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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동물농장>과 <1984>를 지은 작가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 1946)'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심리를 묘사한 바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글쓰기는 복잡한 인간적 본능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그걸 정의할 순 없다. 그러나, 그 에세이에서 조지오웰은 어쩌면 가장 공감할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작가의 글쓰기가 결국 `정치적 목적'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고 일갈했기 때문이다.
왜 작가의 글쓰기가 좀더 고상한 데 이르지 못하고, 정치와 같은 난잡하고 때론 혐오스런 분야를 지향해야 할까? 인간의 삶 자체가 정치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인간 삶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정치와 맞닿아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신의 섭리일 수 있지만, 그가 어머니의 자궁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대면해야 하는 것은 운명적인 그 세계의 `정치 사회상'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사회에 태어나는 인간과 억압과 감시, 차별과 특권이 판치는 독재 국가에 태어나는 것은 생의 터전을 천국과 지옥으로 가른다. 결국, 한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개별적 인간의 운명과 삶 전체를 주관할만한 위력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정치적 동물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한 시대의 영혼들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가 겪는 아픔과 마주한 운명은 그에게 진실을 고발하고, 그것을 결국엔 `쓰게' 이끈다. 숨막히는 독재의 상황은 인간의 자유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탁월한 견해처럼 영혼의 고발자인 작가의 모든 글쓰기는 암묵적으로 정치적 뉘앙스를 함유하게 된다. 201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페루 출신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권력구조의 지도를 그려내고 개인의 저항·반역·좌절을 통렬한 이미지로 포착해냈다"고 설명했다. 선정 이유에서 보듯, 그의 작품들이 숱한 정치성을 띠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노벨상 수상작 선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작품은 소설 <염소의 축제>라고들 한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무려 32년간이나 도미니카 공화국을 지배했던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의 폭정에 관한 이야기로, 권력에 빌붙어 트루히요의 충직한 `개들'로 살았던 권력자들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그에 희생되고 상처받은 무고한 시민들과 여성들을 회고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세계 독자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독재를 이미 경험했거나, 현재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추스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다. 더불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근본적인 악마성을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해 복원하는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솜씨는 세계문학의 진수를 맛보기에 충분하다.
도미니카 공화국, 그 역사적 배경
20세기 초 세계적인 독재자를 키워낸 땅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을까? 도미니카 공화국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 사이에 존재하는 인구 800만 정도의 섬 국가다. 이 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가 세계 최빈국 아이티요, 나머지 3분의 2의 땅덩어리를 도미니카 공화국이 메우고 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섬을 점령했고, 섬의 원주민인 타이노 족은 서서히 백인과 그들이 데려온 흑인 노예의 등살에 멸족하기에 이른다. 처음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땅은 아이티 흑인 노예들의 혁명을 통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 아이티 혁명을 통해 섬은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지고, 흑인들을 피해 백인들이 넘어온 땅이 바로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의 종족 90%를 이루는 뮬라토는 그때 넘어온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다. 도미니카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 독립했지만, 20세기 초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되고 1930년 육군 장성인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는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1961년 산크리스토발 고속도로 부근에서 정적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암살되기 전까지 무려 32년간, 도미니카 공화국를 1인 지배했다. 그는 여느 독재자들의 변명처럼, 재임 기간 경제와 정치를 안정 시키고 국민 소득을 증대시켰으며, 뛰어난 리더쉽으로 물렁한 국가를 반석뒤에 올려 놓았다고 평가받길 원했다. 그러나 국가 발전이란 성과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인과 강간, 권위적 무소불위의 폭정과 측근들의 축재가 만연된 사회상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게 옳은 것이며 가야할 길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소설 염소의 축제 - 세 가지 이야기에 녹아든 독재의 참상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1,2권으로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이다. 이야기가 맥을 잡아내는 1권은 읽기에 힘이 든다. 그러나 2권은 물 흐르듯 흥미롭게 빠르게 전개된다. 바르가스 요사의 필력이 흠잡을 데 없는 번역에 실려,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즐거움보다는 분노와 공분에 닿아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큰 줄기에서 세 가지로 나뉜다. 상원의원 아구스틴 카브랄 의원의 딸, 우라니아는 뉴욕의 성공한 변호사다. 그는 하버드를 나왔고, 세계 은행에서 일한다. 마흔 아홉이지만 미혼이다. 14살 때 도미니카를 떠난 이후, 그는 한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편지에도 숱한 세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중병에 걸려 말없이 초점없는 눈빛을 내보이는 아버지 앞에 그는 35년만에 마주하고 앉았다. 우라니아는 왜 35년간, 아버지를 증오했을까? 그는 왜 조국을 찾지 않았을까? 상원의원 카브랄은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고 조국에 왜 그는 등을 돌렸던 것일까?
두번째 이야기는 7명의 암살자들을 따라간다. 안토니오 델라 마사, 안토니오 임베르트, 아마티도,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 토니 임베르트, 페드로 리비오 세데뇨, 터키인. 이들은 1961년 5월 30일 염소를 죽이는 축제를 계획한다. 여기서 염소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별칭이다. 염소는 강한 번식력이 있는 동물이다. 흐리멍텅한 국가를 반석위에 세웠다고 자부하는 트루히요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도미니카를 재건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32년간 독재를 이어오면서 그는 주변국의 대통령 암살에 관여하고, 천주교 주교들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미국의 미움을 사고, 미주기구들로부터 경제 제제를 받는다.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시인이자 문필가인 발라게르 박사를 세우고, 자신은 후견인 노릇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그는 발정난 염소처럼, 공화국의 무수한 여인들의 처녀성을 노린다. 측근의 아내를 취하며 즐기는 것은 보통이고, 한밤중 남편과 시간을 보내는 여인들에게조차 치근거린다. 누구도 공화국의 `수령'이자 `원수'인 트루히요의 요구에 `노우'라 말할 수 없다. 이 짐승같은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이 공화국 시민의 존엄과 자유를 쟁취하는 일이라 믿는, 7명의 암살자들은 국방부 장관 푸포의 쿠테타 약속을 믿고, 거사를 진행한다. 5월 30일 밤, 발정난 염소를 죽이는 성대한 축제는 성공했을까?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로서 요사는 독재자의 허망한 최후와 암살자들의 고통스런 고문장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세번째 이야기는 트루히요의 통치와 그들의 측근들에 관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다. 공화국을 아이티의 침략과 경제적 수난, 열강의 압박으로부터 구했다고 자부하는 트루히요는 여성을 취하는 것을 그 보상으로 생각한다. 그의 절대권력은 측근이 내뱉은 한마디의 말 실수로 권력의 상층부를 갈아치울 정도로 막강하다. 그에게 충성하고 아부하는 측근들은 그를 신처럼 모신다. 트리히요의 은혜를 하늘처럼 여기고, 따르는 자들에겐 재산과 권력과 안락이 제공된다. 트루히요의 친인척은 국가 재산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국외 은행에 국부를 빼돌리며, 그것을 암묵적으로 허락받는다. 의심많은 트리히요는 경호부장 조니 아베스의 비밀 요원인 칼리에들을 통해 끊임없이 정적을 살해하고, 감옥에 가둔다. 그는 공화국 내에서 32년간이나 신처럼 행세한다. 어리석은 국가와 국민을 궁지에서 구원한 사자처럼 생각하지만, 전립선의 병 때문에 시시때때로 소변을 저린다. 그의 방광은 유일하게 그의 의지를 거부한다. 그는 고장난 방광을 감추려 들고, 몹시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러한 모습은 독재자의 카리스마에 어울리지 않게도 애처롭다. 끊임없이 여성들을 농락하면서 숙청 대상에 오른 최측근 카브랄 상원의원의 딸인, 14살 소녀 우라니아를 범하는 모습은 독재자의 본질이 악마성에 닿아 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독재자의 보편적인 악마성을 고발하다
이 소설은 독재자의 곁에서 그에게 충성을 다 받치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자들의 비열함을 드러낸다. 카브랄 상원의원은 트루히요의 신임에서 멀어지자,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낸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란 두려움에서 자신의 외동딸을 재단의 재물처럼 트루히요에게 바치고자 한다. 카브랄의 비상식적인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자신의 딸을 수령에게 보냄으로써,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동결된 게좌가 풀리고, 다시 상원위원장으로 복귀될 희망을 품는다. 트루히요의 쿠테타가 성공하던 시점에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일으켜 세운다는, 각오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독재의 시간이 흐르자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양심조차 실종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한다는, 속설이야말로 트루히요의 독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세가지 이야기를 자신의 유려한 서사속에 담는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세가지 큰 줄기를 전후좌우로 오간다. 1권이 끝나자 이런 서술 방식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엮는 그의 유능한 솜씨에 감탄케 된다. 생소한 먼 나라 독재자 이야기는 작가의 탄탄한 재능위에 흥미와 긴장감을 이어간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어느 순간 독자는 하나의 질문에 가 닿는다. 그것은 단순명쾌하다. ` 독재가 왜 나쁜것일까?'
많은 답이 있을 수 있겠다. 독재의 해악은 인간의 악마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떠오르는 한가지로 답하고 싶다. `그것이 생명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생명은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인 목숨을 상징하는건만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자존심, 자존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살아도 사는게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독재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파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르니아는 14살의 나이로 70살의 독재자의 품에 안겼다.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성적 학대를 통해, 그의 영혼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돋아난다. 조국을 떠나, 뉴욕에서 성공한 변호사로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연애도, 결혼도, 생각해본적이 없이 늙어가고 있다. 독재의 참상은 우르니아의 고백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난 공부했고 직업도 있고, 돈도 잘 벌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아직도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 (중략) 고모와 너희들도 문제가 있고, 힘든 시기를 보냈고, 실망하고 절망하기도 했어. 그러나 가족이 있고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친척도 있고 조국도 있어. 그런 게 바로 인생이겠지. 하지만 아빠와 총통은 나를 불모지로 만들었어." 염소의 축제 2, p.365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탁월한 재능으로 독재자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 안에 숨겨진 악마성을 폭로한다. 그가 그리고 있는 독재자 트루히요는 전혀 개성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보편적인 세계 시민이다. 다만, 그가 독재자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역사를 통틀어 독재자는 트루히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면 국가와 시민은 영원히 구원될 수 없을거란 과대 망상을 앓는다. 쿠테타로, 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독재의 본색을 드러낼 때, 몰락의 나락에 선다. 그래서, 일찍이 철학자 플라톤은 부로 인해 마음이 들뜬 장사꾼이나 군인이 쿠테타로 군사정권을 수립할 때, 국가의 파멸이 온다고 예언했던 것이다.
뛰어난 서사, 선명한 이미지로, 작가는 <염소의 축제>에서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는 순간,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가임을 의심하지 못한다. 문학이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대상은 상처받은 세상의 생물과 무생물이다. 그건 역사와 개인을 포괄한다. 우라니아의 비극적인 인생은 우리에게 한가지 교훈을 남긴다. 독재자는 죽어도, 그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인물은 살아남는다는 것. 트루히요의 시체위에서 광분하는 수하들을 보라. 몸통과 깃털은 한 몸이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처녀성을 뺏기지 않기 위해 우린 정치를 눈여겨봐야 한다. 세상이 정치를 통해서만 바뀔 수 있다는 간단한 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정치적 무관심이야말로, 언제든지 또다른 우라니아의 비극을 만들 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소설이 시민에게 던지는 교훈이자 가르침이다.
조지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되었을 때였다."
201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