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 - 싸우는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거대한 생애와 사상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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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를 쓰고 시를 짓고 제도 언론인은 아니라지만 반평생 뛰어난 논설로 언론계를 평정하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농부였으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리고 성직자는 아니었으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정치를 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정치인보다 치열하게 당대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인물.  그 모두 이면서 그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람.  철학자 김상봉이 말하길 500년 훗날 20세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과 철학자로서 이름을 올릴 단 한 사람이라 표현된 철인. 그러나 자신이 `바보새'로 기꺼이 불리기를 원했으며, "시골 농촌의 시골사람, 두메 사람"이라 하여 `들사람' `야인'을 자처했던 이.  그가 함석헌이다.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고 청년 시절, 함석헌과 교류하며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자, 지금 여러 신문에 날카로운 칼럼을 게재하고 있는 언론인 김삼웅은 함석헌의 일생을 `저항'이란 관점에서 되돌아보길 원했다. 하여, 그 평전의 제목에도 `저항인'이란 수식어가 들어가 있다.  함석헌은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요, 저항이 곧 인간'이라고 썼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하는 것이고, 나는 나다하는 자아의식은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라 생각했다.  그의 여든 여덟 전 생을 되돌아보면 헛말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어떻게 `야인',  `저항'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규정했을까. `야인'이자 `들사람'이란 말 자체가 자신이 권력과 부로부터 인연없는 민중의 일부분이란 자백과 상통한다. 1901년 평안도 용천 바닷가에서 상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땅 용천은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곳으로 조상 가운데 벼슬한 사람이 없었다. 함석헌은 인물이 출중하고 머리가 비상했다.  훗날 동경고등사범을 나와 출세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신을 키워준, 오산학교로 돌아가 교사로 있으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지시를 거부하며 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당대 부당한 권력의 지시에 맞서 밥줄이 걸린 교사직을 내던지는 `저항'을 실천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미 1919년 평양 고보를 다니다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일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에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반정부 전단 살포 배후 인물로 지목 돼 1개월간 소련군 사령부에 구금 당한 일도 있다.  이승만 독재, 5,16 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17 쿠데타 등 한국 현대사의 모든 순간에 그는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 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그의 독립과 자유,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모든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핍박받는 `씨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거기 등장했고, 존재했다.  그는 때로는 온 몸으로, 당대의 따라올자 없는 문장으로, 저항운동의 든든한 어른 노릇을 했다.


21세기 독자인 나는 함석헌 이름 석자를 최근에야 알게 됐다. 물론 그의 이름을 접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의 존재도 풍문으로 들은 바 있다.  우리 사회가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잊고 있는 것은 손실이자 아이러니 아닐까.  그가 지병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시점은 상징적이다. 1987년 6월 29일.  한국민주화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 6.29 선언이 있던 날이다.  입원하기 전날까지 여든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투쟁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의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성서'를 역사해석의 도구로 사용하며 한민족의 역사를 세계역사, 인류역사의 범주안에서 해석하고 풀이한다. 역사해석의 관점이 기성 종교나 그 어떤 역사학자의 그것과도 달랐다.  그의 종교관은 기독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구사하는 문장은 가장 평이하면서도 토속적이었고 힘이 있었다.  


196,70년대 한국 지성계의 중심이 된 잡지는 <사상계>였다.  `영원한 광복군'으로 박정희의 숙적이자 라이벌이었던 언론인 장준하가 창간한 이 잡지는 함석헌이란 무명의 필자를 섭외했다.  함석헌은 <사상계>에다 `5.16을 어떻게 볼까?'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등 당대 명 논설들을 발표하며 일약 <사상계> 최고의 필자로 우뚝 선다.  그는 독재와 싸우며 숱하게 감옥을 들락거렸고, 또 기성언론인들이 군사정부에 주눅들어 있을 때, 민중 독자들에게 청량감 있는 논설들을 선물했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필자로 섭외하며 최대 판매고를 올렸고 독재권력의 집중 감시와 탄압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함석헌은 소크라테스의 독백, 세례 요한의 석청, 모세의 시나이 산, 디오게네스의 통나무, 간디의 아힘사와 진리파지, 휘트먼의 <풀잎> 소로의 월든 호숫가의 통나무집, 매월당 김시습의 `미친 오줌', 토머스 페인의 <상식>, 성삼문의 의기를 높이 사고 좋아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보다는 야인, 지배보다는 자유를 택한 들사람들이다.  시대의 아웃사이더이다.   당대의 패배자이지만 영원한 승자이다. 이들은 속박이나 규제의 생활이 아니라 자유로운, 해방된 삶을 추구하며, 이것을 신념과 생활에 일치시킨 사람들이다.  함석헌도 이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천의무봉하게 살았다.  일제에 필봉을 들이대고, 소련군대에 달려들고, 이승만의 처를 `경무대 여유'라고 질타했다. 박정희 쿠데타의 새벽에 모두 침묵할 때 5.16을 세차게 비판하고, 전두환을 줄기차게 질타했다.  그리고 바벨탑으로 둘러싸인 기독교계에 맹타를 날렸다.  어용 지식인, 곡필 언론인들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국민을 일깨웠다. "  김삼웅, <저항인 함석헌> 388쪽


저자인 김삼웅은 에필로그에서 "함석헌은 누구냐? 그의 사상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압축이 쉽지 않다" 고백한다.  그의 삶과 사상을 400여 페이지에 걸쳐 소개한 이후, 토로한 정직한 넋두리였다. 그의 이름에 내걸린 무게를 조금 알게된 나로서는 더욱 함석헌 평전을 읽고나서도, 그 삶과 사상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잠시 절판 상태인 <함석헌 전집>은 30권에 이른다. 여든 여덟 일생, 잠시도 쉬지 않고 배우고 읽고, 쓰고 행동하고 싸운 여정이 30여권의 전집으로 남겨졌다.   함석헌이 누구인가?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전집 30권은 읽고나서 말할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제자인 김삼웅이 정성을 기울여 쓴 평전을 읽은 독자로서 오늘의 독자가 함석헌을 왜 주목해야 하는지 정도는 몇가지 주장할 수 있겠다. 


첫째, 함석헌은 자신을 `바보새' `들사람' `씨알'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20세기 민족의 교사요, 한국의 대표 지성이었다. "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로 시작하는 시를 쓴 이가 바로 함석헌이었다.  일제 시대, 유학을 다녀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그의 별명은 `함 도깨비'였다. 질문하면 도무지 모르는게 없다 해서,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시인이었고 역사가였으며, 종교인이었고, 언론인이자, 저술가였다.  그 모든 능력의 총합이 바로 그였다.  역사서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그는 한국 역사를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한민족은 백의민족, 동방예의지국처럼 사람들만은 좋을지 모르나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고 팔 줄 모르며, 자기를 파지 않기 때문에 자존심도 없고, 자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도 없다"고 통절하게 분석한다.  한국 사람을 이처럼 낱낱이 해부한 한국인이 누구요, 역사가가 누구였던가. 


"정치라면 구차한 외교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는 일로 알았고, 거기서 사대주의가 생겼고 지금까지도 큰 나라에 의지하며 눈칫밥을 먹고 사는게 일상사다. 백년을 앞둔 건축물이 없고, 집 중에서 제일 큰 것은 겨우 경복궁이요, 돌로 만든 것 중에 제일은 은진미륵 정도다. 직업을 구한다면 입에 풀칠하는 것이 목적이니 대를 잇는 명문이 없고, 사업을 한다면 내일로 보수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中


둘째, 그는 `진짜' 기독교인이자 종교인이었다. 가짜와 진짜의 기준이 무엇이냐, 고 말할 때 오늘날 종교인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종교만이 옳고 타종교는 모두 이단이자 배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흔한 오늘날 종교인들의 수사요, 신앙 아닌가.  IS가 왜 생겼나?  미국과 서방이 10여 년 전, 이라크를 침략하며 민간인들을 향해 융단 폭격을 감행하면서부터 싹 텄다. 불교용어로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오늘날 세계에서 종교의 이질성은 살육의 근거가 된다.  그것이 종교의 본래 모습인가.  함석헌은 일본 유학시절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훗날 퀘이커교로 전향하면서 교회나 성당 같은 건축물과 예배와 같은 형식을 거부하는 신앙을 고수한다. 기독교계에선 그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그는 <사상계>에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라는 논설을 싣는 등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 정의에 눈감는 이율배반적 모습에 적극 항거하며 참종교인의 용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개정판 서문 中


셋째, 그는 `민족의 교사'였다.  그는 민중을 `씨알'로 표현했다. 나서서 발언해야 할 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사상계>에 발표한 그의 논설들은 당대 독자들을 사로잡는 논리와 용기로 쓰여졌다. 언론인 故 송건호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며, 시대 이면을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고 썼다.   함석헌은 당대 부조리한 권력과 잠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지만, 일생 학문에 정진했다.  "늘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며, 행동" 했다.  그가 <사상계>의 독자들을 놀라케 한 논설들을 발표한 시기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나이들수록 그의 사유와 독서의 폭은 넓고 깊어졌으며, 이를 통해 `민족의 교사'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백했듯이, 책 2 권을 섭렵한 나로선 함석헌을 잘 소개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싸우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거대한 생애와 사상"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의 지성을 발견한 기쁨만큼은 감출 수 없다.  저자 김삼웅은 그가 가진 무게감을 "퇴계학, 율곡학, 남명학, 다산학의 명백을 잇는 `함석헌학, 즉 씨알학'이라 표현한다.   당대 최고 문장의 소유자였고,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한 학자였고, 소박한 농부를 자처했으나, 총칼을 내세운 군부정권에 굴하지 않고 항거한 저항인이었던 사람.  그도 인간으로서 완벽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만한 인품과 지식과 정의로움을 가진 지식인이 몇이나 될까.  `곡학아세'에 능통한 세태에 그는 분명 모든 지식인의 영원한 `인간 문화재'다.   `바보새' `들사람' `씨알' 그리고 민족의 교사, 함석헌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부족하다.   그는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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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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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작가로서 갈고 다듬어질 뿐이다.  하지만 갈고 닦는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진 못한다.  일생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인가.  양심처럼 삶이란 대명제 아래 쉽게 내팽개쳐지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양심과 타협한다.   왜냐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삶의 경로를 바꿀 결단과 행동을 불러와야만 하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양심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 때문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위선자에 머문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조지 오웰은 정확히 그 반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던 제국주의 시대에 인도에서 태어나, 훗날 `제국 경찰'이 된 그가 생계가 보장된 식민지 경찰직을 포기하고 자발적인 부랑자가 된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가 제국경찰에 사표를 쓴 것은 압제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작가를 꿈꾸어서였다.   평생 그는 작가로서 세상 모든 피압제자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 편에 서서 글을 썼고, `민주적 사회주의'로 표상되는 이념을 드러내는 정치적 글쓰기에 매진한다.


마흔 여섯 길지 않은 인생 속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진 못했지만, 그가 오늘날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생동하는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해준 작가가 그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은 사회와 정치 비판적인 소설인 <동물농장>과 <1984>와 같은 작품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사실 그는 현실과 뗄 수 없는 기록문학인 `르포르타주'에 능통한 작가였다.  오늘날 그가 써낸 르포르타주는 심지어 역사가들이 참고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닐 정도로 뛰어난 기록문학의 대명사로 평가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1936년 1월 좌파 출판사인 `레프트북클럽'의 청탁으로 잉글랜드 북부 탄광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노동을 취재 고발한 르포물인 <위건부두로 가는 길>(1937)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청탁한 좌파출판사의 의도를 조금 엇나가고 만다.  당대 좌파인 사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원고를 기대했던 출판사의 의도와 다르게 오웰은 책의 2부에서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이란 주제를 내걸고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민중들과 융합하지 못하는 현실, 민중들이 사회주의가 아닌 파시즘과 공산주의로 전도되는 이유를 사회주의 내부의 적들 때문이라고 규정짓는다.  그것과 더불어,  제 1부에서 다루고 있는 `탄광지대 노동자들의 밑바닥 생활'에서 그가 묘사한 1930년대 영국 북부 탄광촌 광부들의 생활상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입체감과 질감있는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적합하다.  이미, 제국경찰에 사표를 내고 자발적인 부랑자 생활을 겪었고 그 기억을 토대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써낸적이 있는 그였다. 


흔히 `막장'으로 불리는 지하 수백미터의 노동 현장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아무런 보호구도 갖추지 못한 채,  채탄 먼지와 지하의 비좁은 협로에서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하고, 비계 바른 빵 한 덩이와 차가운 차 한 병을 점심으로 떼우며 광부들은 일한다.  그러나, 8시간 노동이 다가 아니다.  탄층이 자리잡은 곳까지 출근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왕복 수킬로미터의 지하공간까지 탁한 공기를 마시며 비좁은 갱도를 따라, 굽은 자세로 때론 무릎으로 기며 출근하는 시간은 8시간 노동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웰은 오늘날 석유의 가치를 지녔을 당대, 석탄을 캐내기 위해, 광부들이 얼마나 빈약한 급여를 받고 이 지옥같은 노동을 견디어 내어야 하는지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고상한 세계를 떠바치고 있는 지상 위의 모든 인간들은 저 지하 노동자의 노고에 빚지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당신도 나도 `타임스 문예 부록'의 편집인도, 동성애자 시인도 캔터베리 대주교도 아무개 동지도,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까지 시커메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찬 상태에서 강철 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    50쪽, <위건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오웰이 묘사하고 있는 1930년대 영국은 실업이 만연하고, 하층 노동자들의 굶주림이 일상화된 시대였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영국 노동 계층의 전경을 보면 유럽 사회가 2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전운이 감도는 정황들을 포착하게 된다.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서도 최상위 계급을 제외한 부르주아 지식층, 사무 노동자, 육체 노동자 계급이 모두 형편없는 노동 소득으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사회,경제적 취약성은 혁명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오웰이 지극히 혐오했던 사악한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빠져들게 했다. 더군다나, 고통받고 있는 대중은 영국의 고질적인 계급 차별적 시선으로 서로를 혐오하는 상황이었다.  최상위 계층을 제외한 모두가 빈곤한 노동계층이었지만, 광부와 같은 최하위 노동계층을 제외한 이들은 자신들이 영국의 전통적인 중산층이란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체제에 약탈당하고 시달리면서도' 노동 계급은 서로를 불신했고, 한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위기가 닥치면 거의 모두가 압제자의 편에 선다고 오웰은 비판하고 있다. 또, 오웰은 당대 사회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있는 원인을 분석 한다.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라는 다소 신화적인 인물을 강요하는데, 영국적인 계급의식에 물든 대부분의 고급 노동자들은 자신의 소득이 얼마나 됐든지 간에, 자신을 `기름때 절은 블루칼라'로 여기길 꺼려한다.  오웰은 차라리 자본가나 프롤레타리아란 말은 덜 쓰고 `약탈자나 피약탈자'란 말을 더 쓰면서 노동 계급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자신이 사무 노동자든, 육체 노동자든, 소수 자본가의 약탈을 받는 피압제자란 사실을 주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면에서는 광부나 부두 노동자보다 실제로 더 열악한 수많은 사무원과 점원 중에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란 칼라 없는 옷을 입는 사람이다. 때문에 `계급투쟁' 운운하며 그들을 감동시켜보려다 질겁하게 만들어버리기만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앞으로 큰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그들은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가르는 선이 정확히 어디부터인지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본질을 고수하는 게 중요한데, 여기서 핵심은 수입이 적고 불안정한 모든 사람은 한 배를 탄 이들이며 한편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304-305쪽


오웰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급 상류 중산층'에 속했던 사람이다. 더군다나 영국 최고의 명문 사립인 이튼 출신이었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고급 노동자들이 전통적인 계급의식에 포위돼,  하층 노동자와 거리를 두려 했던 영국 사회에서 오웰은 어떻게 모든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작가로 살겠다고 결심했던 걸까.  그 이유를 이 책 2부의 자전적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1927년 오웰은 휴가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온 직후, 제국 경찰직에 사표를 쓸 것을 결심해 버린다. 제국 경찰로서 5년간 일하면서, 그는 압제의 일원으로 악행을 저질렀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번민 끝에, 그는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그르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영국 노동계급에게로 마음이 향한 것은 장소만 바뀌었을 뿐, 노동자의 처지가 식민지인들의 처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오웰은 작가가 되어 일생 피압제자인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하고, 지배층의 착취와 악행을 고발하며,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색이 분명한 글을 쓰기 위해서, 부랑자가 돼 그들과 어울렸고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향해 국경을 넘었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쓰기 위해서, 수개월간 탄광노동자의 집에 하숙하며 지하 수백미터의 탄광지대에 몸을 던져 취재활동을 벌였다.


조지 오웰은 모름지기 작가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 첫째는 필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모두가 열쇠수리공이 되지는 않는다. 그들 가운데 남의 집 문을 따는 도둑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양심, 소위 개념이라고 이름붙여질 수 있는 작가적 관점이 중요한 이유가 그런게 아닐까.  세상의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 지식인의 우월성이 아니라 낮고 소외받는 자의 곁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용기와 소신은 어쩌면 한갓 기술에 지나지 않는 필력보다 더 작가에게 더 필요한게 아닐까.  오늘날 한국 소설과 한국의 작가들이 맥을 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수많은 필력있는 작가들이 조지 오웰과 같이 낮은 곳에서 낮은 이들의 삶에 동화돼, 그들의 삶을 담아내는 르포르타주를 써 봤다는 이야길 들어보지 못했다.  치열한 글쓰기는 치열한 삶 안에서 발휘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소재 또한 핍박받는 사람들 안에서 훨씬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은 작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오늘의 독자들이 여전히 그를 읽는 이유 아니겠는가.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글이 장식적인 기교나 허튼소리에 매몰돼 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되었을 때'라고 일갈한다. 조지 오웰은 일생 책상 틈바구니에서 공상적인 상상력으로만 글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로서 이념성을 보여주는 오웰의 정치적 목적성이 지극한 르포르타주다.  그는 이 작품속에서, 당대 노동자들의 전망없는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지식인과 모든 노동자가 분열하고 증오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세상의 험지와 음지에서 정치,사회적 식견을 갖고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자로서, 오웰은 모든 피압자제의 편에 서기를 주저치 않았던 진정한 작가정신의 소유자였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글쟁이의 자부심을 지켜준 작가로서 우린 오래도록 조지 오웰이란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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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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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했다.  순수 소설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서 였을까.  소설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가 한강은 이름 석자만 오랜 시간 들어온 작가다.  그의 아버지가 한승원이란 사실을 제외하곤 한강은 오랜 소설 독자인 나와 인연이 없는 작가였다.  소설 책 띠지에 작가의 사진이 이렇게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는 소설 책은 거의 없다.  그런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이 소설가의 관상은 도움이 되었다.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뜨고 있는 눈,  세상을 가련하게 응시하는 저 눈빛이야말로 그의 작품 `채식주의자'에 대한 해설 그 자체였다.  그의 눈빛은 이 작가의 지루한 듯 하면서도 섬세하고 가독성이 없는 듯 하면서도 철학적인 문체까지도 설명해주었다. 

모두가 육식을 즐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리의 음식점은 하나같이 고깃집 위주로 정리된지 오래다.  고기의 종류도 다양하다. 소,돼지,오리, 닭, 생선까지.  모두가 육식을 좋아하고 당연시 한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단백질이란 영양소는 가장 중요하다. 그 단백질을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는 게 `고기'다.  가끔 채식바람이 불긴하지만 대세인 육식을 거스를 순 없다.  육식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전사들이 `득템'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필수 `아이템'인 것이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주부이자 아내인 `영혜'는 냉장고 속 모든 고기를 내다버리는 것으로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다.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과정이 차라리 건강 때문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TV 건강 예능에 혹 한 것도 아니요, 건강상의 문제로 육식을 기피한 것도 아니다. 주인공이 채식의 길로 들어선 것은 `꿈'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모호한 답변은 마치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쏴 죽인 죄로 검사의 신문을 받는 가운데 한 답변을 연상 시킨다. "태양 빛 때문이었소"  그런 답변은 심오해서 읽는 이를 긴장시키지만 이성의 이해 범주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린다.  그 이후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언행은 정상인에게 이해불가의 영역인 셈이다.  소설 <채식주의자>와 <이방인>의 주인공은 이러한 점 뿐만 아니라 대단히 과묵한 점에서도 동격이다.

<채식주의자>속 영혜는 주인공임에도 대사가 거의 없다. 그는 소설 속에서 남편, 제부, 언니의 시선에서 이해되고, 평가 된다. `영혜'라는 주인공은 철저히 신비주의의 가림막을 치고,  답답할 정도로 그 정체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이유가 지나친 주인공에 대한 `신비주의 전략'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마치 영혜에 대한 작가의 묘사를 보면 그녀가 17살의 사춘기 여고생 같다. 왜 작가는 영혜라는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간 것일까.  영혜의 육식에 대한 거부반응은 거의 절대적이다. 평범한 이에게 찾아온 신내림처럼 급작스런 변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꿈'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궁색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61쪽, 한강 <채식주의자> 

과묵한 주인공에게 가끔 작가는 이런 중요한 대사를 발설하게 한다. 그의 이어진 대사 속에서는 어린 시절, 자신을 문 죄로 집에서 키우던 개 한 마리가 아버지의 폭력속에서 죽어간 과정과 결국 보신탕 재료로 사용되고 만 최후에 대한 경험도 들어 있다. `영혜'는 자신을 구성하는 육체가 다른 생명에 대한 `파괴와 폭력의 결과물'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육식을 기피하고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이런 `인류사적이며 철학적인 사색' 때문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을 거부하는 한 평범한 여성을 통해서 인간 세계의 폭력과 약육강식을 에둘러 비판하려 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소설인 셈이다. 여기가 끝은 아니다. 

`영혜'는 육식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세계,  평균치의 인간으로서 살기를 바라는, 폭력을 긍정하고 독려하며 끝없이 자신과 동질화시키려는 세상에서 `탈주'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이 소설속에서 영혜가 나무를 동경하며, 그것을 닮아가고자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나무처럼 물구나무 서기를 즐기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햇볕 속에서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누가 보아도 정신병원의 일원이라 판정하기 알맞은 행동으로 형상화 된다.  나무나 식물은 인간의 음식물을 전혀 먹지 않는다.  결국 소설의 끝 부분에 가면, 영혜는 고기 뿐만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모든 음식물을 거부하며 앙상하게 죽어가고 있다.  결국 그녀는 인간이 아닌 나무가 되고 식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그 무엇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존재, 오히려 생명을 키우며 응원하는 그러니까 여인의 젖가슴 같은 존재 말이다.

" 내가 믿는 건 내 가슴 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난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부러 고기맛을 보러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오늘 고기 반찬을 좀 올려보라고 아내를 채근해 본적도 없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고기를 먹을 기회는 차고 넘친다.  고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고기를 함께 뜯고, 씹는 일이 이 문명,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이 된 셈이다.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폭력적이 되었다고 느껴본적은 없다. 그냥 음식일 뿐이니까. 보신탕은 기분상 먹지 않는다. 집에 애견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내 기억과 함께 했던 수많은 강아지들, `똥개'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시적인 상상력으로 육식을 인간의 폭력성을 키우는 에너지로 여기는 듯하다.  작가 한강은 시로 문학에 입문한 사람이다. 

<채식주의자>는 뜬금없이 맛있는 고기에 시비를 건 작품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고기를 다른 상징물들로 교환한다면 뜻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에서 가장 육식을 많이 하고 즐기는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인종인 것은 맞다.  그들은 실제로 지구의 도시들을 수백번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코스모스>를 지은 세계적인 과학자 칼 세이건은 지구 생명체의 운명이 몇 몇 나라의 지도자들 판단에 맡겨져 있는 현대 세계의 아이러니를 꼬집은 적이 있다.  역사는 언제든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를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니까.

<채식주의자>는 지루한 전개와 특별하지 않는 스토리, 지나친 결벽주의로 묘사된 주인공 때문에 가독성이 없고 흥미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소설 책 한 권을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하는 상황은 아이러니다. 작가의 골수 팬이 아니고서야 인내심에 유지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소설(이야기)의 본질은 일단 `뒷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자체의 동력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그것을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게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난 한강의 이 작품이 썩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강은 최근 인터뷰에서 "얼른 방으로 도피해 지금 내 작품에 몰두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부럽고 사랑스럽다.  그럼에도, <채식주의자>가 깊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이유는 뭘까?  20,30대 때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만 찾아다닌적이 있다.  그 당시의 독서는 알 듯 모를 듯한 언어에 열광했다.  아마 그 시절에 이런 작품을 대했다면 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많은 때를 몸과 마음에 붙이고 산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본질은 오염이다.  그래서, 에둘러 말하는 소설은 답답하다.  상징적으로 폭력을 논해서 세상이 변할까.  `채식주의자'로의 전향은 세상 그 무엇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와 공포를 이야기해도 좋지 않을까. 남북이 1950년대의 막장 대치의 상태로 퇴행하는 시기,  매일 핵 미사일을 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북한의 어린 지도자를 보는 일이 우리 국민의 일상사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9살 어린 노동자는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시스템과 이 사회 이익구조의 희생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언제나 반복되는 이 세계의 실제하는 폭력과 공포다.   이 잔인한 공포물의 한 복판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채식주의자>의 가냘픈 여주인공의 고기에 대한 `생떼'는 아니, 그 상징과 은유는 차라리 거추장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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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영원한 자유란 무엇인가? 이 시대의 스승 성철스님이 들려주는 감로법문
성철 지음 / 장경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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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까다롭고 예민하며 모든 종교에 비판적이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유일하게 19세기 유럽인에게 생소했던 불교를 극찬했던 적이 있다.  무신론자였던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무신론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를 대체해, 불교가 유럽을 지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기를 은근 기대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평생 연구했던 철학은 결국 불교에서 이미 수천년 전에 다뤘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한국은 불교와 뗄 수 없는 나라다.   한반도에서 기독교의 일천한 역사에 비해,  한민족의 생성과 함께한 종교가 있다면 정치철학에 가까운 유교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종교가 불교다. 


성철은 지난 1980~90년대, 조계종의 최고 어른이자 지도자인 종정의 자리에 두번이나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종정에 취임한 이후 보여준 수도승의 자세는 자리나 명예를 탐하는 승려는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일생 속세와 관계를 끊고 구도에만 몰입하는 승려로 더 유명했다.  파계사에서 행한 8년간의 장좌불와(눕지 않고 좌선함)와 조계사 종정에 추대되고도, 합천 해인사를 떠나지 않고 구도를 계속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공부하며 수행하는 선승으로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한번 깨치고 나서 공부할 것이 남아 있다면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며 불교계 학승들 사이에 논쟁을 일으켰다. 


그가 1968년 대학생 수련법회에서 설법한 이야기를 엮은 이 책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통합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불교의 가르침과 진수를 무척 분석적인 태도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성철은 모든 종교 가운데 오직 불교만이 현대 과학의 발전 아래에서도 의심받지 않는 확고한 종교로 해가 갈수록 증명되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설과 불교의 특색인 무신론에 기반한 불교 사상의 우월성을 1960년대까지의 세계적 언론보도와 출판물을 인용하며 증거하려 애쓴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빠르게 세계로 전파되고 검증되는 시대가 아니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윤회가 세계인의 다양한 체험을 통해, 거의 기정 사실화되고 있다고 표현되는 점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한다. 


성철이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회피하며 불교적 세계관으로 돌아나오는 모습을 보자.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에서 믿음의 근간이 되는 논리였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왔다.  성철에 따르면, 그것은 현대에 와서 붕괴되고 만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종교에 회의를 가진 이들이 생겨나고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이제 사람들은 무턱대고 믿으라는 성 어거스틴의 불합리한 요구에 반기를 들고 말았다.  신자들의 변화에 기독교나 천주교는 교리를 수정하거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논리를 개발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기독교의 발원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은 다 이런 사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철은 불교의 우월성과 흔들리지 않는 불교적 진리를 나열한다. 불교 또한 매우 공상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있다. 서방정토나 극락과 지옥이란 개념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설정한 이러한 공간은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주장한다.  불교의 근본 이념은 인간은 자기개발이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무한한 자기 개발과 수행을 통해, 모두가 부처(절대적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은 존재에게 현실 그대로 절대이고 극락 세계이며, 중생 모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가 아닌 사람이 없음을 깨달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에너지와 질량이 불변한다는 등가원리를 불교의 불생불명, 부증불감의 이론과 등치시킨다. 


이런 주장을 통해 성철은 3천년 전에 부처가 진리를 깨쳐서 드넓은 우주에 대해 설해 놓은 이야기가 오늘날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성철의 논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오늘날 불교가 현대물리학과 통하는 점이 있고, 과학자들이 불교를 가장 선호한다는 점도 사실이다.  성철은 불교의 근본 이상인 생사해탈에 이르는 길에 세가지 장애를 지적한다.  첫째가 돈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돈이 눈에 보이면 공부는 그만이다.  세상이 시끄럽고 종단이 수난을 겪는 것도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다 돈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돈 때문에 승려가 타락하고 돈 때문에 출가자가 썩고 있다고 자책한다. 그러면서 `참으로 돈을 독사보다 무서워하고 비상보다 겁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여자, 혹은 남자 즉 이성이다. 도를 성취하려면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 누군가 이렇게 따져 물었다. " 부처님은 여자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항상 여자를 경계하라고 하시는고?"  성철은 이렇게 답한다. " 원수가 져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여자를 멀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한다는 말일 뿐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명예다.  돈이나 여자까지도 이겨낸 큰 스님들에겐 허세가 있는데, 자신이 이토록 대단하고 장한 사람이다, 큰 스님이다, 도인이다는 자부심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일생 성철이 초라한 행색으로 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하는 수도승으로 산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까.  성철을 만나기 위해서 불자들은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고 전해진다. 역설적으로 삼천배를 땀흘려 행한 이들은 성철을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삼천배를 하면서 굳이 스님을 만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씩의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 도의 길은 날로 덜어가고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 간다, 고 했습니다. 참으로 깨치는 길은 한 생각 덜어서 자꾸자꾸 덜어 나아가야 하고 학문을 하려면 자꾸자꾸 배워 나아가야 됩니다. 도와 학은 정반대의 처지에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언설을 다 버리고 오직 마음을 한 곳에 모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으로써 성불하였지 이론과 문자를 배워서 성불하였다는 소리는 없습니다."  174쪽, <영원한 자유>


성철의 법어집은 명쾌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선물하는 책이다.  불교의 이론을 군더더기 없는 해설과 과학적 사례와 증거들을 통해 강화하고 증명하려 애쓴 점은 불교의 가르침에 직접 닿을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하지만,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에게 확신에 찬 윤회의 증거들을 나열하는 것이나 타 종교에 대한 불교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점은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하지만, 성철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것은 그가 종교인으로서 살았던 담박한 삶에 있다고 믿는다.  어떤 종교든 간에 종교는 마음을 닦는 일이다. 성철은 학승이자 수도승으로서 일생 구도적 삶을 멈추지 않았다.  돈과 여자, 명예 그 무엇도 탐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종교를 떠나서, 마음을 닦아 행복과 불멸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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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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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서민 교수가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자칭 `글쓰기 지옥훈련 10년'을 채우고 하산한 그가 나름 터득한 `글쓰기 무공'을 담아낸 책이다.  칼럼을 즐겨 읽었던 독자이자 그가 어떻게 글쓰기 수련을 해 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반갑다. 나는 서민의 글쓰기 스타일을 좋아한다.  의사, 교수, 예능인, 칼럼리스트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능력자지만 언제나 솔직하고 겸손한 그의 태도는 마음에 든다. 저런 정도의 스펙을 가진 유명인이면 우리 사회에서 목에 힘깨나 들어가기 마련인데, 서민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름처럼 친근한 `서민'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지나치게 솔직한게 흠일 정도로 그간 인터뷰나 책을 통해, 자신의 컴플렉스와 인생사를 소소히 드러내논 바 있다.


그렇다고 그가 가벼운 사람은 아니다.  서울대 의대 출신에다, 대학교수로서 학생들도 열심히 가르치고 외국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될 정도로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성실함과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중과 유리되지 않는 대학교수다. 대학 교수중에서 서민처럼 예능에 나와 사람들을 웃기며,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쓰고 이웃들과 거리낌 없이 소통하며,  당대 권력의 치부를 돌려까는 특유의 칼럼을 쓰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서민은 `알라딘 서재'에서 유명한 서평가 `로쟈'를 앞지르고 서재 리스트 1위에 오른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자신의 글쓰기가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는 교수도 없다.  교수는 그냥 있어도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기 마련인데 말이다. 


서민은 왜 그렇게 글쓰기에 집착하게 됐는가.  특유의 솔직함이 묻어나는 그의 책 <서민적 글쓰기>(생각정원,2016년)에는 그가 글쓰기에 집착하게 된 인생사가 드러나 있다.  `안 생겼다'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공부와 유머로 극복하고자 했고, 이런 인생사의 전략은 잘 들어맞았다.  의대에 들어가서는 자신보다 더 `안 생긴' 의대생들을 만나고서 동병상련의 공감을 느꼈다고 회상하는 부분에선 역시 서민다운 유머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서민이 글쓰기에 빠져들게 된 것이 외모 때문이라고 하는 고백은 지나친 비약 같다.  그는 본래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지식인과 교양인으로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욕망인 것이다.


서민 교수는 우리 나라 출판물 가운데 교수집단이 써 낸 대중교양물이 지나치게 빈약한 것은 교수들이 글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맞는 말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인 장하준이 써낸 경제학 서적들을 보라. 그가 써낸 책들 대부분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가 뭔가.  장하준의 글은 쉽고 재미있다.  그간 독자들은 경제학에 이런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지 장하준의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한국의 경제학 교수들이 장하준보다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다.  장하준 만큼 글을 잘 쓰지 못할 뿐이다.  글쓰기가 한 사람의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치부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글쓰기는 전문가의 필수적 재능이며, 능력이어야 한다. 


서민은 대학 시절 이후, 일간지 칼럼리스트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썼고 기회가 되면 소설, 수필집, 유머 등 가리지 않고 책을 펴냈다. 물론 그 중 제대로 성공한게 별로 없다고 그는 말한다.  서른 이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독서를 하기 시작했고 그 10년동안 물불 안가리고 글을 써내며, 글쓰기를 수련했단다.  그 결과, 그는 유명 일간지 두 군데에 칼럼을 연재할 기회를 얻었고 쓸만한 대중전문서를 집필했으며, 알라딘 서재 1위를 탈환하는 글쟁이로 성장했다.  그리고, 특유의 유머와 비유적 감각을 글쓰기에 녹여내며 `서민적 글쓰기'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10년간 노력해서 글을 잘 썼다는 것 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는 글을 잘 쓰는 다양한 노하우가 집약 돼 있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하며,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한번만 읽어보면 이해될 만큼 평범한 노하우다.  이 책이 글쓰기 책으로서 독자에게 하나의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바로 `스타일의 개발'이란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서민의 글쓰기는 분명히 매력이 넘친다.   유머가 있고, `모자란 권력자와 한심한 정치'를 돌려까는 것은 그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하지만, 누구든 서민처럼 글을 쓰려 하면 안 된다.  그런 방식은 서민의 트레이크 마크로 서민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글쓰기를 흉내내는 순간, 그것은 한낱 시시한 아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한때, 한국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흉내내는 작가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성공한 작가 누구였는가.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사실 우리나라는 글쓰기를 장려하기보다 더 멀어지게 만드는 교육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글쓰기에 관한 모든 책이 독서를 필수조건으로 꼽지만,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책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는, 아니 읽지 않을수록 더 유리해지는 시스템이니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곱 살 때부터 서른까지 책이라곤 교과서만 읽었던 내가 대학입시의 수혜자가 된 게 그 증거다."   48쪽


서민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글을 잘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렇다. 그는 글쓰기에서 지독한 노력파였다. 교수로서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마다하고 그는 지옥의 글쓰기를 수련하기 위해, 모진 고통과 인내와 실패를 감수하며 10년간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다.  더군다나 그는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남는 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공을 쌓아갔다.  그는 일간지에 칼럼을 쓰며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유머와 끼가 넘치는 칼럼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서민적 스타일'이란 글쓰기 풍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오직 서민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보적 글쓰기다.  하여, 나는 그의 글쓰기가 전혀 부럽지 않다.


내겐 나의 글쓰기 스타일이 있고, 나는 그것을 찾고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또한 10년간 서평을 써오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간 발견한 글쓰기의 노하우는 `꾸준함', 즉 `우보천리'였다.  소걸음만큼 나아가는 것, 어제보다 단 한 발자국만 나아가도 만족하는 것, 그게 나의 글쓰기 수련 방법이었다.  직장인으로서, 또 생활인으로서, 나는 최선을 다해 틈틈이 책을 읽고 한달, 한해도 거르지 않고 평균치의 책을 읽고 글을 쓰려 노력했다. 아직 난 서민처럼 `글쓰기 지옥훈련'을 끝마치고 하산할 단계는 아니다. 충분히 수련됐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간 꾸준하게 글쓰기를 연마하면서 느낀 것은 글쓰기는 배울 수 있는게 아니란 점이다. 


글쓰기가 나아지려면 글을 직접 써보아야 한다.  독서와 글쓰기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그것이다.  독서가 TV나 스마트폰 사용보다 능동적이긴 하지만, 글쓰기와 비교해선 지극히 수동적인 일이다.  책만 읽고 글을 써보지 않는다면 글쓰기는 절대로 늘지 않는다.  피아노를 잘 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부터 피아노를 연습하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고 시작이 끝의 서막이다.  글쓰기는 글을 쓰면서 배우는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찾고 그것을 연마하고 발전시킨다면 우리는 자신만의 색이 분명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리는 것"을 소망했다.  `서민적 글쓰기'가 가닿고 있는 지점이 그와 같다.  궁극적으로 내가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남을 흉내내려 하지 말고 자기의 글을 쓰자.  글쓰기, 배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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