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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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장강명을 잘 몰랐다. 요즘 책 볼 시간도 많이 없고, 더군다나 소설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다. 어지간한 작가의 이름은 꿰차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런 내게도 장강명은 생소한 작가다. 그런데, 그는 상복이 많은 작가였다.  보수신문인 동아일보 기자를 10년 가까이 하다,  한겨례 문학상을 받으며 기자에서 작가로 전업한 독특한 이력에다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몇 해 만에 1억 5천만원에 달하는 상금을 거머쥐었다.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작가로서 더할나위 없이 호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가는 "하루 8시간 1년 2,000시간을 준수하며, 액셀로 투명하게 문장 생산량을 기록할" 정도로 성실함을 보여주고도 있다.(조선비즈 인터뷰 中) 


글쓰기에서 성실함은 중요하다.  글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쓴다는 것은 동서고금 작가들이 모두 동의할 테니까 말이다. 월급쟁이 기자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신분이 바뀌었으니 고정수입은 없을테고, 믿을 것은 자신의 펜 끝 아니겠는가.  장강명에게 글쓰기의 성실함은 미덕이 아니라 기본이자 필수였을 것 같다.  나는 장강명을 잘 몰랐으나 <댓글부대>라는 제목만으로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곧바로 눈치했다.  때로 작가의 의중은 책 한 권 보다 단 한 문장안에 함축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설의 첫 문장을 보자.  " 대체로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이 운영한 댓글부대를 1세대로 본다 " (6쪽)  이 소설은 제주 4.3 평화 문학상을 받았다.  상금도 상당한 것으로 안다.  장강명은 50여편의 응모작을 따돌리고 <댓글부대>로 이 의미깊은 문학상을 받았다.  제주 4.3 사건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그때 희생된 1만 4천명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들은 명예 회복의 절차를 끝마쳤다. 국회에서 통과된 특별법을 통해서 말이다.  일부 극우논평가들을 제외하곤 제주 4.3은 국가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되는 역사다.  <댓글부대>가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민감한 사회적 사안을 다루려는 작가의 용기와 치열함에 대한 격려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기대와 달리 2012년 대선 당시의 국정원 댓글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댓글 조작'을 하는 집단은 20대의 세 청년이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국가권력이나 국정원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게 `분명한' 합포회라는 베일에 가려진 조직의 지시를 받는다.  이 세 청년은 대단히 뒤틀린 문제아들이 아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모든 스펙을 장착하고서도 취업 문을 넘지 못하는 청년 3인조. 그들은 이 사회와 세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냉소적 태도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속에서 그들이 사회에 대해 불평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게 신기하다.  대신,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아무 죄책감 없이 그들을 조종하는 물주 앞에 충성을 다하려는 단세포적인 자세만이 엿보인다. 이 청년들의 놀라움 성실함 속에는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 조작 현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문을 걸어잠그고 두문불출의 자세로 헌신하던 유전자가 그대로 살아 숨쉰다.  당시, 문을 걸어잠근 국정원 20대 여직원에게서 분노보다 밥벌이의 엄중함이 느껴졌던 것은 참 서글픈 일이었다.  


그들이 `합포회'라는 기성보수 조직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 여론 조작을 통해 청년들과 진보집단의 다툼과 분열을 이끌어낼 때, 그들에게 제공되는 `당근'은 오직 `섹스할 수 있는 여성'과 `충분한 사례금' 정도다.  청년 실업 문제가 별다른게 아니다. `섹스와 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회불평등, 기회상실이 청년 실업의 핵심적 사안 아닌가.  하여, 이 소설의 전반을 지배하는 이 끈적하고 은밀한 한국 사회의 퇴폐적 밤문화는 이 소설의 필요악이다. 그들은 합포회의 프로젝트를 성공할 때마다 상당한 보수를 받는다. 여기에 비례해, 이 세 청년의 섹스는 `노래방의 보도 여인들'과 노닥거리는 것에서 `텐프로 업소의 연예인 뺨치는 여인들'에 이르는 것으로 그들의 신분 상승을 상징화 시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독자는 국정원 댓글 사건이 아닌 별 볼 일 없는 3인조 청년의 인터넷 여론 조작의 실태와 그 비열함에 빠져들게 된다.  독자의 기대와 달리 소설이 `삼천포'로 긴 여행을 시작하고 만 것이다.


" 독재 국가에서는 지금도 인터넷이 그런 고발자, 감시자 역할을 해,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런가?  인터넷 신문이나 블로거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냐고.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 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 "   55쪽, 장강명 <댓글부대>


<댓글부대>는 `2012년 국정원의 선거 여론조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 아닌게 분명해졌다.  난 왜 그런데 이 소설이 그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거나 에둘러서라도 파고들것이라고 예측했을까.  소설제목과 책에 걸쳐있는 띠지에서 오는 착시 때문이었다.  "제가 쓴 소설 중에서 가장 빠르고 독합니다"  사건 진행이 빠른 것은 맞는데 `독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소설은 `양비론'에 가닿는다.  이 세계에서 나쁜짓은 거대 권력만의 특권은 아니라는 사실, 따지고 들면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인간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진정 내가 이런 식의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이 소설을 잡지는 않았다는건 또 분명하다.  <댓글부대>에서 난 정말 장강명이 `독하게' 국정원의 대선 댓글 조작을 희화화라고 시켜줄 지 알았다.  이건 나만의 바람이었나?


장강명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 `출처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거나 마음에 부담을 털어버리듯, 이렇게 일갈한다. " 작가인 저는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견해도 찬성하지 않고, 어떤 인물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243쪽)  그렇다면 묻고 싶다.  작가로서 그는 왜 이 소설을 `독하게 썼다고 주장했는가'  누구의 견해도 찬성하지 않고, 어떤 인물도 지지 하지 않으면서 장황하게 이 긴 소설을 왜 쓰셨는지 묻고 싶다.  그저 4.3 문학상이 주는 무게와 대가를 바라고 소설을 쓰셨다는 이야기일까.  


한국 문학이 망해가고 있다는 비명이 들려온게 어제 오늘의 이야긴 아니다.  최근 신경숙의 표절 사태에서 보여준 양식있는 자들의 행태는 왜 한국 문학이 이지경에 이르렀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태도.   책을 읽지 않는 독자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천문학적인 선인세를 제공하는 출판사와 하루키의 신작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에 긴 줄이 늘어선 것은 하루키 책에다 뭔가 대단한 선물을 끼워팔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작가의 작품이 좋다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고 작가의 상상력이 펼쳐진 그 무한한 세계에 먼저 발 담가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한국 독자들은 죽지 않았고, 그들은 좋은 작품에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댓글부대>는 적잖이 실망감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진영 논리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다.  작가가 이 세계의 실상을 진보와 보수를 떠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반성하자는 의미를 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힘있는 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양태를 비양심으로 등치시키는 것 자체가 비열한 양비론이다.  대의 민주제는 완벽하지 않는 다수가 그래도 깨끗한 소수를 선택해 정치를 맡기는 제도다.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은 그들이 깨끗함을 선택받았기 때문이지 대중이 깨끗해서가 아닌 것이다.  국정원의 댓글조작과 희망없는 청년 3인조의 여론 조작이 같을 수 없는 이유다. 


작가에게 분명한 관점은 생명과도 같다.  인간은 완전히 선하지도 않고, 완전히 악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는건 아니다.  어느 시대나 작가의 책무란 선과 악이 공존한 세상에서 용기있게 그 악을 고발하는 역할이다.  분명한 악을 보고도 악이라고 말할 용기조차도 내지 못한다면, 그는 왜 글을 쓰는 것인가.  기자이자 작가였던 고 리영희 선생은 살아 생전 자신의 자서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고통을 무릅써야 한다"고 했다.  <댓글부대>에선 그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이라면 `밥벌이로 전락한 서글픈 글쓰기'가 보여질 뿐이다.  젊은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쓴다면 한국 소설에서 맵고 독한 맛은 잊어야 한다. 차라리 매 끼니 청양 고추로 밥 한 사발을 말아 먹든지, 아니면 `발렌타인 17년산'으로 독한 맛을 느껴 보는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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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2-0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씀이 참 와 닿네요. 고 리영희 선생의 말씀도요.
이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님도 역시 그렇군요.
또 이만한 작품에 그런 문학상을 수여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서글프네요. 우리나라 작가들 더 치열하고 스스로에게
더 혹독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러다 우리나라 문학 하양평준화되겠어요.

개츠비 2016-06-08 09:46   좋아요 0 | URL
상을 받을 수는 있지만, 4.3문학상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엠뷔피콥 2016-08-1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성어린 리뷰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장강명 작가가 읽고 리뷰를 해줬으면 할 정도네요.

고통이라고는 밥벌이를 위한 고통밖에 보이질 않는다라는 마지막 글에서
무릎을 탁치고 갑니다

리뷰글 감사합니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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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꽤 유명한 사람이다.  KBS는 2015년 새해 3일간 황금시간대에 신년 특강을 그에게 맡겼다. 시청률도 만만치 않게 높게 나왔다.  그 당시 그는 막 <에디톨로지>라는 신간을 냈을 때였다. 물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특강이 시작되기 전, 신간 서적으로 읽은 터라 강의가 더 재밌고 귀에 쏙쏙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그가 특강에서 한 이야기는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한 이야기들이 주 내용이었다.  그는 국내외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성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생끝에 시간강사 생활을 벗고 정교수가 되었고 12년 동안 교수 생활도 열심히 했다. 논문도 많이 썼고, 대한민국 여가정책을 입안한 주인공도 그라고 고백한다. 그런 그가 2012년 안식년을 맞아 일본으로 떠났고 어느날 갑자기 몇 년 후면, 연금이 보장되는 교수직을 집어던졌다.


<에디톨로지> 이후, 1년만에 신간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21세기북스,2016)를 내놨다. 일본의 한 전문대에서 그림을 전공하고 최근 졸업한 그는 이번 저서속에다 자신이 직접 그린 삽화를 페이지 곳곳에 배치했다. 그의 글쓰기는 유머러스하고 쉽다. 이런 장점을 통해 그는 자신의 주전공인 심리학 이론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이번책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엔 자신의 삶과 심리학,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유가 널뛰기 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참 솔직한 글쓰기다.  내가 그의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에로틱하고 탈권위적인 자유로움때문이다.  우리 시대, 점잔빼는 어른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절대로 성적인 농담을 쉽게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글쓰기에서 성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김정운은 반대다. 그가 성적인 이야기를 농담 수준으로 하고 있는 이유는 고지식한 독자들이나 출판사의 편집자를 진정시키기 위한 트릭 같단 생각이 든다. 아쉬운 부분이다. 인간은 성적인 것에 관심이 밥 먹는 것 다음으로 많을지 모른다. 아니, `그것부터 하고 밥을 먹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쉰을 넘긴 중년 남자, 김정운은 글쓰기에서 이 동물적인 본능을 농담이란 포장지에다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가 독자를 상대로 사기치지 않는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12년 새해, 다이어리에다 "난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썼다.  생각해보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싫은 일이었다.  `더이상 학생들에게 사기쳐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수직을 `때려치웠다'.   


우리사회에서 일하고 싶어서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누군들 일이 취미가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은 대개 재미없고, 밥벌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연봉이 억대가 넘어가는 항공사의 기장이나 은행원이나 그들이 좋아서 비행기를 몰고, 돈을 세고 있는게 아니다. 가르치는게 즐겁고 재밌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김정운은 어려서부터 선생을 신뢰하지 못하는 기질적 성격에다 교수가 된 후, 12년만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대학교수라는 명패를 던져버리고 그는 일본에서 4년간 체류하며, 재수업을 받는다.  평소 관심있었던 `성인만화'를 전공하고 싶었다. 그것이 100세 시대, 노인들이 주 소비층으로 올라설 세상의 블루오션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사랑했다.


김정운은 혈혈단신 쉰 살에 자취생활을 시작한다.  `격하게 외로운 4년'을 그는 어떻게 보냈을까.  연초 황금시간대에 공영방송에서 특강을 맡길 정도로 `명사'였던 그는 이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일본의 한 귀퉁이 시골마을에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그 4년간 그는 성인만화가 아닌 일본화를 전공해 전문대 학위 하나를 따냈고, 총 6권의 책을 번역,집필 및 기획했다. 일본어 독해실력을 부쩍 키웠고, 수년간 집중해서 주전공인 심리학을 더 깊이 파고들고 책을 내려고 사진작가 윤광준과 유럽의 뒷골목을 배회했다.  그는 그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자 인생에서 이토록 재미있게 공부해본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모두 외로움을 담보로 얻어낸 성과물입니다." (13쪽)


김정운은 이 모든 성과를 `외로움'으로 돌렸다. 외로움이란 사람들이 기피하는 감정이다. 외롭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경조사를 챙긴다. 자신의 경조사가 외롭게 보이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과 멀어지려 한다. 마음이 공허하면 곁에 사람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카페에 모여 그렇게 하릴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고 쓸데없는 술자리를 만들어, 2, 3차 까지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김정운은 반대로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로움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쁠수록 더 공허해진다고 말한다.  외로움을 피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그는 제안한다. " 격하게 외로워야 덜 외롭다 "는 것이다. 


"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서워 외로운 시간을 피하려고 합니다.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겁니다. 외로워야 성찰이 가능합니다. 고독에 익숙해져야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인 `성찰'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심리학적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야 외롭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역설입니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김정운 8쪽


그런데, 김정운이 외로움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외로움은 자유와 연결 돼 있다.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홀로 있을 때 자유롭게 좋아하고 즐기고 사랑하는 일을 해야 그 외로움이 두렵지 않다.  김정운의 외로움 예찬은 하여, 인생에서 진정 하고 싶은 일의 발견을 전제로 한다.  세상 사람들이 바쁜 척 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하여, 겸손하지만 진정한 능력자인 김정운 식으로 자신의 직장을 바로 때려치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평생 추구할 목표나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먼저 정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먼저, 당신은 무엇을 일생 추구하고 싶은 사람인가?  당신이 사랑하는 일과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며,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겁나?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이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없는 나같은 사람은 김정운의 용기와 결단을 영원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거다.


김정운은 그림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고백한다.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하여, 그는 `계속 공부할 거다'라며 이 책을 끝맺는다. 김정운의 새해 계획은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도 여수 땅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꾸미는 것이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책을 쓰며, 아주 잘생긴 진돗개 두 마리를 키우며,  그림 그리다 졸리면 마루에 누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든다.   물론 이 공간안에서도 그의 창의적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 책읽고 연구하고, 결국 좋아하는 공부를 계속하는 삶 말이다.  상상만해도 여유롭고 행복한 삶이다.  지상에 유토피아가 있다면 바로 저 김정운의 바닷가 외딴 집으로 주소지를 옮기는게 좋을 듯하다.


" 조르바가 이 책의 주인공(카잔차키스)을 처음 만난 날, 함께 일하자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주인공은 묻는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조르바는 아주 간단하고도 단호하게 말한다. `자유라는 거지!' "  322쪽


우리 사회 쉰(50)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옆을 봐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여전히 살아 남았다면, 그들은 권력과 재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지위에 알맞은 권력, 일중독, 오직 일을 통해 형성된 인맥이 삶의 모든 것 인양 상상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많다. 김정운은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다 만나봤으나 대부분 `정상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상식적으로 그 위치까지 오르느라고 얼마나 미친 듯 살아왔겠냐는 거다. 말할 것도 없지만, 하루하루를 겨우 견디어내는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고 묻는다.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쉰'은 불행하다. 은퇴가 몇 년 앞으로 다가온 쉰은 여전히 자신의 인생목표가 없는 것이다.  권력이 빠져나간 자리 외로움을 대신할 `대체제'도 없다.


난 그런 `쉰'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능력자인 김정운 식으로 직장이란 링 위에다 `하얀 수건'을 던질 용기는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며 기회를 엿본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링위에선 방심하는 즉시 상대의 펀치가 날아든다. 그것을 요리조리 피하려면 시선과 상대의 움직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발을 재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사각의 링 위에선 움직이지 않고는 버텨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직장인의 숙명도 그와 같지 않을까.  치열하게 일하면서 다른 세계를 꿈꿀 수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당장의 위협이란 핑계로 꿈꾸기를 포기한다면 그 좁디 좁은 링, 공포의 링이 존재의 기반으로 고착되고 말 것이다.


외로움과 자유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갈망을 꿈꾸고 싶다.  쉰이 넘어 안정적인 삶을 던져버리고 불안정한 자유에 안착한 김정운은 자유로운 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먼저 눈 밭을 걸어가 멋드러진 자취를 남긴이로 기록될 것이다.  김정운의 책은 세번 째 독서다.  첫번째는 놀이를 기피하는 사회와 개인에 대한 문화심리학자의 따끔한 충고였다.  두번째 책은 지식은 편집에서 오는 것이란 가르침이었다. 지식인은 편집자란 메세지가 인상깊었다. 세번 째 책에서 그는 모든 이들이 피하고자하는 외로움이야 말로 자유로운 삶의 기반이 됨을 입증했다. "성공해야 행복한게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다"는 김정운식 `개똥철학'에 공감한다.  하여, 나는 더욱더 에로틱하게 재미를 발견하며, 생산적 고독속에서 꿈을 기억하고 자유를 탐색하는 삶을 이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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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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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출신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독서가다. 책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일생 가까이 하는 사람을 `독서가'의 범주에 넣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흔한 이름인가.  그는 젊은 시절, 서점 점원으로 일하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거장을 만났다. `환상적 사실주의'라는 장르를 개척한 남미의 독보적 소설가였던 보르헤스는 당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망구엘은 그와의 인연을 계기로,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거장과의 만남은 그를 독서와 글쓰기의 세계로 이끌었다. 문학적 영감을 자극받은 그는 훗날 소설가로서 문학상까지 거머쥐었다. 그런데, 망구엘은 소설가의 길을 포기한다.  그 이유가 특별하다. 

어린 시절 망구엘은 글짓기를 위해, 꼬박 이틀 밤을 새워본적이 있었다. 그 고통스런 글쓰기의 세계는 악몽이었다.  그에 비해, 독서하는 시간은 행복했고,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선물했다.  그는 고달픈 작가보다는 즐거운 독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자서전 <말Les mots>의 제 1 장 소제목을 `읽기'라고 붙였다.   숱한 철학저작들을 써 낸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고백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보답이 없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고통스런 노력이다.  그러나 독서는 일종의 축제였다"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 속 주인공 로캉텡은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그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오래된 고전 작품들을 뒤적이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의 주요한 이야기이자 공간적 배경이다.  읽기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짜릿한 축제의 장소는 어디였을까.  바로 도서관이다.  20년 전 대학시절 대학의 그 많은 건물 가운데, 기억에 남는 공간을 꼽자면 도서관을 들어야 한다.  늦은 오후, 강의가 끝나면 내 발길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한번은 레포트 자료를 찾기 위한 도서관에 간 일이 있었다. 오랜 시간 미로 같은 선반을 배회했고 도서관 선반이 늘어선 그 책의 숲 속에서,  목적없는 방황의 재미를 발견했다.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는 그 책들 사이에서 때로 길을 잃고 말았다.  아무 책이나 빼어보고, 문장 몇 마디를 읽다 책장에 넣곤 하는 일은 대학시절 행복한 기억이다.  그 때를 회상하며 망구엘의 책을 집어들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밤의 도서관>(세종서적,2012)에서 인류와 함께 했던 도서관들을 소개한다.  기원전 220년 건립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부터 나치 치하의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둔 수감자들이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돌려보곤 했다는 미니 도서관의 역사까지 훑어 본다.  그런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자신의 도서관을 소개하고, 그 공간에서 책을 읽어나가는 즐거움에 대한 고백으로 읽힌다. 망구엘은 프랑스에 정착하며 허름한 창고를 개조해 비교적 큰 서재를 만든다.  그는 이 공간을 `밤의 도서관'이라 불렀다. 낮엔 일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이 많았으므로, 망구엘이 도서관에서 자신의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고요한 밤 시간이었다. 

" 내 도서관이 내 삶의 일대기라면, 내 서재는 내 정체성을 결정짓는 곳이다 "  186쪽,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15세기 말, <군주론>을 지은 마키아벨리는 당대 이탈리아의 권력을 쥐고 있던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버림 받는다. 그때까지 그는 촉망받는 학자이자 유능한 장관이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전 재산을 빼앗긴 후, 허름한 농가에 유폐당한다.  낮에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노동을 하다,  밤이 되면 그는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멋드러진 궁전복으로 갈아 입었다.  왜 그랬을까. 장중한 옷을 입고 옛 현인들을 배알하는 장소로 들어서기 위해서다. 자신의 농가에 만든 그만의 도서관에 입장하기 위한 나름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 그는 매일밤 그렇게 4시간 가량을, 세상을 잊고 고민거리를 기억하지 않으며,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도 떨지 않으며, 그렇게 글의 세계에 파묻혔다. "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서관은 `돈'이 나오는 `사무실'이나 `업무 현장'이 아니다.   도서관은 실물경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비경제적인 영역이다.  하여, 오늘날 도서관은 시험공부를 위한 장소이거나 `학자연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서재를 갖고 있는 개인들은 쉽게 찾아볼 수도 없다.  낯선 누군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끔 역시나 실망할 때가 많다. 그 집에 책이 보관된 책장이 단 한개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다.  그에 비해,  누구의 집을 방문하든 거실의 터줏대감은 쇼파와 티브이다. 서재는 오늘날 특별한 사람이 가진 특별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부유하거나 아니면 독서라는 전혀 쓸모없고 젠체하는 사람들이 가진 유별난 장소인냥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서재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역사이자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닌가.

" 서재는 그 주인, 즉 그곳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독서가에게 `에우테미아(euthymia)'를 준다. 세네카는 에우테미아가 `영혼의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설명하며, `트란킬리타스(tranquillitas, 평온)'로 번역했다.  에우테미아는 방해받지 않는 기억이며, 글을 읽는 시간의 편안함이다."   196쪽

망구엘의 `밤의 도서관'을 방문하는 이들은 곧잘 묻곤 했다. 그 많은 책을 다 읽어보았으냐고 말이다. 누구든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까.  정말로 도서관과 서고의 책들을 소장인은 모두 읽어보아야 하는 걸까.   망구엘은 답한다.  "모든 책을 펼쳐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규모가 어떻든 간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기억과 망각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독서가는 이익을 얻는다."(264쪽)  도서관의 역설은 인간이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 돼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망구엘의 이 말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거리다.  인간이 일생 몇 만 권의 책도 읽질 못하지만, 사람이 책을 만나는 시간은 `로또 당첨'의 기회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 단 한 권의 책이 그 누군가에겐 삶의 전환점을 안길 것이다.

군복무 시절 군 서가의 책을 섭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봤자 100여권 정도 였다.  전방 철책에 있을 때에는 야간 보초 근무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잠을 잤던 1번 관물대 옆에는 근무상황을 총괄하는 상황실이 있었는데,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창이 나 있었다. 그 상황실의 불빛과 밤새 오가는 무전 송수신은 잠을 방해했지만,  책을 읽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것도 소대장의 눈치를 봐야했지만 말이다.  군대라는 억압된 공간속에서 그 시간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우주와 세계를 나고 들 수 있었던 기회였다.

최근 몇 해, 이사를 한두번 하면서 그동안 모은 책, 800여권을 처분했다.  망구엘의 글을 읽다가 다시금 `나만의 도서관'에 대한 잊혀진 꿈을 꾸게 되었다.  지금껏 내게 책을 모은다는 것은 집안에 작은 서재를 꾸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도 도서관을 만들 수 있다. 그 공간의 역할은 `위안과 망각'이어야 한다.  삭막한 현실을 가끔은 잊고 거리를 둬야 한다.  인간에겐 서재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때, 인간은 억압하는 세계를 벗어나 세네카가 말한 `에우테미아(영혼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책을 읽는다는게 별게 아니다.  세상일의 경중과 삶의 진실을 구분하고 놓치지 않는 일이다.   밥을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사람 삶의 모두가 아니지 않은가.  최근 몇 해, 노숙자과 교도소의 수감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프로젝트가 세계적으로 번져나간적이 있다. 그들이 한잔 술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전 몇 권을 읽고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했단 것은 생의 진실을 포착하는데 있어, 책의 역할을 증거한다. 

"밤이면 가끔 나는 완전한 익명의 도서관을 꿈꾼다. 제목도 없고 저자도 밝히지 않는 책들로 가득해서, 온갖 장르와 온갖 문체 및 온갖 사연이 주인공이나 장소도 모르는 채 하나로 모여 시냇물처럼 끝없이 흐르며 이야기를 이루는 도서관이다. 나는 그 이야기의 어디에라도 풍덩 뛰어들 수 있다. "  73쪽

산 정상에 올라서 바라보는 풍경은 세상이 생각보다 작다는 깨달음이다. 그 좁은 공간속에서 옥신각신하며 이해를 다투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하지만, 그 공간속에서도 산보다 더 높고 깊게 인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한다.  그곳은 도서관이다.  책을 통해, 자신의 영혼과 세계의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 매일 재방송처럼 재미없는 삶과 일순간 작별할 수 있는 공간, 그곳은 인간에게 위안과 망각 그리고 희망을 전달하여 주는 마법의 장소다.  책의 가장 큰 역할이 인간의 삶에 위안을 건넨다는 점은 중요하다. 사람은 그 어디에서 위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을 포기한다. 위안은 곧 `생의 의미'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책을 읽는 행위의 의미와 중요함을 역설하는 독서가다.  <밤의 도서관>을 통해 평범한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상상과 위안의 공간으로서 도서관을 재발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처럼 `밤의 도서관'의 주인장을 꿈꾸어보라고 부추긴다.  내게 책과 도서관은 말초적이지 않고도 짜릿해서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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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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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를 책 한 권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것도 5천년의 시간이 담긴 한민족의 역사를 말이다.  20세기 90여년 일생을 민족의 교사로 살다간 함석헌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2003)는 그같은 의문을 풀어주기에 적합한 대중 역사서다.  오늘날 수많은 위치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지도자와 교사들이 함석헌의 이 책에 대한 독서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 이 때다. 졸지에 역사교육이 자랑스런 국정교과서를 보유한 북한과 방글라데시 수준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급거 모집하고 그것조차 중도사퇴하는 마당에, 제대로 된 역사해석에 대한 독자들의 불안과 갈증은 증폭되지 않았을까.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본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이란 수식어가 붙은 책이었다.  함석헌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유학하며,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신앙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객관적인 역사에다 `성서적 입장'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고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다는 말로 해명 한다. 이 책이 기독교의 서사와 논리를 바탕으로 한국 역사를 풀어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는 모든 종교적 진리를 하나로 보고 종교간의 차이를 형식의 차이로 이해한다.  함석헌에게 있어 유교와 불교,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와 카톨릭은 형식이고, 각 종교가 내세우는 선한 가치는 `뜻'이며 진리다.  그가 생전 한국 교회집단과 자주 논쟁한 것은 이런 기본적 종교관 때문이었다.


그는 훗날 퀘이커 교도로 개종하는데, 퀘이커 교회가 평화와 비교권적 제도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동,서양간 다양한 종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독창적 철학을 만들었는데 함석헌의 `씨알 사상'이다.  그는 투철한 신념을 갖고 당대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투사였으며, 비폭력, 민주주의, 평화에 대한 지지로 `민중이 깨어나야 나라가 산다'는 씨알의 계몽을 위해 사상가이자 역사가이자 민중 지도자이자 교사로서 90년 생애를 꽉 채웠다.  종교적 서사와 논리에 기대 한국 역사를 풀어나가는 것이 생소하고 거부감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난으로 압축된 역사안에서 그 안에 담긴 뜻을 찾고, 역사의 개념과 한국 민족이 가져야 할 태도와 미래를 서술한 것은 그의 탁월한 명문과 아름다운 우리말 속에서 깊은 감동으로 살아난다.


그에게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일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 과거 가운데 기록할 필요, 알 필요를 느끼는 것은 현재 안에 살아 있고,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관은 과거의 단순한 사실을 적는 것이 아니라, 사실 가운데 고르는 것이요, 그 고르는 표준이 지금과의 관련성이다.  현재에 가지는 의미, 뜻을 찾아내고 발견하고 기록하는 게 사관이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다.  하여, "역사가의 자격은 그 기억에 있지 않고 판단에 있다."(43쪽)   역사의 사실(事實)은 해석된 사실인데, 여기서 해석의 주관성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바름'이란 해석하기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나'가 수긍할 수 있도록,  뚫어보고 해석하는 힘을 갖고 바른 기록을 해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함석헌이 말한 `참나'와 대립되는 것이 `작은나, 거짓 나, 사(私)다.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해석하려는 욕망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눈치챌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역사가 사랑에서 나왔고 사랑에 이끌려 사랑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아가페를 공자는 인(仁)으로 보았고, 노자는 도(道)로 보았고, 석가는 빔(空)으로 보았다.  그가 협소한 기독교인의 논리를 벗어나 동,서양 사상을 융합하여 더 큰 진리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이렇듯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동,서양 역사는 대립의 개념으로 발전해 왔다. 동양이 복종,통일,되풀이,지킴의 역사였다면 서양역사는 반항,자유,발전,진보의 역사다.  동서양이 정반대인 것으로 보이고, 그 역사 발전에 우월이 있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동양은 서양 문명을 추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서양의 교만하던 입에서 동양 소리가 차차 높아진다. 이렇게 동,서양이 서로 다른 길을 따른 것은 보다 높은 것을 드러낼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한국 역사와 세계 역사의 흐름 안에서 `뜻'을 찾고 갈구하여야 할 이유가 이렇게 제시된다. 


"모든 것이 뜻이 있어서 되었다. 죽은 것은 나기 위해서요. 실패한 것은 이기기 위해서다. 동서양이 서로 갈라진 것은 서로 도와 모두 높은 데 오르기 위해서다.  마치 두 다리가 서로 갈라지고 서로 반대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듯이, 동양은 정신을 맡았고 서양은 물질을 맡았다."   80쪽,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그는 역사를 지어내는 것이 `아가페'라면 한국역사도 그 마지막 뜻이 `아가페'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함석헌은 이 책에서 그 뜻인 아가페가 실제의 한국역사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실패하며, 시험되는지 서술하고 있다.  아가페는 어떤 도구를 필요로 할까.  함석헌에게 한국역사를 추동하는 힘은 `고난'으로 정리된다.  그는 회고하기를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젊은 가슴에 영광스런 조국의 역사를 안겨줄 수 있을지 힘써 보았으나 쓸데없었고,  어려서부터 듣던 민족의 영웅들을 크게 불러보았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고백한다.  그 작은 소리로 묻어버리기엔 한민족 5천년 앓는 소리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95쪽)


한국 사람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심각성이 부족하며 파고들지 못한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깊은 사색이 없고,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 뒤에 영원을 찾으려고, 컴컴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아 알을 품는 알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서 시 없는 민족이요, 철학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 종교가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다 남에게 빌려온 종교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백의 민족, 동방예의지국, 다 좋은 소리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을지 모르나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고 팔 줄 모른다. 자기를 파지 않기 때문에 자존심이 없다. 자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도 없다.  이런 한국 사람의 성향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정치라면 구차한 외교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는 일로 알았고, 거기서 사대주의가 생겼고 지금까지도 큰 나라에 의지하며 눈칫밥을 먹고 사는게 일상사다. 백년을 앞둔 건축물이 없고, 집 중에서 제일 큰 것은 겨우 경복궁이요, 돌로 만든 것 중에 제일은 은진미륵 정도다. 직업을 구한다면 입에 풀칠하는 것이 목적이니 대를 잇는 명문이 없고, 사업을 한다면 내일로 보수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함석헌은 고려 인종1127년에 발생한 묘청의 난이 실패하고 김부식 일파가 승리한 것이 유교가 한학을 불교가 국풍파를 이기며, 한국 역사가 보수적, 속박적 사상에 정복된 기점이라고 분석한다.  옛 고구려 시절 이후로, 한번도 북벌을 단행하지 못하고 고려의 서경(평양)천도가 실패하며 한국 역사가 결국 정치,사상적 종살이로 고려,조선을 허송세월하게 된 원인으로 꼽는 것이다. 


"한민족이 한을 모른다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다. 소련 가서 종살이하마 약속하고 외교에 성공했다는 놈들아, 미국 가서 심부름 충실히 하마 한 것을 무슨 영광이나 되는 양 꽃뿌리고 맞이하는 놈들아, 그게 어찌 우리 갈 길이냐? 허리에 칼을 꽂음은 어서 빼란 명령 아니냐?  나라의 절반을 자름은 곧 도로 붙이라는 명령이 아니냐?  형제를 칼 들려 맞세움은 칼을 내버리고 울고 서로 쓸어안으라는 말이지 어찌 정말 싸우라는 말이냐?  미국,소련이 서로 세력을 자랑함은 거기 속지 말라 함이지, 어찌 그 어느 놈에 붙으란 말이냐?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434쪽


그러나, 한국 역사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고난이 있다면 `뜻'이 있기 때문이요, 고통이 있다면 `극복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침략과 수탈과 민중의 고난이 줄을 잇는 한국 역사에 고난의 뜻과 의미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그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하여, 나를 버린 죄, 역사의 뒤안길에서 뜻을 찾지 않는 죄, 생명을 찾지 않는 죄, 우리의 평면적 인생관을 고치지 않은 죄, 자아에 충실하지 않은 죄, 고식주의와 은둔주의를 벗어나기 위하여 더 큰 고난이 필요하며,  숙명철학을 몰아내고 장차 올 새 역사에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고난은 필요하다.  보다 높은 도덕, 진보적인 사상의 앞잡이가 되고, 낡은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금껏 한민족은 세계사적 사명을 잊고 살았다. 함석헌은 이 사명을 깨닫는 힘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조상들이 고구려 만주벌판을 누빌 때 흥안령을 넘기 전부터 가슴 깊이 간수하고 길러온 `선한 품성', 착한 바탕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仁)한 사람이란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성격이 되기까지는 길고 긴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우리가 가만히 손을 대어보면 상한 가슴 밑에 `인'의 일맥이 할딱이고 있음을 안다. 인은 곧 알맹이다.  생명이며,  절대자의 명령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세계역사가 폭력과 쟁탈의 역사였다면 앞으로의 역사는 도덕적 싸움의 역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77쪽)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끝을 세계, 민족, 국가라는 거대한 개념의 서술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 그가 이 책의 마지막에서 강조하는 것은 개별적 인간의 지성과 덕성의 자라남이다.  생각을 키우고, 지성을 계발하며 덕을 숭상할 때 한민족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역사 추동의 힘을 결국 깨어있는 개인의 몫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 이것은 일생 그가 천착한 "씨알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다.  


대부분의 사가들은 한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캘 때, 1, 200년을 그 범주 안에 두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함석헌은 `뜻'으로 이름 붙인 성서적 역사철학이란 도구를 갖고 통합하고 융합하며, 한민족의 역사를 세계 역사, 인류 역사의 서사안에서 해석하고 풀이한다.  하여,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지금껏 읽어온 어떤 역사책도 하지 못한 넓은 시야와 통찰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보자면, 객관적 역사에 종교적 도그마를 잣대로 사용하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뜻'이란 독창적인 역사분석의 도구는 의외로 독특한 해석에 가닿으며 무한한 의미를 생성시켜 주었다.  도대체 뭔가 희망이 보이질 않는, 작고 보잘것 없는 한민족 고난의 역사가 그저 고난으로 끝나지 않으며, 더 큰 뜻으로 소생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근거를 심어준 것이다.


겨우 책 한 권을 읽고, 20세기의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스승인 함석헌에 대해 다 말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오랜 시간 서평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은 그같은 이유에서다. 대표작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독자들은 함석헌이란 사상가를 맛본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그의 저작들을 오래도록 읽고 연구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역사를 `작은 나, 거짓 나, 사심’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려 하는 세력에 맞서,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역사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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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로 승부하라 - 대한민국 대표 중국어 강사, 문정아의
문정아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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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아는 대한민국 대표 중국어 강사다.  13년 동안 중국어를 연구하고 가르쳐온 중국어 전문가다.  그녀는 2015년 대한민국 신창조 경영인 대상을 받았다. 신창조인 대상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갖고 일자리 창출과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중국어 교육분야 2015년 소비자 선호도 1위 브랜드 대상과 서비스 만족 대상을 받았다.  문정아 중국어는 학원 교육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기업이다.  2003년 `문정아 중국어 연구소'를 개소하고 13년만에 `문정아 중국어'는 대한민국 최고의 중국어 교육기관으로 우뚝썼다.  `문정아 중국어'의 대표강사이자 CEO인 문정아는 누구인가?


문정아 중국어 CF에선 방송인 전현무가 등장해 코믹하고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평소 전현무는 중국어를 공부해왔고, 중국 현지 방송에서도 중국어 실력을 선보인적이 있다. 그런 그가 문정아 CF에 캐스팅 됐을 때,  섭외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평소 그가 `문정아 중국어'로 중국어 실력을 다지고 있었음을 고백했던 것이다.  중국어 교육 기관으로 TV CF가 만들어진 경우는 흔치 않다. 대중들은 전현무의 CF를 통해 `문정아 중국어'를 비로소 알게 됐지만,  중국어에 관심 있는 수강생들 사이에서 이미 문정아는 중국어의 `지존'으로 통한다.


하지만, 20년 전 그는 중국 유학 1세대 학생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그것도 중국어 전공이 아니라 중의학 전공이었다. 그가 중의학에 관심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허리를 다쳐 대소변을 받아낼 정도로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가 중의학을 전공한 분에게 치료를 받고 완치됐다. 이후, 그녀는 중의학을 공부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중국 땅으로 향했다.  유학생을 가장 먼저 괴롭힌 것은 어학이었다. 한국에서 한달 정도 중국어를 익히고 갔지만 그녀는 1년 넘게 두꺼운 사전을 옆에 끼고, 어학 연수부터 받아야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혼자 울기도 했고 사전을 집어 던지며 모든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도 했다. 


사람의 앞날은 예단할 수 없는 법,  중의학을 전공하던 그녀는 어학 쪽에 소질이 있다는 얘길 주위에서 자주 듣게 된다.  중국 유학시절 초반부터 규칙적이고 절제된 계획 아래 공부에만 전념해 온 그녀는,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왕따'로 불릴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동북 3성의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말하기대회에 나가선 연달아 준우승에 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그녀에게 중국어는 숙명처럼 다가왔다. 삶의 진로를 의학에서 어학으로 바꿨고 귀국 후에는 학원 강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첫 강사면접에서 면접관에게 내뱉은 말은 "누구보다 중국어를 잘 가르칠 자신이 있습니다" 였다.  중국어 전공자도 아닌 그녀의 말엔 무게감이 실리지 못했고 몇 번 면접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강사 자리를 얻고 나서도 고민은 있었다.  어떤 날은 수강생 한 명을 앞에 두고 강의를 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넘어야 할 산은 높고 험했다. 그럴수록 오기와 자신감으로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유학기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중국어 학습법을 터득했고,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전해줄 준비도 되어 있었지만 들어줄 학생이 없었을 뿐이다. 학원강사로서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명강사들을 벤치마킹 했다.  새내기 강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선배 강사들의 장점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란 생각에서다. 매일 서점에 가서는 과목에 상관없이 유명 강사들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명강사들의 강의를 직접 가서 들어보며 차츰 독자적인 교수법, 강의법을 계발했다. 


새내기 강사 시절에는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본적도 없었다.  학생들에게 좀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욕심에 휴일도 없이 강의 준비로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는 새벽 출강해 밤까지 이어진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거의 하루 종일 학원에 머물렀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지 1년여가 지나자, 그녀는 학원으로부터 우수교수상을 받았고 어느새 HSK(한어수평고시)대표 강사의 타이틀을 얻었다.  중국 유학으로부터 20년, 중국어를 가르쳐온 지 13년 만에 그녀는 이제, 대한민국 최고의 HSK 강사이자, 중국어를 가장 체계적이고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보유한 자타공인 중국어 전문가로 성장했다.  청춘의 한 시절, 중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평범한 여학생이 어학이란 분야에 소질을 발견했고,  20년 후 최고의 강사이자 CEO로 성장한 비결을 담아낸 여정이 그녀의 에세이 <중국어로 승부하라!>(미래의 창, 2015)에 담겨 있었다.


이 책은 한 CEO의 성장일기이자 중국어를 갓 시작한 이들에게 하나의 인상깊은 로드맵을 제공하는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녀가 중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온 삶이 오롯이 담겨 있고, 중국어를 공부하는 방법과 마음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강의에서 문정아라는 이름은 수많은 중국어 수강생을 불러들이는 브랜드가 되었다.  학원이란 비좁은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고자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지 얼마 후 명실상부한 온라인 중국어 교육 1위 사이트로 급성장했다.  놀라운 성장를 이뤄낸 문정아에겐 소박하지만 여전히 담대한 꿈이 있다.  `문정아의 약속' 두가지다. 


첫째, `중국어 비싸서 못 배우겠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문정아의 온라인 사이트에선 44만 8천원에 중국어를 무한정 배울 수 있는 평생수강권을 보급하고 있다.  초급부터 고급까지, 회화와 HSK, 비즈니스 중국어에서 작문까지 중국어에 대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원스톱 서비스다. 여기에 시중에서 20만원대에 달하는 윈도우 태블릿까지 무상으로 제공한다.  여러모로 남는게 없는 장사겠단 생각이 들지만 문정아의 생각은 다르다. " 내가 가르치는 누군가가 내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와 주고 그 결과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이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를 통해 중국어에 눈뜨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내 기쁨도 커진다." 198쪽


둘째,`누구나, 마음껏, 제대로 중국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고 값싸게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정아의 약속이다.  예전, 학원강사로 있을 때 수강료 낼 돈이 없어 학원을 그만둔다는 학생을 붙들고, 문정아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돈 안 내도 되니까 그냥 들어, 학원에는 모르게 해줄게'  학원측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배운다는 것을 자신의 제자들에겐 없는 얘기로 만들고 싶었다. 요즘도 그녀는 자신의 특강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강의료에 상관없이 어디든 달려간다.  돈이 있는 곳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는 곳이 문정아가 필요한 곳이란 생각에서다.


왕따 유학생, 한국에선 학위 인정이 불가능한 `중의학 전공자'로서 그녀는 20대 청춘의 시절을 낯선 땅에서 보냈다.  20년을 훌쩍 넘겨,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국어 강사, 잘 팔리는 중국어 교육 동영상을 제공하는 CEO로 성장했다.  더이상 호시절이 없다 생각해도 좋을 지금, 그녀는 허망과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단다.  `이게 다가 아니다'란 생각에서다. 국내 유수의 대학 교수님들을 은사로 동양철학(논어,맹자,대학,중용)을 깊게 공부하고서 생각을 달리 먹었다.  `최고가 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란 깨달음이었다. 문정아 중국어연구소의 사훈은 맹자가 말한 선의후리(先義後利)다. "먼저 의를 베풀고 난 후에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족과 이웃, 수강생과 직원들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잊지 않는다. 그녀의 삶의 모토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사람으로서 먼저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것이다.  그녀는 간절히 꿈꾸면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살면서 여러번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이 중국어만을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숨은 능력을 찾아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런 조력자가 되길 소망한다.  그녀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며, 문정아가 했냈다면 여러분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누구에게나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다는 용기의 말을 건네며 이 책을 끝마친다.  


최고의 자리에 선 사람은 흔하다.  하지만, 그들에겐 저마다 모방할 수 없는 스토리가 있다.  그 스토리엔 그의 인생이 있고, 그의 성공이 있다.  누구도 같은 방법으로 성공할 순 없다.  이미 정상으로 난 길을 되밟는 것은 감동이 없고, 생기가 없다.  히말라야 최고의 알피니스트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자다.  그가 오직 역사에 남는다.  성공을 원한다면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어 최고 강사, 소박하지만 따뜻한 꿈을 꾸는 여자, 문정아는 지금도 인생이란 정상에 새로운 루트를 닦고 있는 사람 같다.  그녀의 꿈은 따뜻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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