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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 25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쟁은 일본과 조선이 맞붙은 최초의 전면전이었고, 명(明)나라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대규모 국제전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역사 컨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차용되고 있는 것이 임진왜란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임진왜란이 일어난 400년 전의 정치,군사적 지형이 그 이후 역사에서 비슷하게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섬나라의 침략성과 야만성을 드러낸 400년 전의 왜군은 그 후, 300년이 지나 제국주의 군대로 변모해 또다시 조선을 점령하고 말았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다. `전쟁을 하다보면 한번 정도 실수나 패배는 있다'는 속담이다.
그런데, 조선은 300년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실수와 패배를 반복했다. 두번째 패배는 아예, 36년간 나라 자체를 잃고 일본과 합병이란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나라가 큰 전란을 당하고 어찌 조선의 지식인들이 반성과 다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 대표적 관료이자 지식인을 꼽자면 서애(西厓) 유성룡을 들 수 있다. 바로, 그가 지은 <징비록懲毖錄>이란 저술 덕분이다. 이 독특한 저술명에 담긴 의미는 <시경> [소비小毖] 편에 나오는 문장,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에서 발췌 한 것이다. 임란 당시 유성룡은 조선 조정의 최고위급 관료로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난을 피해 선조가 궁을 떠나자, 그를 호종했으며 전쟁 내내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 활동하며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전쟁을 막후에서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빼앗기자, 고향에 돌아가 저술에 몰두했고 그 즈음 쓴 책이 <징비록>으로 전해온다. 이 책은 현재 국보 132호로 지정돼 있다. 서책이 국보로 지정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읽고 나면 이 책이 지닌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명민한 지식인이자 조선의 전쟁 지휘부의 관료로, 전쟁의 실상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중 군사 지휘와 백성의 군무 참여를 지시했고 선조에게 중요한 조언을 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가장 긴밀히 조,명 연합군의 전략을 협의 했다. 서울을 버리고, 평양성조차 벗어나려는 임금을 설득하지만 실패한다. 임란 발생 전에 그는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추천하고, 형조정랑으로 일하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하며,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다. 전쟁 전,후에 보여준 그의 활약상은 총체적 조선 사회의 난맥상 한가운데서도, 진정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관료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징비록>은 현장 기록이다. 먼 훗날 과거의 사실을 역사가의 손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의 글에서 깊은 울림과 절박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부산포에 당도한 왜군 선박은 부산 앞바다를 모두 덮을 정도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불과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곧이어 왕이 피난했던 평양성을 빼앗는다. 그런데, 왜군은 평양성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고니시 유기나가는 평양에 당도해서 조선 진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온다. "우리 수군 10만이 또 서해로부터 도착할 것입니다. 조선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인지요?" 유성룡은 왜군이 평양성에서 발이 묶인 이유를 이순신의 공으로 서술한다. 거제 견내량에서 왜 수군을 격파함으로써, 수군과 육군의 한반도 병진 작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징비록>의 후반부는 이순신의 업적과 그의 뛰어난 전술에 대한 기술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전반부가 전란의 발생과 초기 싸움, 선조 임금의 피난과 평양성 탈출, 명나라 군의 개입이 주를 이루는 것과 대비된다. 유성룡은 선조임금의 신하로 임금을 비난하고, 그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또, 유교사회에서 왕을 비판하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임란 내내,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자신의 목숨 부지에 온힘을 기울리는 선조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징비록>을 읽으며 독자가 느끼는 답답함은 조선의 사령탑이 부재하고, 그의 존재감이 없다는 점이다. <징비록>의 후반부는 이순신의 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유성룡은 이 분명한 전, 후반의 대비를 통해 선조 임금과 그의 무능함을 에둘러서 비판하고자 한게 아니었을까.
" 그러자 (명 제독) 진린은 임금께 이런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쓴 것은 그가 마음으로부터 감복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하였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 " 207~215쪽, 유성룡 <징비록>
조선 육군이 연패하는 와중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지만, 이후 명나라는 왜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이었다. 전쟁보다 협상으로 왜군을 돌려 세우려 했지만 간교한 왜군은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하고 그가 부재한 상태에서 정유재란(1597)을 일으킨다. <징비록>을 보면 남쪽 바다를 지켰던 이순신이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큰 신임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순신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선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백성들이 모이자 세금으로 군량미를 거둘 수 있었다. 선조임금이 도망친 서울 도성을 불지른 백성들과 비교되는 상황이다.
명 제독 진린은 거만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순신을 인정하게 된 사연이 소개된다.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군대를 바다 한 가운데까지 나가 맞이한다. 조선 수군이 쌓은 업적을 모두 진린의 공으로 돌리기도 했다. 전란의 한가운데서, 조명 연합군이 단결하기 위한 방책을 이순신은 이런 방식으로 쌓았던 것이다.
400년 전 조선의 관료 유성룡은 전쟁 중, 왜군의 특성을 "간사하고 교활함"으로 압축한다. 그런 습성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전략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쓴 이유는 왜인의 특성을 간파해, 다시는 조선이 침략당하지 않는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 전 후 유성룡 같은 식견있고 애국심이 넘치는 관료가 하는 건의는 묵살되기 일수였다. 서울 도성을 버린 후, 임금이 거처하던 성에 불을 지른 것은 적군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임금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의는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었지만, 선조는 백성을 버렸다. 선조가 평양성에 머물던 시기, 분노한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결국 진압되지만, 그들이 의심했던 것은 결국 왕이 평양성의 자신들을 버릴 것이라고 점이었다. 이 때 조정의 관료들은 임금이 평양성을 사수할 것이라고 말하며 혼란을 수습하지만 그 말이 있고 얼마 후, 왕은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랬으니 어찌 백성이 조선의 지도부를 신임할 수 있었을까. <징비록>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서술된다. 전쟁은 곧 굶주림이었다. 백성들은 왜군의 조총과 칼날 끝에서 죽었지만, 대부분 굶주림에 죽어갔다. <징비록>에선 압축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가족이 가족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서술한다. 한 명나라 장수가 길가에서 굶어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아기를 거둬 기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 이 모습을 본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칼을 빼어 길을 막고 나서며 폭행했다. 신주는 길에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재신을 지목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 이 무렵 연광정에서 임금께로 향하던 나는 아녀자와 어린 아이까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성을 버리고 갈 거면 왜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소? 이야말로 우리를 속여 적의 손에 넘겨주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92쪽
<징비록>을 읽으며 그 생생히 잡힐 것 만 같은 죽음과 공포에 다가갔다. 임진왜란을 다룬 그 어떤 문헌보다 <징비록>이 귀중한 자료인 것은 현장의 생생함 때문이다. 이 기록에는 과장도 흥분도 없다. 이유없이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대한 분노와 무력한 임금과 조선의 체제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가장 큰 수확은 400년 전 관료가 숨겨둔 두 지도자의 `대비'였다. 선조와 이순신, 명나라 제독까지 인정한 이순신의 인품과 리더쉽은 역사의 불가능한 가정을 불러오게 한다. 만약, 조선의 임금이 이순신이었다면? 그 이후, 조선의 운명은 어땠을까. <징비록>의 불안한 예언처럼 300년 훗날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
임진왜란은 예언된 전쟁이었다. 16세기의 상황이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책임있는 관료들과 임금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결국 수많은 죽음과 공포를 불러들였다. 400년 전 참혹했던 저 동아시아의 국제전을 통해 우리 시대 평화의 가치를 되돌아 볼 수 있을 듯하다. 현명한 지도자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평화를 지향한다. <징비록>의 교훈적 가치는 유효하다. 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여전히 아시아의 대륙을 넘보는 `간사하고 교활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백성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신임을 받지 못했던 선조 임금의 리더쉽은 역사적으로 얼마나 진보했을까. 우리는 `이순신'을 지도자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질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