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붉은 색을 좋아하진 않는다.  붉은 색은 흔히 정열과 에너지를 상징한다.  나는 차분하고 편한게 좋다.  그래서 파란색이나 연두색 등을 선호한다. 굳이 적색 계통을 고르라면 분홍색과 핑크색 정도까지는 눈에 거스르질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와 붉은 색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색에서 뭔가 비극적인 냄새와 처연한 사연이 연상된다. 붉은 색은 시각적인 요소를 넘어 마음에 파열을 일으키고 강렬함과 자극적인 느낌이 전해온다.

그러나 정열적인 사람, 사랑에 빠진 연인들, 혹은 예술가의 혼을 이야기할때 붉은 색은 시의적절하다.   그 색에선 타협이나 적당주의가 떠오르지 않는다. 목표를 향한 집요함, 운명을 내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 색을 좋아하진 않지만, 모름지기 인간이란 한 번뿐인 인생을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게 살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붉은 색의 강렬함에 이끌린다.

요 며칠전 히말라야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은 봉우리 낭가파르밧을 오르던 산악인 고미영 씨가 하산 도중 1500미터의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들었다.  14좌 가운데 11개를 성공적으로 올랐던 그녀, 크레바스로 미끄러지기 전 100미터 앞에는 그녀를 기다리던 베이스 캠프가 있었다.  올해만 4개의 히말라야 정상에 올랐던 41살의 여인, 14좌를 모두 오르고 사랑의 결실을 맺고자 했던 사람.  

그러나 안타까운 사고로 그녀는 히말라야에 인생을 묻었다.  수습되기전 헬기에서 찍은 그녀의 사고사진은 붉은 색 등산복 차림이었다.  하얀 눈위에 언뜻 보이던 선혈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히말라야, 낭가파르밧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성과주의니, 무리한 일정이니 말들이 많다.  그러나 산에 잠든 그녀가 말해주는 것은 꿈을 갖고 묵묵히 정상을 향하던 그녀의 열정이다.  우린 이미 소진한지 오래인 꿈을 데우던 그 붉은 에너지말이다.

권지예의 장편 <붉은 비단보>를 읽었다.  조선의 16세기는 남존여비가 법치화되고, 반상의 구별이 명확하고, 첩의 자식인 서얼이 차별받은 시대였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타고난 조건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고 인생을 결정짓던 불평등한 시대였다.  이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곧 운명이었다.  그 시절 신분이란 무서운 것이라서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대개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운명적 비극이다.

소설은 각기 다른 신분을 가진 세 여인의 일대기를 조망한다. 그림과 글씨에 능한 빈한한 양반가의 여식 항아, 빼어난 미모와 춤솜씨를 가진 서얼 출신의 초롱,  천하의 문사적 기질을 갖고 조선의 엘리트 가문에 태어난 가연.  이 세 명의 소녀는 친구로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출신성분에 따라 운명지워진 다른 길의 인생을 예고한다.

조선 여인의 클리셰(진부한 상징)를 드러내는 이들 세 여인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지만, 전형적이다. 작가는 항아에게서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실었다.  초롱에게선 빼어난 미모와 문예를 겸비한 기생 황진이의 삶을 차용한다.  천재적인 글솜씨의 가연은 비극적인 삶을 살다 27세에 요절한 조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생을 가져왔다.

서사의 중심은 명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세도가에 시집가서 문필적 능력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자살한 `가연'이나 서얼의 신분적 불평등함속에 관기로 일생을 살게 되는 `초롱'에 맞춰져 있지 않다. 이들 두 여인은 삶은 운명의 양극단에 위치한다.   작가는 유달리 강렬한 자아의식과 그림과 글씨에 대한 끝모를 집착을 가진 아이, `항아'를 소설의 중심에 놓는다.  항아는 자의식이 깊고, 예술에 대한 열정이 크지만 일생을 평범한 아내,며느리,딸,어머니의 역할에도 충실한 전형적 여인으로, 삶과 예술이 균형을 이룬 캐릭터다.

`항아'는 이 소설에서 조선 여인의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예술이라는 자유분방한 도구를 통해 시대를 건너뛰어 현대적 자아의식을 가진 여성으로 재탄생한다.  예술혼이란 인류의 보편성에 속한다.  그것은 자기를 뛰어넘어, 세상과 우주, 역사와 문명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모든 예술가는 그 꿈을 위해 자기의 혼을 태운다.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안락한 삶이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다.  위대한 예술은 예술가에게 살아가는 근거이며, 바탕이다.  이 절정의 예술혼을 소설속 조선의 여인에게 발견하는 일은 반갑고도 낯설다.

"나는 붓을 잡는 그 시간이 행복했다. 사내의 사랑도 부모에 대한 정도 종당엔 변화하기 마련. 우주의 모든 것은 사계절처럼 변하고, 어차피 모든 존재는 홀로인 것이다.  홀로 우주를 사는 것이다. 붓은 홀로 우주를 주유할 수 있게 하는 날렵한 한 필의 말이었다."  권지예, <붉은 비단보>, p.245

작가는 집필후기에서 이 소설이 평전이나 역사소설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비록 역사상 50여년의 시차를 두고 한 세기에 존재했던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이 소설이 `현대적 시각에서 바라본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로 읽히길 고대한다'고 쓰고 있다.  작가의 집필 의도는 역사성이나 인물성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여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가닿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인물들의 전형성과 역사성으로 인해, 평전이나 역사소설로 읽힐 위험성이 있다. 역사인물을 차용함으로써, 인물이 빗어내는 독창성과 재미가 반감된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겉이 아니라 내밀한 속살을 파고들면, 이같은 우려는 상당부분 불식된다.  그것은 이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한 불멸의 여성 예술인의 열정과 의지를 담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전기적인 사건은 서사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연리지의 애절한 사랑을 담았고, 삶에 충실한 조선 생활인의 이상을 담아내면서 덤으로 예술적인 열망을 놓치 않는 성실한 예술가를 실감나고 정교한 필치로 창조복원한다.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상상력, 분명한 주제의식은 이 소설을 빛낸 3요소라 말할 수 있다. 

" 그림은, 글씨는 내 상처를 먹고 자랐다. 상처가 아플수록 나는 그림을 욕망했다. 그것들은 나의 정인(情人)이었다. 오히려 정인이 있어서 내 앞의 삶을 더욱 반듯하게 살아냈다. 모순이었다. 그래, 모순이었다. 그게 삶이 아닐까. 모순이 아니라면 삶이 아니지. 모순을 껴안지 않으면 삶이 아니지. 후회는 없다. " 권지예, <붉은 비단보>, p.352

꿈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다.  생의 열망이 식어버린 김빠지게 재미없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학생들은 경쟁에 밀려 꿈의 노예가 되었다. 직장인에게 어릴적 품었던 꿈은 생의 먼지낀 악세사리다.   현상유지에 분주한 인생만큼 가련한 삶이 있을까?  시간이 남아도, 여가가 생겨도 마땅히 할일이 없어 고민인 사람들이 널려 있다.  최근 회식자리에서 술기운에 내뱉은 직장 상사의 한 마디 말이 기억에 맴돈다. "나는 이제 끝났다. 나이 50, 곧 정년도 다가오는데 끝난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인생을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는데, 마라톤에서 게임이 끝나는 경우는 단 한가지. 내가 달리기를 포기할 때다.  목표지점에 골인하고자하는 의지를 놓아버릴때, 자신의 마라톤 경기는 끝나고 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는 의지, 골인 라인에 도달하겠다는 꿈을 가질때, 우리는 계속 달릴 수 있다.  계속 달리면서 자신의 생을 확인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이 꿈이 가진 능동성이며, 추진력이다.

`항아'의 붉은 비단보에는 꿈이 담겨 있다. 그녀의 꿈은 상처와 고통으로 점철된 기록이자 성과물이다. 48년 인생동안의 모든 정수가 그 안에 담겨 있다.  항아는 죽지만 꿈은 죽지 않는다.  항아의 그림과 글씨는 역사속에서 불멸의 예술로 승화된다.  붉은 비단보는 불멸의 꿈이다.  유한한 인생과 영원한 예술 사이에서, 예술가는 영원을 택한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당신의 붉은 비단보에는 지금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가? 




2009.7.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