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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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긑대'니 '탈현대'하는 이야기가 자주 들리는 오늘날까지도 100년전 근대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요구했던 가장 근본적인 사항들조차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에르푸르트 강령'의 집필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근대적 자본주의적 사회의 주요모순-여성에 대한 억압, 개인의 인명에 대한 국가의 경시, 제국주의적 전쟁-이 극복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측면에서 첨예화된 현시점에서, '정통 좌파'를 '구시대적인' 것으로 몰아 '장송(葬送)' 할 수 있을까? 100년 전에 정의한 자기 역할조차 제대로 한지 못했다고 해서 '좌파'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국 10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모순들을 미화하고 호도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핵심부 차원에서 조차 '전통' 좌파의 요구사항들이 대부분 관철되지 못한 현실에서 '좌와 우'를 뛰어넘어 '제3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현실 순응과 안주' 정도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종말처럼, '전통'좌파의 '역할 고갈'도 아직은 멀고먼 것이다.' pp294~295

'안주와 타협의 지속적인 극복, 부단한 자정작용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좌파의 공통분모다' p288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의 핵심이라 생각되는 부분이다. 박노자씨의 글에서 깊은 통찰과 폭넓은 지식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관점(세계관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이 역사와 현실을 관통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선진 혹은 후진 자본주의든 자본주의 모순에 의해 충돌과 발전하고 있다는 것. 북유럽의 복지정책과 그 사람들의 혜안이 실은 극복되지 않은 과제를 앚고 있다는 것.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부러움(시기와 질투를 포함하는 것이다)은 그들의 모습을 추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발전의 진보적인 면을 신중히 골라 배우고, 그들의 안주와 타협을 비판해야만(박노자씨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하는 것. 박노자씨는 반복해서 이 책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소위 '진보주의자'라 자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박노자의 관점에 대해 깊은 고뇌를 해야할것이라 본다. '부단한 자정작용'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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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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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전작들을 읽지 않았다. 내 독서 습관 때문이다. 나는 가급적 대중적 흥미위주의 책을 찾아 읽는 것이 구미에 맞지 않아서였는데, 이는 교양을 풍부히하기 보다는 다분히 시간 때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성찰과 깊은 고뇌에 인도하지 않는 독서라는 것은 가벼운 것에 불과하다는 폄하가 있었던 것이다. 독서는 그렇게 가벼운 대상이 될수 없다는 의식. 하지만 베르베르의 <<뇌>>는 나에게 독서의 색다른 면모를 겪게 해주었다. 바로 즐거움이다.

<<뇌>>를 통해서 인간의 '뇌'의 작용에 대해 탐험하게 되었다. 즉 이성의 충추인 뇌를 탐험하게 된것이다. 내가 직접 현미경이나 멕스레이를 들여다 보지 않아도(물론 이런것들이 주어진다고 알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딱딱한 과학 강연에 참석하지 않고서도 뇌를 알수 있도록 하는 즐거움이 주어진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능력을 최대로 발휘 할 수 있는 동기를 이 소설에서는 1)고통을 멎게 하는 것 2)두려움에서 벗어나느 것 3)생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4)안락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5)의무감 6)분노 7)성애 8)습관성 물질 9)개인적 열정 10)종교 11)모험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간 삶의 동기를 대략적으로 정리한 것인데, <<뇌>>는 인가에게 '동기'를 부여하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후의 비밀'이라는 인간에게 최대치의 쾌락을 주는 수술이 정신과 환자에게 집중력을 발산하도록 하는 '동기'. <<뇌>>의 결론이 '최후의 비밀'을 이성적으로 조절하지 않아 폐기하듯 열거된 '동기'들 역시 이성적 범주에 머무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합리성과 그 맥을 같이하는데, <<뇌>>는 인간의 동기유발이 이성적 합목적성을 전제함을 일깨워준다. 마치 뇌가 이성의 총괄체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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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 2000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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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때부터, 아니<<결혼은, 미친짓이다>>라는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 제목을 접할때부터 이 책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나는 영화가 아니였으면 이 책의 존재를 알수 없었을 것이다.) '안락한 둥지가 있는 자들이 일탈을 꾀하고자 한 도피 행각을 그린 소설' '파랑새를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일탈을 꾀하고자하는 소설'
뭐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마지막 페지지를 넘길때 이런 선입견은 확인하기 싫은 확실한 증거물을 봐버리고 말았다는 씁쓸한 심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내 예상이 빗나가는 아주 절묘한 구성을 기대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결국 책을 덮으면서 '관슴에 젖어 있으며 감상에 한번 빠지게 되는 짜릿한 상상을 자극하는 소설이군', '종종들을수 있는 외도 이야기군'라며 혼자 말을 하고 말았으니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재치있는 글이 준 즐거움이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누구나 하는 결혼. 그러나 누구나 후회하는 결혼. <<결혼은, 미친짓이다>>는 돌파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특정 이론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사실 그런 것들을 비꼰다) 또한 현 결혼제도의 허와 환상을 꼬집으며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결혼에 대해 심각한 고립감을 느낄수있는 사람이라면 더 나아가 제도에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사람에게는 그 중에서 여성에게는 상상만으로 즐겁지만 현실적 행동으로 진전되기에는 고통스런 공상을 선사하는 이야기다. 아직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제도의 구속에서 벗어날 어떠한 조건도 없는 이들에게는 상상만이 현실의 고통을 어느정도 위안해주듯 결론으로는 현실에 다시 순응하게 하듯, <<결혼은, 미친짓이다>>의 결론도 남/여 주인고의 주말부부행세 중단으로 끝나고 만다. 이것은 아마도 비꼬기의 한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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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마광수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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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화생활을 한다는 것은--지금은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얻기에 문화를 즐기는가? '내안에 잠재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면 싱거운 답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을 통해 '공포'와 '연민'을 느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배출하여 카타르시스를 얻는다고 했다. 연극을 보면서 극중 배우의 처지와 동일화하게 되면 공포를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마광수씨는 이 규정을 확대한다. 인간의 감정 즉 정신의 순화/속죄/배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육체의 욕망역시 배설하는데 있다고한다.(카타르시스의 중요한 동인인 '공포'와 '연민'을 고대노예제사회의 표현이고 이를 현 자본주의적 조건을 고려하면 '질투'와 '선망'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말하고있다.) 이는 불교사상과 음양이론을 접합시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론을 확장한다.

이것은 밥을 먹을 때 '이것을 먹으면 탈이 날것이다'라고 생각하면 배앓이를 하듯이 마광수씨는 정신의 욕망해결이 육체적(물질적) 욕망해결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있다. 즉 '정신과 육체의 일원론적一元論的 파악'이다. 문화라는 상부구조의 거대한 확대와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광수씨의 '정신과 육체의 일원론적 파악'이 갖는 의미가 자뭇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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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 소설전집 4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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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유명한 여자 소설가 중 뺄수 없는 이름. 하지만 나는 신경숙, 공지영 등등의 소설 몇권을 읽었지만 박완서씨의 소설을 읽지 못했다. 사실 관심이 없었다. 주로 남자 소설가의 글을 읽어오던터라 선뜻 여자소설가에게는 손이 가지 않았다. 간혹 일게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식이었다.(주위에서 반복해서 추천(?)하게 되니)

그렇지만, <살아있는 날의 시작>을 읽게 된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끔 웃음 짓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에 작아진 체구의 어머니를 보면서 '지금 내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 책을 보게 된 것이다. 바로 이책을 구입하고 읽게 되었는데, 슬픈 감정에 휩싸인채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내 어머니의 머릿속말을 이 책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다는 착각아닌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한줄한줄 슬프게 읽었다.

내 어머니 세대의 사회적 멸시와 남편의 무시, 삶의 의지를 표현하지 못한채 반복해야만 하는 좌절이 주인공의 독백에서 아주 잘 드러났기 때문에 연민이 아닌 슬픈 감정을 일으켰던것 같다. 남편, 시어머니, 친어머니, 자식들에게 강요받는 헌신에 스스로 위안하며 찾기 힘든 즐거움을 만드는 일들은 남자인 나로써도 눈물짓게 하는 것이었다. 내 어머니의 슬픔이 가끔 늘어놓는 푸념과 한풀이식 잔소리를 이해할수있겠다면 당장은 위선일수있겠으나 박완서씨의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그것을 일깨워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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