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양장) -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4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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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자는 기원전(BC) 551년 중국 산둥성 취푸에서 태어나 기원전 479년 사망한다. 73살의 노스승은 그가 일생 길러낸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쳤다.  공자의 생몰은 정확한 역사 기록이다.  그는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와 함께 인류의 4대 스승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4명을 함께 호칭하는 것은 신심 깊은 이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종교 신비주의의 영역안으로 들어가 있어, 그들을 같은 인간의 격으로 부르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오직 공자와 소크라테스만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이란 격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여,  신성(神聖)의 성격이 짙은 신약성서나 불경을 읽는 것과 공자의 어록을 담아낸 <논어>를 읽는 마음 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논어>를 역사책이나 철학서로 마주하거나 아니면 처세서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이 짧은 공자의 어록이 담긴 책을 며칠 이면 완독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의 <논어>는 과연 그렇게 간단한 책인가.  한반도에 서양의 다양한 종교, 철학 사상이 들어오기 전 먼 고조선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치며 2천년 이상 한민족은 공자 사상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아왔다. 각 시대마다 <논어>의 가르침이 경시되거나, 중시되는 경향은 달랐지만 조선은 무려 500년간 정치와 체제의 근본이념으로 공자의 사상을 받들었다. 그 영향은 현대에도 한민족의 생활을 제약 한다.  충과 효를 강조하는 것이나 제례의 전통을 유지하며 조상을 존경하는 것은 동아시아인의 스승, 공자의 <논어>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다루는 철학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서양 철학이나 성경을 위시로한 경전을 읽는데 심혈을 기울이는데 반해, 공자의 <논어>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쉽게 품지 않는다.  나또한 그랬다.  한자 세대가 아닌 독자들은 <논어>라는 책에 접근하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출중한 한학자로서 사마천의 <사기> 전체를 완역해 낸 김원중 교수가 옮긴 <논어>(글항아리, 2012년)는 공자의 어록에다 생소한 중국 역사기록과 주요 주석가들의 해설을 함께 담아냈다.  그간 몇번 읽다가 완독을 포기한 <논어> 완독에 안착한 것은 그 덕분이다. 


<논어>를 읽는 가운데, 또 완독 후에, 내 마음은 지극히 충만했다. 공자의 어록들은 짧았지만, 그 문장 안에 담긴 뜻은 오묘하고 깊었다. 반복해 읽을 때마다 그 뜻이 이해되는 듯하다가도, 다시 읽으면 또 다르게 읽히는 것이다. 이 책은 감히 완독했다고 표현할 수 없는 책이었다. 곁에 두고 꺼내보고, 또 꺼내 봐야 할 책은 진정 <논어>였다.  중요한 것은 내가 <논어>에서 공자의 견해와 사상에 공감하는 점을 상당히 발견한 점이다. 그가 소위 성인으로 불리는 까닭은 `인(仁)' 사상에 기댄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인, 이라고 했다.  인에 이르기 지극히 어렵고, 주위에 인한 사람이 없으나, 인격이 완성되고도 인하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할만큼, 공자는 인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내가 공감한 것은 그런 평범한 성인의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내가 <논어>에서 발견한 공자 사상의 특별한 점은 다음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겠다.


첫째, 공자 자부심의 정체는 `배움(學)이었다.  제자들이 편찬한 <논어>에서 그 첫 시작을 알리는 공자의 말씀은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제자들은 스승 공자가 일생 무엇에 집착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편찬한 책의 첫 일성에 배움이란 흔한 단어를 넣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는 <논어>안에서 수차례 배움의 가치와 방법, 배움에 대한 자신의 지극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공자가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해하는 제자들과 이웃들에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이치를) 아는게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고 언명한다. 또, "나는 온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생각해보았지만, 유익함이 없었으며, 배우는 것이 더 나았다"고 표현한다.


호학(好學)에 대한 공자의 클라이막스는 여기다. " 열 가구가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성실과 믿음이 나와 같은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그러면서 공문자라는 사람이 시호에 `문文'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사연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영민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그를 文이라 부른 것이다."  사람이 사람됨을 갖는 것은 일평생 배운다는 자세 안에 있고, 모르는 것에 대해선 아는 체 할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도 떳떳히 물어서라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둘째, 공자는 인문주의자이자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서양이 르네상스를 겪고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세계관의 좌표를 또 한번 수정하지만, 공자는 그보다 2천년 전에 이미 인본주의를 설파한 위인이었다.  공자는 상을 당한 사람이 지나가면 고개를 숙이고, 한쪽 귀퉁이에서 종종걸음을 칠 정도로 몸을 조심히 하고 예를 표했다. 또, 그는 어린 시절 제사상을 차리는 놀이를 할 정도로 예를 일찍이 숭상했다. 3년상이 너무 길다는 제자와의 논쟁에서 공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여(재여)는 인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만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고 일갈한다.  한마디로 너 어렸을 때, 부모님이 3년간 너를 돌봐주었는데 너는 부모돌아가시자 3년간 예를 표하는 삶이 길다고 하니 말이 되냐?고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뜻밖에 귀신을 멀리할 것과 죽음에 대해 묻지 말라고 얘기했다.  계로라는 제자가 귀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을 섬기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 계로가 물러서지 않고 다시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라고 되묻는다.  공자는 삶을 이야기했지 죽음과 귀신에 대해선 말하려 하지 않았다. 공자는 귀신을 `경원(敬遠)', 즉 공경하면서 멀리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공자가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거나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하늘 뿐'이라고 토로했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귀신'이란 것은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알 수 없는 모든 신비주의적인 것을 총칭한다.


공자의 고백은 얼마나 정직한가. 혹여,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종교간 분쟁과 테러, 증오가 들끓는데 종교가 공헌하고 있는 점은 없을까. 이 구절을 읽으며 깊게 생각해볼만 하다. 공자는 귀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조차 잘 섬기지 못하는 역설을 꼬집은 것이다.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고 호통친다.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이 마치 죽음을 겪어 본듯이 얘기하곤 한다.  그래서, 세상이 평화롭고 건강해 졌는가, 따져보면 절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다툼밖에 날 것이 없다.  차라리 공자처럼 정직히 죽음을 모르니 삶에 전념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더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셋째, 공자가 말한 이상적인 정치와 정치인 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자는 56세가 되자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제 정치에 적용시킬 군주를 찾아 제자들과 여정에 들어선다. 14년간 주유열국(周遊列國) 하지만, 누구도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69세가 되어 초라한 신세로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여생을 보냈다.  그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길은 봉쇄되었지만, 공자는 스승으로서 참된 정치의 기본 원리를 <논어>에 남겨 놓았으며 그의 정치 사상은 현대의 정치 지도자들도 명심해야할 대목으로 충만하다.


공자는 정치의 기본은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어떤 사람이 관직에 있지 않은 공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답한다. "[서경]에 이르기를 효도하고 오직 효도하여 형제들에게 우애롭게 대하고 정치에 (이것을) 베풀어라'고 했으니, 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는가"  오늘날 정치의 수준이 밑바닥을 기는 것은 혹여 가정조차 제대로 건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정치판에 나온 것 때문은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문장이다. 


공자는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식량을 충족시키고, 병기를 충분히 하고, 백성들이 (군주를) 믿게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의 신뢰라고 답한다. 거짓말 잘하는 정치인, 선거철이면 표를 받기 위해 거짓공약을 난발하고 모르쇠하는 정치인들은 유념할 대목 아닌가.  또, 부끄러움에 관해 얘기하면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 (자리를 차지하며) 녹봉을 받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녹봉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고 주장한다.  군자는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오고 도가 없으면 은거해야 한다고도 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양심과 의리를 파는 정치 철새들을 향한 공자님의 말씀이다.


<논어>는 두께가 얉고 공자의 어록을 단문으로 집어낸 문장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일생을 두고 곱씹고 사색할만큼 촌철살인의 비유와 2천년의 시간을 넘어서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 돼 있다. 공자는 제자 자공의 말재주를 싫어했다.  배울 땐 둔하다 싶을 정도로 과묵하고 공자의 언변에 토를 달지 않았던 안회를 가장 사랑했다. 그 이유를 공자는 안회가 배운 것을 어떻게든 실천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에 두고 있다. 공자는 자신에게는 네가지 걱정거리가 있다고 토로했다. 


"덕을 닦지 못한 것, 배운 것을 강습하지 못한 것, 의로운 것을 듣고서도 찾아가지 못한 것, 좋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한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다"   <논어> 공자, 133쪽  김원중 옮김


<논어>를 읽는 시간은 예상외로 지루하지 않았다.  수많은 페이지와 문장이 접히고 밑줄이 그어졌다.  완독했지만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을 가진 다는 것은 특별한 독서체험이다. <논어>는 종교서적도 아니고, 처세서도 아니었다. 세상 살이에 보탬이 되고 인간관계에 득이 되는 책도 아니다. 21세기 독자들에게 이 책이 주로 처세서로 팔리는 현실은 적절하지 않다.  <논어>는 그 모두를 포용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세상 살이와 인간 세계의 이치를 담아내며,  넓고 깊은 사색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보물창고였다.


제자들에게 공자는 `해와 달'에 비유되곤 했다.  자신들이 넘어서고자 애쓰지만 감히 넘어설 수 없는 스승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록에 담긴 문장들로 2천 5백년 전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유추할 순 없지만, 공자가 일생 무엇에 뜻을 두고 가르침을 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여, 우리는 이렇게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세상 이치를 깨달은 공자도 일평생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촌부에게서도 배울 점을 찾았다.  일평생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그였지만, 좀더 덕스럽지 못하고, 의롭지 못함을 고민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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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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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을 읽은 계기는 영화 <사도> 때문이었다.  영화 <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초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바로 <한중록>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믿을 수 있는 객관적 사료라고 하지만 사건의 실체에 좀더 다가가기 위해선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의 기록이 우선이다. 사건을 겪은 1차 관계자가 아니라면 그 내밀한 역사의 깊이와 사연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한중록>이 역사적 진실의 정확성에 대한 오해와 억측에도 여전히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것은 이 책 저자의 위치와 신분 때문이었다. 


<한중록>을 지은 이는 혜경궁 홍씨다. 그녀는 열살 나이에 사도세자의 아내로 간택 돼 궁중에 들어왔다.  사도세자는 일평생 `광증'을 보이며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성미 까다롭던 영조는 혜경궁을 며느리로 맞이하던 날, 그녀를 앞에 두고 궁중생활의 예법에 대한 일장 훈계를 늘어놓을 정도로 예민하고 세심했다.  또, 그녀는 영조의 대를 이은 후계자 정조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여인이었지만, 그 70년 궁중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한중록>은 이렇듯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80년 전 생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기록물이다. 


<문장강화>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 이태준은 <한중록>을 일컬어 `조선의 산문 고전'이라 높게 평가했다. 이 책은 역사와 문학이라는 두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현대 독자의 관점에서 <한중록>의 기록은 역사이지만, 그 표현방식은 지극한 고백이자 인간적 절규에 가깝다. 결국 사실과 고백이 뒤섞인 이 책은 역사를 문학으로 읽게 만들며, 한 시대의 촘촘한 사건들과 한 인간의 상처받은 영혼을 만날 수 있게 돕는다.  조선의 권력 상층부, 그 어떤 여인도 감히 역사와 문학이 혼용된 기록물을 후대에 남겨놓지 못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기억력이 특출나고 총명해, 한번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잊지 않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한중록>의 독자들은 정조의 말에 수긍하게 될 터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세 차례의 회고록을 묶은 책이다. 혜경궁이 이 책을 지은 목적은 친인척의 청탁에 의해서였다. 61세 때인 1795년에 혜경궁은 조카 홍수영의 부탁을 받고, "나의 일생(이하 역자 명명)"으로 이름붙여진 `간이 자서전'을 써줬다.  정조가 죽고 얼마 후인 1802년엔 순조의 생모, 가순궁이 자손들도 알 수 있도록 사도의 삶에 대해 들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내 남편 사도세자"를 썼다. 정조가 죽고 혜경궁 친정인 홍씨 가문이 위태롭게 되자 "친정을 위한 변명"이란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다. <한중록>을 지을 당시, 혜경궁은 "집안이 망한 아픔에 화가 치밀어 등이 뜨거워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썼다.  왜 혜경궁은 최고 지존의 자리에서도 일평생 분노와 고통에 휩싸여야 했을까.


10살 나이에 동궁의 비가 되어 후세 권세를 예약했던 혜경궁의 운명은 뜻밖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극으로 치달으며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내 남편 사도세자>의 서문에서 그녀는 `임오화변(1762년 5월, 사도세자 뒤주 살해사건)'의 실체를 자신만큼 잘 아는 이가 드물며, 자신의 기록이 거짓이면 하느님의 죽이심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장에서 혜경궁이 주장하는 뒤주사건의 진실은 영조가 사도에게 자애가 없어 그가 서서히 미쳐갔고, 일의 전후를 떠나 미친 자식이 날뛰니 영조는 종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혜경궁이 이 일에 관해 분명한 사실 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은 임오화변에 관한 공식 역사기록이 훼손된 것도 이유였다.


정조는 1776년 즉위 직전에 영조에게 상소해, 임오화변에 대한 승정원(왕의 비서실)의 기록을 없애달라고 조른다.  정조 입장에서 아비 사도의 괴이한 죽음이 즉위 후 부담이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소문들이 권력암투 가운데 번져나갔다. "사도가 병환이 없는데 영조가 신하들의 헐뜯는 말에 넘어가 자식을 죽였다"거나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 등이 권하여 뒤주를 들여오게 했다"라는 풍문이었다.  혜경궁 입장에선 이런 소문들은 곧바로 친정을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고 느꼈다. 


왕의 외척이 된 혜경궁 홍씨 가문은 그녀가 궁에 들어오면서부터 입신하고 권세를 누린다. 혜경궁이 지극히 애틋하게 생각하는 아비 홍봉한은 삼정승의 자리를 두루 거쳤고,  병권과 재정을 총괄하는 자리를 오고가며 실세로 살았다.  작은 아버지 홍인한 또한 영조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5세의 나이로 66세였던 영조의 왕비가 된 정순왕후가 궁에 들어와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크고, 또 정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권력구도의 물갈이가 필요해졌고 많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혜경궁 홍씨 가문은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게 된다.  <한중록>에서 분노와 절규에 떠는 혜경궁의 목소리는 다름아닌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가운데 들려오는 `비명소리'였던 것이다. 


"내 목숨이 아침 저녁 사이에 왔다갔다하니, 쓴 것을 주상의 어미인 가순궁에게 맡겨, 내 죽은 후라도 주상께 드리고자 하노라. 주상께서 내 겪은 바의 흉험함과 내 집 당한 바의 원통함을 알아 삼십 년 쌓인 한을 풀어주시는 날이 오면, 내 죽은 넋이라도 지하에 간 정조를 뵙고, (중략..) 모자의 평생 한을 이룬 것을 서로 위로하리라.  내 이 글에서 한 터럭이라도 꾸미거나 과장한 것이 있으면, 이는 위로는 정조를 무함한 것이고 아래로는 사사로이 우리 집만 두둔한 것이니, 내 어찌 하늘의 재앙이 무섭지 않으리오."  295쪽, 혜경궁 홍씨, <한중록>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놀랍도록 일관되게 친정의 어른과 자손들까지도 우상화에 버금가는 표현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날 아버지 홍봉한이 뒤주 아이디어를 냈는냐, 안냈느냐가 훗날 정조시대 상당한 논란이 됐다.  만약 뒤주 아이디어가 홍봉한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면 그는 역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변호하기 위해, 혜경궁은 그날 아버지 홍봉한의 궁중 동선을 거의 시간대별로 서술하고 있다.  정조가 즉위하자 곧 유배되어 사사된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도, 혜경궁은 일관되게 작은 아버지의 무혐의를 주장했다.  혜경궁의 친정 우상화의 압권은 다섯 살 막내 동생이 궁에 들어와 하는 행실과 사람을 아는 눈썰미가 어른과 같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는 표현에서 극에 달한다.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 집안의 모든 인사에 대한 서술형식이 대개 이런 식이다.  홍씨 집안 뿐만 아니라 그 친척까지도 무척 긍정적으로 표현해 놨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배다른 후손들을 평가하는 것이나 김귀주로 대표되는 정순왕후 외척 세력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결코 인심이 후한 사람이 아니라는게 드러난다. 그들을 천하의 후레자식이나 역사에 다시볼 수 없는 역적으로 묘사한다.  오늘날의 독자 입장에서 혜경궁 가문과 정순왕후 가문의 권력다툼은 누가 선이고 악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저 왕의 외척 세력간 피터지는 권력싸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순왕후 측에서 <한중록>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편파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중록>의 기록물로서의 가치는 평가절하 할 수 없다. 20세기 작가 이태준이 조선을 대표하는 산문 고전이라 평했듯, 이 작품을 문학으로 대한다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문학의 본질은 `팩트'와는 별 관계가 없다.  내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이 곧 진실이 되는 것, 그게 문학이다.  혜경궁의 인생사 80년이 압축된 이 기록물은 이 땅에 살았던 한 여인의 내면 깊숙한 곳을 탐색할 기회를 준다.  그녀가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말년에 기억을 더듬어 <한중록>이란 글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기록속에서 드러난 혜경궁의 절절한 아픔과 고통의 정체는 지위나 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것이다.  아비에 대한 애틋함, 친정에 대한 호의, 아들에 대한 모정이 그렇다. 


혜경궁은 세자비의 지위에서 사도의 죽음을 통해 하루아침에 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로 내몰렸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의 아들 정조와 혜경궁의 운명도 바람앞에 촛불과 다름 없었을 테다.  일평생 권세를 누린 아버지가 말년에 모든 권력을 잃고 역적의 지위로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작은 아버지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아들 정조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그가 죽자 아끼던 셋째 동생 홍낙임은 정치보복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 불안과 죽음, 공포의 시간들에 관한 묘사가 <한중록>의 주요 테마였으며, 그것은 역사가 아닌 한이 서린 문학으로 옮겨갔다.


" 그날 내가 세손(정조)을 데리고 친정으로 나가니, 그 망극한 경상이야 이를 것이 있으리오. 임금(영조)의 하교가 우리 모자를 살려주겠다고 하시고, 아버지께 세손을 보호하라 이르시니, 내 망극한 상황에도 성은을 감축하여, 세손을 어루만지며 `우리 모자 몸을 보전하여 성은을 갚자 그리고 아버지의 서러움을 이어 착한 아들이 되라' 경계하니라. 우리 모자 서로 의지하여 목숨은 보전했지만, 천지간 한없는 설움이야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   212쪽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자신의 기록이 `한 터럭이라도 꾸미거나 과장한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진한 역사가나 독자는 없다.  사관이 아닌 개인의 입장에서 쓴 글은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곡해될 수밖에 없다.  <한중록>은 사람들의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쳐 쓰여진 책이 아니다.  객관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자유롭게 서술한 책이다.  하여, 혜경궁 홍씨의 삶과 고통이 한없이 불운하였다치더라도 그것을 공정한 역사의 심판대에 세울 잣대로 쓸 순 없는 것이다.   


<한중록>은 18세기의 역사안으로 21세기의 독자를 초대한다.  그러나, <한중록>만이 18세기의 조선을 제대로 그려내는 사료이기에 오직 그것으로만 18세기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행여 있다면 어떨까.  일인 우상화와 권력 세습에 능한 북한이 역사에 대한 하나의 견해만을 고수하는 것은 왜인가.  독재국가는 생각의 통일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제외하곤 역사를 다루는 태도는 언제나 다양한 견해의 표출을 허락하고, 그 견해 간의 논쟁을 거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교훈을 얻는 쪽으로 발전한다.  민주국가에서 역사와 학문이 발전하는 표준적인 절차가 그런 것이다. 


하여,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열린 토론과 합의를 무시하고, 역사를 자신의 생각만으로 틀지우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를 `광인(狂人)' 아니면 `독재자'라 부르는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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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5-11-0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중록은 실제로 꽤 재미있지요. 다만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조금의 비평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혜셩궁 홍씨의 입장을 감안하고 읽지 않으면 반쪽짜리가 되지요.

개츠비 2015-11-22 10:26   좋아요 0 | URL
동감합니다. 비평적 독서의 필요성이 절실한 책입니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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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제목덕분이다알고 보니 이 산문집의 제목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 제목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이후, 5년간 책은 내 서재에 잠들어 있었다스물 아홉 편의 산문이 이 책에 담겨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책을 사고 나서, 정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떤 소설의 리뷰를 쓰는데 참고하느라 `나는 왜 쓰는가'라는 대표 산문을 읽었을 뿐이다.  놀랍게도그 산문은 해가 갈수록 내 글쓰기가 달려나가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을 해명하고 지지해주고 있었다그것은 `왜 나는 점점 정치적인 글쓰기에 치중하는가'였다.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쓰기의 동기를 크게 네가지로 정리한다 첫째순전한 이기심이다.  작가들은 허영심이 많고 남보다 더 똑똑해 보이고 싶어하는 자기중심적 성향이 크다.  이런 경향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최상층의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성이다.  

 

둘째미학적 열정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또한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관심이다셋째역사적 충동이다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하려는 욕구에서다마지막으로정치적 목적의 글쓰기다.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며 왜 분투해야 하는지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망에서 기원하는 글쓰기다그러면서 오웰은 이 에세이를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한다.

 

자신이 일평생 글을 쓰며 돌아보니 이 네가지 동기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그 중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가 가장 따를만한 동기란 점은 분명하다고 선을 긋는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작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조지오웰이 글쓰기의 동기로 꺼낸 네가지는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을 써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다.  순전한 이기심에서 미학과 역사를 거쳐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욕망은 자연스럽다.  성장하며 생각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면에서 밖으로 관심을 돌린다.  그런 과정은 뛰기전에 걸어야하고걷기 전에 기어야만 하는 인간육체의 발육단계를 연상케 한다.  조지 오웰의 대표산문 스물 아홉 편을 읽으며 이 작가의 소설을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음에 새삼 놀랐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렇게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산문들은 생의 주기마다 작가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좋은 산문은 유리창 같아야 한다는 말로 글이란 것이 개인적인 관심에서 사회적인 공감의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작가로서 활동한 시기는 인류사의 가장 불행한 역사인 1,2차 세계대전과 겹친다.  초등학교 시절 1차 대전을 겪었고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던 40대 시절엔 2차 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었다.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였다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인도의 아편국 관리였다그는 첫돌이 되기전에 영국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을 명문 기숙학교인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보낸다사립학교에 가기 전 수료해야 했던 예비학교가 바로 그곳이었다작가는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산문을 통해 그 시절을 회고한다.  이 에세이는 부모와 떨어진 기숙학교가 가진 폐해를 돌아보고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교장 부부의 전횡 속에서 오웰은 매질과 질낮은 의식주의 고통을 이겨내야했던, 그 시절 지배와 감금이 일상화된 기숙학교의 폐단을 고발한다.

 

훗날 명문 사립학교 이튼을 졸업한 그는 졸업생 대부분 대학진학을 하는 것과 다르게 대영제국 식민지 버마에 경찰로 지원한다이 시절에 쓴 글 가운데 <교수형>은 사형집행에 동행한 자신의 기억을 추스리고 있는 작품이다.  법집행 과정에서 무감각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에 대한 회의와 제국주의의 하수인인 식민지 경찰직에 혐오를 느낀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라고 표현한 그는 결국 훗날 고약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경찰직을 사임하고자발적으로 파리와 런던의 하층 계급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이 고행의 시기 그는 노숙자와 다름 없이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작가로서 습작기를 보낸다. 

 

"그들 사이엔 대화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우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영혼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거창한 주제다. 다음 끼니가 확실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건 다음 끼니뿐이다."  14쪽


오웰은 인생사의 다양한 경험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았다.  오웰 산문의 보고는 언제나 현장이었다.  1936년 레프트 북클럽이란 한 진보단체는 그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탄광촌을 취재해 책 한 권을 써줄 것을 요청한다.  탄광 노동자의 삶과 생활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그는 <위건부두로 가는길>이란 르포르타주를 써냈다. 스페인이 프랑코 정권의 파시즘으로 기울자 공화파 민병대의 일원이 돼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카탈로니아 찬가>(1938)라는 책을 남기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소설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 같은 작품들은 47년 인생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작품일 뿐이다.  그는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로서 궁핍하게 일생을 살아왔고 산문을 쓰며 작가로서 기반을 단단히 했다. 그의 글쓰기의 근본은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었다.


조지 오웰 산문의 특성은 유려하지 않지만 표현이 정제되고 단어 쓰임이 정확하며, 전달방식이 간결하다는 점이다.  기자 생활을 거치며 많은 기사문을 쓴 경험에서 드러나는 글쓰기 특징일 것이다. 그의 산문들은 소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라 부를만 하지 않다. 주제가 무겁고 조밀하며 분석적이며 하고 싶은 말을 독창적인 개성안에 담아내곤 한다.  그는 일평생 접시닦이, 서점 점원, 서평가, 기자, 노숙인, 군인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글쓰기를 갈고 닦았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정치철학과 인생관에 따라 생활이 보장된 식민지 경찰직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일은 간단치 않다.  그는 이후 유럽의 부랑자 대열에 합류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297쪽


조지 오웰 스물 아홉 편 산문들을 섭렵하며 산문의 매력에 빠졌다.  그같이 좋은 산문들을 써보고도 싶었다.  또, 막상 쓴다면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한 작가의 산문들을 연달아 읽으며 얻은 용기일까. 그는 부랑자일 때도 글을 썼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시절에도 <1984>의 문장들을 다듬고 고쳤다.  글을 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원고에서 손을 놓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손상시키며 문장을 완성해 나갈 정도로 그것은 대단한 일인가.  그 연속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스물 아홉 편 오웰의 산문속에 있었다.  왜 쓰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작가는 어떤 고통과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 것인지, 그는 산문으로 답한다. 


표제작 <나는 왜 쓰는가>을 읽고 많은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었다.  책은 유독 그 작품에서 지저분해지고 말았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를 `순전한 이기심'으로 밝힌 문단에선, 운좋게도 나는 내가 글을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을거라는 필연적 이유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293쪽


나는 내가 한 개인이라는 자각을 버리고 싶지 않다. 일평생 시키는 일에 충실한 영혼없는 기계로 생을 마칠 순 없다. 나는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욕망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꾸준한 글쓰기다. 오웰은 정확히 세상에 두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8살이었던 자신에게 굴욕과 매질을 일삼았던 세인트 시프리언스 예비학교의 교장 부부의 만행을 마흔 넷의 나이에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역설적인 산문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 시절 교장 부부는 빈말로 아이들을 칭찬하거나 상처주기 일쑤였다. 오웰은 그 모든 것들을 겪는 내내 마음속 한가운데 결백하게 남아 있는 내면의 자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진심은 증오뿐임을 아는 자아였다"(406쪽)


생을 끝마치기 불과 2년 전, 그는 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굳이 들추어내어 산문으르 쓸 생각을 했을까. 그를 작가로 키운 건 바로 세상에 널린 소모품이 아닌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한 개인이라는 자각'이었다.  8살 어린 시절 고통을 응시했던 자아는 일생 세상의 부조리와 공포에 맞서 외부 세계를 고발하는 자아로 변신해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서게 했다.   산문 쓰기를 추동하는 힘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변함없는 응시다. 그것을 우리는 작가의 시선이나 양심으로 부른다.  영혼없는 허깨비로 생을 소비할 것인가,  관점이 분명한 글쓰기를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조지 오웰의 특별한 산문들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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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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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뜻을 둔 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을 찾을 때까지 시행착오를 거친다.  나름의 독서법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거나 실력있는 독서가들의 사례를 참고할 수도 있다.  독서법에 정답이 있을까.  없다.  그것은 단지 앞에 놓인 산을 어떻게 오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다. 20세기 알파니스트 라이홀트 메스너는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를 아무런 지원없이 단독으로 등정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하나의 루트를 뚫고나면 그것이 자신만의 길이 되는 것이다.


전후인 1950년대 일본의 중등학교 교사 하시모토 다케시는 신생 사립학교인 나다 중학교에 부임해 50년 동안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의 선생님들은 한 과목을 6년간 전교생에게 가르쳐야 했다. 물론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과목 담당 선생님께 전권이 부여되었다.  하시모토는 공인된 교과서를 버린다.  그리고 얇은 소설책 한 권을 3년간 읽는 수업을 시작한다.  훗날 이 수업은 `기적의 교실'로 일본 NHK 방송국의 교양 프로그램에 소개된다.  하시모토의 슬로리딩 교육법은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 몇 년 후, 일본 최고 명문 도쿄 대학에 최다 합격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일본 문예평론가 이토 우지다카가 지은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21세기북스)에는 `기적의 교실'을 만든 하시모토의 일생과 `은수저 수업'이라 명명된 슬로리딩 독서법, 그리고 제자들의 기억속에 남은 하시모토의 수업에 대한 회상이 담겨 있다.  페이지 중간중간에 삽입된 `천천히 깊게 읽기' 의 장에선 슬로리딩의 가치와 의미를 여러 작가와 `은수저 졸업생들'의 인터뷰로 심도 있게 다시 짚고 있다.


하시모토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몸이 약해서 자주 병원에 드나들었고 한번은 복막염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아버지는 신발을 만들어 파는 상인이었지만 수금날이 되면 말술을 먹고 돈을 날리기 일쑤였다.  어린시절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책상 앞에 앉을 시간,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책읽기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덕분이다. 국어시간에 담임은 교과서를 소홀히 하고, 자주 소설책을 읽어주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몸동작과 억양까지 살려 들려주는 문장들은 9살 하시모트를 몰입의 즐거움과 소설책 읽기에 매료되게 했다.  소년은 그 때 처음으로 엄마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졸랐다.  책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집안이 파산했다. 하시모토는 공부를 잘했고 이를 눈여겨 본 중학 담임 선생님 덕분에 입주 가정교사로 취업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해 졸업 후 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대학시절 그는 평생 공부의 방법론을 익히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연히 일본 한자 연구 1인자의 프로젝트 <대중일사전> 편찬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때를 "먹고 자는 것도 잊고 하루 종일 한자의 바다에서 헤엄쳤다"고 회상한다. 하시모토에게 이 작업은 `대충 아는 정도로 끝내지 않는다. 철저하게 조사하고 궁리한다' 는 자신의 독서 교육철학을 세운 기회였다. 


" 이번 신입생부터 교과서를 쓰지 않겠다. 중학교 3년 동안 `은수저' 한 권으로 수업하겠다'. 일부러 버린다.  일부러 파고든다.  일부러 돌아간다. 1950년 4월, 이렇게 해서 마침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의 교실'이 탄생했다."  83쪽,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하시모토가 교재로 채택한 소설책 <은수저>는 작가 나카 간스케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 짧은 소설이다. 일본의 과거와 잊혀진 문물, 사투리, 고유명사가 담겨 있고, 한 아이의 성장담이 주 내용이었다.  하시모토는 <은수저>를 3년동안 가르치겠다고 선언한 이유를 슬로리딩 철학으로 해설한다. "한가지 가치있고 질 좋은 것을 집중해서 철저하게 흡수하면 그것이 향후 모든 일의 바탕이 된다는 사고"(38쪽)다.  이것은 전후 일본 사회의 주류였던 성장과 속도를 바탕으로 한 교육방식과 역행하며, 한 작품을 깊이 읽고 그곳에서 지식을 확장하는 독서법의 성공 사례로 재탄생한다. 


`은수저 수업'의 특징은 책 한 권을 느리게 읽는 것에만 있지 않다.  하시모토는 아이들이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서 멈추고 그것을 머릿속에서만 아니라 오감으로 느끼고 체험하기를 바랐다.  그런 경험을 위해선, 책을 속독해서는 안되고 여유롭게 천천히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읽는 중간 텍스트에서 벗어나 언제든 다른 주제로 뛰어넘는 일도 필요하다.  독서는 이때 능동적인 방향으로 건너뛴다.  한 권의 소설이 천개의 지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하시모토의 국어 수업 교재는 소설책 한 권이었지만 매시간 선생은 자신이 정성을 쏟아 연구한 인쇄물을 들고 나타났다.  아이들은 하시모토의 인쇄물에 열광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이야기가 매회, 정갈하고 완성도 있게 편집 돼 있었다고 `은수저 아이들'은 회상한다.


어느날 학급 반장이던 학생이 인쇄물을 나눠주던 하시모토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런 속도로 200쪽의 소설을 언제 다 읽습니까?"  하시모토의 수업방식은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학생들의 조바심을 불러오곤 했다. 독해,작문,문법 등을 다양한 교재로 학습하던 여타의 공립학교 학생들에 밀리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였다.   반장의 항의섞인 질문에 하시모토는 이렇게 답한다.  


" 속도가 중요한게 아니다. 설령 빨리 읽어 나간다고 합시다. 여러분에게 뭐가 남을 것 같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내 수업은 속도를 다투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속독을 가르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보다 다들 조금이라도 어렵다고 느낀 곳, 흥미로운 곳에서 스스로 옆길로 빠지면 좋겠습니다.  자꾸만 파고들어서 자신의 세계를 깊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당장 도움이 되는 것은 곧바로 쓸모 없어집니다.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낀 것에서 마음이 동하여 스스로 깊이 파내려 가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내 수업에서 힌트만 찾으면 됩니다. "  131-132쪽


일생을 책과 벗하며 살겠다고 다짐한 게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줄곧 책을 읽었다.  하지만, 어떻게 책을 읽어야겠다는 특별한 철학은 없었다.  시간이 많고 열정이 있었을 때 나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섭렵하기 위해 노력했다.  직장에 들어와서 보니 책을 읽을 시간은 부족했지만 독서를 포기할 순 없었기에 책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턱없이 부족해지자, 매일 조금씩 읽기라는 내 독서법도 변화의 때가 온듯 하다.  하지만,  지금껏 독서에 임하며 한번도 속독과 친해본적이 없다. 책을 빨리 읽는다는 방법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런 재주가 없었기에 나는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뒤로 돌아가 반복해 다시 읽는 방법을 택했다. 


정독의 장점은 책을 소화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는 방법, 다시 서평을 쓰는 과정을 통해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풋이 적으니 아웃풋도 적었으나 나는 꾸준함의 위력을 믿고 그 방식을 줄곧 따랐다.  그것이 내가 지난 십수년간 책과 친해지는 방법이었다.  물론 속독의 장점은 많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쏟아지는 때,  책 한 권을 너무 오래잡고 있으면 남에게 뒤쳐지는건 아닌지 조바심이 일곤 했다. 평생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은 한정 돼 있기에, 속독을 통해 그 양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전후 일본의 교육현장에서 하시모토 선생은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슬로리딩을 시도한다. 소설책 한 권을 3년간 읽으며 국어교육을 대체하는 것이다.  하시모토에게 6년간 국어교육을 받았던 `은수저 학생'들이 포진한 나다 학교는 훗날 일본 최고 명문대학에 최다 합격생을 배출한다.  슬로리딩과 높은 학업성취도는 상관 관계가 있었을까.  졸업생들은 이구동성으로 하시모토 선생의 교수법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 수업을 통해,  단순한 정보습득이 아닌 깊이 있는 지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을 익혔고, 모든 공부의 기본인 국어에 흥미를 느끼자 그것이 학력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시모토의 슬로리딩이 주는 메세지는 `독서란 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남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읽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독서성공론이 횡행하고 있다.  모든 것이 경쟁과 효율로 치환되는 세계의 아니러니한 풍경이다.  하지만, 독서는 경쟁의 수단이 아니다.  책을 빨리 많이 읽어야 하는 사람은 특수한 소수에 그친다.  그것은 목적이 특정된 독서법이다. 누구를 위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쉼없이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학교와 사회속에서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때 인간은 창조와 예술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다.  무목적성이 독서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 밤마다 조금씩 책을 읽는 사람은 그때마다 나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말고 시공간적으로 동떨어진 또다른 세계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력을 기르고, 다른 사람의 감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효과가 있습니다."  40쪽


조직속의 인간이 그 안에서 일하는 풍경을 보라.  그는 그 시간동안 자신의 자아와 영혼을 대면할 시간이 없다. 그는 조직의 부속품으로 시간을 소비한다.  조직속에서 성공하는 인간의 조건은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버리고 조직의 목적과 임무에 충실한 것이다.  그때 그는 조직의 아바타가 되어야 한다.  우린 언제 자신의 내면 깊숙히 자리한 진짜 나와 마주앉게 될까.  독서하는 시간이다.  목적없이 책장을 넘기고, 어느 행간에서 사유의 실마리를 발견할 때 인간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천천히 깊게 읽는' 슬로리딩은 내가 발견한 부담없고 목적없는 책읽기의 전형이다. 아무리 두꺼운 책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끝에 이른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책읽기가 두렵지 않고, 평생 책과 멀어지지 않는다. 우보천리(牛步千里)이며 티클모아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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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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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 25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쟁은 일본과 조선이 맞붙은 최초의 전면전이었고, 명(明)나라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대규모 국제전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역사 컨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차용되고 있는 것이 임진왜란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임진왜란이 일어난 400년 전의 정치,군사적 지형이 그 이후 역사에서 비슷하게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섬나라의 침략성과 야만성을 드러낸 400년 전의 왜군은 그 후, 300년이 지나 제국주의 군대로 변모해 또다시 조선을 점령하고 말았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다.  `전쟁을 하다보면 한번 정도 실수나 패배는 있다'는 속담이다.  


그런데, 조선은 300년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실수와 패배를 반복했다. 두번째 패배는 아예, 36년간 나라 자체를 잃고 일본과 합병이란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나라가 큰 전란을 당하고 어찌 조선의 지식인들이 반성과 다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 대표적 관료이자 지식인을 꼽자면 서애(西厓) 유성룡을 들 수 있다.  바로, 그가 지은 <징비록懲毖錄>이란 저술 덕분이다. 이 독특한 저술명에 담긴 의미는 <시경> [소비小毖] 편에 나오는 문장,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에서 발췌 한 것이다.  임란 당시 유성룡은 조선 조정의 최고위급 관료로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난을 피해 선조가 궁을 떠나자, 그를 호종했으며 전쟁 내내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 활동하며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전쟁을 막후에서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빼앗기자, 고향에 돌아가 저술에 몰두했고 그 즈음 쓴 책이 <징비록>으로 전해온다. 이 책은 현재 국보 132호로 지정돼 있다.  서책이 국보로 지정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읽고 나면 이 책이 지닌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명민한 지식인이자 조선의 전쟁 지휘부의 관료로,  전쟁의 실상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중 군사 지휘와 백성의 군무 참여를 지시했고 선조에게 중요한 조언을 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가장 긴밀히 조,명 연합군의 전략을 협의 했다. 서울을 버리고, 평양성조차 벗어나려는 임금을 설득하지만 실패한다.  임란 발생 전에 그는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추천하고,  형조정랑으로 일하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하며,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다. 전쟁 전,후에 보여준 그의 활약상은 총체적 조선 사회의 난맥상 한가운데서도, 진정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관료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징비록>은 현장 기록이다. 먼 훗날 과거의 사실을 역사가의 손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의 글에서 깊은 울림과 절박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부산포에 당도한 왜군 선박은 부산 앞바다를 모두 덮을 정도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불과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곧이어 왕이 피난했던 평양성을 빼앗는다. 그런데, 왜군은 평양성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고니시 유기나가는 평양에 당도해서 조선 진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온다. "우리 수군 10만이 또 서해로부터 도착할 것입니다. 조선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인지요?" 유성룡은 왜군이 평양성에서 발이 묶인 이유를 이순신의 공으로 서술한다. 거제 견내량에서 왜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수군과 육군의 한반도 병진 작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징비록>의 후반부는 이순신의 업적과 그의 뛰어난 전술에 대한 기술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전반부가 전란의 발생과 초기 싸움, 선조 임금의 피난과 평양성 탈출, 명나라 군의 개입이 주를 이루는 것과 대비된다. 유성룡은 선조임금의 신하로 임금을 비난하고, 그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또, 유교사회에서 왕을 비판하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임란 내내,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자신의 목숨 부지에 온힘을 기울리는 선조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징비록>을 읽으며 독자가 느끼는 답답함은 조선의 사령탑이 부재하고, 그의 존재감이 없다는 점이다. <징비록>의 후반부는 이순신의 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유성룡은 이 분명한 전, 후반의 대비를 통해 선조 임금과 그의 무능함을 에둘러서 비판하고자 한게 아니었을까.


" 그러자 (명 제독) 진린은 임금께 이런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쓴 것은 그가 마음으로부터 감복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  207~215쪽, 유성룡 <징비록> 


조선 육군이 연패하는 와중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지만, 이후 명나라는 왜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이었다. 전쟁보다 협상으로 왜군을 돌려 세우려 했지만 간교한 왜군은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하고 그가 부재한 상태에서 정유재란(1597)을 일으킨다. <징비록>을 보면 남쪽 바다를 지켰던 이순신이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큰 신임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순신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선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백성들이 모이자 세금으로 군량미를 거둘 수 있었다. 선조임금이 도망친 서울 도성을 불지른 백성들과 비교되는 상황이다.


명 제독 진린은 거만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순신을 인정하게 된 사연이 소개된다.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군대를 바다 한 가운데까지 나가 맞이한다. 조선 수군이 쌓은 업적을 모두 진린의 공으로 돌리기도 했다. 전란의 한가운데서, 조명 연합군이 단결하기 위한 방책을 이순신은 이런 방식으로 쌓았던 것이다.


400년 전 조선의 관료 유성룡은 전쟁 중, 왜군의 특성을 "간사하고 교활함"으로 압축한다. 그런 습성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전략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쓴 이유는 왜인의 특성을 간파해, 다시는 조선이 침략당하지 않는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 전 후 유성룡 같은 식견있고 애국심이 넘치는 관료가 하는 건의는 묵살되기 일수였다. 서울 도성을 버린 후, 임금이 거처하던 성에 불을 지른 것은 적군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임금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의는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었지만, 선조는 백성을 버렸다. 선조가 평양성에 머물던 시기, 분노한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결국 진압되지만, 그들이 의심했던 것은 결국 왕이 평양성의 자신들을 버릴 것이라고 점이었다.  이 때 조정의 관료들은 임금이 평양성을 사수할 것이라고 말하며 혼란을 수습하지만 그 말이 있고 얼마 후, 왕은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랬으니 어찌 백성이 조선의 지도부를 신임할 수 있었을까.  <징비록>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서술된다. 전쟁은 곧 굶주림이었다. 백성들은 왜군의 조총과 칼날 끝에서 죽었지만, 대부분 굶주림에 죽어갔다.  <징비록>에선 압축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가족이 가족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서술한다.  한 명나라 장수가 길가에서 굶어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아기를 거둬 기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 이 모습을 본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칼을 빼어 길을 막고 나서며 폭행했다. 신주는 길에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재신을 지목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 이 무렵 연광정에서 임금께로 향하던 나는 아녀자와 어린 아이까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성을 버리고 갈 거면 왜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소?  이야말로 우리를 속여 적의 손에 넘겨주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92쪽


<징비록>을 읽으며 그 생생히 잡힐 것 만 같은 죽음과 공포에 다가갔다.  임진왜란을 다룬 그 어떤 문헌보다 <징비록>이 귀중한 자료인 것은 현장의 생생함 때문이다. 이 기록에는 과장도 흥분도 없다. 이유없이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대한 분노와 무력한 임금과 조선의 체제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가장 큰 수확은 400년 전 관료가 숨겨둔 두 지도자의 `대비'였다.  선조와 이순신, 명나라 제독까지 인정한 이순신의 인품과 리더쉽은 역사의 불가능한 가정을 불러오게 한다.  만약, 조선의 임금이 이순신이었다면? 그 이후, 조선의 운명은 어땠을까.  <징비록>의 불안한 예언처럼 300년 훗날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 


임진왜란은 예언된 전쟁이었다. 16세기의 상황이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임있는 관료들과 임금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결국 수많은 죽음과 공포를 불러들였다. 400년 전 참혹했던 저 동아시아의 국제전을 통해 우리 시대 평화의 가치를 되돌아 볼 수 있을 듯하다. 현명한 지도자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평화를 지향한다. <징비록>의 교훈적 가치는 유효하다. 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여전히 아시아의 대륙을 넘보는 `간사하고 교활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백성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신임을 받지 못했던 선조 임금의 리더쉽은 역사적으로 얼마나 진보했을까.  우리는 `이순신'을 지도자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질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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