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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 불안 또는 회의에 관하여
필립 얀시 지음, 정영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한동안 C.S 루이스나 필립 얀시 등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그들은 이제 막 태동하는 나의 기독 신앙이 위험에 좌초되려 할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나타나 나의 신앙에 듬직한 디딤돌을 놓아 주었다. 그들은 나의 부족한 기독교적 지식을 보충해주었고, 신앙과 이성 사이의 혼란속에 시의 적절한 논리를 심어줌으로써, 기독교를 형이상학이 아닌 삶안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이끌었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나 기독교에 대한 관심, 나의 신앙은 지금 정체기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밥을 먹을때마다 기도를 하며, 교대 근무에 걸리지 않는 일요일엔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영국의 유명한 무신론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마냥, 신이 없다고 주장하며 흥분하는 사람들을 가볍게 웃어 넘기고, 그들의 깊이없는 세계관을 수정해주고 싶은 욕망이 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맹목적인 신앙인들 즉, 교회의 목사님 말을 하나님 말씀인냥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순진무지함, 교회 모임에 나올것을 종용하는 전화를 귀찮을 정도로 해대는 신자, 교회 안의 하루는 융숭깊은 신앙인이요, 교회밖의 일주일은 풍류도락가처럼 사는 이중적 인간, 성경외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으며 그것은 당연한 일인것인냥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사람을, 신이 없다고 흥분하며 그 깊이없는 혀를 놀려대는 사람만큼이나 혐오한다.
실제로 어떤 모임에서 종교얘기가 나오면,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될 때가 있다. 대게 종교란 정치와 마찬가지로 답이 없는 다툼의 소재로 전락하기 일수다. 그러나 가끔 모임의 구성이 독실한 기독교도와 무신론자, 이제 막 교회를 나가는 초보신자 정도로 구성되면, 대화의 깊이를 떠나 다양한 의견들로 그 모임은 풍성해진다. 독실한 기독교도는 무신론자와 초보 신자를 향해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지식으로, 성경이라고는 한줄 읽어본 적도 없는 이들을 주늑들게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목사의 위치에 서서 일장 설교를 한다.
이 모임의 무신론자는 목사의 설교를 듣다말고, 자신있게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얘기하는데, 솔깃해서 듣고있자면 그는 바로 그 `자신' 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교'의 신자다. 이 대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참석자는 바로 초보신자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다가, 지금껏 어떻게 교회에서 괴롭힘을 당했는지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즉,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는데도 구역예배에 나오지 않았다고 같은 신도들이 그 신앙없고 신의없음에 핀잔을 주더라는 얘기부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라는 아주 민감한 질문까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은 이 모임의 `목사'인데, 그가 공포와 위협이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애를 타이르듯 타일렀을 때 초보신자의 표정은 안도로 평안해진다.
신앙이 깊고, 오직 성경만을 알며, 교회일만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와 차를 마시며 두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성경과 신앙 얘기를 나누었다. 한때, 그는 내게 쓸데없는 책들을 보지 말고 오직 성경외의 지식에는 관심갖지 말라는 얘기를 해준적이 있다. 나의 서재를 보며, 필요없는 책들이 너무 많다고 자평을 해준적도 있다. 그의 이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그가 평소에 오직 성경이라는 인식의 틀 속에서만 안주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타종교에 대한 태도,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도들의 신앙생활, 삶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의 의견에 동조를 보냈지만, 또 어떤 부분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삶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언어들을 비유가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고, 일점일획에도 어긋나지 않은 성경적인 삶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필립 얀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작가다. C.S 루이스는 명철함이 칼날보다 더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이미지는 현실의 세상이 아니라,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연구실이다. 그러나 필립 얀시는 흔히 우리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초보신자처럼, 불안과 회의에 가득한 질문만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던지는 질문들을 좋아한다. 그의 칼럼들을 모은 책인 <비망록>의 부제를 - 불안 또는 회의에 관하여 - 라고 지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반인들에게 `크리스천'이라는 단어가 다음의 아홉 가지 자질을 연상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즉 일반인들이 크리스천들에게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p.41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어? 그런데 교회는 신도들에게 경건한 만족감이나 주고 신자가 불신자들보다 낫다는 우월감이나 심어주고 있어. 분명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교인 상호간에 상부 상조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 교인들의 생활은 바람직한 것 같아. 그렇지만 알코올 중독자는 교회에 가면 열등감과 사랑의 부재를 느껴." p.59
"마지막 순간에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는 매력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선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동기 부여를 하는 데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독자가 올바른 가정에서 양육받고, 기독교계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 살다가 심판날 임종할 때 회심한 신참보다 다음 순위로 밀려난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p.226
한참, 그 분과 얘기를 하다가 그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참고, 이렇게 물었다. "혹시 천국에 다녀오셨나요 ? 어떻게 그렇게 다녀오신 것처럼 잘 아시나요 ?" 어떻게 보면 약간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나는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처럼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설명하길래 한 질문이었다. 그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성경이 모든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신앙심의 두터움에 불만이 있는게 아니다. 그러한 신앙은 모든 신앙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독교도만이 사는게 아니고, 무수한 타종교인, 무신론자가 뒤섞여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 신앙의 정도도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그와 같이 확신에찬 믿음은 단 1%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 잣대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로 보이질 않겠는가. 그러니, 교회는 교회 밖과 담을 쌓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믿음의 폭력을 정당화 하는 집단도 생겨나는 것이라고 본다.
20세기 초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는 그의 회심기에서 이렇게 기독교적 겸양에 대해 썼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진리의 일부는 알 수 있다고 믿으나, 모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관용의 기초이며,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평화롭게 대할 수 있는 원천이다"
겸양이 부족한 기독교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질문과 의문을 자신의 저서속의 트레이드 마크인냥 내보이는 작가, 필립 얀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간조의 말처럼, 어찌 사람이 진리의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하나님만 알고 있는 것을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 때, 그 신앙은 이상한 확신으로 넘쳐나게 된다.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그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2천년전 이 땅에 오셔서 함께 어울린 사람들은, 종교 권력과 율법이란 확신으로 넘쳐난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거지와 창녀, 이방인과 범죄자 등,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인식으로라면 모두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장 12절) 라고 말씀 하심으로써, 그가 오신 이유가 낮은 자를 구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천명하셨다.
성경외에는 그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는, 그분에게 한마디 드리고 싶다. 편식을 하면 건강을 잃듯이, 영혼의 편식은 아집과 편협만을 낳을 뿐이라고.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도에게 회의는 필수 비타민이고, 질문과 의문은 올바른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영양제라고 말이다.

2008.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