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여기에 - 청춘편
미우라 아야코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1994년 9월
평점 :
품절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1-12절





98년 4월 전방철책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나, 그곳은 해발 1천미터가 넘는 산악지대
였다. 우리 소대가 경계를 맡은 지역은 지형이 험준해서 간첩조차도 넘어오길 포기한다는
곳이었다. 야간 경계근무가 끝나면 나는 곧바로 잠들지 않았다. 군대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무언가를 낭비하고 있다는 조바심에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라도
잡지 않으면 온통 그 하루가 내 인생에서 깨끗이 지워지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언제나
책을 잡았다. 작은 나의 관물대에는 군복을 제외하곤 작은 서가나 다름 없었다. 2년 2개월간
군대에서 읽은 책들이 약 77권 정도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딱 한 권 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길은 여기에>라는 수필집? 이것을 수필집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으론 분명 수필집 이었는데, 그것은 자전소설이 정확한 명칭이다. 소대의 작은 책장에
꽂혀 있던 자그마한 문고본이었던 그 책. 책이 귀했기 때문에 서가의 책들을 순서대로 읽어
가던 나는, 아마도 김한길의 <여자의 남자>를 읽은 후에 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
한다. 그 책을 읽는 동안에 정말로 하루하루가 귀한 시간이었다. 그 책을 읽는 새벽 시간은
내 인생이 새롭게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일본의 패전과 그에따른 개인적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야꼬의 수기는 13년간 투병 생활과 정신적 타락, 그리고 정결한
신앙인 친구 마에까와 다다시라는 사람을 통해 신앙을 갖기까지의 아야꼬의 인생역정이 그려
져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철학에 심취해 있어서 삶이 철학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의 모든 고민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고, 그런 내용을 담지 않은 문학
은 시시해 보였다. 더군다나 종교적 믿음이란 너무나 추상적이고 허깨비 같은 것이어서, 도대
체가 믿음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게 보여졌다. 신을 볼 수 없는데 느낄 수 없는데, 실재하지
않는 신에게 어떻게 의지할 것인가? 내가 신앙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런 단순한 논리였다. 그러나 아야꼬의 절절한 투병기와 그가 신앙으로 빠져드는 모습들을
읽어가면서 나또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
었던 "보이지 않는, 실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문제를 아야꼬는 요한일서 4장 12절의 구절의
인용을 통해 그 책속에서 해명해 주고 있었다.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2절


그 시절엔 한동안 이 구절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기엔
군대의 환경은 적절하지 못했다. 전방의 봄은 늦게 찾아온다. 겨울 내내 눈을 치우느라 허리가
망가지고, 눈만 내리면 먼저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 정신병?에 시달리던 그 시절에 5월을 하루
남겨둔 4월 30일의 폭설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아야꼬의 책 <길은 여기에>는 내 독서인생
에 가장 큰 자국을 남겨두게 되었다. 훗날 여름이 가까워서 다시 아야꼬의 <빙점>을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제 형이상학은 내게 명철한 인간의 지성을 상징하는 것일 뿐, 별다른 감명은 없다.
나는 형이상학에 빠져들어 10년을 지나고 겨우 그 복잡한 인간의 철학에서 해방되었다. 인간의
철학은 철학자의 숫자에 비례한다. 그만큼 다양하다. 과거 나는 회심하는 작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심없이 사는 똑똑한 작가들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자살한 이은주란 배우가 했다는 그말. " 아기곁에는 엄마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말의 의미에 공감한다. 나의 신앙은 이제 시작이어서 믿음이 얕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관계를 더 깊고 더 가깝게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남아있다.





2005.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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