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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음 - 정약용 산문 선집 ㅣ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1
정약용 지음, 박혜숙 엮어옮김 / 돌베개 / 2008년 6월
평점 :
1. 시작 - 고전 읽기의 오류
한때 고전(古典) 읽기에 치중했던 적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일이다. 문학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푸스>에서부터 19세기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까지, 철학으로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까지. 그리고 서양의 많은 역사서와 인문 서적들을 긁어 모았고 경박한 현대의 서적들이 갖지 못한 가치들을 고전으로부터 발견하고 나름 뿌듯해했다. 그러나 훗날 되돌아보니 이것은 몹시도 무가치한 독서였다.
고전에 대한 가치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모두 서양의 문명 속에 함몰된 것이었다. 우리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고, 5천년의 풍부한 문화적 관습 속에 살아가는 사람으로 고전을 읽는다고 했지만 고작 손에 잡은 것은 서양의 문학과 철학책이었다. 나름 책읽기를 좋아하고, 책 읽기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왜 이러한 편협에 이르렀을까? 요즘 들어 일상적인 독서에 기초적인 성찰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성찰 안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은 다름아닌 다산 정약용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다산은 전라도 강진 땅 귤동마을에 있었다. 한양으로부터 형극(荊棘)의 유배길을 나선지 십 년 가까운 시간이 다 돼 가던 시간. 다산은 귤동마을 다산초당에 거하며, 임금의 사랑도 잊고 벼슬길의 영광도 뒤로한 채 쓸쓸히 마흔 후반과 오십 초반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나라에 큰 죄를 짓고 폐족(廢族)이 되어,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강진 땅에 와 있었다. 18세기 조선 후반 권력 구도는 정조 임금이 승하한 후, 노론계열이 남인 유식층을 몰아내는데 온 힘을 쏟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서슬 퍼런 시절 정약용이 목숨을 구한 것만도 천운이라 부를 만 했다. 다산이 지은 죄라곤 십 수년 전 천주학 서적을 읽었다는 것, 그의 주위에 천주학에 빠진 이들이 몇 있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다산은 결국 유배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보복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같은 예는 흔하다. 조선 500년 역사 자체가 당쟁의 피 비린 내 나는 싸움터였기 때문이다. 역사란 냉혹한 것이라서 거대한 흐름 속에 한 개인의 운명 따윈 게으치 않는 게 그 순리 아니던가? 그럼에도 나는 다산이 안타깝고 그 운명이 아프다. 만약, 다산을 지극히 사랑했던 정조 임금이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앞날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역사적 추론이 마음속에 일렁인다. 만약, 그의 실학사상이 제도권 안에서 빛을 발할 수만 있었다면 그의 유배 이후 100년 훗날 나라가 망하는 수치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미래에 남북분단의 현재적 비극이 이어지지도 않았을 거란 가정을 하게 된다.
오늘날 다산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다. 200년 전 유배지에서 고독과 슬픔을 안으로 삼키고, 역사적인 저작들을 써 내려갔을 고통의 시간들에 비하면 이것은 분명 격세지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 또한 그의 웅대한 영혼 속에 파묻히고 싶은 욕망에 포위되었다. 그 절정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서양적인 것이 점령해 버린 현대, 21세기 대한민국, 학문과 문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양의 그림과 서양의 음악과 서양의 문학이 더 우월하고, 우리의 문화란 빈곤하고 초라하단 편견 속에 전도된 문화적 자부심이 부재한 시절, 다산이야말로 그 모든 편파적인 사고틀을 통쾌하게 전복시키고, 수정할 단 한 분의 위인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사 속에 세계에 떳떳하게 내놓을만한 대학자가 불과 200여 년 전 이 땅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다는 사실, 조선왕조의 부패한 정치상황 속에서 백성을 위한 사랑이 넘쳐 흘렀던 단 한 분의 따뜻한 목민관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와 더불어 오늘날 관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명저(名著) 목민심서의 저자가 바로 그였다는 사실들이 그 같은 전복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근거다. 다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200년 전 오롯이 조선땅에 우리처럼 발 붙이고 살았던 그의 영혼, 그 마음 안으로 들어가고 싶단 소망을 솟게 한다. <다산의 마음>, (돌베개, 2008 박혜숙 편역)을 읽게 된 것은 그러므로 내겐 필연과도 같다.
2. 만남 - 讀者, 다산의 마음에 가닿다
이 책에 소개된 다산의 글들은 진정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조선의 대학자이며, 500여권의 여유당 전서를 남김으로써 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이 된 사람, 감히 넘겨짚을 수 없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더불어, 이 책 안에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해서 언제나 그 고통을 잊지 않고 함께 슬퍼할 줄 알았던 영원한 목민관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한다. 먼 귀양지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고향 땅의 자식과 아내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따뜻한 아비와 남편의 모습도 놓치면 안 된다. 가난과 명예가 학문하는 길의 방해물이나 그 목적이 될 수 없음을 피력하는 것에서 후학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난다. 어느 글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마음 가득 절절히 독자의 가슴을 적시는 것은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진정성 때문이다. 그것은 다산의 성정(性情)의 기본을 이루는 인간다움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라는 글은 유배지에서 52살에 지은 글이다. 세상일이란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움만이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진리를 풀어 설명한 글이다. 노론정권의 핍박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되고,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 일순간 폐족이 되었지만 이 절망의 순간에도 다산은 삶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 한다. 그래서 "성안에서 있을 적에는 항상 마음이 울적하고 갑갑했지만, 다산에서 살게 된 이후 안개와 노을을 구경하고 꽃과 나무를 즐기면서 귀양살이의 시름을 훨훨 잊게 되었다"(p.30)라고 쓴다. 모든 게 마음씀씀이에 달렸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긍정하라. 다산의 단출한 가르침이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일독해야 할 글이 있다. `정치 잘 하는 법'이란 글이다. 다산은 중국의 고사 하나를 끌어와 모름지기 정치와 정치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명확한 설명을 해 보인다. 중국의 전설적인 선인(仙人)은 부구옹에게 어느 날 한 현령이 와 물었다. 정치 잘 하는 법이 무엇입니까? 이에 부구옹이 답한다. "그대는 들으려는가? 염(廉), 염(廉), 염(廉)이다." 이에 현령이 의뭉스러워하자. 풀어서 답한다. 다산은 이렇게 썼다. " 내 그대에게 말해 주겠네, 청렴함은 밝음을 낳는다. 그러니 사물의 실상이 훤히 드러날 것이다. 청렴함은 위엄을 낳는다. 그러니 백성들이 모두 그대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청렴함은 강직함을 낳는다. 그러니 상관이 그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이래도 정치 잘하는 방법으로서 부족한가?"(p.84) 다산은 정조시절 두 번의 관직생활을 했다.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짧게 재임했던 것이다. 그의 관직생활을 단 한자로 정리할 수 있다. 염(廉)이다.
다산은 모두 6남 3녀를 낳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아이가 2남 1녀이니 죽은 아이가 4남 2녀나 된다. 그것도 모두 돌 전후의 애틋한 시간을 함께 있다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말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요, 세상의 조화인데 그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는가? 그러나 유배 온 지 얼마 안되어 잃은 농(農)이는 각별했고 그래 고통이 몇 배는 컸으리라. 이 슬픔의 장 `우리 농이'에서 다산은 아이 잃은 슬픔을 이렇게 묘사한다. " 네가 이 세상에 왔다가 떠날 때까지가 겨우 3년인데, 나와 헤어져 산 게 2년이나 되는구나. 사람이 60년을 산다면, 40년 동안이나 아버지와 떨어져 산 셈이니, 참 슬프구나." (p.136) 이제 돌도 되지 않은 딸아이를 키우는 나는 출근하면 아른거리는 것이 아내의 얼굴이 아닌 딸아이의 얼굴이다. 부모 된 심정으로 통곡했을 유배지에서의 다산을 통해, 200년이란 시간은 온데간데 없이 그 심사에 온전히 공명(共鳴)한다.
세상살이란 고달프기 마련이다. 그러나 느리게 걷더라도 가야 할 길은 가야하고, 받은 잔은 반드시 마셔야 하는 것이 세상이치다. 조선 왕조의 석학 다산은 이 고달픈 우리네 삶에 작은 힌트를 준다. `두 글자의 부적'이란 글에서 다산은 세상 살이의 이치를 설명한다. " 나는 너희들에게 전원을 물려줄 수 있을 정도의 벼슬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의 부적이 있어 지금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들은 하찮게 생각하지 마라. 한 글자는 `부지런할 근(勤)'자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검(儉)'자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p.200) 미국 헌법을 기초한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가난한 집안의 17자녀 가운데 15째로 태어나 정규교육을 2년밖에 받지 않았다. 그가 성공의 조건으로 훗날 자서전에 남긴 교훈 가운데 두 가지가 바로 다산이 말한 검소함과 근면함이다. 동서양의 석학이 모두 인생의 성공 조건으로 언급한 것이라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결실 - 독서의 근본을 세우다
어느덧 강진 땅 귤동마을 다산초당에 가본지도 몇 해가 흘렀다. 대학 시절과 사회에 나와 한번씩 그러니까 딱 두 번 그곳에 다녀왔다. 한번은 관광지처럼 마음 편히 생각하고 들렀던 곳. 그러나 몇 해가 흐르고 다산 선생의 글 몇 줄을 읽고 나서야 겨우 나는 그 공간에 서서 가슴 끝이 먹먹해오는 감정에 휩싸였다. 200년 전 다산 선생님이 초당 곳곳에 남겨놓으신 흔적들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정치적 이해 때문에 형제를 잃고, 가문이 망하고, 폐족이 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학문하는 자의 강직함과 평생 목민관으로서 애민(愛民)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고독과 슬픔 그리고 억울함은 그가 훗날 역사에 남을 저작들을 집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세상 살이의 고달픔과 분주함 때문일는지 초당에 다녀온 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밀려오는 도덕적인 결핍들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빈궁해지려 할 때마다, 아니 책장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목민심서와 그의 산문집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다산의 마음과 그곳 초당의 풍광들을 그리워했다.
한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의 책 읽기가 지금 멈추어 있다. 무턱대고 많은 책을 읽으려다 제풀로 지친 격이다. 그러나 따지고 들어가보면, 나의 책 읽기에 하나의 중요한 결핍이 존재함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것은 고전읽기의 오랜 편협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우연의 일치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다산의 글을 읽다가 깨우친 것이다. 내게 독서의 근본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가? 왜 그 많은 책들을 사 모으는가? 한번도 제대로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아니, 나는 물을만한 용기가 없었다. 목적의식 없는 독서, 근본이 세워지지 않은 독서는 무위한 일이다. 그것은 영원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고역(苦役)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할 것이고, 지극한 인간다움에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의 근본은 孝과 敬이다. 다산 선생은 이 책 `오직 독서뿐'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 근본이 무엇인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 근본이 무엇인가? 효도와 공경이다." p.185, {다산의 마음}, 박혜숙 편역
다산의 짧은 글이 잠깐 잠깐 맛 뵈듯 선보이는 이 책 속에서 나는 오늘 이 시대 살아 있는 다산의 존재감과 마주한다. 권력을 향해 끝없이 해바라기 하던 그 탐욕스런 인간들 사이에서 한 발 빗겨나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옷 한 벌을 걸치고, 초당의 정적 속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저작들을 써 내려갔을 그의 고독한 시간들을 상상한다.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 받는 정치가 호치민이 평생 베갯머리에 두고 삶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목민심서의 웅혼한 문장들이 지금 이 시간, 이 세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는 것은 그 문장에 담긴 진정성, 곧 진실들 때문이다. 오늘 다산의 업적과 삶의 편린들이 평범한 한 아내의 남편,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아이의 그 순진무구한 얼굴, 부모님의 자애로운 보살핌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이 시대 독서하는 자의 근본에 대해 묻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며, 인간다움이다. 다산은 역사의 스승이자, 지금 이 시간 내 영혼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아닌가?
2009.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