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미를 든 대통령 - 부패 없는 사회를 위하여
김정수 지음 / 민들레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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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 세계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주가폭락과 경기침체로 글로벌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개방과 투자를 옹호하고, 정부개입을 극도로 거부하는 신 자유주의의 수호자 노릇을 한 미국 경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연일 추락하는 분위기다. 높은 연봉과 고급승용차로 대변되던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 월가(Wall Street)에서는 연일, 파산의 위기속에서 실업자가 수만 명씩 양산되고 있다. 급기야 미국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 서브프라임 사태를 막아보려 하는 최후의 수단을 쓰려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 경제의 위기는 어디서 왔을까? 가장 큰 원인은 일부 투기적 자본가와 투자은행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대출자의 신용이나 상환능력은 생각지 않고, 법망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부동산 과열을 등에 엎고 부실대출의 건수를 높였지만,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부실한 대출은 곧바로 은행의 연체율을 높여 철옹성과 같았던 미국 금융산업 전체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그 결과 미국경제와 한배를 탄, 신 자유주의의 세계경제는 함께 위기의 격랑속에 빠져들어 허우적대고 있다.

부패의 역사와 기원을 다루면서 현재의 한국 사회의 부패 문제를 되돌아보게 해 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김정수 한국투명성기구 정책실장이 지은 <다리미를 든 대통령>이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난 인류 역사속에서 부패란 독버섯이 자라난 기원을 분석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사회의 그 어떤 분야도 그 독버섯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데 있다. 중국 고대 사회의 부흥과 쇠락을 분석해보면,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본인이 먼저 검소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리면, 국가가 부유해졌고 국민이 안락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반대로 나라가 쇠락해 가는 지점에서는 반드시 임금과 관료들이 먼저 검소와 청렴과는 거리가 먼 뇌물과 매관매직이 넘쳐나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따라서 사회분위기가 부패로 얼룩진 것을 볼 수 있다.

중세 가톨릭은 천국행 티켓이라 할만한 면죄부를 팔았다.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고, 면죄부의 가격이 높을수록 연옥생활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코미디와 같은 얘기지만, 달릴 생각하면 유럽이 정신적으로 기독교로 통일돼 있던 시절이고, 세속 권력보다 종교 권력의 힘이 막강했던 시절의 이야기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갈 만 하다. 고려 문종 10년의 기록을 담은 <고려사>를 보면, 승려들이 재산을 불리기 위해 장사를 하고, 술과 고기로 배를 채웠고 시정에서 날뛰다가 사람들과 함께 싸움질을 하는가 하면,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에 종사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은 또한 근 현대사의 한국 사회가 어떻게 부패로 얼룩져 있는지 분석하며 고발한다. 제 1 공화국인 이승만 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3.15 부정선거로 4.19 의거를 불러와 결국 현직 대통령의 하야라는 기록을 남겼다. 박정희 정권은 신흥 재벌들과 유착하면서, 수많은 부패 사건을 만들어냈다. 전두환은 5.18 민주화 운동으로 그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을뿐더러, 부패 문제로 법정에 갔을 시에는 전씨 집안의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친인척 비리가 만연했다. 노태우는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해 착복했으며 김영삼 정권은 대통령 아들의 인사개입과 한국 사회의 부패가 곪아터진 IMF 사태를 맞이했다. 김대중 정권은 벤처기업들로부터 두 아들이 뇌물을 받은 일로 대통령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바 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거의 부패와 동고동락을 했다 할 정도로, 부패의 사슬이 굵고 질긴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국가별 청렴도를 조사해보면 언제나 하위권을 달리고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건국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 부를만한 IMF가 정치권과 유착한 부도덕한 기업가의 뇌물 36억원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한보철강을 이끈 정태수는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나는 이 나라에서 사업하는 문법을 다 꿰차고 있다” 하며 거만을 떨었다는데, 그뜻은 무엇인가? 한보 부도로 촉발된 IMF 사태는 그가 정치권에 뿌린 검은 돈에서 출발한다.

이 책을 통해 만난 수많은 사례들을 돌아보며, 부패와 청렴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부패는 곧 나라에 있어서 패망의 시발점이며, 개인에 있어서 몰락의 전주곡이다. 그러나 청렴이란 단어에서 우리는 국가의 밝은 미래와 개인의 행복을 궁극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이나 씨랜드화재 사건에서 희생된 생명들을 맞바꿀 가치는 이 세상에 없으며, 거기서 기원한 국가,사회적 손실은 측정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에서 개인들이 주고받은 뇌물이란 미미했다. 우리가 이 사회의 작은 부패조차 용인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직장인으로서 나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회사에 공헌하는 것을 내 소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건 기본적으로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회사의 발전이나 국가의 발전을 넘어,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서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국가청렴도 1위이자, 동시에 국가경쟁력또한 1위인 나라 핀란드는, 부패하지 않는 사회는 국가와 사회와 개인 모두가 함께 번영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세계 경제의 위기는 부패, 도덕적 해이로부터 출발한다. 그 반복의 고리는 단단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끝부분을 보면, 인상깊은 장면이 하나 나온다. 페스트균의 몰락에 환호하는 시민들 사이를 빠져나온 의사 리유가 언젠가 페스트가 우리곁으로 되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장면이다. 부패와 파멸이란 그 질긴 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는 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책은 그 지름길을 알리는 표지석과 같다.






개츠비의 독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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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 불안 또는 회의에 관하여
필립 얀시 지음, 정영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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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동안 C.S 루이스나 필립 얀시 등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그들은 이제 막 태동하는 나의 기독 신앙이 위험에 좌초되려 할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나타나 나의 신앙에 듬직한 디딤돌을 놓아 주었다.  그들은 나의 부족한 기독교적 지식을 보충해주었고, 신앙과 이성 사이의 혼란속에 시의 적절한 논리를 심어줌으로써, 기독교를 형이상학이 아닌 삶안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이끌었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나 기독교에 대한 관심, 나의 신앙은 지금 정체기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밥을 먹을때마다 기도를 하며,  교대 근무에 걸리지 않는 일요일엔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영국의 유명한 무신론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마냥, 신이 없다고 주장하며 흥분하는 사람들을 가볍게 웃어 넘기고, 그들의 깊이없는 세계관을 수정해주고 싶은 욕망이 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맹목적인 신앙인들 즉, 교회의 목사님 말을 하나님 말씀인냥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순진무지함, 교회 모임에 나올것을 종용하는 전화를 귀찮을 정도로 해대는 신자, 교회 안의 하루는 융숭깊은 신앙인이요, 교회밖의 일주일은 풍류도락가처럼 사는 이중적 인간, 성경외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으며 그것은 당연한 일인것인냥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사람을, 신이 없다고 흥분하며 그 깊이없는 혀를 놀려대는 사람만큼이나 혐오한다.

실제로 어떤 모임에서 종교얘기가 나오면,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될 때가 있다. 대게 종교란 정치와 마찬가지로 답이 없는 다툼의 소재로 전락하기 일수다.  그러나 가끔 모임의 구성이 독실한 기독교도와 무신론자, 이제 막 교회를 나가는 초보신자 정도로 구성되면, 대화의 깊이를 떠나 다양한 의견들로 그 모임은 풍성해진다.  독실한 기독교도는 무신론자와 초보 신자를 향해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지식으로, 성경이라고는 한줄 읽어본 적도 없는 이들을 주늑들게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목사의 위치에 서서 일장 설교를 한다.

이 모임의 무신론자는 목사의 설교를 듣다말고, 자신있게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얘기하는데, 솔깃해서 듣고있자면 그는 바로 그 `자신' 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교'의 신자다.  이 대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참석자는 바로 초보신자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다가, 지금껏 어떻게 교회에서 괴롭힘을 당했는지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즉,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는데도 구역예배에 나오지 않았다고 같은 신도들이 그 신앙없고 신의없음에 핀잔을 주더라는 얘기부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라는 아주 민감한 질문까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은 이 모임의 `목사'인데, 그가 공포와 위협이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애를 타이르듯 타일렀을 때 초보신자의 표정은 안도로 평안해진다.

신앙이 깊고, 오직 성경만을 알며, 교회일만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와 차를 마시며 두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성경과 신앙 얘기를 나누었다.  한때, 그는 내게 쓸데없는 책들을 보지 말고 오직 성경외의 지식에는 관심갖지 말라는 얘기를 해준적이 있다. 나의 서재를 보며, 필요없는 책들이 너무 많다고 자평을 해준적도 있다.  그의 이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그가 평소에 오직 성경이라는 인식의 틀 속에서만 안주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타종교에 대한 태도,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도들의 신앙생활, 삶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의 의견에 동조를 보냈지만, 또 어떤 부분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삶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언어들을 비유가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고, 일점일획에도 어긋나지 않은 성경적인 삶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필립 얀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작가다. C.S 루이스는 명철함이 칼날보다 더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이미지는 현실의 세상이 아니라,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연구실이다. 그러나 필립 얀시는 흔히 우리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초보신자처럼, 불안과 회의에 가득한 질문만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들을 좋아한다. 그의 칼럼들을 모은 책인 <비망록>의 부제를 - 불안 또는 회의에 관하여 - 라고 지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반인들에게 `크리스천'이라는 단어가 다음의 아홉 가지 자질을 연상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즉 일반인들이 크리스천들에게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p.41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어?  그런데 교회는 신도들에게 경건한 만족감이나 주고 신자가 불신자들보다 낫다는 우월감이나 심어주고 있어. 분명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교인 상호간에 상부 상조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 교인들의 생활은 바람직한 것 같아. 그렇지만 알코올 중독자는 교회에 가면 열등감과 사랑의 부재를 느껴." p.59

"마지막 순간에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는 매력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선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동기 부여를 하는 데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독자가 올바른 가정에서 양육받고, 기독교계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 살다가 심판날 임종할 때 회심한 신참보다 다음 순위로 밀려난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p.226

한참, 그 분과 얘기를 하다가 그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고, 이렇게 물었다. "혹시 천국에 다녀오셨나요 ? 어떻게 그렇게 다녀오신 것처럼 잘 아시나요 ?"  어떻게 보면 약간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나는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설명하길래 한 질문이었다.  그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성경이 모든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신앙심의 두터움에 불만이 있는게 아니다.  그러한 신앙은 모든 신앙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독교도만이 사는게 아니고, 무수한 타종교인, 무신론자가 뒤섞여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 신앙의 정도도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그와 같이 확신에찬 믿음은 단 1%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 잣대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로 보이질 않겠는가. 그러니, 교회는 교회 밖과 담을 쌓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믿음의 폭력을 정당화 하는 집단도 생겨나는 것이라고 본다. 

20세기 초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는 그의 회심기에서 이렇게 기독교적 겸양에 대해 썼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진리의 일부는 알 수 있다고 믿으나, 모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관용의 기초이며,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평화롭게 대할 수 있는 원천이다"   

겸양이 부족한 기독교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질문과 의문을 자신의 저서속의 트레이드 마크인냥 내보이는 작가, 필립 얀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간조의 말처럼, 어찌 사람이 진리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하나님만 알고 있는 것을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 때, 그 신앙은 이상한 확신으로 넘쳐나게 된다.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그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2천년전 이 땅에 오셔서 함께 어울린 사람들은, 종교 권력과 율법이란 확신으로 넘쳐난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거지와 창녀, 이방인과 범죄자 등,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인식으로라면 모두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장 12절) 라고 말씀 하심으로써, 그가 오신 이유가 낮은 자를 구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천명하셨다. 

성경외에는 그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는, 그분에게 한마디 드리고 싶다.  편식을 하면 건강을 잃듯이, 영혼의 편식은 아집과 편협만을 낳을 뿐이라고.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도에게 회의는 필수 비타민이고, 질문과 의문은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영양제라고 말이다. 

 
 



 

 

 
200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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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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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 미터의 수직 빙벽을 자랑하는 봉우리, 그게 바로 촐라체다.  이 봉우리가 낯설게 느껴지는건 히말라야 하면, 8000 미터급의 14좌를 바로 연상해 왔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14좌가 아닌, 그 곁의 비교적 얕은 봉우리를 오르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무겁도 진중한 이야기는, 소설의 재미를 떠나서 읽는이의 가슴을 짓누른다. 수직빙벽을 자랑하는 그 높은 봉우리의 정적속에, 크레바스 안에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썩지않고 얼어버린 상태로 죽어있는 한 사람을 이야기 할때, 온 몸에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죽음은 그곳 히말라야에선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언젠가 14좌 가운데 하나를 오르다 실종된 한국 산악인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한 휴먼 원정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내가 놀란 것은 그 원정대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곁에 산을 오르는 생동하는 인간들 사이로 앉아서 쉬듯, 죽어있는 알피니시트들의 주검 때문이었다. 마치 전장을 암시하듯, 생과 사가 그렇게 생생히 갈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장엄함을 너머 그들의 무모함에 작은 분노가 일었던 기억이 있다.

작가는 나름의 삶의 비루함을 품고, 세상을 등지고 산을 오르는 두 청년을 보여준다. 상민과 영교.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다.  그리고 합심해도 오르기 힘든, 수직빙벽이 버티고 있는 그 겨울 촐라체에서, 이들은 피터지는 다툼으로 정상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다. 그들의 실패는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는 베이스캠프의 `나(화자)'가 있다. 무엇으로 생의 의미를 갈망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현실의 인연 때문에 내면의 궁극의 목표가 희미해져 버린 한 사나이는 이 히말라야에서 그것을 발견키 위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의 종적이란, 생명의 흔적이란, 찾아보기 힘든 촐라체에 오르는 두 청년은 서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쉴새없이 내면의 자신과 다툰다.  생이 자신에게 짐지운 운명과 무방비로 상처입힌 것들에 분노하며,  고독의 극한속으로 빠져들어 있으나, 그들에겐 아름다운 정상에의 소망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상이 그들에게 남겨준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공허감이었다.  존재는 아래에서도 외롭고, 정상에서는 곱절로 공허하다.  그러므로 존재는 언제나 공허하다.  이것을 촐라체의 정상은 확인해준다. 

전설적인 알피니스트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의 낭가파르바트(히말라야에서 9번째로 높은 봉우리) 등반기인 <검은 고독 흰 고독>에서 등반 역사상 최초로 단독등반에 성공, 정상을 밟았지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는데, 이러한 감정의 폭발이 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나와 정상은 하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르다"  이 알피니스트의 정상에서의 전언을 통해, 우리는 정상이 항상 눈물겨운 감동을 선사해주지 않음을 예감할 수 있다.  대지에의 삶이나 정상에서의 존재나, 무궁무진한 감동과 기쁨, 고독과 공허를 주는 것은, 그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내면일 뿐임을 우리는 이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촐라체는 그 존재의 내면속 깊은 분노와 삶의 상처, 그리고 상대에 대한 불신의 벽을 허무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에 의미가 있다. 상민과 영교는 바라지 않았던 불우한 가정환경속에서, 무방비로 사랑과 정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전생의 모든 아픔이 그 짧은 4박 5일의 촐라체 등반을 통해 치유되고, 형제애로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들에게 생명의 끈을 건내준, 화자인 `나' 또한 그 끈을 통해 비루한 서울 생활로 상징되는 삶을 뛰어넘어, 그 방해를 뒤로하고 본질적으로 이 생에 자신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 엄혹한 촐라체가 진중한 삶이 묻어나는 글쓰기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겨울, 혹한의 설산에서 겨우 구원된 상민과 영교, 그리고 `나'는 무언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 막 깃든 희망의 불씨를 지펴보려하는 노력을 엿보인다.  그들 각자의 삶은 촐라체를 통해, 다시 정리되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작가로서의 길을 갈 것이고,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잘라낸 손과 발을 통해서라도, 이 생을 성실히 살아갈 것이란,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구점은 남아 있다.  그들을 그 엄혹한 촐라체로 내몬, 내면의 공허, 존재의 공허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질 수 없다. 나는 그것이 해결된 듯 하면서도 석연찮이 종결짓고 있는, 이 소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죽음으로 걸어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처럼 뜨겁고 단단한 사랑을 품은 사람이 어떻게 절망을 쫓아 산에 오를 수 있겠는가. `오냐, 내가 홀로 너를 넘고,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촐라체에 도전할 것이다' 피켈 하나 쥐고 단호히 촐라체 북벽을 올려다보면서 소리쳤을 그의 피어린 선인이 내 귓구멍 속을 힘차게 울렸다." <촐라체> p.321

라이홀트 메스너와 같은 알피니스트들에 의해, 히말라야의 정상들은 정복되었다.  그들의 의지와 꿈은 숭고함에 이른다. 그들의 정상에로의 헌신과 발걸음은, 인간이 스스로 설정한 생의 바리케이트는 치워질 수 있고, 치워져야 함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이들이 정상에 다다라서 한 일은, 눈물을 흘리거나 잠시 감동받은 일을 제외하곤, 다시 내려가야할 채비를 하는 것과 하산에의 경로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정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것을 통해 암시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세속의 삶이 주지 못한 것은 극지의 삶또한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본래, 고독하다.  그리고 본래, 공허하다. 세상의 물질과 이상이 그것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고독과 공허는, 이 세상속의 어떤 것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명예와 인기와 돈으로 상징되는 탑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에 우리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 화려하지만, 속으로 부패하고, 곪아터진 영혼이 그려지진 않는가 ? 물질과 명예에 부나방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 ? 내가 이 세상에 어떤 공헌을 해야 하는가 ? 그리고 영원히 변치않고, 썩지 않을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에 온통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공허하고, 언제까지나 고독할 것이다.   소설 <촐라체>는 이것을 확인해주고 있을 뿐이다.

 



 

 

200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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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삶 - 간절히 원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라
강헌구 지음 / 쌤앤파커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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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가 시작됐다.  명절이 시작되면 가장 바쁜 곳 가운데 하나인 곳에 근무하는 나는 오늘도 근무고 내일도 근무다.  근무표상 연휴가 끝나는 이틀후가 나에겐 휴일이 될 것 같다.  어제는 중학친구와 초등친구들을 만났다. 새벽 3시가 다 돼 집에 들어왔다. 아내는 자고 있었고, 몸은 지쳤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는 새벽까지 이어지는데도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홈 프렛트에 서 있으면, 선물꾸러미를 한아름씩 들고 고향을 찾아든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엔 기쁨과 함께 어두운 구석도 느껴진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그리 밝지만은 않을 그들의 얼굴이지만, 그래도 고향은 언제나 포근함으로 따뜻히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저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저들.. 동창회에 나오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 하나하나도 떠올려본다.  며칠전 앨범을 뒤지며, 그 시절에는 모두 한 인물씩했던 친구들의 모습과 지금은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며 살고 있을 그들의 늠늠한 모습이 연상돼,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제 회사에서 한 노숙인과 실랑이를 하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며칠씩 감지 않은 듯한 헝크러진 머리, 신발은 온데간데 없는 때가 낀 맨발에, 속옷이 너덜너덜 겉옷사이로 삐져나온 모습 등 전형적인 노숙인이었다.  낮에는 손님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밤에는 동네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겉으면 봐선 행색이 초라할뿐 몸은 건강한 것 같다.  사지가 멀쩡한 노숙인을 볼때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노숙인을 볼땐, 화가 날때가 많다.

저마다 사연이야 있을테지만, 그러나 저렇게 멀쩡한 몸을 지니고 민폐를 끼치는 삶은 좀체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병상에 누워 건강한 삶을 희구하고 있을까?  저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고통을 알기나 할까?  자신에게 건강한 육체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해야할 이유또한 알지 못하는 저들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 병든게 분명함이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진 재력가라도 자식에게 그 재산을 관리하고, 올바르게 쓸 줄 아는 건강한 정신을 물려주지 못한다면, 그 재산이 후대에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있는데로 큰소리를 질러대고, 고향을 찾은 사람들을 향해, 시비를 거는 그 노숙인의 상의 주머니가 볼록했다. 알고보니, 짱똘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나중엔 사람들에게 그걸로 위협아닌 위협을 하는게 아닌가 ?  볼짱 다 본 인간이구나.

강헌구의 <가슴 뛰는 삶>을 읽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삶의 비전에 관한 책이다. 비전은 인생이 나아가아할 나침반이다.  나침반이 고장나면 배가 목적지를 잃어 표류하듯이, 사람의 인생도 정처없이 떠돌게 된다. 강헌구는 이 책에서 수많은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비전을 무엇으로 세워야 하는가 ?  그 질문을 이 책의 독자에게 하고 있다.  지금껏 비전없이 살아온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당장 모든일을 놓고, 자신의 비전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직함으로 살아왔는가?  성실함으로 살아왔는가?  종교적인 신념이 당신을 지지하는가?  다 좋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걸고 평범한을 넘어, 그것 하나만을 생각할때면 언제 어느 순간이든지, 가슴이 울렁이고, 가슴이 저려오며, 가슴이 황홀해져 가슴뛰는 그러한 목적, 즉 비전을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강헌구는 이러한 비전을 통해 "Check-in your Dream, Change your Destiny !" 즉,  우리안에 내재한 꿈에 입장하고, 숙명을 바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의 숙명적인 인생의 사명, 즉 키워드를 발견했다면,  작심해서 소리쳐 출사표를 던지고 자신의 온몸을 거기에 불태우며, 파묻어, 우리의 영혼안에 그 꿈을 등록하고, 설치해서, 작동시켜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심을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난관이 우리의 앞날을 버티고 서 있는가?  그러나 걱정하지말자.  내안에 유전자 스위치를 On 시키는 순간, 무섭도록 강렬한 숨은 파워가 샘솟게 되는데, 그 힘을 바탕으로 지식의 임계질량을 돌파해서, 자신의 꿈에 관한 최고의 이론가가 되고, 플러스 울트라의 힘으로 더 멀리 나아가라고 북돋운다. 

그리고 비전의 정상궤도에 올라섰다면, 이제 죽을힘을 다해 질주하면 되는 것이다.  질주하다 보면 우리의 이름 석자가 전설적인 브랜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쉼없이 내달려온 인생에서 절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왜 사는가?  왜 비전을 이루어야 하는가 ?  라는 자기 영혼앞에 묻는 질문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만 하면 비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질주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소중한 모든 가치를 잃어버렸다면 ? 그 꿈의 성취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당신이 이기다니요 ?  천만에요, 내가 이겼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달렸잖아요?"  p.278

강헌구의 이 책은 비전을 세우고, 비전을 향해 달리며, 비전의 아름다운 종착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열심히, 성실히, 앞을 향해 살아가고 있지만, 온전한 비전의 부재앞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한번뿐인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그 소중한 삶을 최대로, 최고로, 누려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전에 관한 종합 메뉴얼이라 부를만한 이 책을 통해, 비전을 가진 자의 황홀함 삶을 느껴본다.

 

 200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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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바인딩하라 (일반편) - 기적의 노트 3P 바인더의 비밀
강규형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미국 건국의 초석을 다지고,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인생에 관한 불멸의 명언을 남긴다.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왜냐하면,인생이란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도 시간은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직장인에게 평일 하루의 일과는 대개 비슷하다.  아침에 기상해서, 출근을 하고, 그리고 회사에서 근무하고 퇴근 후 간혹 술자리에 참석하고 나머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만 본다면, 평일 평범한 직장인에게 하루는 온통 노동과 휴식이라는 간단한 방식으로 짜여진 듯 보인다. 정형화 돼 있는 이러한 시간들은 좀체, 어떤 방법으로든 부풀리거나 확장시킬 수 없다는 비관적인 시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모든 직장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까?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핑계를 뭐라고 대는가? 바로 시간이 없다, 라고 말한다. 시간이 없기에 운동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없기에 책을 읽지 못하고, 시간이 없기에 영어공부를 할 수 없다.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온통 불가능해 진 이유는, 그러니까 시간이 하루 24시간 주어졌다는 운명론과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과연 그런데 그게 맞는 말인가?  주위를 조금만 관심있게 돌아보면, 직장생활을 거뜬히 해내면서도 운동과 독서, 그리고 취미생활을 즐기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떠나며, 동호회 할동을 즐기고, 덤으로 회사에서는 인정받아 승진의 롤로코스터를 타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시간은 특별히 하루 25시간 주어진건가?

<성공을 바인딩하라>의 저자 강규형은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월급 120만원을 받던 이랜드 신입사원의 신분에서 입사 몇년만에 연봉 3억원을 받는 톱 세일즈맨으로 성장을 이루어낸 비법을, 그의 책에서 3P바인딩이라는 기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3P 바인딩은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자기성장의 시나리오다.

여기서 바인딩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그는 자기관리와 업무관리 그리고 인생 전체를 관리하는데 있어서, A5 용지를 20PIN 바인더로 묶어서 세밀하게 관리하는 기법을 만들어냈다. 그가 구성한 바인더는 항상 휴대하는 메인 바인더와 그외 수많은 보조 바인더로 구성돼 있다. 메인 바인더는 시스템 다이어리와 같은 전체적인 관리를 우선으로 하고, 세밀한 정보 관리는 보조 바인더를 새로 꾸며 관리하는 방식이다.

그는 자기경영이란 개념조차 알지못했던 시절, 이러한 바인딩을 사용해서 세밀하게 시간을 관리하고, 자신의 시간을 조직적이고 철두철미하게 기록하고, 피드백 하면서 각 기업을 거치며 항상 최고의 연봉과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자신있게 공언한다.  이 책에는 수십권에 이르는 바인더를 만들고 관리했던 노하우와 더불어 자기경영에 성공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 주어진 시간을 이용해 어떻게 성공에 이르게 되었는지 소개하고 있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하는가? 아니면 잊기 위해 기록을 하는가? 대개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한다고 대답한다. 과연 그럴까? 정답은 `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다. <메모의 기술>저자 사카토 켄지도 "기록하고 잊어라. 안심하고 잊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항상 머리를 창의적으로 쓰는 사람이 성공한다."라고 했다. p.167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즉,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 라는 말이다.  사람에게 3가지 경영이 있다. 자기경영,회사경영,사회경영이다.  그 가운데 첫째는 자기경영이다.  이러한 말은 낯설게 보인다.  그러나 회사나 국가를 경영하는 것처럼, 개인도 경영될 수 있고 경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를 경영한다는, 개념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예를 들어, 평벙함 직장인의 출근길 아침 7시로 필름을 돌려보자.

전날 마신술로, 아니면 쓸데없는 티비시청이나 유흥으로 밤늦게 잠을 청하면, 아침은 허겁지겁하기 일수다. 겨우 세수를 하고 옷갈아입고, 밥먹을 시간도 없이(직장인들 가운데 아침밥을 거르는 사람은 많다), 출근을 한다.  비몽사몽간에 출근을 하는 사람과 전날 계획적인 시간표, 즉 자기경영의 원칙대로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을 없애고 취침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뒷날 아침 출근시간보다 1~2시간 먼저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남은 시간 독서와 자기계발에 투자했다면, 그는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또렷한 정신으로 당당히 하루를 자기것으로 만들며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하루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게도 24시간이다.   자신의 돈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머니의 구멍으로 새고 있다면 펄쩍 뛸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당장에 그 구멍을 메울려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러나 24시간 가운데, 알게 모르게 새는 시간은 얼마나 많은지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없다, 라는 핑계는 이것을 알게 되면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것이다.   

나는 최근에 새롭게 프랭클린 플래너라는 시스템 다이어리를 통해, 시간 관리에 나섰다.  연간,월간,주간, 일일 계획, 그리고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할 비전과 가치를 적어 놓는 공간, 수첩 한 권으로 모든 일정을 체크하고, 과거를 피드백하고 현재와 미래를 기록하고 계획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내가 이 시간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는,  새는 시간들을 막아보자는 의도에서다.  다행히 프랭클린 플래너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들이 그 유용성을 보증하고 있다.

프랭클린 플래너를 통해, 시간 관리를 하고 있는 요즘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기록으로 보관되고 그리고 실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있다.  강규형의 <성공을 바인딩하라>를 읽고,  시간관리를 통한 자기경영에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변화된 삶은 곧 시간 배분을 통한 자기계발 시간의 확보와 누구에게도 소홀하지 않는 여유로운 생활로 되돌아 왔다. 

나는 더이상 허겁지겁 아침을 먹지 않아도 되고, 항상 나침반 없는 배처럼 먼 미래를 위해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면에서, 개인과 기업에서의 혁신은 간단한 것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내가 최근에 도입한 프랭클린 플래너와 더불어 강규형이 말하는 3P바인딩 시스템은 동일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다시 한번 벤자민 플랭클린의 시간에 대한 명언을 되씹어보고 싶다. 그만큼, 인생의 시간은 한정돼 있고 시간은 유수와 같이 덧없고 빠르다.  그 사실앞에 조바심이 일지 않는다면, 그는 여름날의 베짱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 

 

 

 

 

200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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