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햇빛출판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독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은 것도 그러고보면 올해로 딱 10년차에 접어든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목적을 갖지 않고 순수히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그리 많이 된 것
은 아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책을 고르고 책을 읽고 감상을 써 내려가는 법이 서툴고
언제나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을 적을 땐 긴장되기까지 한다. 때로는, 내가 단시간에
읽어내려간 책이, 또 그렇게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책이란 것이, 대부분 작자의 무한한
인내와 노력과 내공이 뒤섞인 땀의 결정체이자,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떠한 삶을 기
록해 놓은 것일수도 있다. 그러할때, 별다른 노고없이 이루어지는 나의 독서는 그저
사치스런 소일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6월초부터 지금껏 틈틈이 읽어내려간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한 개인의 내면이
도달할 수 있는 사색과 통찰, 그리고 인내와 인생이 활자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책으
로서 지금껏 내가 서술한 그 예에 적확히 해당하는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책을 읽을 때면 밀려오는 감회와 존경의 마음은 어떠한 미디어도 책을 대신할 수 없
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그래서 그 책에 대한 독서의 시간들은 더없이 소중하게 되
며, 내 손때가 묻은 작가의 저서가 그대로 내 짧은 독서인생의 값진 장서가 되어 버린
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저자가 1968년에 터진 통일혁명당 사건
으로 무려 20년 20일을 복역하고 1988년 8.15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부모님과 가족
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무슨 죄로 인해서 그는 20년이란 긴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을까 ? 그것이 가장 먼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통혁당 사건을
검색하면 이렇게 시작된다..



"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사건이라고...김종태(金鍾泰)는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통일혁명당(북한노동당의 在南地下黨)
을 조직.. 전(前)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
전복을 기도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李文奎) 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 네이버



시사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은 인터넷 검색에서야 겨우 찾을 수 있는 통혁당사건.
가끔 신문지상에서 박정희 독재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의 조작 간첩사건으로 지금은
밝혀진 이 사건에 그가 연루돼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와 숙명여대에서 경제학을 가
르쳤던 그는 사형을 언도받은후, 곧이어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받아, 20년 20일 감옥
에서 보낸 것이다. 전도유망하고 평탄한 학자의 삶이 독재권력의 망령된 폭력에
희생된 순간이다. 그는 20대의 후반과 30대의 전부를 그리고 40대의 초반을 사방
이 막힌 감옥에서 끝없는 인동의 시간으로 보내야 했다. 평범한 우리들로선 그
시간에 주눅들기 일수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상상이란 관념에 머문다. 그러나
20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실제로 살아내야 했을 당사자의 고통과 절망은 어떻게
상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동안 그는 감옥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것은 스무번
의 봄이자 스무번의 겨울이다. 왜 이렇게 표현해야 할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또
한 감옥 생활을 간접체험한 덕분이다. 그의 글대로라면, 징역생활은 `겨울을 인내
하여 봄을 맞이하는 일' 같단 생각이 들어서다. 20년간 반복된 편지글의 계절인사
를 읽다보면 단 한번도 그러한 유폐를 경험하지 못한, 독자들로서도 그러한 인사가
단순한 편짓글의 예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밖에서 살았던 27년이 관념이라면
감옥은 현실이고 세상의 밑바닥이었다. 사람도 환경도 모두 그러했다. 그래서 충분
히 그의 관념도 그렇게 추락할 수 있는 여건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편짓글들속에서
나는 환경이 누추해도 인간의 내면의 성숙이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책을 가까이 했고, 서예를 통한 글쓰기도
멈추지 않는다. 지나친 독서는 사색을 방해하고 방대한 지식은 실천이 배제된 환경
속에서 무용지물이 될 거란 고민을 하게 된다. 그의 편짓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수님과 계수님 앞으로 보내진 것들인데, 20년간 편지들은 놀랍게도 한결
같이 감정적인 기복과 흐트러짐이 없다. 변화없는 감옥 생활의 소소한 일상의 깨달
음, 밖에서 경험하지 못한 노동의 교훈, 개성이 남다른 죄수들과의 관계맺기 등을
서술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옥생활을 살아가면서도, 그는 인간과 학문에 대한 나름의 사
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내면의 힘을 키워온 학자의
기상과 의지, 그리고 그 긴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낸 인내를 본받을 수 있었다. `자유
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이 있듯이, 자유를 빼앗긴 인간은 절망하기 일수다.
그럼에도, 더구나 독재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삶 자체가 송두리째 훼손된 상황속에서
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법 없이 그 현실 자체를 `또렷한 의식'속에서 살아온
그의 정신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하다.



20년이란 긴 세월의 노고가 깃들인 글을 그 짧은 시간 동안, 가볍게 읽어 낸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오늘날 기교가 넘치고 세련된 글들을 생
산해 내고 있는가 ? 그러나 감동은 그러한 작문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짧은
서간문들 사이에서 발견한 작가의 진중한 삶의 기록은 결코 아무나 흉내내지 못할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러한 책을 발견해 내고, 또 선택하여 읽는 행위는 오직 독자의 몫
이지만 또 쉽지 않은 일이다. 쭉정이가 너무 많아 낱알을 고르기 힘든 것이 오늘날
독자들의 고민 아닌가 ? 나는 그래서 다시한번 현명한 독자로서 `책의 선택'을 강조
해 두고 싶다.



그의 첫 저서는 이 책이지만, 다음 기회에 그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와
<더불어 숲> 등의 저서를 읽어볼 계획이다.



------------밑줄긋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
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
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
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29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06.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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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 2006 감독/ 유하, 출연 / 조인성,진구,이보영,천호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무지'는 대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필요없는, 그리고 쓸데없는,
공포나 아니면 그 반대의 동경을 품게 만드는게 사실이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갖는
이같은 일반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특정 세계의 진실을 왜곡하고, 부풀리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우리나라의 `조폭영화'들이 대게 그러했다. 일명 깍두기 들이 영화에 등장할땐 언
제나 그들은 우리와 다른 별나라 사람으로 그려지기 쉽상이다. 범접할 수 없는 그들의 세
계가 스크린에 옮겨질때 그들은 대게 코미디의 소재가 되거나 폭력적이긴 하나 의리는 아
는 소위, 매너있는 조폭들로 탄생되기 일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웃기는 사람' 들
이거나 `의리가 넘치는 진짜 남자'들인가 ?


유하 감독의 영화 <비열한 거리>는 여자앞에선 정의에 넘치는 듯하며, 그리고 너무 잘생긴
또 같은 집단간에는 의리가 넘쳐나는듯한 `병두(조인성)'라는 조폭의 삶을 통해, 우리 영화
가 대중들에게 잘못 주입시킨 조폭에 대한 오해를 시원스레 풀어주고 있는 영화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짓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조폭은 조폭일 뿐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얼마나 간단한가 ? 근데, 그것이 이 영화의 진수가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감독
의 의도는 결국, 우리네 삶에 대한 은유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은유는 나와
너가, 그리고 조폭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너나할것없이, `비열하기 짝 없군' 하는 냉소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다. 그러나 섬짓한건 조폭이 아니라,
현실의 우리다. 조폭은 원래 비열해도 별 상관없다. 근데 현실의 우리의 일상화된 비열함은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세상에 깔린 비열함은 언제나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삼류 조직의 2인자 병두(조인성), 그는 가난하다. 가족은 철거민촌에서 기거하고, 어머니
는 병들었고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자신의 일(조폭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세상은 비정한 것. 조직 보스는 그를 결코 키워주지 않는다. 보스도 편애를 하는 법이니
까. 어떻게든 그 세계에서 성공해 그 세계를 벗어나고픈 병두는 인생 역전을 위해 `과속'을
결심한다. 조직의 큰손 황회장(천호진)을 발판삼아 질주를 결심하는데, 그러한 질주엔 공짜가
없다. 사람을 죽이고, 그것이 그의 업보가 된다. 그의 곁엔 조폭 세계를 그려서 성공하고픈
삼류 영화감독 민호(남궁민)가 있고, 그는 다름 아닌 이 영화의 감독 유하의 분신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잘 흘러가는 것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병두의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초
등학교 동창 현주(이보영)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인생엔 핑크빛이 감도는 듯 했는데,
딱 아쉽게도 거기까지다. 그는 사람을 죽였고, 원죄는 모든걸 처음으로 돌려놓는다. 과속
하며 앞질러간 인생은 빠른 종착지에 도달할 뿐이다.


그런데 영화가 너무나 허무하고 음습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혀를 찔려서인가 ? 병두는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 보스를 칼로 요리할때는 잔혹하지만,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
는 그는 효자이며, 사랑하는 현주앞에서 수줍어하는 그는 사랑에 미숙한 청년이고, 동생들
을 챙겨주는 그는 따뜻한 오빠이자 형이다. 또 어떤가 ? 영화감독 민호에게 자신의 과거를
아무런 꺼리낌없이 들려줄때, 그는 여리디 여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영화가 단
순한 조폭 영화와 갈리는 지점이다. 조폭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우리를 보고 있는 듯 한
착각, 그리고 섬뜩함은 유하 감독이 관객들에게 요구하는 반성문이자, 이 영화를 보는 사
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는, 너는, 왜 그렇게 살아왔니 ? 왜 그렇게 각기 다른 모습으
로 살아왔니 ? 하는 그러한 섬뜩한 질문을 감독은 친절하게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반성문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것이 완전한 것 같은 내 삶. 직장이 있고 그렇게 가난하지 않으며, 또 나를 사랑해주는 사
람이 있고, 내가 사랑할 사람이 존재하고, 마음 넉넉한 친구들이 있다. 그것 뿐인가 ?
더 많을 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정말로 `비열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세상의 얼마를 살아
오지 않았던가 ?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외줄타기와 같다. 치우치면 떨어지며 정체되면 흔들린다. 살아남기 위해선 끝없이 줄위
에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비열함'을 일상화 시
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열하지 않고도 외줄을 잘 타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이 영화가 내게, 그리고 관객에게 던진 질문이다.









2006.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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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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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 오래된 정원 / 류시화 옮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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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다. 그러나 한가하다. 오늘과 내일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교대 근무자인
나는 이렇게 어쩡쩡한 휴일을 맞는것이 일상사다. 남이 놀때 일하고 남이 일할땐 또 이렇게
쉰다. 휴일의 개념이 상실된지 오래다. 어떤 약속도 없다. 온전히 휴일이다. 그런 휴일을
맞는것이 두달만이다. 그러고보면 정말로 바쁘게 산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바빴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결국 올해 두달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 두 달동안 나의 생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기엔 물론 책 읽을 시간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딱 1년전 이맘때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펴들었다. <월든>의 작가, 소로우의 편지들을 엮은 책이다.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2005 서점에 들러서 직접 골랐다.


소로우는 200년전 미국 사람이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을 나왔을 정도면 학식도 갖추었고,나
름 생활도 윤택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연필 공장 사장이었다.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가 가진 명함을 들여다볼까? 그는 우선 명상가였다. 자연주의자, 초월주의 사상
가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인도 힌두 사상에 일평생 깊이 몰입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귀농
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유기농업의 선구자이다. 또 자신의 재능을 살려 목수일도 했고, 가
끔 이웃의 측량작업도 해주고 생활비도 벌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일평생, 그가 돈을
벌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로 치면 백수이
자, 게으름뱅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고향 메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일대를 산책 하는 것, 또 자연을 관찰 하는 것,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것,
여행 하는 것, 사색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날 19세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작가들(나다니엘 호손, 에머슨, 월트휘트먼)사이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그 이름 소로우
다.


"우리가 가진 생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p.60


대학을 나와 별 직업없이 전전하던 소로우에게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다. 같은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헤리슨 블레이크란 사람이다. 블레이크도 소로우와 기질이 비슷했던가보다. 사회적 성
공과 부를 떨쳐버리고, 세속에서 멀어져서 영적인 삶을 추구하려던 그는, 허술한 듯 하면서도
깨달음이 가득한 삶을 실천하고 있던 소로우를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소로우
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13년동안이나 편지가 오고
간다. 이 편지들에서 소로우는 자신의 생활을 블레이크에게 전해줄 뿐이다. 소로우가 쓴 편지
는 자신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대한 몇가지 단상들 이겠지만, 그것은 블레이크에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숲속의 생활에서 탄생한 저서 <월든>에서 충분히 그 깊이가 드러나는 소로우의
소박한 삶의 철학이, 편지글 속에서 부연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2년 2개월이란 시간동안 소로우는 고향의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대학을
나와서 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고, 에메슨이라는 당대의 뛰어난 사상가 소유의 땅에 오두막을
손수 짓고 20대의 2년 2개월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숲속의 생활은 온전히 자급자족이었다.
집을 짓고, 식량을 구하고, 텃밭을 일구고, 물고기 낚시를 하는 것 등으로 육신을 돌보았다면,
그는 고요한 아침 나절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또 숲속을 방랑하며 나무와 동물들
을 관찰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면서, 영적인 성숙을 위해 노력했다. 몇평남짓한 오두막집을 짓
고 이 자연친화적 삶을 살겠다는 아이디어는, 그 후 많은 미국의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닮은 삶을 살아가려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2년 2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20대의 한창 나이를 군에서 보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세속에서 2년 2개월과
단절된 공간에서의 그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물론 소로우가 보낸 숲속의 생활만큼은 아닐지
라도, 그와 상당히 닮아 있는 시간일 수 있다. 강원도 전방 고지에서 보낸 시간들은 소로우의
삶을 체험해보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그때, 그 깊은 산속에서 나는 <월든>을 일부러 찾아 읽
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래서 그때, 나도 소로우를 조금은 흉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외부와 떨어진 자연속에 파묻혀 있었건만, 군대라는 생활의 제약
상 무수한 인간관계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기에, 그 실험은 실패였을게 분명하다. 아무튼, 그
의 <월든>을 감명깊게 읽은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그 삶속에 녹아있는 `자유분망함'을 갈망
하고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지닌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막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p.89


소로우 같은 삶을 오늘날 실천할 수 있을까? 오직 성공을 위해 달려나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겐
꿈같고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더 많이 가져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인간이
다. 어느 시대에나 돈과 권력은 인간이 탐내기 가장 쉬운 것들이었다. 비단 오늘날만이 아니라,
소로우의 시대에도 더 많은 소유를 통해 더 많은 노예를 갖고, 인디언을 몰살해서 그들의 땅
을 빼앗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이
다. 어찌보면, 소로우의 삶은 기행과도 같은 것이다. 더 많이 가질 수록 더 많이 행복한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돈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인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억
제대책을 기안했던 고위 공직자들이 강남에 아파트를 두채씩이나 가지고 있다해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격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거기엔 사람들의 은근한 시샘도 내포되어 있다. 그만큼
오늘날이나 몇백년전이나 소로우의 삶은 과히 누구나 실천하지 못하는 `소유'를 포기한 `존재'
중심적인 삶이다. 영적인 성장이 없이 물질적인 풍요만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삶은 소로우에겐
진정 사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는 데는 우리는 얼마나 즉각적입니까? 그러나
정신의 배고픔과 갈증을 충족시키는 데는 얼마나 느립니까? 너무도 현실적인 종
족인 우리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서는 차마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없
습니다." p.79


20대엔 혼자가 참 좋았다. 혼자가 마음 편하고 홀가분하고 간섭받지 않고 자유스러웠다. 그러
나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게 아니란걸 느낀다. 누군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평화롭고, 그
렇지 않으면 불안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다
고 얘기한다. 그러나 소로우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일평생 구
도자의 길을 갔던 소로우의 영혼의 깊이는 고독을 상쇄시키고도 남았겠지만, 우리같은 사람이
야 어디 그렇겠는가? 그러나 소로우의 말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언젠가
사람은 결국 혼자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결정적인 부분들에선 타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고 혼
자서 감당해 내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이 있다. 외롭다는 생각은 아마도 영혼의 더듬이가
오직 인간만을 향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 내가 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짜로 고독한 것은
혼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소로우는 이렇게 자신의 영
혼의 풍성함을 설명한다.



" 내 집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 나절이면 더욱
그렇다. 나의 상황을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다. 마
치 웃는 것 같은 특유의 소리를 내며 크게 울어 대는 저 아비새나 월든 호수가
외롭지 않듯이 나는 외롭지 않다. 저 외딴 호수에게 대체 어떤 벗이 있겠는가?
태양 역시 홀로 있는데, 안개 낀 날에는 간혹 둘로 보이는 때도 있지만 하나는
가짜 태양인 것이다. 신 역시 홀로 존재하지만 악마는 홀로 있는 법이 없다.악
마는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며 그 무리는 수도 없이 많다. 초원의 한 송이 할미
꽃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땅벌이 외롭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
도 외롭지 않다. 샛강이나 지붕 위에 풍향계, 북극성, 남풍, 4월의 소낙비, 정
월의 해빙, 새로 지은 집에 든 첫번째 거미가 고독하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
다." p. 72



소로우는 19세기 미국의 동양인으로 불린다. 그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들은 인도의 종교
서적들이다. 힌두서적인 <바가바드 키다>와 <마누 법전>을 그는 평생 읽고 명상했다. 소박
하고 자연친화적이며 영적인 삶은 이런 그의 사상에서 나왔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그러나
아무런 종교적 편견없이 그의 저서들을 대하면, 그의 사색들이 심오하면서도 독자의 마음
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쁘고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사회의 정글에서 살아
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소로우는 깊은 가르침을 준다. 본말이 전도된 세상에서 인간은 자
신의 본질을 망각하기 쉽상이다. 200년전 소로우가 세속을 거부하고 산속의 오두막으로 들
어간 이유는, 삶을 제대로 누려보기 위해서였다. 영혼이 아니라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
이란 그저 삶의 유지일 뿐이지, `향유'가 되지 못한다. 소로우의 삶을 그대로 우리가 빼
닮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오늘 나의 삶을 반성하고 되돌아볼 기회는 된다. 그리고 기
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이 답답한 세속에서 벗어나 그처럼 자유분망한 생활을 꾸려가보며
생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절대적인 공감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대지가
봄기운으로 넘쳐나는 이때에, 영원한 자연인 소로우를 다시 만나게 돼 기뻤다.




200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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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류의 서적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문학이라고 하면
뭔가 무겁고 진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진리는 어려운 글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낯익은 일상을 담고 있는 글들에서 오히려 삶을 새롭게 발견
하는 위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올 봄에 읽은 두 권의 서적은 그 좋은 본보기다.
<내 생애 단 한번>과 <문학의 숲을 거닐다> 마음에 와닿는 작가를 만나기는 힘들 일이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결국엔 저자의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이다. 삶과 글이 건강한 삶의 자세와 조화를 맺고 있는 그녀의 글에는 당당함과
명징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그런 삶의 자세를 갖기까지 문학이 그녀에게 준 위안과 용기
가 어떤 것인지 이 책들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내 생애 단 한 번>이 그녀의 삶이 담겨
있는 일상사의 에세이라면, 신간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고전이라는 테마안에서 문학과
일상을 뒤섞여 거대한 바다와 같다는 고전들의 숲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모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그녀의 문학 칼럼을 모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의 출판은 좀더 늦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로 발병한 암 때문에, 저자가
불가피하게 연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번도 빠짐없이 써오던
기사를 어느날 중단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글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섭섭함 같은 것과 더
불어 그녀의 안타까움을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마지막장을 채우고 있는 `문학의
힘'이란 글에서였다. 그리고 글 속에서 평범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굴곡진 삶을 약간은 엿
볼 수 있게 된다. 장영희 님의 아버지 고 장왕록 박사는 유명한 번역가이다. 아버지를 따라
그녀도 번역가로 활동중이고,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어 교과서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화려한 성공에는 더불어 이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이면들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할 것 같다. 오히려 많은 삶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은 다양하다. 읽어본 책들은 저자의 소개에 반가웠고 새로운 책들에
대한 언급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책을 가까이하던 시절에는 나도 고전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 시절에 나의 손을 거쳐간 작가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스토옙
스키다.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그의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읽었을 때의 감흥의
기억들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과거 내가 지나쳐온 문학의 숲
길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다시금 돌아가고 싶기도 한 시절이다. 무언가에 순수하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것이 곧 열정이고 그 열정이 식었다는 것은,
삶에 그만큼의 생기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고전읽기에 대한 독려로서 비춰지는 장영희님
의 책. 일반독자들을 너무 고려한 나머지 때로는 당의정의 당도가 너무 지나친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지만, 소개글을 읽고 그 책을 한번쯤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전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추스려보면, 한번쯤 다시 읽고 싶단 책들이 있다. 그러나
책을 잡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책장의 먼지낀 책들만 먼발치서 바라
보고 그냥 지나친다. 내게 그러한 책이 몇 권 있는데,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이나
허만 멜빌의 <백경> 같은 책들이다. 고전은 읽을때에는 힘에 겹지만, 그러고보면 가장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에 남겨지는 책이다. 올해는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나는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겨지는 책을 읽고 싶다. 강렬한 자극을 받고 싶은 것이다.


-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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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서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었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p.318)



2005.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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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여기에 - 청춘편
미우라 아야코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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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1-12절





98년 4월 전방철책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나, 그곳은 해발 1천미터가 넘는 산악지대
였다. 우리 소대가 경계를 맡은 지역은 지형이 험준해서 간첩조차도 넘어오길 포기한다는
곳이었다. 야간 경계근무가 끝나면 나는 곧바로 잠들지 않았다. 군대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무언가를 낭비하고 있다는 조바심에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라도
잡지 않으면 온통 그 하루가 내 인생에서 깨끗이 지워지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언제나
책을 잡았다. 작은 나의 관물대에는 군복을 제외하곤 작은 서가나 다름 없었다. 2년 2개월간
군대에서 읽은 책들이 약 77권 정도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딱 한 권 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길은 여기에>라는 수필집? 이것을 수필집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으론 분명 수필집 이었는데, 그것은 자전소설이 정확한 명칭이다. 소대의 작은 책장에
꽂혀 있던 자그마한 문고본이었던 그 책. 책이 귀했기 때문에 서가의 책들을 순서대로 읽어
가던 나는, 아마도 김한길의 <여자의 남자>를 읽은 후에 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
한다. 그 책을 읽는 동안에 정말로 하루하루가 귀한 시간이었다. 그 책을 읽는 새벽 시간은
내 인생이 새롭게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일본의 패전과 그에따른 개인적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야꼬의 수기는 13년간 투병 생활과 정신적 타락, 그리고 정결한
신앙인 친구 마에까와 다다시라는 사람을 통해 신앙을 갖기까지의 아야꼬의 인생역정이 그려
져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철학에 심취해 있어서 삶이 철학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의 모든 고민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고, 그런 내용을 담지 않은 문학
은 시시해 보였다. 더군다나 종교적 믿음이란 너무나 추상적이고 허깨비 같은 것이어서, 도대
체가 믿음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게 보여졌다. 신을 볼 수 없는데 느낄 수 없는데, 실재하지
않는 신에게 어떻게 의지할 것인가? 내가 신앙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런 단순한 논리였다. 그러나 아야꼬의 절절한 투병기와 그가 신앙으로 빠져드는 모습들을
읽어가면서 나또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
었던 "보이지 않는, 실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문제를 아야꼬는 요한일서 4장 12절의 구절의
인용을 통해 그 책속에서 해명해 주고 있었다.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2절


그 시절엔 한동안 이 구절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기엔
군대의 환경은 적절하지 못했다. 전방의 봄은 늦게 찾아온다. 겨울 내내 눈을 치우느라 허리가
망가지고, 눈만 내리면 먼저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 정신병?에 시달리던 그 시절에 5월을 하루
남겨둔 4월 30일의 폭설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아야꼬의 책 <길은 여기에>는 내 독서인생
에 가장 큰 자국을 남겨두게 되었다. 훗날 여름이 가까워서 다시 아야꼬의 <빙점>을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제 형이상학은 내게 명철한 인간의 지성을 상징하는 것일 뿐, 별다른 감명은 없다.
나는 형이상학에 빠져들어 10년을 지나고 겨우 그 복잡한 인간의 철학에서 해방되었다. 인간의
철학은 철학자의 숫자에 비례한다. 그만큼 다양하다. 과거 나는 회심하는 작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심없이 사는 똑똑한 작가들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자살한 이은주란 배우가 했다는 그말. " 아기곁에는 엄마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말의 의미에 공감한다. 나의 신앙은 이제 시작이어서 믿음이 얕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관계를 더 깊고 더 가깝게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남아있다.





2005.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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