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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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책읽기의 개인사가 있기 마련이다.  그 개인사는 현실의 역사만큼이나 굴곡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인생에 큰 파동을 일으킬만한 위력을 지닌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질 않고도 인생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하다.  그들의 저 만족스런 표정을 보라. 그건 잠시 내 주위의 지인들 면면을 머릿속에서 돌려보면 간단한 답이 나온다.  그들은 책을 읽질 않는다.  시간이 남으면 어떻게 그 시간을 KILL(죽일까)를 고민한다.   그러고도 어떤 안타까움이나 조바심을 찾아볼 순 없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 둘을 비교해 본다한들 확연히 그 차이가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술자리에서나 사석에서 이야길 풀어놓는걸 보면,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가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흔하다.  술기운에 말을 잘할 수는 있겠지만,  잡담,험담의 수준을 넘어서질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다.    대화의 소재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눈높이가 필요한 경우가 그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생의 마인드로 아이들은 업그레이드 된다.  그러나 어른들은 왜 그러질 못할까? 

4,50의 나이에도 무협지나 만화에만 빠져지내는걸 취미의 일종으로 여길 순 있다.  취미 생활은 여유로움과 피로의 회복을 인생에 제공하는 유익한 활동이니까.  그러나 공자님이 선언하신 인생의 꼭지점,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도록 공상과 재미만 추구하는 인생은 누가보아도 가볍고 철없는게 아닌가?  

정혜윤 CBS PD의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한 프로 독서가가 어떻게 책과 인물, 인생에 대해 색다른 변주를 보여주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이 사회 유명 작가, 영화감독, 배우 등의 책읽기 편력에 대해 들려주는 듯한 책이지만 정혜윤은 이같은 단순한 서술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친분으로 그들을 인터뷰하고, 책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정혜윤의 책에 대한 지식과 동경, 집착, 기억 등과 버무려지는 과정을 거친다.  한 인물의 책읽기의 편력에서 시작한 서술은 지은이의 책에 대한 느낌으로 기술되고, 마무리 된다.  그 사이에 실제 인터뷰이(Interviewee)의 목소리는 잦아지고, 인터뷰어(Interviewer)의 톤이 높아진다.

이같은 서술 방식은 책읽기의 프로답게 독특하고 능란하다.  이 책에서 소개한 인물들을 보라.  한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독서가들 아닌가?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은희경, 신경숙, 박노자.  이들이 읽은 책과 그 책에서 갈피처럼 꽂아놓은 시간의 기억들과 보조를 맞추기란 서술자의 풍부한 독서량과 이해력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혜윤은 그들 못지 않은 책읽기의 프로라 인정해 줘야 한다.   

그러나 눈에 거슬리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이나 책의 표지를 훑어보면서 독자가 기대했을 것과는 판이한 정혜윤 식 서술 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될 수 있겠다.  독자는 아무래도 정혜윤의 독서 편력과 인생사보다는 여기에 인터뷰 된 인물들의 책읽기 편력에 더 관심이 많았을 테니까.   곳곳에 보이는 몽환적인 정혜윤의 문장들도 눈에 거슬린다.    내가 흔히 흥미롭게 보아오는 신문의 작가 인터뷰 기사 만큼의 깔끔함과 생동감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작가의 인터뷰에서조차 서술자가 지나치게 개입해 자의식을 흘려 놓는다면,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작가만 설쳐대는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물론 이 책의 미덕은 충분하다.  서술의 깊이과 변주의 능란함은 엄청난 독서량과 지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처음부터 끝까지를 채우고 있는 것또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책에 대한 애정과 책읽기에 대한 열정이다.  덧붙여, 그들이 선택해 읽었던 독서목록의 폭을 충분히 벤치마킹할 필요성이다. 독서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전을 읽지 않고, 베스트셀러에나 기웃거리며 통찰력 있는 독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선도적인 독서가들의 책읽기 여정에 덧붙여, 그들이 선택한 책 목록을 친절하게 책의 뒷편에 묶어둔 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로서 감사할 일이다.

이 시대 내노라하는 작가이자 감독이자 배우들인 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독서가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능수능란한 책읽기는 개인적인 인생사에 따라 다른 길을 걷고 다른 목록을 취하고는 있지만, 저마다 도달한 곳은  한 인간이 일군 개성적 세계이며, 그 세계가 보여주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책안에 길이 있다, 라는 걸 그들의 삶은 확실히 증명한다.

이 책이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과 재미있는 착각을 제공해준 것도 언급해야겠다. 진중권이 초경량 비행기로 비행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 더군다나 거금을 주고 초경량 비행기를 아예 사 버린일은 놀랍고 부러운 일이다.  김탁환이 어렸을적 앓었던 지병으로 한 때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이 그의 문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거란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박노자의 이름이 러시아의 아들이란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  국내에선 일자리가 없어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에서 교수 자리를 얻었다는 점.  그리고 착각 하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의 저자가 선혜윤씨(개그맨 신동엽의 아내)라고 생각한 나의 무지.  그래서 왜 재밌는 남편 얘기는 하나도 없을까? 라는 불만이 가끔씩 일었다는 점.  검색해보니, 그건 나의 우스운 착각이었다.  정혜윤씨는 CBS PD,  선혜윤씨는 MBC PD였다.  :>

 


 

200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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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음 - 정약용 산문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1
정약용 지음, 박혜숙 엮어옮김 / 돌베개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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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고전 읽기의 오류


한때 고전(古典) 읽기에 치중했던 적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일이다문학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푸스>에서부터 19세기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까지, 철학으로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까지. 그리고 서양의 많은 역사서와 인문 서적들을 긁어 모았고 경박한 현대의 서적들이 갖지 못한 가치들을 고전으로부터 발견하고 나름 뿌듯해했다.   그러나 훗날 되돌아보니 이것은 몹시도 무가치한 독서였다.  

고전에 대한 가치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모두 서양의 문명 속에 함몰된 것이었다. 우리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고, 5천년의 풍부한 문화적 관습 속에 살아가는 사람으로 고전을 읽는다고 했지만 고작 손에 잡은 것은 서양의 문학과 철학책이었다.  나름 책읽기를 좋아하고, 책 읽기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왜 이러한 편협에 이르렀을까?  요즘 들어 일상적인 독서에 기초적인 성찰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이 성찰 안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은 다름아닌 다산 약용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다산은 전라도 강진 땅 귤동마을에 있었다한양으로부터 형극(荊棘)의 유배길을 나선지 십 년 가까운 시간이 다 돼 가던 시간. 다산은 귤동마을 다산초당에 거하며, 임금의 사랑도 잊고 벼슬길의 영광도 뒤로한 채 쓸쓸히 마흔 후반과 오십 초반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나라에 큰 죄를 짓고 폐족(廢族)이 되어,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강진 땅에 와 있었다. 18세기 조선 후반 권력 구도는 정조 임금이 승하한 후, 노론계열이 남인 유식층을 몰아내는데 온 힘을 쏟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서슬 퍼런 시절 정약용이 목숨을 구한 것만도 천운이라 부를 만 했다다산이 지은 죄라곤 십 수년 전 천주학 서적을 읽었다는 것, 그의 주위에 천주학에 빠진 이들이 몇 있었다는 것이 전부였다다산은 결국 유배되었다이것은 정치적 보복이었다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같은 예는 흔하다. 조선 500년 역사 자체가 당쟁의 피 비린 내 나는 싸움터였기 때문이다역사란 냉혹한 것이라서 거대한 흐름 속에 한 개인의 운명 따윈 게으치 않는 게 그 순리 아니던가그럼에도 나는 다산이 안타깝고 그 운명이 아프다만약, 다산을 지극히 사랑했던 정조 임금이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앞날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역사적 추론이 마음속에 일렁인다. 만약, 그의 실학사상이 제도권 안에서 빛을 발할 수만 있었다면 그의 유배 이후 100년 훗날 나라가 망하는 수치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미래에 남북분단의 현재적 비극이 이어지지도 않았을 거란 가정을 하게 된다.

오늘날 다산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다.  200 전 유배지에서 고독과 슬픔을 안으로 삼키고, 역사적인 저작들을 써 내려갔을 고통의 시간들에 비하면 이것은 분명 격세지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 또한 그의 웅대한 영혼 속에 파묻히고 싶은 욕망에 포위되었다.  그 절정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 아닐까서양적인 것이 점령해 버린 현대, 21세기 대한민국, 학문과 문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서양의 그림과 서양의 음악과 서양의 문학이 더 우월하고, 우리의 문화란 빈곤하고 초라하단 편견 속에 전도된 문화적 자부심이 부재한 시절, 다산이야말로 그 모든 편파적인 사고틀을 통쾌하게 전복시키고, 수정할 단 한 분의 위인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역사 속에 세계에 떳떳하게 내놓을만한 대학자가 불과 200여 년 전 이 땅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다는 사실, 조선왕조의 부패한 정치상황 속에서 백성을 위한 사랑이 넘쳐 흘렀던  한 분의 따뜻한 목민관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와 더불어 오늘날 관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명저(名著) 목민심서의 저자가 바로 그였다는 사실들이 그 같은 전복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근거다다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200년 전 오롯이 조선땅에 우리처럼 발 붙이고 살았던 그의 영혼, 그 마음 안으로 들어가고 싶단 소망을 솟게 한다<다산의 마음>, (돌베개, 2008 박혜숙 편역)을 읽게 된 것은 그러므로 내겐 필연과도 같다.
 

2. 만남 - 讀者, 다산의 마음에 가닿다 

이 책에 소개된 다산의 글들은 진정 그가 어떤 부류의 인간이었는지를 설명한다조선의 대학자이며, 500여권의 여유당 전서를 남김으로써 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이 된 사람, 감히 넘겨짚을 수 없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더불어, 이 책 안에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해서 언제나 그 고통을 잊지 않고 함께 슬퍼할 줄 알았던 영원한 목민관으로서의 면모를 확인한다먼 귀양지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고향 땅의 자식과 아내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따뜻한 아비와 남편의 모습도 놓치면 안 된다.  가난과 명예가 학문하는 길의 방해물이나 그 목적이 될 수 없음을 피력하는 것에서 후학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난다어느 글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마음 가득 절절히 독자의 가슴을 적시는 것은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진정성 때문이다.  그것은 다산의 성정(性情)의 기본을 이루는 인간다움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라는 글은 유배지에서 52살에 지은 글이다.  세상일이란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움만이 있는 게 아니다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진리를 풀어 설명한 글이다노론정권의 핍박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되고,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일순간 폐족이 되었지만 이 절망의 순간에도 다산은 삶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 한다그래서 "성안에서 있을 적에는 항상 마음이 울적하고 갑갑했지만, 다산에서 살게 된 이후 안개와 노을을 구경하고 꽃과 나무를 즐기면서 귀양살이의 시름을 훨훨 잊게 되었다"(p.30)라고 쓴다모든 게 마음씀씀이에 달렸다행복해지고 싶다면 긍정하라다산의 단출한 가르침이다.

정치인들이 반드시 일독해야 할 글이 있다. `정치 잘 하는 법'이란 글이다. 다산은 중국의 고사 하나를 끌어와 모름지기 정치와 정치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명확한 설명을 해 보인다중국의 전설적인 선인(仙人)은 부구옹에게 어느 날 한 현령이 와 물었다정치 잘 하는 법이 무엇입니까이에 부구옹이 답한다.  "그대는 들으려는가? (), (), ()이다."   이에 현령이 의뭉스러워하자. 풀어서 답한다.   다산은 이렇게 썼다. " 내 그대에게 말해 주겠네, 청렴함은 밝음을 낳는다. 그러니 사물의 실상이 훤히 드러날 것이다. 청렴함은 위엄을 낳는다. 그러니 백성들이 모두 그대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청렴함은 강직함을 낳는다. 그러니 상관이 그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이래도 정치 잘하는 방법으로서 부족한가?"(p.84)  다산은 정조시절 두 번의 관직생활을 했다.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짧게 재임했던 것이다. 그의 관직생활을 단 한자로 정리할 수 있다.  ()이다.

다산은 모두 6 3녀를 낳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아이가 2 1녀이니 죽은 아이가 4 2녀나 된다. 그것도 모두 돌 전후의 애틋한 시간을 함께 있다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말았다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요, 세상의 조화인데 그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었겠는가그러나 유배 온 지 얼마 안되어 잃은 농()이는 각별했고 그래 고통이 몇 배는 컸으리라이 슬픔의 장 `우리 농이'에서 다산은 아이 잃은 슬픔을 이렇게 묘사한다. " 네가 이 세상에 왔다가 떠날 때까지가 겨우 3년인데, 나와 헤어져 산 게 2년이나 되는구나. 사람이 60년을 산다면, 40년 동안이나 아버지와 떨어져 산 셈이니, 참 슬프구나." (p.136)  이제 돌도 되지 않은 딸아이를 키우는 나는 출근하면 아른거리는 것이 아내의 얼굴이 아닌 딸아이의 얼굴이다. 부모 된 심정으로 통곡했을 유배지에서의 다산을 통해, 200년이란 시간은 온데간데 없이 그 심사에 온전히 공명(共鳴)한다.

세상살이란 고달프기 마련이다그러나 느리게 걷더라도 가야 할 길은 가야하고, 받은 잔은 반드시 마셔야 하는 것이 세상이치다조선 왕조의 석학 다산은 이 고달픈 우리네 삶에 작은 힌트를 준다. `두 글자의 부적'이란 글에서 다산은 세상 살이의 이치를 설명한다. " 나는 너희들에게 전원을 물려줄 수 있을 정도의 벼슬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의 부적이 있어 지금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들은 하찮게 생각하지 마라. 한 글자는 `부지런할 근()'자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검()'자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p.200)  미국 헌법을 기초한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가난한 집안의 17자녀 가운데 15째로 태어나 정규교육을 2년밖에 받지 않았다. 그가 성공의 조건으로 훗날 자서전에 남긴 교훈 가운데 두 가지가 바로 다산이 말한 검소함과 근면함이다동서양의 석학이 모두 인생의 성공 조건으로 언급한 것이라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결실 - 독서의 근본을 세우다 

어느덧 강진 땅 귤동마을 다산초당에 가본지도 몇 해가 흘렀다대학 시절과 사회에 나와 한번씩 그러니까 딱 두 번  그곳에 다녀왔다한번은 관광지처럼 마음 편히 생각하고 들렀던 곳그러나 몇 해가 흐르고 다산 선생의 글 몇 줄을 읽고 나서야 겨우 나는 그 공간에 서서 가슴 끝이 먹먹해오는 감정에 휩싸였다.  200년 전 다산 선생님이 초당 곳곳에 남겨놓으신 흔적들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정치적 이해 때문에 형제를 잃고, 가문이 망하고, 폐족이 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학문하는 자의 강직함과 평생 목민관으로서 애민(愛民)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고독과 슬픔 그리고 억울함은 그가 훗날 역사에 남을 저작들을 집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세상 살이의 고달픔과 분주함 때문일는지 초당에 다녀온 지도 한참이 지났다그러나 마음속에서 밀려오는 도덕적인 결핍들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빈궁해지려 할 때마다, 아니 책장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목민심서와 그의 산문집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다산의 마음과 그곳 초당의 풍광들을 그리워했다

한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의 책 읽기가 지금 멈추어 있다무턱대고 많은 책을 읽으려다 제풀로 지친 격이다그러나 따지고 들어가보면, 나의 책 읽기에 하나의 중요한 결핍이 존재함을 최근에야 깨달았다그것은 고전읽기의 오랜 편협처럼 어리석은 일이다우연의 일치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다산의 글을 읽다가 깨우친 것이다.  내게 독서의 근본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이다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가왜 그 많은 책들을 사 모으는가? 한번도 제대로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아니, 나는 물을만한 용기가 없었다.  목적의식 없는 독서, 근본이 세워지지 않은 독서는 무위한 일이다. 그것은 영원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고역(苦役)에 지나지 않는다왜냐하면 나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할 것이고지극한 인간다움에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의 근본은 孝과 敬이다.  다산 선생은 이 책 `오직 독서뿐'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 근본이 무엇인가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 근본이 무엇인가효도와 공경이다."   p.185,  {다산의 마음}, 박혜숙 편역 

다산의 짧은 글이 잠깐 잠깐 맛 뵈듯 선보이는 이 책 속에서 나는 오늘 이 시대 살아 있는 다산의 존재감과 마주한다권력을 향해 끝없이 해바라기 하던 그 탐욕스런 인간들 사이에서 한 발 빗겨나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옷 한 벌을 걸치고, 초당의 정적 속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저작들을 써 내려갔을 그의 고독한 시간들을 상상한다.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 받는 정치가 호치민이 평생 베갯머리에 두고 삶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목민심서의 웅혼한 문장들이 지금 이 시간, 이 세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는 것은 그 문장에 담긴 진정성, 곧 진실들 때문이다오늘 다산의 업적과 삶의 편린들이 평범한 한 아내의 남편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아이의 그 순진무구한 얼굴, 부모님의 자애로운 보살핌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이 시대 독서하는 자의 근본에 대해 묻고 있다그것은 사랑이며, 인간다움이다다산은 역사의 스승이자, 지금 이 시간 내 영혼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아닌가?
     

 

   

                                                                2009.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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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11-2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애절양'이라는 시로 처음 다산을 만났고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책꽂이에 있는데 개츠비님의 이 책이 다음 차례가 될듯 싶습니다. 저는 아직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리뷰 덕분에 제 독서의 열매를 기대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개츠비 2009-09-23 16:08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저는 이 책을 시작으로 앞으로 다산의 책들을 읽으려고 합니다. 소설 두 편을 보았는데, 직접 그의 글을 읽어보는게 더 좋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부족한 리뷰에 대한 격려 고맙습니다. 다산의 글을 통해 많은걸 깨닫는 시간 되시길 빕니다.^^
 
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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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대는 막막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군대시절 IMF가 찾아왔다.  졸지에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실직가장들이 늘어났다.  주위엔 사업 부도를 맞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나는 복학후 2년 남짓, 학교를 더 다녔다.   졸업하면 나또한 그런 부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변변찮은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대학에서 배운것을 써먹을 기회도 없었다. 그냥 몸을 열심히 놀리면 되었다.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시간,더 열심히 일하고도 받은 급료는 더 적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규직이 아니었으니까. 

학교와 직장 때문에 10년 가까이 자취 생활을 했다.  그러나 모든걸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의 품에 안겼다. 무턱대고 이삿짐을 쌌다.  그날로 생애 최초의 백수가 된 것이다.  The White Hand, 무일푼=백수.  초,중,고 12년, 대학 4년의 교육을 받고 나서 내가 도달한 지점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할일이 없는 백수였다.  청춘의 아이러니고 비극이었다.  

고향집으로 오는 내 이삿짐안에는 이외수의 전집 6권이 들어 있었다.  백수가 되기 며칠 전에 구입한 책이었다. 고향에 내려가 이외수의 소설들과 한달을 보냈다. 울고,웃고,냉소하고, 마음껏 세상을 조롱하고, 자기의 뜻과 소신대로 세상을 주유하며 당당히 맞서는 가난하지만 영혼만은 부유했던 한 사람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여름날이었다. 비구름을 머금은 하늘을 의심하며 고향집 근처에 있는 모교 초등학교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 짧은 자전거 여행에 나는 읽고 있던 시집 한 권,  볼펜 한 자루,  메모지 한장을 준비했다.  평일 교정 벤치에 앉아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하나둘씩 짝을지어 교정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메모지에 시를 끄적였다.  내 마음처럼 시도 처량하게 쓰였다. 아이들의 얼굴엔 보람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향하는 이들의 설렘과 행복감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부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저 꼬맹이들도 오늘 할일을 마치고 집으로 간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할일이 없구나.  

이젠 그 시절의 기억이 내 청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생의 로드맵,  그러나 나의 막막했던 20대의 후반, 그 절망의 날들속에서도 나는 이외수를 읽고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절망의 끝자락에서 지핀 희망의 뜨거운 불씨였는지도 모른다.  그 교정 벤치,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던 여름날, 쓰여지지 않은 시를 끄적이던 날로부터 정확히 6개월 후 나는 내 20대를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던 백수,비정규의 인생,실연의 고통을 내 힘으로 걸어나왔으니까.

이외수, 그는 내 청춘의 멘토였다.  그가 써내려간 산문들을 읽으며 가난과 백수로 살아가더라도, 인간됨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배웠다.  인생에 대한 절망이 예술혼을 지피는 장작이 될 수 있음을 알았고, 그의 가꾸지 않은 외모에서 진정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임을 깨달았다. 그의 이채로운 괴짜적 습관들을 통해 고정관념이란 파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절망하는 청춘들의 희망이었다. 

내 젊은날의 멘토, 이외수가 이제 우리 시대 청춘들에게 강렬한 `화두의 총알들'을 날렸다.  2003년 출간된 <날다 타조>의 개정 증보판, 이외수식 청춘사용설명서 <청춘불패>가 내 품에 안겼다.  책장을 열자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상징적이다.  고달픈 청춘들이여, 화학성분으로 비산되는 향기이기는 하나, 잠시 삶의 짐을 내려놓고 이 향기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쓰디쓴 약은 행복하기 위해 먹듯이, 이 책을 보약이라 생각하며 읽으라는 의미처럼 다가온다.

이제 이순(耳順)을 넘긴 이 시대의 몇 안되는 진짜 어른으로서, 또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던 동질감으로, 이외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따뜻한 공감의 조언들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던지는 조언들은 주위에서 흔히 들어온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의 표현들마다에 이외수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언어의 명징함과 삶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의 문장들에서 오랜 연마를 통해 자신의 언어를 갖고 도저한 경지에 오른 한 작가를 상상하게 된다.

이외수가 우리 시대의 백수들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던진다.

"하지만 그대여 서두르지 말라. 멀고도 험난한 인생길, 엎어진 김에 쉬어갈 수도 있지 않은가. 백수는 젊은 날 한 번쯤은 겪어야 할 황금의 터널. 백수를 경험하지 않은 젊음을 어찌 진정한 젊음이라 일컫을 수 있으랴. 차라리 나는 그대가 자랑스럽다."  (p.87)

길을 잃고 방황하는 20,30대의 청춘들에겐 이런 처방전이 내려진다.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꿈, 그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꿈, 그러한 꿈 하나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대의 이십대는 그것으로 크나큰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p.94)

"삼십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분골쇄신 정진하는 시기이므로 연마기(練磨期)라 한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실력을 연마하는 시기이니 어떤 시련과 고통이 닥치더라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말라.(p.96)

이제는 고정독자만 40만을 넘어서는 작가인 이외수는 익살스럽게도 다시 가난과 무명의 젊은날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젊은날의 이외수는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생략하고, 저녁은 굶은 날"이 많았을 만큼 가난했다.  작가라는 꿈을 갖고 정진하던 시기에 끼니를 해결하는 문제로 고민할만큼 그는 절정의 가난을 경험했다.  지금 내 책장에 그가 그 시절  주린 배를 안고 써낸 작품들이 담겨있다.  <꿈꾸는 식물>, <들개>, <겨울나기>,<장수하늘소>,<벽오금학도> 등.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품들은 오늘날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이외수의 작품은 2002년 출간된 <괴물>이라는 소설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이외수에게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이외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말한적이 있다.  이제 작가로서 여생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지금껏 써왔던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작 한 권을 써내고 싶은 것이라,고.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젊은날 그가 써낸 초기 작품들은 이미 그 수준에 도달했고, 젊은날 그는 그 경지에 이미 당도했다.  그 작품들을 통해서, 그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니까.  그러니까, 청춘의 절망,가난,불운을 재료삼아 직조해낸 그 시절의 작품들이 오늘의 이외수를 만든 것이다.

안개낀 것처럼 앞날이 막막했던 20대를 지나, 30대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나의 백수시절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후회다.   그 후회란 그 시절 왜 여유와 자유로움 속에서 좀더 유유자적 하지 못해을까? 쉽게 말해서,  백수의 직분에 충실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조바심치며, 인생의 한 순간을 불안해하고, 낭비한 것이 후회되지,  백수생활을 좀더 빨리 끝내지 못했던게 후회되진 않는다.  이외수의 지적처럼 20대는 인생의 큰 꿈 하나만을 제대로 계획할 수만 있어도 성공한 것이다.  백수의 시절이야말로 인생의 황금기, 즉 직장과 가정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모든 청춘들의 로망의 시절이다.

청년백수가 100만이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숫자는 이 시대 절망과 고통속에 신음하는 청춘들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 고난은 신의 또다른 계략일 수 있다. 고난을 순수하게 고난으로만 받아들이면 발전이 없다. 고난을 인생의 쓴 약으로 생각하고 인내하며 미래를 설계할 때, 그 고난은 성공의 발판이 될 것이다.  젊은날의 이외수에게 가난과 고통이란 작품 창작의 동력이고 소재였다.  결국 그것으로 이외수는 오늘 최고의 작가로 성장했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어떤 환경속에서도 인내하며,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사람이 도달하게 되는 정직한 지점이다.  작가 이외수는 이 시대 불운한 청춘들의 멘토이자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임이 분명하다.
 



200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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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hug! 아프리카
김영희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여행의 목적이 꼭 즐거움일 필요가 있을까?   우린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여행한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여행의 기술>을 읽다보면,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고, "아테네"라고 하지 않고 "세계"라고 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 나라만이 전부가 아님을 우린 시시때때로 잊어버린다.  세계가 우리의 무대, 우리 생의 공간이란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 우린 때로 배낭의 짐을 꾸려야 한다.

대개 해외여행이라면 초보여행자들은 근사한 여행지를 찾기 마련이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뒷골목이나 미국 뉴욕의 한 복판을 걸어보고 싶은 것은 이심전심이다.  내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지고 색다를수록, 또 누추하지 않고 세련된 세계일수록 제대로된 여행지란 착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여행은 대개 수박겉핧기에 그치고 만다.  고달픈 기억들이 여행을 더 의미롭게 한다.   `집나가면 개고생'이어야 하는 것이 여행의 본질 아닐까?

그래서 대한민국 방송국 대표 프로듀서로서 그간 참신한 기획으로 코메디 오락물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왔던 김영희 PD가 무작정 배낭짐을 꾸리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쌀집아저씨란 별명이 왜 붙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그렇게 불렸다.  그 단어에서 풍기는 소탈한 이미지만큼 그가 연출한 프로그램엔 오락성과 공익성이 잘 배합되곤 했다.  대체 그는 왜 하고많은 나라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들이 움집해 있는 대륙 아프리카로 여행을 갈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을 받아들고 생긴 첫번째 궁금증이다.

소감부터 말하면 이렇다.  지금껏 몇 편의 여행기를 읽어보았지만 이 책만큼 참신하고 생동감 넘치는 여행기를 만나보진 못했다.  이 책에서 김PD는 세가지 조리기구를 통해 아프리카를 맛있게 요리해 나간다. 그 세가지는 짧고 감칠맛나는 문장, 헨드폰으로 찍은 듯한 날렵한 스냅사진, 그리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아프리카를 스케치한 그림들이다.  특히 여행지의 풍광이나 사람들을 묘사하는 그의 그림 실력은 자타가 공인해줄만큼 특출나다.  피디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려도 되는건가?   고백하건대, 이 책을 읽는 내내 사진이나 여행기보다 더 재밌었던건, 그의 붓터치를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아프리카의 표정들이었다.

여정에 따라 쓰고,찍고, 그린 이 여행기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고달프지만 신비스러운 아프리카 여행에 그와 동행하고 있음직한 착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책에서 만난 아프리카는 여행지로서 바라보기엔 토착민의 삶에 먼저 안쓰러운 눈길이 쏠린다.  최고급 식당은 현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다.  관광지마다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자신을 단돈 몇십달러에 써달라고 애원하기 일수다. 아프리카에 더이상 공식적인 노예상은 없다. 그러나 자발적인 노예들은 가는 곳마다 득실대며 당신의 은전을 요구하고 있다.

관광객이 건내는 단 몇 달러의 돈에 자존심을 내팽개칠 수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여전히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묻혀 있는 케냐의 묘지앞에 서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 여행기를 읽으며 그가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아프리카의 현실이란게 무엇인지 감잡게 된다.

그러나 포커스를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닌 아프리카 대지에만 놓고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러면 이 대륙은 신비 그 자체다.  단박에 이 세계는 인류가 기원한 태고의 땅이자 거룩한 대륙이다.  세계 최고의 도시 마라케시에서는 수많은 국제 회의가 열린다. 마라케시의 이름을 본딴 국제협약들도 즐비하다.미국 그랜드캐년의 규모를 넘어서며 영화 <반지의 제왕>의 무대가 되었던 드라켄즈버그 협곡은 마치 관광객을 화성이나 달 표면으로 이끌만큼 환상적 풍광을 지녔다.  세계 최대의 사막 사하라와 낭만의 도시 카사블랑카도 빼놓을 수 없다.   또 나이아가라 폭포에 버금가는 빅토리아 폭포의 장엄함은 사진과 글만으로도 그 웅장함이 전해오기에 충분하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며 영화같은 사파리를 즐길 수 있는 곳,  동물도감에서나 나올법한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땅이 바로 아프리카다.이곳엔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원시의 웰빙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드넓은 초원에 불이 꺼지면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도시에서는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밤의 본래 모습이 드러난다. 진정한 밤이 초원을 덮는다.  그래야 비로소 동물들이 잠을 잔다.  그러므로...인간이라는 동물들의 불면증은 밝은 밤에서 비롯된 것! 진정한 밤을 가질 수 없는 현대인들이 진정한 잠을 경험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기가 현대인들의 진정한 잠을 방해하고 있다. "  <헉! 아프리카>, 김영희 , p.26

김피디는 두달간의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아프리카의 속살을 속속들이 경험했다.  그것은 세련된 부분들이 아니라 먼지날리는 신작로처럼 누추한 풍광들이다.  후진적인 사회 시스템은 게으르고 비전없는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에서 시원하고 있단 생각도 든다.  그러나 한꺼풀 더 벗기고 아프리카를 바라보면 우리 사회의 비릿한 풍경들이 겹쳐보이곤 한다.  보다 나을것도, 보다 좋을 것도 없는 그런 세계말이다.  특히 정치인의 마인드는 우열을 가늠하게 힘들지도 모르지.....

아프리카 대륙이 후진적인 것은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난 수세기에 걸쳐 아프리카는 자원과 시민을 진보한 유럽 세계에 수탈당했다.  서양인들이 남기고 간 것은 가난과 무기일 뿐이다. 현재 빈곤과 내전의 고통에 휩싸인 아프리카는 기름진 얼굴을 한 유럽인들이 값싼 은전을 베풀러 오는 여행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피디가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것도 이 장엄한 대륙의 가능성이다. 사기꾼, 거지, 도둑, 강도가 득실대는 아프리카 대륙을 거쳐오면서, 언제나 유모와 여유로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김피디는 여행지 곳곳에서 대한민국 쌀집아저씨의 여유와 인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언제나 빛을 발하는 것은 못된 사람들 사이에 보석처럼 박힌 성실하고 매너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 먼 타국, 온통 검은 피부들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성실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드넓은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 발견한 생명의 흔적만큼 가슴뛰는 그 진실. 독자는 미지와 암흑의 땅에서 가슴이 따뜻해 지는 그 익숙한 사람들에 감동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프리카의 희망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김PD는 왜 아프리카로 떠났나'에 대한 짧지만 가장 명쾌한 답이 될 것 같다.



2009.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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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7-2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도 님의 강력할 지름에 땡스투하고 구매했는데
이 책은 더한 뽐뿌질을 ㅎㅏ시네요~.^^;;;
보관함에 넣습니다~.^^

개츠비 2009-07-28 11:42   좋아요 0 | URL
nabee님...제가 뽐뿌질을 했나요 ? ^^ 좋은 책은 널리 퍼트리면 좋죠. 굿바이스러니까용
 
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붉은 색을 좋아하진 않는다.  붉은 색은 흔히 정열과 에너지를 상징한다.  나는 차분하고 편한게 좋다.  그래서 파란색이나 연두색 등을 선호한다. 굳이 적색 계통을 고르라면 분홍색과 핑크색 정도까지는 눈에 거스르질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와 붉은 색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색에서 뭔가 비극적인 냄새와 처연한 사연이 연상된다. 붉은 색은 시각적인 요소를 넘어 마음에 파열을 일으키고 강렬함과 자극적인 느낌이 전해온다.

그러나 정열적인 사람, 사랑에 빠진 연인들, 혹은 예술가의 혼을 이야기할때 붉은 색은 시의적절하다.   그 색에선 타협이나 적당주의가 떠오르지 않는다. 목표를 향한 집요함, 운명을 내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 색을 좋아하진 않지만, 모름지기 인간이란 한 번뿐인 인생을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게 살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붉은 색의 강렬함에 이끌린다.

요 며칠전 히말라야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은 봉우리 낭가파르밧을 오르던 산악인 고미영 씨가 하산 도중 1500미터의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들었다.  14좌 가운데 11개를 성공적으로 올랐던 그녀, 크레바스로 미끄러지기 전 100미터 앞에는 그녀를 기다리던 베이스 캠프가 있었다.  올해만 4개의 히말라야 정상에 올랐던 41살의 여인, 14좌를 모두 오르고 사랑의 결실을 맺고자 했던 사람.  

그러나 안타까운 사고로 그녀는 히말라야에 인생을 묻었다.  수습되기전 헬기에서 찍은 그녀의 사고사진은 붉은 색 등산복 차림이었다.  하얀 눈위에 언뜻 보이던 선혈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히말라야, 낭가파르밧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성과주의니, 무리한 일정이니 말들이 많다.  그러나 산에 잠든 그녀가 말해주는 것은 꿈을 갖고 묵묵히 정상을 향하던 그녀의 열정이다.  우린 이미 소진한지 오래인 꿈을 데우던 그 붉은 에너지말이다.

권지예의 장편 <붉은 비단보>를 읽었다.  조선의 16세기는 남존여비가 법치화되고, 반상의 구별이 명확하고, 첩의 자식인 서얼이 차별받은 시대였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타고난 조건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인생을 결정짓던 불평등한 시대였다.  이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곧 운명이었다.  그 시절 신분이란 무서운 것이라서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대개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운명적 비극이다.

소설은 각기 다른 신분을 가진 세 여인의 일대기를 조망한다. 그림과 글씨에 능한 빈한한 양반가의 여식 항아, 빼어난 미모와 춤솜씨를 가진 서얼 출신의 초롱,  천하의 문사적 기질을 갖고 조선의 엘리트 가문에 태어난 가연.  이 세 명의 소녀는 친구로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출신성분에 따라 운명지워진 다른 길의 인생을 예고한다.

조선 여인의 클리셰(진부한 상징)를 드러내는 이들 세 여인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지만, 전형적이다. 작가는 항아에게서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실었다.  초롱에게선 빼어난 미모와 문예를 겸비한 기생 황진이의 삶을 차용한다.  천재적인 글솜씨의 가연은 비극적인 삶을 살다 27세에 요절한 조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생을 가져왔다.

서사의 중심은 명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세도가에 시집가서 문필적 능력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자살한 `가연'이나 서얼의 신분적 불평등함속에 관기로 일생을 살게 되는 `초롱'에 맞춰져 있지 않다. 이들 두 여인은 삶은 운명의 양극단에 위치한다.   작가는 유달리 강렬한 자아의식과 그림과 글씨에 대한 끝모를 집착을 가진 아이, `항아'를 소설의 중심에 놓는다.  항아는 자의식이 깊고, 예술에 대한 열정이 크지만 일생을 평범한 아내,며느리,딸,어머니의 역할에도 충실한 전형적 여인으로, 삶과 예술이 균형을 이룬 캐릭터다.

`항아'는 이 소설에서 조선 여인의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예술이라는 자유분방한 도구를 통해 시대를 건너뛰어 현대적 자아의식을 가진 여성으로 재탄생한다.  예술혼이란 인류의 보편성에 속한다.  그것은 자기를 뛰어넘어, 세상과 우주, 역사와 문명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모든 예술가는 그 꿈을 위해 자기의 혼을 태운다.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안락한 삶이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위대한 예술은 예술가에게 살아가는 근거이며, 바탕이다.  이 절정의 예술혼을 소설속 조선의 여인에게 발견하는 일은 반갑고도 낯설다.

"나는 붓을 잡는 그 시간이 행복했다. 사내의 사랑도 부모에 대한 정도 종당엔 변화하기 마련. 우주의 모든 것은 사계절처럼 변하고, 어차피 모든 존재는 홀로인 것이다.  홀로 우주를 사는 것이다. 붓은 홀로 우주를 주유할 수 있게 하는 날렵한 한 필의 말이었다."  권지예, <붉은 비단보>, p.245

작가는 집필후기에서 이 소설이 평전이나 역사소설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비록 역사상 50여년의 시차를 두고 한 세기에 존재했던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이 소설이 `현대적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로 읽히길 고대한다'고 쓰고 있다.  작가의 집필 의도는 역사성이나 인물성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여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가닿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인물들의 전형성과 역사성으로 인해, 평전이나 역사소설로 읽힐 위험성이 있다. 역사인물을 차용함으로써, 인물이 빗어내는 독창성과 재미가 반감된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겉이 아니라 내밀한 속살을 파고들면, 이같은 우려는 상당부분 불식된다.  그것은 이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한 불멸의 여성 예술인의 열정과 의지를 담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전기적인 사건은 서사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연리지의 애절한 사랑을 담았고, 삶에 충실한 조선 생활인의 이상을 담아내면서 덤으로 예술적인 열망을 놓치 않는 성실한 예술가를 실감나고 정교한 필치로 창조복원한다.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상상력, 분명한 주제의식은 이 소설을 빛낸 3요소라 말할 수 있다. 

" 그림은, 글씨는 내 상처를 먹고 자랐다. 상처가 아플수록 나는 그림을 욕망했다. 그것들은 나의 정인(情人)이었다. 오히려 정인이 있어서 내 앞의 삶을 더욱 반듯하게 살아냈다. 모순이었다. 그래, 모순이었다. 그게 삶이 아닐까. 모순이 아니라면 삶이 아니지. 모순을 껴안지 않으면 삶이 아니지. 후회는 없다. " 권지예, <붉은 비단보>, p.352

꿈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다.  생의 열망이 식어버린 김빠지게 재미없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학생들은 경쟁에 밀려 꿈의 노예가 되었다. 직장인에게 어릴적 품었던 꿈은 생의 먼지낀 악세사리다.   현상유지에 분주한 인생만큼 가련한 삶이 있을까?  시간이 남아도, 여가가 생겨도 마땅히 할일이 없어 고민인 사람들이 널려 있다.  최근 회식자리에서 술기운에 내뱉은 직장 상사의 한 마디 말이 기억에 맴돈다. "나는 이제 끝났다. 나이 50, 곧 정년도 다가오는데 끝난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인생을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는데, 마라톤에서 게임이 끝나는 경우는 단 한가지. 내가 달리기를 포기할 때다.  목표지점에 골인하고자하는 의지를 놓아버릴때, 자신의 마라톤 경기는 끝나고 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는 의지, 골인 라인에 도달하겠다는 꿈을 가질때, 우리는 계속 달릴 수 있다.  계속 달리면서 자신의 생을 확인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이 꿈이 가진 능동성이며, 추진력이다.

`항아'의 붉은 비단보에는 꿈이 담겨 있다. 그녀의 꿈은 상처와 고통으로 점철된 기록이자 성과물이다. 48년 인생동안의 모든 정수가 그 안에 담겨 있다.  항아는 죽지만 꿈은 죽지 않는다.  항아의 그림과 글씨는 역사속에서 불멸의 예술로 승화된다.  붉은 비단보는 불멸의 꿈이다.  유한한 인생과 영원한 예술 사이에서, 예술가는 영원을 택한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당신의 붉은 비단보에는 지금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가? 




200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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