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항인 함석헌 평전 - 싸우는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거대한 생애와 사상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역사서를 쓰고 시를 짓고 제도 언론인은 아니라지만 반평생 뛰어난 논설로 언론계를 평정하고,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농부였으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리고 성직자는 아니었으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정치를 하지 않았으나 그 어떤 정치인보다 치열하게 당대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인물. 그 모두 이면서 그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람. 철학자 김상봉이 말하길 500년 훗날 20세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과 철학자로서 이름을 올릴 단 한 사람이라 표현된 철인. 그러나 자신이 `바보새'로 기꺼이 불리기를 원했으며, "시골 농촌의 시골사람, 두메 사람"이라 하여 `들사람' `야인'을 자처했던 이. 그가 함석헌이다.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고 청년 시절, 함석헌과 교류하며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자, 지금 여러 신문에 날카로운 칼럼을 게재하고 있는 언론인 김삼웅은 함석헌의 일생을 `저항'이란 관점에서 되돌아보길 원했다. 하여, 그 평전의 제목에도 `저항인'이란 수식어가 들어가 있다. 함석헌은 `저항하는 것이 사람이요, 저항이 곧 인간'이라고 썼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하는 것이고, 나는 나다하는 자아의식은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라 생각했다. 그의 여든 여덟 전 생을 되돌아보면 헛말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어떻게 `야인', `저항'하는 인간으로 자신을 규정했을까. `야인'이자 `들사람'이란 말 자체가 자신이 권력과 부로부터 인연없는 민중의 일부분이란 자백과 상통한다. 1901년 평안도 용천 바닷가에서 상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땅 용천은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곳으로 조상 가운데 벼슬한 사람이 없었다. 함석헌은 인물이 출중하고 머리가 비상했다. 훗날 동경고등사범을 나와 출세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신을 키워준, 오산학교로 돌아가 교사로 있으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지시를 거부하며 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당대 부당한 권력의 지시에 맞서 밥줄이 걸린 교사직을 내던지는 `저항'을 실천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미 1919년 평양 고보를 다니다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일로,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에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반정부 전단 살포 배후 인물로 지목 돼 1개월간 소련군 사령부에 구금 당한 일도 있다. 이승만 독재, 5,16 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17 쿠데타 등 한국 현대사의 모든 순간에 그는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 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했다". 일제로부터 시작된 그의 독립과 자유,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모든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핍박받는 `씨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거기 등장했고, 존재했다. 그는 때로는 온 몸으로, 당대의 따라올자 없는 문장으로, 저항운동의 든든한 어른 노릇을 했다.
21세기 독자인 나는 함석헌 이름 석자를 최근에야 알게 됐다. 물론 그의 이름을 접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의 존재도 풍문으로 들은 바 있다. 우리 사회가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잊고 있는 것은 손실이자 아이러니 아닐까. 그가 지병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시점은 상징적이다. 1987년 6월 29일. 한국민주화의 중요한 변곡점이 된 6.29 선언이 있던 날이다. 입원하기 전날까지 여든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투쟁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의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성서'를 역사해석의 도구로 사용하며 한민족의 역사를 세계역사, 인류역사의 범주안에서 해석하고 풀이한다. 역사해석의 관점이 기성 종교나 그 어떤 역사학자의 그것과도 달랐다. 그의 종교관은 기독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구사하는 문장은 가장 평이하면서도 토속적이었고 힘이 있었다.
196,70년대 한국 지성계의 중심이 된 잡지는 <사상계>였다. `영원한 광복군'으로 박정희의 숙적이자 라이벌이었던 언론인 장준하가 창간한 이 잡지는 함석헌이란 무명의 필자를 섭외했다. 함석헌은 <사상계>에다 `5.16을 어떻게 볼까?' `매국외교를 반대한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등 당대 명 논설들을 발표하며 일약 <사상계> 최고의 필자로 우뚝 선다. 그는 독재와 싸우며 숱하게 감옥을 들락거렸고, 또 기성언론인들이 군사정부에 주눅들어 있을 때, 민중 독자들에게 청량감 있는 논설들을 선물했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필자로 섭외하며 최대 판매고를 올렸고 독재권력의 집중 감시와 탄압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함석헌은 소크라테스의 독백, 세례 요한의 석청, 모세의 시나이 산, 디오게네스의 통나무, 간디의 아힘사와 진리파지, 휘트먼의 <풀잎> 소로의 월든 호숫가의 통나무집, 매월당 김시습의 `미친 오줌', 토머스 페인의 <상식>, 성삼문의 의기를 높이 사고 좋아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보다는 야인, 지배보다는 자유를 택한 들사람들이다. 시대의 아웃사이더이다. 당대의 패배자이지만 영원한 승자이다. 이들은 속박이나 규제의 생활이 아니라 자유로운, 해방된 삶을 추구하며, 이것을 신념과 생활에 일치시킨 사람들이다. 함석헌도 이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천의무봉하게 살았다. 일제에 필봉을 들이대고, 소련군대에 달려들고, 이승만의 처를 `경무대 여유'라고 질타했다. 박정희 쿠데타의 새벽에 모두 침묵할 때 5.16을 세차게 비판하고, 전두환을 줄기차게 질타했다. 그리고 바벨탑으로 둘러싸인 기독교계에 맹타를 날렸다. 어용 지식인, 곡필 언론인들에게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국민을 일깨웠다. " 김삼웅, <저항인 함석헌> 388쪽
저자인 김삼웅은 에필로그에서 "함석헌은 누구냐? 그의 사상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압축이 쉽지 않다" 고백한다. 그의 삶과 사상을 400여 페이지에 걸쳐 소개한 이후, 토로한 정직한 넋두리였다. 그의 이름에 내걸린 무게를 조금 알게된 나로서는 더욱 함석헌 평전을 읽고나서도, 그 삶과 사상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잠시 절판 상태인 <함석헌 전집>은 30권에 이른다. 여든 여덟 일생, 잠시도 쉬지 않고 배우고 읽고, 쓰고 행동하고 싸운 여정이 30여권의 전집으로 남겨졌다. 함석헌이 누구인가?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전집 30권은 읽고나서 말할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저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제자인 김삼웅이 정성을 기울여 쓴 평전을 읽은 독자로서 오늘의 독자가 함석헌을 왜 주목해야 하는지 정도는 몇가지 주장할 수 있겠다.
첫째, 함석헌은 자신을 `바보새' `들사람' `씨알'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20세기 민족의 교사요, 한국의 대표 지성이었다. "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로 시작하는 시를 쓴 이가 바로 함석헌이었다. 일제 시대, 유학을 다녀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그의 별명은 `함 도깨비'였다. 질문하면 도무지 모르는게 없다 해서,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시인이었고 역사가였으며, 종교인이었고, 언론인이자, 저술가였다. 그 모든 능력의 총합이 바로 그였다. 역사서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그는 한국 역사를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한민족은 백의민족, 동방예의지국처럼 사람들만은 좋을지 모르나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고 팔 줄 모르며, 자기를 파지 않기 때문에 자존심도 없고, 자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도 없다"고 통절하게 분석한다. 한국 사람을 이처럼 낱낱이 해부한 한국인이 누구요, 역사가가 누구였던가.
"정치라면 구차한 외교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는 일로 알았고, 거기서 사대주의가 생겼고 지금까지도 큰 나라에 의지하며 눈칫밥을 먹고 사는게 일상사다. 백년을 앞둔 건축물이 없고, 집 중에서 제일 큰 것은 겨우 경복궁이요, 돌로 만든 것 중에 제일은 은진미륵 정도다. 직업을 구한다면 입에 풀칠하는 것이 목적이니 대를 잇는 명문이 없고, 사업을 한다면 내일로 보수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中
둘째, 그는 `진짜' 기독교인이자 종교인이었다. 가짜와 진짜의 기준이 무엇이냐, 고 말할 때 오늘날 종교인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종교만이 옳고 타종교는 모두 이단이자 배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흔한 오늘날 종교인들의 수사요, 신앙 아닌가. IS가 왜 생겼나? 미국과 서방이 10여 년 전, 이라크를 침략하며 민간인들을 향해 융단 폭격을 감행하면서부터 싹 텄다. 불교용어로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오늘날 세계에서 종교의 이질성은 살육의 근거가 된다. 그것이 종교의 본래 모습인가. 함석헌은 일본 유학시절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훗날 퀘이커교로 전향하면서 교회나 성당 같은 건축물과 예배와 같은 형식을 거부하는 신앙을 고수한다. 기독교계에선 그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그는 <사상계>에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라는 논설을 싣는 등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 정의에 눈감는 이율배반적 모습에 적극 항거하며 참종교인의 용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개정판 서문 中
셋째, 그는 `민족의 교사'였다. 그는 민중을 `씨알'로 표현했다. 나서서 발언해야 할 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사상계>에 발표한 그의 논설들은 당대 독자들을 사로잡는 논리와 용기로 쓰여졌다. 언론인 故 송건호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며, 시대 이면을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고 썼다. 함석헌은 당대 부조리한 권력과 잠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지만, 일생 학문에 정진했다. "늘 생각하고 책 읽고 글 쓰며, 행동" 했다. 그가 <사상계>의 독자들을 놀라케 한 논설들을 발표한 시기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나이들수록 그의 사유와 독서의 폭은 넓고 깊어졌으며, 이를 통해 `민족의 교사'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백했듯이, 책 2 권을 섭렵한 나로선 함석헌을 잘 소개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싸우는 평화주의자"였으며, "거대한 생애와 사상"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의 지성을 발견한 기쁨만큼은 감출 수 없다. 저자 김삼웅은 그가 가진 무게감을 "퇴계학, 율곡학, 남명학, 다산학의 명백을 잇는 `함석헌학, 즉 씨알학'이라 표현한다. 당대 최고 문장의 소유자였고,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한 학자였고, 소박한 농부를 자처했으나, 총칼을 내세운 군부정권에 굴하지 않고 항거한 저항인이었던 사람. 그도 인간으로서 완벽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만한 인품과 지식과 정의로움을 가진 지식인이 몇이나 될까. `곡학아세'에 능통한 세태에 그는 분명 모든 지식인의 영원한 `인간 문화재'다. `바보새' `들사람' `씨알' 그리고 민족의 교사, 함석헌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부족하다. 그는 누구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