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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영원한 자유란 무엇인가? 이 시대의 스승 성철스님이 들려주는 감로법문
성철 지음 / 장경각 / 2014년 9월
평점 :
무척 까다롭고 예민하며 모든 종교에 비판적이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유일하게 19세기 유럽인에게 생소했던 불교를 극찬했던 적이 있다. 무신론자였던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무신론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를 대체해, 불교가 유럽을 지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기를 은근 기대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평생 연구했던 철학은 결국 불교에서 이미 수천년 전에 다뤘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한국은 불교와 뗄 수 없는 나라다. 한반도에서 기독교의 일천한 역사에 비해, 한민족의 생성과 함께한 종교가 있다면 정치철학에 가까운 유교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종교가 불교다.
성철은 지난 1980~90년대, 조계종의 최고 어른이자 지도자인 종정의 자리에 두번이나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종정에 취임한 이후 보여준 수도승의 자세는 자리나 명예를 탐하는 승려는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일생 속세와 관계를 끊고 구도에만 몰입하는 승려로 더 유명했다. 파계사에서 행한 8년간의 장좌불와(눕지 않고 좌선함)와 조계사 종정에 추대되고도, 합천 해인사를 떠나지 않고 구도를 계속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공부하며 수행하는 선승으로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한번 깨치고 나서 공부할 것이 남아 있다면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며 불교계 학승들 사이에 논쟁을 일으켰다.
그가 1968년 대학생 수련법회에서 설법한 이야기를 엮은 이 책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통합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불교의 가르침과 진수를 무척 분석적인 태도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성철은 모든 종교 가운데 오직 불교만이 현대 과학의 발전 아래에서도 의심받지 않는 확고한 종교로 해가 갈수록 증명되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설과 불교의 특색인 무신론에 기반한 불교 사상의 우월성을 1960년대까지의 세계적 언론보도와 출판물을 인용하며 증거하려 애쓴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빠르게 세계로 전파되고 검증되는 시대가 아니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윤회가 세계인의 다양한 체험을 통해, 거의 기정 사실화되고 있다고 표현되는 점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한다.
성철이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회피하며 불교적 세계관으로 돌아나오는 모습을 보자.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에서 믿음의 근간이 되는 논리였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왔다. 성철에 따르면, 그것은 현대에 와서 붕괴되고 만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종교에 회의를 가진 이들이 생겨나고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이제 사람들은 무턱대고 믿으라는 성 어거스틴의 불합리한 요구에 반기를 들고 말았다. 신자들의 변화에 기독교나 천주교는 교리를 수정하거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논리를 개발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기독교의 발원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은 다 이런 사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철은 불교의 우월성과 흔들리지 않는 불교적 진리를 나열한다. 불교 또한 매우 공상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있다. 서방정토나 극락과 지옥이란 개념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설정한 이러한 공간은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주장한다. 불교의 근본 이념은 인간은 자기개발이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무한한 자기 개발과 수행을 통해, 모두가 부처(절대적 존재)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은 존재에게 현실 그대로 절대이고 극락 세계이며, 중생 모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가 아닌 사람이 없음을 깨달을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에너지와 질량이 불변한다는 등가원리를 불교의 불생불명, 부증불감의 이론과 등치시킨다.
이런 주장을 통해 성철은 3천년 전에 부처가 진리를 깨쳐서 드넓은 우주에 대해 설해 놓은 이야기가 오늘날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성철의 논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오늘날 불교가 현대물리학과 통하는 점이 있고, 과학자들이 불교를 가장 선호한다는 점도 사실이다. 성철은 불교의 근본 이상인 생사해탈에 이르는 길에 세가지 장애를 지적한다. 첫째가 돈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돈이 눈에 보이면 공부는 그만이다. 세상이 시끄럽고 종단이 수난을 겪는 것도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다 돈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돈 때문에 승려가 타락하고 돈 때문에 출가자가 썩고 있다고 자책한다. 그러면서 `참으로 돈을 독사보다 무서워하고 비상보다 겁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여자, 혹은 남자 즉 이성이다. 도를 성취하려면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 누군가 이렇게 따져 물었다. " 부처님은 여자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항상 여자를 경계하라고 하시는고?" 성철은 이렇게 답한다. " 원수가 져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여자를 멀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한다는 말일 뿐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명예다. 돈이나 여자까지도 이겨낸 큰 스님들에겐 허세가 있는데, 자신이 이토록 대단하고 장한 사람이다, 큰 스님이다, 도인이다는 자부심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일생 성철이 초라한 행색으로 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하는 수도승으로 산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까. 성철을 만나기 위해서 불자들은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고 전해진다. 역설적으로 삼천배를 땀흘려 행한 이들은 성철을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삼천배를 하면서 굳이 스님을 만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씩의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 도의 길은 날로 덜어가고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 간다, 고 했습니다. 참으로 깨치는 길은 한 생각 덜어서 자꾸자꾸 덜어 나아가야 하고 학문을 하려면 자꾸자꾸 배워 나아가야 됩니다. 도와 학은 정반대의 처지에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언설을 다 버리고 오직 마음을 한 곳에 모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으로써 성불하였지 이론과 문자를 배워서 성불하였다는 소리는 없습니다." 174쪽, <영원한 자유>
성철의 법어집은 명쾌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선물하는 책이다. 불교의 이론을 군더더기 없는 해설과 과학적 사례와 증거들을 통해 강화하고 증명하려 애쓴 점은 불교의 가르침에 직접 닿을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하지만,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에게 확신에 찬 윤회의 증거들을 나열하는 것이나 타 종교에 대한 불교의 우월성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점은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 하다. 하지만, 성철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것은 그가 종교인으로서 살았던 담박한 삶에 있다고 믿는다. 어떤 종교든 간에 종교는 마음을 닦는 일이다. 성철은 학승이자 수도승으로서 일생 구도적 삶을 멈추지 않았다. 돈과 여자, 명예 그 무엇도 탐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종교를 떠나서, 마음을 닦아 행복과 불멸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