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기술 - 심리학자의 용서 프로젝트
딕 티비츠 지음, 한미영 옮김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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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을 살아가다보면 사람이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 설 때가 있다.  거창한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사소한 일에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된다.  아니 매일 매일 그런 상황속에 맞닥뜨리는게 인생같기도 하다.  농담으로 던진 말 한마디나 무심코 한 행동 때문에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은 심리적 곤경에 빠지는 일이 있다.

성인병의 상당 부분이 잘못된 식습관이나  운동부족에 기인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가 자신의 건강을 결정짓는 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찾아가며 챙기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이 가시덩굴밭을 구르며 피흘리고 있는데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건강하고 살고 싶은가 ?  오래 살고 싶은가 ?  어느날 의사로부터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섬뜩한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오늘 당장 `용서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겸 심리상담사 딕 티비츠는 자신의 저서 <용서의 기술>(원제:Forgive to live)에서 단언한다.  "살고 싶으면 용서하라" 

`용서'란 말은 우리가 평소 자주 입에 올리고 듣기에 참 좋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한다.  용서하는 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본인을 위한 것이라고.  왜냐하면 용서란 행위 자체가 대개 자신의 마음속에서 암묵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에 대해 그 앞에 대고 `당신을 용서할게'라고 말하진 않는다.  마음속의 분노와 관계의 갈등을 치유하고 중화시키는 것이 바로 `용서'인 것이다. 

"인생은 카드 게임과 같다. 어떤 패를 받느냐는 당신 뜻과는 관계없다. 그러나 그 패를 가지고 어떤 게임을 할지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용서는 좋지 않은 패로 좋은 경기를 하는 방법이다.  " 딕 티비츠, <용서의 기술> p.69

복잡한 사회속에서 살아가다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나게 된다.  상대가 잘못된 패를 던지면 나또한 그에 반응하게 돼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매번 반응하다보면 마음은 병들고 또한 몸이 상하게 돼 있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타인을 바꿀 수는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이고, 나의 반응이다.  내가 상대를 용서하는 순간, 나 자신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과거속에 머물고, 자신을 어둠속에 가둬두게 된다.  결국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구속받는다.  인생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저자 딕 티비츠는 책의 후반부에 용서와 고혈압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 용서하고 관용적인 사람,  용서하는 연습을 하고 그것이 체화된 사람은 고혈압 증상이 상당부분 완화 됨을 증명해 보인다.   이쯤 되면 이 책의 제목이 왜 `살아가기 위해 용서하라(Forgive to live)'인지 눈치채게 된다.

외부적인 하나의 현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저자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며 그런대로 기분좋은 일이라고 얘기한다. 왜 그런가 ?  벌어진 현상은 곧바로 우리의 신체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 현상에 대해 일차적인 인식을 하게 돼 있고 그 말은 곧 벌어진 일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인식의 관점은 우리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는 말이다.  

오늘 하루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맨발로 자갈밭을 걸어온것처럼 고통스러웠더라도,  당신은 마음속 주문을 통해 자갈밭이 부드러운 모래밭으로 변화하는걸 목격할 수 있다.  그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는 용서라는 요술 지팡이를 한손에 쥐고 밝게 웃고 있다.

"당신이 어떤 불쾌한 상황을 겪더라도 의도(당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힌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했는가)와 효과(그 사람의 행동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딕 티비츠, <용서의 기술> p.64

회사에서 기분나쁜 소리를 동료에게 듣는다. 당장에 쏘아 붙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바꿔보자.  당장에 화를 내면 당신의 이미지만 실추되고, 그 사람과의 관계는 파탄날 수도 있다.  여기서 용서라는 마술과도 같은 관계의 윤활유를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반응 사이에는 언제나 이같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선택을 잘 하면, 우리의 마음은 평화롭고 인간관계는 발전하며, 인격은 한층 성숙될 수 있다.

우리의 관점은 우리의 현실을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점을 바꾸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분노라는 현상이 삶을 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리가 품은 생각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분노 대신 용서를 택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당신이 용서하기로 선택했다면 당신은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떨쳐버리고 가야 한다.  그리고 당신 삶에 책임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라는 깨달음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책임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과거가 아니라 당신의 꿈이 당신을 안내하게 만들어라. "     딕 티비츠, <용서의 기술> p.220

저자는 그러나 무턱대고 용서하는 것은 용서의 방법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분노의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용서하지 마라.  용서란 용기 있는 행위다.  용기란 상대의 잘못을 분노하지 않고, 반박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동력이다.  그것은 냉정함과 지혜가 요구되는 일이기도 하다.  버릇 나쁜 상대는  당신의 관용을 역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동질감, 내가 상대에게 실수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관용을 먼저 베풀면 그가 변화할 것이라는 신뢰. 용서하는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 상태다.  무엇보다 이 세가지에 대한 생각을 숙의하는 사회는 용서받는자도, 용서하는 자도 없을 듯 하다.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용서임에는 분명하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껏 용서가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곧 나를 위한 행위임이 이 책을 읽은 지금 분명해졌다.  먼저 내가 살기 위해, 라는 생각을 하면 상대의 무례함과 거친 언행에서 오는 분노를 자제할 수밖에 없다.  분노와 화냄, 자체가 나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섬뜩하지 않는가?    마음속을 훑어서 용서해야 할 사연들, 사람들을 불러내자.   그리고 지금 당장  `살기 위해' 그들을 용서해 주자.  아주 흥쾌히!







200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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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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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지나고 나면 이 잔인한 계절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까?  졸지에 전직 대통령도 `자살할 수 있을 정도로 모진 나라'의 국민이 되었고, 자해공갈단을 연상시키듯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무력 시위는 답답해진 가슴에 쉴틈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가지수는 북한의 핵위협 쯤이야 이미 면역이 돼 있다는 듯,  별 영향이 없음을 과시하고 정치인들은 6월의 국회에서 또 미디어법으로 한판 붙을 요량이다.  지난 5월은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라는 수식어가 민망하였다.

어렸을 적 우리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약자가 존중받는 세상, 가난한 이들도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이 정의롭다라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배웠고 상상했던 그 어린 시절부터 실제 세상은 정의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한탄할 일도 아니다.  단지, 내 마음이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정의로웠을 뿐이었을까?  이제 나이가 드니 세상사의 굴곡에 점점 무감각해져 가는 나를 느낀다.

그럼에도, 사는 동안 5월의 기억들은 아름답지 않았던가?  푸르른 초목이 아름다웠고, 봄바람이 제법 시원해질때가 되면, 5월엔 푸른 잔디밭에 누워 하늘만 봐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나의 짧은 삶 가운데 5월은 그래도 가장 평화로웠던 날들의 기억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제 해마다 5월이 오면 그 앞에 슬픈 기억들을 떠올리며, 황망히 떠나보낸 사람들을 눈물속에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저 봉화 마을의 부엉이 바위에라도 올라 지켜주지 못한 사람을 애타게 불러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서강대 영문과 교수, 뛰어난 번역가, 영어 교과서 저자, 아름다운 문장가, 에세이스트, 평생 목발을 애인처럼 끼고 다닌 사람, 서양화가 故 김점선의 친구.  이 슬픈 5월에 우리가 떠나보낸 사람 가운데 한명, 故 장영희 교수에 대한 프로필이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였던가?

2000년 초 대학 졸업반 시절이었다. 자취방 공동 화장실엔 샘터라는 잡지가 항상 놓여 있었다. 이름만 들어보고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질 않은 그 책에서 우연히 그녀의 글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잡지 뒤편에 단발머리, 초롱한 눈망울, 어색하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내 생애 단 한번>이라는 그녀의 단행본 광고였다.  그 잡지는 한 달 내내 거기 있었고, 나는 매일 그녀의 얼굴과 수필집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에세이따위엔 관심 없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독서 편력기인지라 장영희와 그 책과의 조우는 그 후로 몇년이 지나야만 했다.  아마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던 희망과 설레임 가득한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그 후 장영희의 카페에 가입했을때, 나는 무료로 신간을 나눠준다는 말에 혹하여 주소와 이름을 그곳 게시판에 남겼다.  신청자가 많아 만원이 넘어가는 하드커버의 신간을 보내줄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니 소포 하나가 와 있었다.  보낸 사람엔 서강대 장영희 교수 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받은 책이 장영희 선생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책자다.  책의 첫 장을 펴들자 "새 봄 새 희망 새 숲의 향기 전하며 "라는 메세지 밑에는 그녀의 사인과  앙증맞은 스티커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생에 처음으로 저자의 사인이 들어간 신간서적을 선물로 받았다.  아, 그때가 2005년 4월 3일이다. 

그로부터 4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2009년 5월 9일 장영희 선생님은 이 눈부신 5월,  결코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뒤로 하고 떠나셨다.  오랜 투병 생활 가운데 그러나 유고(遺稿)를 다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치 독자에게 던지는 유언처럼 두툼한 단행본 한 권을 또다시 세상에 헌정했다.  요며칠전 출퇴근길 기차안에서 4년전 생면부지의 독자에게 책이라는 가장 귀한  선물과 희망의 메세지를 남겨주었던 고마운 사람의 마지막 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만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p. 120

펀드 열풍에 무턱대고 든 펀드의 손실액은 어디 하소연도 못한 채 흔적 없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어느 마음 따뜻한 작가의 사인이 든 책 한 권은 4년이 지났어도 내 기억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걸 보면, 그녀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 책을 받은 후 몇년이 흐르고 이제 홀연히 작가는 이승을 떠났고, 책 한 권이 또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이제는 내가 직접 구해 읽은 책이다.  더 이상 그녀의 멋진 사인도, 귀여운 별모양의 스티커도 없는  책이다. 그러나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다듬은 원고는 내가 받은 또하나의 귀중한 선물에 다름 아니다.  이 황망한 계절, 책속에 가득한 감사와 희망의 언어들이 쉴새없이 나의 가슴을 위무(慰撫)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언어에도 희망이 담길 수 있고, 가식적인 사람들도 진실을 입에 담을 수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좋은 글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삶에서 건져올리는 빛나는 보석과도 같다.  그것은 흉내낸다고 쓸 수 있는 언어들이 아니다.  진정 아름답게 살지 않으면 그러한 언어들은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마지막 책속에서 장영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내가 살아보니...'라는 경험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영어에 `한 개의 속임수는 천 개의 진실을 망친다'라는 격언이 있지만, 어쩌면 그 반대, `한 개의 진실은 천 개의 속임수를 구한다'가 더욱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속이지 않는 자'가 한 명만 있어도 `속이는 자` 천 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p. 224

삶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 많은 돈, 무소불위의 권력, 좋은 아파트, 좋은 차, 좋은 음식, 로또같은 횡재.   누구나 이러한 것들을 바랄 수는 있다. 그것은 나쁜 바람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지면 우리의 내면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장영희는 말한다. 일상에서, 평범함 삶안에서, 희망과 감사를 체험하자, 라고.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행복이란 손쉽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 내가 내뱉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타인의 삶에 희망을 싹틔우고,  내가 행한 오늘의 작은 선행이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 수만 있다면, 진정 이 세상은 희망과 감사가 넘치지 않겠는가?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던 5월이 갔다.  슬픔을 남기고 이승을 떠나간 사람들, 어제까지 매일 신문,방송 지면에서 못된놈, 죽일놈이 되어야 했던 전직 대통령도 죽어서야 세상의 별이 되었다.  죽고나서야 그 진가, 그 보배로움, 그 아름다움을 깨치는 우리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주위를 둘러볼때다.  소중한 사람들이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다.  그리고 그들에게 따뜻한 배려와 친절, 사랑을 보여줄 때란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장영희 선생님의 유고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으며 마음이 참 평온해졌다. 세상사 잘 헤쳐 나가기 위해 너무 약샥빠를 필요가 없겠구나, 깨닫는다.  5월, 그녀가 남기고 간 책 한 권에서 건져올린 감사와 희망의 언어들이 슬픔속의 나를 위로한다.

 

200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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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 자서전
피터 드러커 지음, 이동현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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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로 소위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관점을 몹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남의 눈에 어떻게 비춰졌는가 하는 점은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공정한 방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외부에 비친 한 인간의 모습이란 객관성을 담보하는 대신에,  내면의 주관성이 설명될 여지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실은 당사자의 고백이 아니고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자서전 읽기야말로 평전 읽기보다 한 인간의 진실에 가닿는 적확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나는 많은 자서전을 읽질 못했지만, 자서전 읽기에 비중을 두고 싶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세기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 자서전을 읽었다.  지난해 12월 버락 오바마 자서전 읽기에 이어 근래 두번째 자서전 읽기에 도전했다. 분량이 700여 페이지에 달했다.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은 한동안 깊이 몰입돼 읽었다면, 피터 드러커 자서전은 전전 긍긍하며 읽었다.  그 이유가 아마도 문체의 난해함에 있었는지 그 철학적 깊이에 있었는지 정확하진 않다.  내게 드러커의 자서전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자서전의 서술적 독특함과 사유의 차별적인 깊이는 그 노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에 다름 아니다.

이 자서전의 독특함은 어디서 오는가?  대개 자서전이라 하면 자신의 살아온 얘기를 가장 주관적인 입장에서 연대순으로 서술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드러커는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다룬다.  자신의 삶에서 그와 깊이 관계된 사람들, 혹은 스치고 지나갔더라도 관심있었던 사람들을 자신의 시선과 생각으로 잡아두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이 자서전에서 보여준다. 그들은 드러커의 인생을 결정짓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의 할머니, 학창시절의 선생님, 그리고 회사의 상사, 동료 학자, 정치가 등이 그들이다.  얼핏보기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드러커는 애정어린 시선과 관찰을 통해 교훈을 끄집어낸다. 

이같은 이 책의 특징은 자서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성을 훼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주관성과 내밀함이다.   관찰자의 시선이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다.  경영학의 대가이자 20세기의 지성, 모든 CEO들의 멘토이자, 르네상스적 지식으로 무장한 경영학자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드러커의 내적 삶과 사연에 도달하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이 자서전의 서술방식인 객관적 거리두기에 약간 실망하지도 모른다.  드러커는 자서전의 서문에서 자신이 관찰자(구경꾼)로 평생을 살아왔음을 고백하면서 개별적 존재인 인간의 가치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주지시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얼마나 인습에 순종적인지, 또는 얼마나 보수적인지, 아니면 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지 상관없이, 일단 그가 자신의 일이나 지식, 흥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매력적인 존재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존재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p.11

드러커의 할머니는 작고 왜소하며, 항상 자신을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라고 부르며 겸손했지만, 그녀는 젊었을적 미모의 피아니스트로 클라라 슈만의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직업 연주자의 길을 포기하며, 평범한 가정의 주부로 살았으나 그녀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 준 유쾌한 사람으로 드러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한번은 이웃 아파트 아파트 꼭대기층에 사는 창녀가 감기가 걸린 것을 알고, 감기약을 건내주기 위해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꼭대기층까지 올라갔다온 할머니에게 드러커의 조카가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 숙녀가 그런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맞지 않아요" 이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 너희는 언제나 그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옮기는 끔찍한 성병만 걱정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나 역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녀가 젊은 남자에게 감기를 옮기는 일은 예방할 수 있다고." 

한번은 할머니가 식당에 들어갔다가 불친절한 여종업원을 밖으로 쫓아낸 적이 있었다. 손님을 맞는 태도가 불친절한 여종업원이 할머니에게 다가오자 할머니는 우산 손잡이를 그녀의 팔에 걸고 약간은 상냥하게 말한다. "아가씨는 교양있고 지적인 여자처럼 보이는군. 당신은 아마 직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모르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 밖으로 나가."  할머니는 우산으로 그녀를 문 쪽으로 세게 밀었다가 이렇게 덧붙인다. " 다시 들어와서 손님에게 적절한 예의를 보여봐." 이에 손자들이 할머니에게 놀라고 당황스러워 묻는다. " 하지만, 할머니, 우리는 다시 여기에 오지 않을 거잖아요. " 그러나 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저 아가씨는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잖니." 

할머니의 일화 가운데 손녀들에게 해준 약간 불가사의한 충고도 이야깃거리다. " 얘들아,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거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이에 기분이 상한 손녀들이 자신은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라고 답하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 네가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는 그때 가서 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지." 

엘자와 소피는 어린 시절, 드러커의 선생님으로 그를 훗날 교육자의 길로 인도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이다.  이들은 자매였지만, 자매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격이 판이했다. 미스 엘자가 권위를 중시했으나 담임으로 취임한 날 아이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는 완벽주의와 의외의 따뜻함을 소유한 스승이라면, 미스 소피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사랑이 넘쳤던 선생이다.  드러커는 미스 소피를 깨달음과 학습을 제공하는데 능숙한데 비해, 미스 엘자가 기술과 비전을 제시했던 스승이었다고 기억한다. 드러커는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왔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이 자매 선생님보다 더 큰 교육자를 만나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그들이 초등교육을 담당하긴 했지만, 선생님이 가져야할 교육적 철학이 확고했고 더불어 아이 각자에 대한 맞춤식 교육과 인간적인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훗날 엘자와 소피는 드러커가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에게 끝없는 영감을 불어넣어준 인물로 각인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스 엘자가 아직 살아 있으며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드러커는 몇가지 물품을 그녀에게 보내며, 모든 글씨를 타자기로 쳤으나, 사인만은 육필로 기입했다. 어린시절, 미스 엘자는 드러커의 악필을 교정해보고자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글쓰기엔 소질이 있음을 알고 그를 격려하고, 끝임없는 연습을 시키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후, 미스 엘자는 어렸을적 제자가 열 살 때 그렇게 감탄했던 아름다운 글쓰체로 답장을 보낸다. "너는 그때와 다름없는 피터 드러커임에 틀림없구나. 교편을 잡는 동안 겪었던 몇 안 되는 실패작 말이야. 너는 내게 글씨를 알아보게 쓸 수 있는 기술을 익혔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지."

"진정한 선생과 진정한 교육자에게는 게으르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멍청한 학생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생이 잘했거나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p. 201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던 어린시절, 여덟인가 아홉살 때 만난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기억은 지금껏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프로이트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프로이트가 현대정신의학이나 현대 문명에 미친 영향의 지대함을 인정하지만, 그가 당시에 일종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같은 원인을 드러커는 타인의 언행이 아닌 프로이트 자신의 이론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열살도 되지 않은 그의 눈에 비친 프로이트를 분석한것이라기 보다는 먼훗날, 프로이트를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는 어린 시절의 프로이트에 대한 그의 회고와 비판에 가깝다.  빈 의학계에서 초창기 프로이트를 무시하고, 경시했다는 그의 피해의식에 대해, 드러커는 그 당시 그만큼 심도 있게 논의되고 연구되고 논쟁이 대상이 되었던 존재는 없었을 뿐더러, 그를 단지 학계에서 `거부'했던 이유를 드러커는 그가 당시 의사로서의 윤리를 상당 부분 위반했고 그의 연구가 의학연구나 치료법이 아니라, 시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20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프로이트의 정신의학적 연구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드러커의 개인적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장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연구하면서 유아성욕 등에 대해 언급하며 당대 많은 비판을 받은적이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대한 드러커의 해석은 오늘날의 그에 대한 평가에 비하면 싸늘하긴 하지만, 이 장의 끝에서 드러커는 그의 학문이 "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좀더 매혹적인 이론인 동시에 인간적 감동을 주는 이론"이었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와 더불어 이 자서전에서 드러커는 나치즘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헨슈와 셰퍼"라는 인물을 통해 악의 본질을 묻고, 19세기의 탁월한 개인 금융업자였던 프리트베르크의 구시대적 삶을 추적하고, 타임과 포춘, 라이프 지를 창간한 헨리 루스 라는 통근 인간의 삶을 다룬다.  절대적 권위를 앞세워 GM를 이끈 앨프레드 슬론과의 만남은 그가 최초로 대기업의 경영 컨설턴트로서 경험을 쌓는 기회로 작동한다.  "미디어는 메세지다"라는 말로 유명한 마샬 맥루안과의 개인적 친분을 회고하기도 하고, 그를 테크놀러지의 위대한 예언자로 기린다.  책의 후반부 대공황 시기의 미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는 오늘 지구적 금융 위기 시대에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로 의미롭다.

드러커는 대공황 시절 미국인의 대응 방식이 "상호 의존과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려는 적극적 자세"로 넘쳐났다고 회고한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역동성과 긍정성을 함의한다. 이는 꼭 자연재해를 극복할때와 같이 미국이란 공동체가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각자가 상대방의 구원자 노릇을 했다,고 드러커는 회고하고 있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대공황을 마치 자연재해를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장황한 개인적 사연이 등장하는데 보통 "내가 어떤 식으로 극복했냐 하면" 또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느냐 하면"으로 시작하지만, 긴 이야기의 끝은 결국 이랬다. "당신도 봤지? 내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어."   <피터 드러커 자서전>, p.622

피터 드러커는 시대를 한발 앞서가는 전망과 미래적인 안목을 경영자와 근로자 모두에게 제공해왔던 학자였다.  평생 학습하는 습관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90세가 넘은 나이때까지 은퇴를 몰랐던 무서운 열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자서전을 다 읽고보니 그같은 그의 기질과 특성의 일부분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짐작하게 된다.  그는 사람을 평가할때 세속적인 유명세나 사회적 지위를 보고 어떠한 선입관을 품지 않았다. 자서전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인간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다양성이 있으며, 그같은 다양성에 단점과 장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행로안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에 섞여들지 않고, 그들 곁에서 한발 물러서 그들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자신의 인생과 학문의 교훈으로 삼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천성적인 구경꾼(관찰자)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자신밖의 세계와 인간들에 대한 방관자적 입장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삶과 사업의 성패, 세상이 돌아가는 하나의 원리원칙이란 언제나 차분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20세기 비상하던 산업사회의 기업과 근로자의 미래를 예측하는데 응용되었고, 언제나 그의 미래 예측은 높은 신뢰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30년대 드러커의 최초의 저서 <경제인의 종말>에서 히틀러 체제속의 독일의 전횡(專橫)과 세계 대전의 가능성을 예상한 일로 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지식인의 높은 지지를 얻은 바 있고, 1960년대 이후 미래의 지식 사회의 도래를 예측하고 경영인과 근로자 모두에게 지식의 중요성을 설파한 일은 그의 시대를 관통하는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라 말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경영학자, 모든 기업의 경영자들이 멘토로 삼고 싶어했던 컨설턴트인 피터 드러커는 지도자(Leader)의 조건을 어떻게 정의 내렸을까?   어떤 이가 진정한 지도자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지도자를 정의내리고, 지도자의 특성을 간파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자 진짜 `지도자'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이며 다르게 행동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리스마로 이끌지 않는다. 카리스마는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짜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끈다.  조종이 아닌 성실성으로 지배한다.  (그는)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직하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p.339

경제가 어렵고, 남북 관계가 최악으로 빠져들고 있는 지금 이 지점, 대한민국엔 피터 드러커가 설명한 지도자(Leader)가 있는가 ?  이 질문에 나는 몹시 회의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외교적으로나 남북 관계에서나 분배적인 평등, 사회 정의적 관점에서 수렁에 빠진 이유는 몹시도 단순하다.  즉, 지도자가 사심(私心)없고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란 시간의 세례를 받는다고해서 그 진가가 훼손되진 않는다.  위대한 예술작품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 가치를 배가시키는 것처럼,  한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는 그가 죽더라도 영원히 국민과 세계 시민의 마음속에 살아남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의 책을 다 읽어갈즈음에 접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내겐 크나큰 아픔이며, 충격이었다. 그러나 피터 드러커가 얘기했던 것처럼, 그 기준에 맞는 위대한 지도자를 우리는 한 때 대통령으로 가진 국민이다.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은 자신의 삶을 직접적으로 서술한 책이 아니지만,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독특한 시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피터 드러커의 깊이 있는 사유와 예리한 분석, 시대를 통찰하는 시선앞에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당당한 자신으로 살아가야할 근거를 획득하게 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200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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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돌의 기억들
현고진 지음 / 포럼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성경 <전도서>의 저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문명은 역사속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고, 새로운 기계를 발명했다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그 끝은 상상할 수 없다멀게는 우주로 가깝게는 인간의 육체로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인간의 능력은 화려하고 그 자체로 경이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성경의 선언은 곱씹어 볼수록 의미롭다길가에 놓인 흔하디흔한 돌 하나, 소리없이 강폭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소위 인간의 역사나 인간 자신보다는 오래되었음이 분명하다발길에 채이는 돌은 너무나 흔하여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무시해버릴만한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시간의 역사와 무게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것인가저 돌은 모진 시간들을 인고하여, 오늘 저 길에 놓여 있다그 존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폭과 영역을 훨씬 넘었고, 넘어설 것이다

인간이 자랑삼아 왔던 문명이란 저 돌과 물로 이루어진 지구라는 터전이 없었다면 감히 존재나 할 수나 있었을까?  만물의 영장이란 화려한 자화자찬으로 이 행성을 지배하여 왔다고 생각한 인간은 오직 개발과 발전만이 유일한 선이란 착각으로 물과 돌의 겸손함은 알지도 못한체, 무지한 삽질만 계속하려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이땅에서 벌어지는 4대강 정비사업, 대운하 프로젝트 등이 자연의 엄숙함과 겸손함을 잊은 오만한 삽질의 대표주자다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5만년 전 원시 구석기인들의 삶을 리드미컬하게 복원하고 있는 소설이다이 소설의 기록은 그대로 인류가 걸었던 발자국이고, 유전자가 저장하고 있는 원형질의 기억이다인류는 오랜 시간 무수한 발견을 이룩해냈다진보는 발견속에서 나왔고, 그걸 통해 인류는 보다 나은 삶을 향해 전진 할 수 있었다사랑의 발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 내가 너를 사랑한다 ', 라는 이 감정이야말로 5만년전 구석기인과 현대인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소설속 등장 인물들은 그 사랑의 원시적인 형태를 여러갈래로 보여주고 있다.  `주름살'은 실연를 당한다. 그가 집단에서 종적을 감춘것은  실연의 고통이 죽음을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아했던 `여우비'란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거부의 응답을 받은 그는 더이상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집단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다.  `여우비' `독뱀'에 대한 사랑은 권력지향적인 사랑이다. 잔인한 성정의 독뱀을 사랑하고, 그의 자식을 낳고자 하는 여유비의 욕망은 권력욕을 교묘하게 사랑으로 포장시킨다.  문명의 역사에서 여우비에 비견될만한 권력욕을 지닌 여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서사의 중심축은 물보라를 사이에 둔 `하늘바람' `푸른지네'의 관계다이미 하늘바람의 아내가 되어서 그의 아이까지 두고 있는 물보라를 사랑하고 있는 푸른지네는 복합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집단과 집단의 리더인 하늘바람과 푸른지네의 대립은 곧 연인 물보라에 대한 소유, 곧 사랑의 궁극적 쟁취를 목적으로 한다푸른지네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이다연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연인을 손에 넣으려는 그는 정적의 아이까지 보듬는 괴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푸른지네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건 종족간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푸른지네였다. 그는 나뭇가지에 올가미를 매달아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보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원했다.
`나를 하늘바람에게 보내 줘'
푸른지네는 올가미를 끌어올려 그의 목에 걸며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영혼이 없다. 네게 다 줘 버렸기 때문에, 네가 가면 나는 죽는다." 
                                         p.144,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그러나 지고지순함은 맹목성의 다른 이름이며 그 열정의 이면에 냉혹한 양날의 칼을 품고 있다그것은 사랑으로 미화된 폭력성이기도 하다집단의 리더가 한 여자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원시나 현대에서나 옳은 일은 아니다집단의 리더는 대의를 갖고 행동하고, 판단해야 한다푸른지네는 잘생겼고, 용맹하며, 건강하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그 모든 능력에도 불구하고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은 삶을 살 것이다.  물보라를 소유하고나서야 그가 아버지 독뱀으로부터 물려받은 잔혹성을 희석시키고, 종족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푸른지네의 사랑은 목적지향적이고, 이기적이며, 맹목적인 야만성 때문에 결코 아름답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바람'이다하늘바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개성이 특별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는 그닥 용맹하지도, 싸움을 잘하지도, 영특하지도, 잘 생기지도 않았다그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 같은 인물이다. 어느 특정한 능력을 품고 있진 않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종족의 어른인 `구름호수'의 불호령에 대의를 살필 줄 아는 자기 통제가 가능한 인물이다. 그는 `느린소'로 대표되는 원로의 지혜를 존중할 줄도 아는 인물이다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탐험가의 기질이 있다. 그는 누구도 찾질 않는 `세상의 북쪽 끝'을 항상 궁금해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이 작품속에서 사랑의 완전한 한 형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를 뺏긴 남자가 보여줄 행동이란 어느 시대건 몹시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늘바람은 푸른지네와 행복하게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는 물보라를 빼앗기 위한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푸른지네와 피를 부를 수도 있는 싸움도 포기한다여기서 하늘바람의 포기는 겁쟁이의 비겁함이 아니다그것은 푸른지네의 맹목적인 목적지향적 사랑과 비교된다.   물보라에 대한 사랑, 자신의 아이에 대한 그리움푸른지네에 대한 증오, 이 모든 감정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한발 물러서 한번 더 생각하고, 그들의 평화를 깨려하지 않고뒤돌아 자신의 길을 떠날 줄 알았던 하늘바람의 사랑은 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한차원 더 높은 사랑의 모습이다. 이 사랑을 작가는 외롭고, 비참하지만 아름답다라고 썼다.

" 하늘바람은 땅을 보고 걷는 주름살을 돌아보며 뜬금없는 물음을 툭 던졌다.
'사랑이 뭔지 아나?'
주름살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바람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걸으며 자신의 물음을 곱씹고 있었다. 사랑은 외로울 수 있다. 사랑은 비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    p.235,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소설 <물과 돌의 기억들>은 서사의 단순성이 보이며, 내용적인 측면의 흥미로운 요소가 산재해 있진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왜 사랑이 아름다워야 하는가왜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가?   남녀간의 사랑이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게 사실이다그렇다면 그 모두를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나의, 당신의, 기억속 사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진정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는가?   독자는 어떤 답을 하게 될까?

그러나 하늘바람이 보여주는 행동에는 남녀간의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요소가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그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며, 미래까지를 내다보고 있다그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을 단순히 한 인간의 욕망의 범주내에 가둬두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욕망이란 본능에 가깝지만 얼마나 많은 폐해를 불러오는가

사랑이란 욕망의 또다른 이름이다. 욕망이란 더 나쁜 의미의 탐욕으로 흐를 수 있다세상의 모든 죄악은 탐욕에서 나온다브레이크가 없는 탐욕때문에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 모두 곤경에 처하기도한다경제의 계급적 폭력성에 매몰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던 미국의 몰락이나 前대통령 측근과 가족의 패가망신은 그 좋은 예이다.  탐욕에 물든 정치인, 경제인들이 넘쳐난다모든 것이 경제 제일주의로 흐르는 지금 이 땅의 자연은 훼손의 삽질을 기다리고 있다탐욕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란 인간의 본능을 극복할 수 있음으로써하늘바람은 덜 진화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라는 원숭이가 아니라진정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였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인다. 5만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크로마뇽인'의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널려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이 덜 진화된 원숭이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늘바람처럼,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관계까지를 고려할 수 있는 그 넓은 성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자사랑을 단순히 자기 욕망의 충족행위로 해석하는 이들은 명심할 일이다.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 사랑은 호모 사피엔스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9.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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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읽은지 한참 지난 책에 리뷰를 쓰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일 같다. 감동은 휘발성이 있다. 표지가 예뻤던 김훈의 책을 출근길에 가져가 퇴근길에 다 읽고 돌아왔다.  아침과 저녁, 내 발걸음은 확연히 달랐다. 김훈의 언어들에 취한 나는 그날의 퇴근길이 새롭고 감사했다.   리뷰를 쓰겠다고 생각을 하고 한참이 지났다.  분주한 일상은 서재에 앉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 책을 읽었을때의 그 충만했던 감흥이 많이 사라진채로 뒤늦게 무언가를 적는다. 그러나 김훈의 산문들은 곱씹어볼수록 깊이 있다.  볼펜으로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다시 살펴본다.  입가에 미소가 돋는다.  다시 한번 용기를 얻는다.

4년전 이맘때 였을까?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티브이 드라마 때문이었다.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때에 접한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은 그러나 별로 좋지 않다.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소설로서 구체성이나 이야기의 흥미나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나 그런게 없었다. 마치 의미가 고도로 함축된 시처럼 쓰여진 문장들은 대선사의 깨달음을 담은 언어같았다.  <칼의 노래>의 실망은 그의 글을 외면한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4년 가까이가 지난후,  베스트셀러에 등 떠밀려 다시 잡게 된 김훈의 에세이에서 나는 그간의 오해를 풀었다. 아니 그를 좋아하게 됐다.  독자의 마음이란 변덕스럽다. 그는 산문을 쓸만한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  인생에 대해 논할만한 통찰과 시선이 있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 이순(耳順)을 넘었다.  

<바다의 기별>에서 내가 감사한 것은 일상성에 대한 평이한 느낌과 소회 덕분이다. 이렇게 살면, 또 저렇게 살면, 이런 생각을 가지면, 행복해진다 라고 뻥을 치는 책들이 참 많다.  세상을 살아가는 메뉴얼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그러한 메뉴얼대로 되는 법이란 없다. 인생은 레시피 같은게 아니다.  레시피는 무언의 폭력이기도 하다. 왜나하면, 따라하면 성공하지만 따라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라는 자명한 이중논리를 은연중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교조주의에 지쳐왔다.  그러니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면 사기가 된다. 천재도 인생을 모른다.  김훈의 글엔 반대로 솔직함이 듬뿍 묻어난다.  그는 삶을 해설하지 않고, 다만 묘사할 뿐이다.  <바다의 기별>은 인생에 대한 김훈표 레시피다.

"모든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라는 난해한 산문으로 시작된 책은 <무사한 나날들>에서 죽음의 필멸성이란 무거운 주제를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하며, 삶에서 죽음으로 흘러가는 슬픈 운명앞에서 일상성의 경건함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람의 평이한 일상이 가진 특유의 생명력과 활력을 일깨워준다. 아빠에게 용돈을 줄 나이가 된 딸아이는 한때 자신의 품안에 안겨 젖을 토하던 생명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반복되는 듯한 우리의 일상은 실은 그 무료하고, 지겨움속에 위대한 경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자랐고, 또 그 아이는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렇게 모든게 반복될 것이다.  그 안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지만, 또 누군가의 탄생이 있고, 또 누군가의 희망이 자라는 이면에 누군가의 슬픔이 채워진다.  그 모순, 그 다채로움, 그 반복성으로 특징지워질 삶의 일상성을 사랑하지 않는자여, 인생을 가타부타 논하지 마라. 김훈표 레시피의 핵심이다.

"삶은 느리고도 길게 계속되는 것이고, 무사한 그날그날 속에서 젖을 토하던 아이가 다 큰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미는 딸을 바라보며, `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기뻐했다."  p. 34  <바다의 기별>, 김훈

일상성은 사랑의 구체성에서 또한 발현된다. 사랑은 백마디 말보다는 한가지 실천이다.  우리의 삶이 말과 언어가 아니라 실제의 살아내는 행위에 있듯이, 사랑은 구체성으로 표현될 때만 마음으로 인간에게 스며들 뿐이다. 그 사랑을 이야기 하기 위해, 김훈은 도심을 달리는 소방차의 긴박한 사이렌 소리를 구원자의 사랑으로 은유한다.  기자시절, 화재 현장의 생생한 기억들은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 명료한 진실"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p. 81 <바다의 기별>, 김훈

<말과 사물>편에서 김훈은 이 시대 언어가 갖는 의미를 되짚는다. 말들이 넘쳐난다.  신문을 비교해서 읽질 않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다.  무엇이 `사실' 이고 무엇이 `의견'인지 모를 언어들이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본질은 먼저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장 가깝게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전달해야 한다.  김훈은 언론인으로 있다 작가의 길로 독립한 사람이다.  그가 더이상 이 시대의 신문이나 저널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회적 담론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이란다. "대체 이 매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도 한다.  언론인이자 말과 글을 다루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좀체 이 시대에 생산되는 말과 언어를 신용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시대 저널리즘에 대한 항복 선언일까?  그렇다면 너무 무력해 보인다.  그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들먹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칼의 노래>의 문장들이 칼끝처럼 분명하고, 명징했던 이유도 그러했다.  이순신의 일기는 명료하다. 사실만을 썼다.  언어와 진실이 일치하지 않은 사회는 불행하다.  거짓이 춤추면 말문이 막힌다.  

우리 삶의 거개의 불행도 거기서 출현한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일치시키지 못하면, 부조화에 빠지고 삶은 길을 잃는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어떻게 결단 내려야 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말과 행동부터 일치시켜야 한다.  김훈은 언어의 존재 이유, 글의 존재 이유를 소통에 두고 있다. 소통하지 않는 모든 언어는 허위란다.  사람이 말을 할 때, 글을 쓸때, 중요한 것은 세련된 언사와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순 없다. 사람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언어는 자폐적이 되고 만다. 작년 주요 언론사 신춘문예에는 특이한 경향이 있었다. 바로,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요즘 신진작가들은 너무 폐쇄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자의식은 문학의 동력이 될 순 있지만 주가 될 순 없다. 

김훈의 에세이를 읽으며 삶을 되돌아본다.  어떻게 삶을 꾸리며 나이들어가야 할까? 를 고민해본다.  이제 이순(耳順)에 다다른 작가는 삶의 비법이나 교훈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살이의 일단을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들려줄 뿐이다.  60여년의 인생동안, 언론인으로 작가로, 그리고 가장으로, 아이의 아빠로 살아왔던 삶을 품위가 깃든 사실적 언어로 그렸다. 문장은 절제돼 있고, 연필과 종이에 써내려간 글은 수공업의 공력이 전해온다.  공감가는 것은 시간의 세례를 받고도 인생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용기와 죽음에 대한 솔직한 두려움을 발설하는 일이다.  그것은 비범치 않고 속물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독자는 위안을 얻고 이 변화무쌍하지 않은 삶에, 반복되는 지겨움에,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그의 글이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밥벌이는 지겹다.  소란스럽고 감흥없는 일상도 지겨운 것이다.  반복성이란 인간을 단순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같은 공포스런 권태로부터 벗어나고파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사랑을 하고, 스포츠를 즐긴다.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여가조차 목적성아래 이루어질때, 그것도 하나의 일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일상을 벗어나려는 모든 이들의 몸부림은 김훈의 레시피에 따르면, 오류다.  일상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본질이 다른곳에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내 주위 사람은 휴일마다 여행을 간다.  가끔 그가 부럽다.   내 휴일은 당분간 똑같을 것이기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끔 그가 안쓰럽게 느껴질때도 있다.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도피일 수도 있다. 

"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p.33  <바다의 기별>, 김훈

김훈의 에세이 <바다의 기별>에서 얻은 하나의 힌트는 이 봄날 오후처럼 본래 우리 삶이 나른하지 않다는 메세지였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의 출근길에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헬렌켈러는 어느날 숲을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물었다.  당신이 걸어간 숲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친구는 특별한게 없었다고 답한다.  헬렌켈러는 이 친구의 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건강한 눈과 귀를 갖고, 그렇게 오랜 시간 숲길을 걸었으면서도 어찌 본게 아무것도 없다 답할 수 있을까?  우린 헬렌켈러의 그 친구처럼 눈뜬 장님, 들을 수 있는 귀머거리처럼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면 돼지는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이 영롱한 진주빛이란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김훈의 산문은 그걸 말해주고 있다.



 

2009.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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