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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돌의 기억들
현고진 지음 / 포럼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성경 <전도서>의 저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문명은 역사속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고, 새로운 기계를 발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그 끝은 상상할 수 없다. 멀게는 우주로 가깝게는 인간의 육체로, 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인간의 능력은 화려하고 그 자체로 경이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성경의 선언은 곱씹어 볼수록 의미롭다. 길가에 놓인 흔하디흔한 돌 하나, 소리없이 강폭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소위 인간의 역사나 인간 자신보다는 오래되었음이 분명하다. 발길에 채이는 돌은 너무나 흔하여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무시해버릴만한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시간의 역사와 무게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것인가? 저 돌은 모진 시간들을 인고하여, 오늘 저 길에 놓여 있다. 그 존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폭과 영역을 훨씬 넘었고, 넘어설 것이다.
인간이 자랑삼아 왔던 문명이란 저 돌과 물로 이루어진 지구라는 터전이 없었다면 감히 존재나 할 수나 있었을까? 만물의 영장이란 화려한 자화자찬으로 이 행성을 지배하여 왔다고 생각한 인간은 오직 개발과 발전만이 유일한 선이란 착각으로 물과 돌의 겸손함은 알지도 못한체, 무지한 삽질만 계속하려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이땅에서 벌어지는 4대강 정비사업, 대운하 프로젝트 등이 자연의 엄숙함과 겸손함을 잊은 오만한 삽질의 대표주자다.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은 5만년 전 원시 구석기인들의 삶을 리드미컬하게 복원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기록은 그대로 인류가 걸었던 발자국이고, 유전자가 저장하고 있는 원형질의 기억이다. 인류는 오랜 시간 무수한 발견을 이룩해냈다. 진보는 발견속에서 나왔고, 그걸 통해 인류는 보다 나은 삶을 향해 전진 할 수 있었다. 사랑의 발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 내가 너를 사랑한다 ', 라는 이 감정이야말로 5만년전 구석기인과 현대인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소설속 등장 인물들은 그 사랑의 원시적인 형태를 여러갈래로 보여주고 있다. `주름살'은 실연를 당한다. 그가 집단에서 종적을 감춘것은 곧 실연의 고통이 죽음을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아했던 `여우비'란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거부의 응답을 받은 그는 더이상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집단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다. `여우비'의 `독뱀'에 대한 사랑은 권력지향적인 사랑이다. 잔인한 성정의 독뱀을 사랑하고, 그의 자식을 낳고자 하는 여유비의 욕망은 권력욕을 교묘하게 사랑으로 포장시킨다. 문명의 역사에서 여우비에 비견될만한 권력욕을 지닌 여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서사의 중심축은 물보라를 사이에 둔 `하늘바람'과 `푸른지네'의 관계다. 이미 하늘바람의 아내가 되어서 그의 아이까지 두고 있는 물보라를 사랑하고 있는 푸른지네는 복합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집단과 집단의 리더인 하늘바람과 푸른지네의 대립은 곧 연인 물보라에 대한 소유, 곧 사랑의 궁극적 쟁취를 목적으로 한다. 푸른지네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연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연인을 손에 넣으려는 그는 정적의 아이까지 보듬는 괴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푸른지네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건 종족간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푸른지네였다. 그는 나뭇가지에 올가미를 매달아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보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원했다.
`나를 하늘바람에게 보내 줘'
푸른지네는 올가미를 끌어올려 그의 목에 걸며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영혼이 없다. 네게 다 줘 버렸기 때문에, 네가 가면 나는 죽는다."
p.144,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그러나 지고지순함은 맹목성의 다른 이름이며 그 열정의 이면에 냉혹한 양날의 칼을 품고 있다. 그것은 사랑으로 미화된 폭력성이기도 하다. 집단의 리더가 한 여자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원시나 현대에서나 옳은 일은 아니다. 집단의 리더는 대의를 갖고 행동하고, 판단해야 한다. 푸른지네는 잘생겼고, 용맹하며, 건강하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그 모든 능력에도 불구하고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은 삶을 살 것이다. 물보라를 소유하고나서야 그가 아버지 독뱀으로부터 물려받은 잔혹성을 희석시키고, 종족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푸른지네의 사랑은 목적지향적이고, 이기적이며, 맹목적인 야만성 때문에 결코 아름답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바람'이다. 하늘바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개성이 특별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는 그닥 용맹하지도, 싸움을 잘하지도, 영특하지도, 잘 생기지도 않았다. 그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 같은 인물이다. 어느 특정한 능력을 품고 있진 않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종족의 어른인 `구름호수'의 불호령에 대의를 살필 줄 아는 자기 통제가 가능한 인물이다. 그는 `느린소'로 대표되는 원로의 지혜를 존중할 줄도 아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탐험가의 기질이 있다. 그는 누구도 찾질 않는 `세상의 북쪽 끝'을 항상 궁금해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이 작품속에서 사랑의 완전한 한 형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를 뺏긴 남자가 보여줄 행동이란 어느 시대건 몹시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늘바람은 푸른지네와 행복하게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는 물보라를 빼앗기 위한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푸른지네와 피를 부를 수도 있는 싸움도 포기한다. 여기서 하늘바람의 포기는 겁쟁이의 비겁함이 아니다. 그것은 푸른지네의 맹목적인 목적지향적 사랑과 비교된다. 물보라에 대한 사랑, 자신의 아이에 대한 그리움, 푸른지네에 대한 증오, 이 모든 감정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한발 물러서 한번 더 생각하고, 그들의 평화를 깨려하지 않고, 뒤돌아 자신의 길을 떠날 줄 알았던 하늘바람의 사랑은 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한차원 더 높은 사랑의 모습이다. 이 사랑을 작가는 외롭고, 비참하지만 아름답다라고 썼다.
" 하늘바람은 땅을 보고 걷는 주름살을 돌아보며 뜬금없는 물음을 툭 던졌다.
'사랑이 뭔지 아나?'
주름살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바람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걸으며 자신의 물음을 곱씹고 있었다. 사랑은 외로울 수 있다. 사랑은 비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 p.235,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소설 <물과 돌의 기억들>은 서사의 단순성이 보이며, 내용적인 측면의 흥미로운 요소가 산재해 있진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왜 사랑이 아름다워야 하는가 ? 왜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가? 남녀간의 사랑이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모두를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당신의, 기억속 사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진정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는가? 독자는 어떤 답을 하게 될까?
그러나 하늘바람이 보여주는 행동에는 남녀간의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요소가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며, 미래까지를 내다보고 있다. 그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을 단순히 한 인간의 욕망의 범주내에 가둬두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욕망이란 본능에 가깝지만 얼마나 많은 폐해를 불러오는가?
사랑이란 욕망의 또다른 이름이다. 욕망이란 더 나쁜 의미의 탐욕으로 흐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죄악은 탐욕에서 나온다.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때문에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 모두 곤경에 처하기도한다. 경제의 계급적 폭력성에 매몰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던 미국의 몰락이나 前대통령 측근과 가족의 패가망신은 그 좋은 예이다. 탐욕에 물든 정치인, 경제인들이 넘쳐난다. 모든 것이 경제 제일주의로 흐르는 지금 이 땅의 자연은 훼손의 삽질을 기다리고 있다. 탐욕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란 인간의 본능을 극복할 수 있음으로써, 하늘바람은 덜 진화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라는 원숭이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였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인다. 5만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나 `크로마뇽인'의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널려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이 덜 진화된 원숭이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늘바람’처럼,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관계까지를 고려할 수 있는 그 넓은 성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자. 사랑을 단순히 자기 욕망의 충족행위로 해석하는 이들은 명심할 일이다.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 사랑은 호모 사피엔스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9.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