을 들여보낸다. 노모는 말의 물을 씨앗으로 변형시킨 뒤 씨앗에 인간의 모습과 노모의 본질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