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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서남서 17km, 남체 바자르 북동북 14km 지점에 위치한 6440 미터의 수직 빙벽을 자랑하는 봉우리, 그게 바로 촐라체다. 이 봉우리가 낯설게 느껴지는건 히말라야 하면, 8000 미터급의 14좌를 바로 연상해 왔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14좌가 아닌, 그 곁의 비교적 얕은 봉우리를 오르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무겁도 진중한 이야기는, 소설의 재미를 떠나서 읽는이의 가슴을 짓누른다. 수직빙벽을 자랑하는 그 높은 봉우리의 정적속에, 크레바스 안에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썩지않고 얼어버린 상태로 죽어있는 한 사람을 이야기 할때, 온 몸에 소름이 돋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죽음은 그곳 히말라야에선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언젠가 14좌 가운데 하나를 오르다 실종된 한국 산악인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한 휴먼 원정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내가 놀란 것은 그 원정대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곁에 산을 오르는 생동하는 인간들 사이로 앉아서 쉬듯, 죽어있는 알피니시트들의 주검 때문이었다. 마치 전장을 암시하듯, 생과 사가 그렇게 생생히 갈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장엄함을 너머 그들의 무모함에 작은 분노가 일었던 기억이 있다.
작가는 나름의 삶의 비루함을 품고, 세상을 등지고 산을 오르는 두 청년을 보여준다. 상민과 영교.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다. 그리고 합심해도 오르기 힘든, 수직빙벽이 버티고 있는 그 겨울 촐라체에서, 이들은 피터지는 다툼으로 정상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다. 그들의 실패는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서술하고 있는 베이스캠프의 `나(화자)'가 있다. 무엇으로 생의 의미를 갈망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현실의 인연 때문에 내면의 궁극의 목표가 희미해져 버린 한 사나이는 이 히말라야에서 그것을 발견키 위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의 종적이란, 생명의 흔적이란, 찾아보기 힘든 촐라체에 오르는 두 청년은 서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쉴새없이 내면의 자신과 다툰다. 생이 자신에게 짐지운 운명과 무방비로 상처입힌 것들에 분노하며, 고독의 극한속으로 빠져들어 있으나, 그들에겐 아름다운 정상에의 소망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상이 그들에게 남겨준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공허감이었다. 존재는 아래에서도 외롭고, 정상에서는 곱절로 공허하다. 그러므로 존재는 언제나 공허하다. 이것을 촐라체의 정상은 확인해준다.
전설적인 알피니스트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의 낭가파르바트(히말라야에서 9번째로 높은 봉우리) 등반기인 <검은 고독 흰 고독>에서 등반 역사상 최초로 단독등반에 성공, 정상을 밟았지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는데, 이러한 감정의 폭발이 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나와 정상은 하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르다" 이 알피니스트의 정상에서의 전언을 통해, 우리는 정상이 항상 눈물겨운 감동을 선사해주지 않음을 예감할 수 있다. 대지에의 삶이나 정상에서의 존재나, 무궁무진한 감동과 기쁨, 고독과 공허를 주는 것은, 그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내면일 뿐임을 우리는 이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촐라체는 그 존재의 내면속 깊은 분노와 삶의 상처, 그리고 상대에 대한 불신의 벽을 허무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에 의미가 있다. 상민과 영교는 바라지 않았던 불우한 가정환경속에서, 무방비로 사랑과 정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전생의 모든 아픔이 그 짧은 4박 5일의 촐라체 등반을 통해 치유되고, 형제애로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들에게 생명의 끈을 건내준, 화자인 `나' 또한 그 끈을 통해 비루한 서울 생활로 상징되는 삶을 뛰어넘어, 그 방해를 뒤로하고 본질적으로 이 생에 자신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 엄혹한 촐라체가 진중한 삶이 묻어나는 글쓰기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겨울, 혹한의 설산에서 겨우 구원된 상민과 영교, 그리고 `나'는 무언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 막 깃든 희망의 불씨를 지펴보려하는 노력을 엿보인다. 그들 각자의 삶은 촐라체를 통해, 다시 정리되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작가로서의 길을 갈 것이고,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잘라낸 손과 발을 통해서라도, 이 생을 성실히 살아갈 것이란,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구점은 남아 있다. 그들을 그 엄혹한 촐라체로 내몬, 내면의 공허, 존재의 공허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질 수 없다. 나는 그것이 해결된 듯 하면서도 석연찮이 종결짓고 있는, 이 소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죽음으로 걸어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처럼 뜨겁고 단단한 사랑을 품은 사람이 어떻게 절망을 쫓아 산에 오를 수 있겠는가. `오냐, 내가 홀로 너를 넘고,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촐라체에 도전할 것이다' 피켈 하나 쥐고 단호히 촐라체 북벽을 올려다보면서 소리쳤을 그의 피어린 선인이 내 귓구멍 속을 힘차게 울렸다." <촐라체> p.321
라이홀트 메스너와 같은 알피니스트들에 의해, 히말라야의 정상들은 정복되었다. 그들의 의지와 꿈은 숭고함에 이른다. 그들의 정상에로의 헌신과 발걸음은, 인간이 스스로 설정한 생의 바리케이트는 치워질 수 있고, 치워져야 함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이들이 정상에 다다라서 한 일은, 눈물을 흘리거나 잠시 감동받은 일을 제외하곤, 다시 내려가야할 채비를 하는 것과 하산에의 경로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정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것을 통해 암시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세속의 삶이 주지 못한 것은 극지의 삶또한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본래, 고독하다. 그리고 본래, 공허하다. 세상의 물질과 이상이 그것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고독과 공허는, 이 세상속의 어떤 것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명예와 인기와 돈으로 상징되는 탑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에 우리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 화려하지만, 속으로 부패하고, 곪아터진 영혼이 그려지진 않는가 ? 물질과 명예에 부나방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 ? 내가 이 세상에 어떤 공헌을 해야 하는가 ? 그리고 영원히 변치않고, 썩지 않을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에 온통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공허하고, 언제까지나 고독할 것이다. 소설 <촐라체>는 이것을 확인해주고 있을 뿐이다.

2008.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