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루했다.  순수 소설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서 였을까.  소설 문장 하나하나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가 한강은 이름 석자만 오랜 시간 들어온 작가다.  그의 아버지가 한승원이란 사실을 제외하곤 한강은 오랜 소설 독자인 나와 인연이 없는 작가였다.  소설 책 띠지에 작가의 사진이 이렇게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는 소설 책은 거의 없다.  그런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이 소설가의 관상은 도움이 되었다. 눈이 부신 듯 가늘게 뜨고 있는 눈,  세상을 가련하게 응시하는 저 눈빛이야말로 그의 작품 `채식주의자'에 대한 해설 그 자체였다.  그의 눈빛은 이 작가의 지루한 듯 하면서도 섬세하고 가독성이 없는 듯 하면서도 철학적인 문체까지도 설명해주었다. 

모두가 육식을 즐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리의 음식점은 하나같이 고깃집 위주로 정리된지 오래다.  고기의 종류도 다양하다. 소,돼지,오리, 닭, 생선까지.  모두가 육식을 좋아하고 당연시 한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단백질이란 영양소는 가장 중요하다. 그 단백질을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는 게 `고기'다.  가끔 채식바람이 불긴하지만 대세인 육식을 거스를 순 없다.  육식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전사들이 `득템'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필수 `아이템'인 것이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주부이자 아내인 `영혜'는 냉장고 속 모든 고기를 내다버리는 것으로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다.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과정이 차라리 건강 때문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TV 건강 예능에 혹 한 것도 아니요, 건강상의 문제로 육식을 기피한 것도 아니다. 주인공이 채식의 길로 들어선 것은 `꿈'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모호한 답변은 마치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쏴 죽인 죄로 검사의 신문을 받는 가운데 한 답변을 연상 시킨다. "태양 빛 때문이었소"  그런 답변은 심오해서 읽는 이를 긴장시키지만 이성의 이해 범주를 단숨에 뛰어넘어 버린다.  그 이후에 드러나는 주인공의 언행은 정상인에게 이해불가의 영역인 셈이다.  소설 <채식주의자>와 <이방인>의 주인공은 이러한 점 뿐만 아니라 대단히 과묵한 점에서도 동격이다.

<채식주의자>속 영혜는 주인공임에도 대사가 거의 없다. 그는 소설 속에서 남편, 제부, 언니의 시선에서 이해되고, 평가 된다. `영혜'라는 주인공은 철저히 신비주의의 가림막을 치고,  답답할 정도로 그 정체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이유가 지나친 주인공에 대한 `신비주의 전략'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마치 영혜에 대한 작가의 묘사를 보면 그녀가 17살의 사춘기 여고생 같다. 왜 작가는 영혜라는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간 것일까.  영혜의 육식에 대한 거부반응은 거의 절대적이다. 평범한 이에게 찾아온 신내림처럼 급작스런 변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꿈'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궁색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61쪽, 한강 <채식주의자> 

과묵한 주인공에게 가끔 작가는 이런 중요한 대사를 발설하게 한다. 그의 이어진 대사 속에서는 어린 시절, 자신을 문 죄로 집에서 키우던 개 한 마리가 아버지의 폭력속에서 죽어간 과정과 결국 보신탕 재료로 사용되고 만 최후에 대한 경험도 들어 있다. `영혜'는 자신을 구성하는 육체가 다른 생명에 대한 `파괴와 폭력의 결과물'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육식을 기피하고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이런 `인류사적이며 철학적인 사색' 때문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을 거부하는 한 평범한 여성을 통해서 인간 세계의 폭력과 약육강식을 에둘러 비판하려 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소설인 셈이다. 여기가 끝은 아니다. 

`영혜'는 육식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세계,  평균치의 인간으로서 살기를 바라는, 폭력을 긍정하고 독려하며 끝없이 자신과 동질화시키려는 세상에서 `탈주'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이 소설속에서 영혜가 나무를 동경하며, 그것을 닮아가고자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나무처럼 물구나무 서기를 즐기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햇볕 속에서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 누가 보아도 정신병원의 일원이라 판정하기 알맞은 행동으로 형상화 된다.  나무나 식물은 인간의 음식물을 전혀 먹지 않는다.  결국 소설의 끝 부분에 가면, 영혜는 고기 뿐만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모든 음식물을 거부하며 앙상하게 죽어가고 있다.  결국 그녀는 인간이 아닌 나무가 되고 식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그 무엇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존재, 오히려 생명을 키우며 응원하는 그러니까 여인의 젖가슴 같은 존재 말이다.

" 내가 믿는 건 내 가슴 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난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부러 고기맛을 보러 식당을 찾아다니거나 오늘 고기 반찬을 좀 올려보라고 아내를 채근해 본적도 없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고기를 먹을 기회는 차고 넘친다.  고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고기를 함께 뜯고, 씹는 일이 이 문명,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이 된 셈이다.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폭력적이 되었다고 느껴본적은 없다. 그냥 음식일 뿐이니까. 보신탕은 기분상 먹지 않는다. 집에 애견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내 기억과 함께 했던 수많은 강아지들, `똥개'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시적인 상상력으로 육식을 인간의 폭력성을 키우는 에너지로 여기는 듯하다.  작가 한강은 시로 문학에 입문한 사람이다. 

<채식주의자>는 뜬금없이 맛있는 고기에 시비를 건 작품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고기를 다른 상징물들로 교환한다면 뜻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에서 가장 육식을 많이 하고 즐기는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인종인 것은 맞다.  그들은 실제로 지구의 도시들을 수백번이라도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코스모스>를 지은 세계적인 과학자 칼 세이건은 지구 생명체의 운명이 몇 몇 나라의 지도자들 판단에 맡겨져 있는 현대 세계의 아이러니를 꼬집은 적이 있다.  역사는 언제든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를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니까.

<채식주의자>는 지루한 전개와 특별하지 않는 스토리, 지나친 결벽주의로 묘사된 주인공 때문에 가독성이 없고 흥미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소설 책 한 권을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하는 상황은 아이러니다. 작가의 골수 팬이 아니고서야 인내심에 유지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소설(이야기)의 본질은 일단 `뒷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자체의 동력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그것을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게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난 한강의 이 작품이 썩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강은 최근 인터뷰에서 "얼른 방으로 도피해 지금 내 작품에 몰두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부럽고 사랑스럽다.  그럼에도, <채식주의자>가 깊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이유는 뭘까?  20,30대 때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만 찾아다닌적이 있다.  그 당시의 독서는 알 듯 모를 듯한 언어에 열광했다.  아마 그 시절에 이런 작품을 대했다면 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많은 때를 몸과 마음에 붙이고 산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본질은 오염이다.  그래서, 에둘러 말하는 소설은 답답하다.  상징적으로 폭력을 논해서 세상이 변할까.  `채식주의자'로의 전향은 세상 그 무엇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와 공포를 이야기해도 좋지 않을까. 남북이 1950년대의 막장 대치의 상태로 퇴행하는 시기,  매일 핵 미사일을 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북한의 어린 지도자를 보는 일이 우리 국민의 일상사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9살 어린 노동자는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시스템과 이 사회 이익구조의 희생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언제나 반복되는 이 세계의 실제하는 폭력과 공포다.   이 잔인한 공포물의 한 복판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채식주의자>의 가냘픈 여주인공의 고기에 대한 `생떼'는 아니, 그 상징과 은유는 차라리 거추장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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