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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읽은지 한참 지난 책에 리뷰를 쓰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일 같다. 감동은 휘발성이 있다. 표지가 예뻤던 김훈의 책을 출근길에 가져가 퇴근길에 다 읽고 돌아왔다. 아침과 저녁, 내 발걸음은 확연히 달랐다. 김훈의 언어들에 취한 나는 그날의 퇴근길이 새롭고 감사했다. 리뷰를 쓰겠다고 생각을 하고 한참이 지났다. 분주한 일상은 서재에 앉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 책을 읽었을때의 그 충만했던 감흥이 많이 사라진채로 뒤늦게 무언가를 적는다. 그러나 김훈의 산문들은 곱씹어볼수록 깊이 있다. 볼펜으로 밑줄을 그은 부분들을 다시 살펴본다. 입가에 미소가 돋는다. 다시 한번 용기를 얻는다.
4년전 이맘때 였을까?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티브이 드라마 때문이었다.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때에 접한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은 그러나 별로 좋지 않다.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소설로서 구체성이나 이야기의 흥미나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나 그런게 없었다. 마치 의미가 고도로 함축된 시처럼 쓰여진 문장들은 대선사의 깨달음을 담은 언어같았다. <칼의 노래>의 실망은 그의 글을 외면한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4년 가까이가 지난후, 베스트셀러에 등 떠밀려 다시 잡게 된 김훈의 에세이에서 나는 그간의 오해를 풀었다. 아니 그를 좋아하게 됐다. 독자의 마음이란 변덕스럽다. 그는 산문을 쓸만한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다. 인생에 대해 논할만한 통찰과 시선이 있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 이순(耳順)을 넘었다.
<바다의 기별>에서 내가 감사한 것은 일상성에 대한 평이한 느낌과 소회 덕분이다. 이렇게 살면, 또 저렇게 살면, 이런 생각을 가지면, 행복해진다 라고 뻥을 치는 책들이 참 많다. 세상을 살아가는 메뉴얼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그러한 메뉴얼대로 되는 법이란 없다. 인생은 레시피 같은게 아니다. 레시피는 무언의 폭력이기도 하다. 왜나하면, 따라하면 성공하지만 따라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라는 자명한 이중논리를 은연중에 내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교조주의에 지쳐왔다. 그러니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면 사기가 된다. 천재도 인생을 모른다. 김훈의 글엔 반대로 솔직함이 듬뿍 묻어난다. 그는 삶을 해설하지 않고, 다만 묘사할 뿐이다. <바다의 기별>은 인생에 대한 김훈표 레시피다.
"모든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라는 난해한 산문으로 시작된 책은 <무사한 나날들>에서 죽음의 필멸성이란 무거운 주제를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하며, 삶에서 죽음으로 흘러가는 슬픈 운명앞에서 일상성의 경건함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람의 평이한 일상이 가진 특유의 생명력과 활력을 일깨워준다. 아빠에게 용돈을 줄 나이가 된 딸아이는 한때 자신의 품안에 안겨 젖을 토하던 생명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반복되는 듯한 우리의 일상은 실은 그 무료하고, 지겨움속에 위대한 경건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자랐고, 또 그 아이는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렇게 모든게 반복될 것이다. 그 안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지만, 또 누군가의 탄생이 있고, 또 누군가의 희망이 자라는 이면에 누군가의 슬픔이 채워진다. 그 모순, 그 다채로움, 그 반복성으로 특징지워질 삶의 일상성을 사랑하지 않는자여, 인생을 가타부타 논하지 마라. 김훈표 레시피의 핵심이다.
"삶은 느리고도 길게 계속되는 것이고, 무사한 그날그날 속에서 젖을 토하던 아이가 다 큰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미는 딸을 바라보며, `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기뻐했다." p. 34 <바다의 기별>, 김훈
일상성은 사랑의 구체성에서 또한 발현된다. 사랑은 백마디 말보다는 한가지 실천이다. 우리의 삶이 말과 언어가 아니라 실제의 살아내는 행위에 있듯이, 사랑은 구체성으로 표현될 때만 마음으로 인간에게 스며들 뿐이다. 그 사랑을 이야기 하기 위해, 김훈은 도심을 달리는 소방차의 긴박한 사이렌 소리를 구원자의 사랑으로 은유한다. 기자시절, 화재 현장의 생생한 기억들은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 명료한 진실"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p. 81 <바다의 기별>, 김훈
<말과 사물>편에서 김훈은 이 시대 언어가 갖는 의미를 되짚는다. 말들이 넘쳐난다. 신문을 비교해서 읽질 않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다. 무엇이 `사실' 이고 무엇이 `의견'인지 모를 언어들이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본질은 먼저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장 가깝게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전달해야 한다. 김훈은 언론인으로 있다 작가의 길로 독립한 사람이다. 그가 더이상 이 시대의 신문이나 저널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회적 담론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이란다. "대체 이 매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도 한다. 언론인이자 말과 글을 다루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좀체 이 시대에 생산되는 말과 언어를 신용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시대 저널리즘에 대한 항복 선언일까? 그렇다면 너무 무력해 보인다. 그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들먹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칼의 노래>의 문장들이 칼끝처럼 분명하고, 명징했던 이유도 그러했다. 이순신의 일기는 명료하다. 사실만을 썼다. 언어와 진실이 일치하지 않은 사회는 불행하다. 거짓이 춤추면 말문이 막힌다.
우리 삶의 거개의 불행도 거기서 출현한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일치시키지 못하면, 부조화에 빠지고 삶은 길을 잃는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어떻게 결단 내려야 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말과 행동부터 일치시켜야 한다. 김훈은 언어의 존재 이유, 글의 존재 이유를 소통에 두고 있다. 소통하지 않는 모든 언어는 허위란다. 사람이 말을 할 때, 글을 쓸때, 중요한 것은 세련된 언사와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순 없다. 사람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언어는 자폐적이 되고 만다. 작년 주요 언론사 신춘문예에는 특이한 경향이 있었다. 바로,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요즘 신진작가들은 너무 폐쇄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자의식은 문학의 동력이 될 순 있지만 주가 될 순 없다.
김훈의 에세이를 읽으며 삶을 되돌아본다. 어떻게 삶을 꾸리며 나이들어가야 할까? 를 고민해본다. 이제 이순(耳順)에 다다른 작가는 삶의 비법이나 교훈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살이의 일단을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들려줄 뿐이다. 60여년의 인생동안, 언론인으로 작가로, 그리고 가장으로, 아이의 아빠로 살아왔던 삶을 품위가 깃든 사실적 언어로 그렸다. 문장은 절제돼 있고, 연필과 종이에 써내려간 글은 수공업의 공력이 전해온다. 공감가는 것은 시간의 세례를 받고도 인생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용기와 죽음에 대한 솔직한 두려움을 발설하는 일이다. 그것은 비범치 않고 속물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독자는 위안을 얻고 이 변화무쌍하지 않은 삶에, 반복되는 지겨움에,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그의 글이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밥벌이는 지겹다. 소란스럽고 감흥없는 일상도 지겨운 것이다. 반복성이란 인간을 단순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같은 공포스런 권태로부터 벗어나고파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사랑을 하고, 스포츠를 즐긴다.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여가조차 목적성아래 이루어질때, 그것도 하나의 일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일상을 벗어나려는 모든 이들의 몸부림은 김훈의 레시피에 따르면, 오류다. 일상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본질이 다른곳에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내 주위 사람은 휴일마다 여행을 간다. 가끔 그가 부럽다. 내 휴일은 당분간 똑같을 것이기 때문에도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끔 그가 안쓰럽게 느껴질때도 있다.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도피일 수도 있다.
"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p.33 <바다의 기별>, 김훈
김훈의 에세이 <바다의 기별>에서 얻은 하나의 힌트는 이 봄날 오후처럼 본래 우리 삶이 나른하지 않다는 메세지였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의 출근길에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헬렌켈러는 어느날 숲을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물었다. 당신이 걸어간 숲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친구는 특별한게 없었다고 답한다. 헬렌켈러는 이 친구의 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건강한 눈과 귀를 갖고, 그렇게 오랜 시간 숲길을 걸었으면서도 어찌 본게 아무것도 없다 답할 수 있을까? 우린 헬렌켈러의 그 친구처럼 눈뜬 장님, 들을 수 있는 귀머거리처럼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면 돼지는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이 영롱한 진주빛이란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김훈의 산문은 그걸 말해주고 있다.

2009.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