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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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역사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자니 내 블로그의 리뷰 분류 항목엔 `역사'가 없음을 깨달았다.  믿기질 않지만 사실 그랬다.  역사가 홀대받는 시대에 나또한 은밀히 동참했단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고등학교에선 2004년부터 역사 과목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었고, 주요한 국가고시에서 한국사는 제외되었다.  역사란게 얼마나 공부하기 까다롭나?  외울것 투성인게 역사다. 출제자가 수험생을 골탕먹이려면 영어나 수학 못지 않게 어려울 수 있는게 역사과목이다.  그래서 수험생은 제도가 바뀌는 시점에 당당히 역사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    

우스개 소리로 요즘 초등학생들은 3.1절을 유관순 누나 생일날 쯤으로 안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은 그래도 괜찮다.  고등교육을 받는 고등학생들조차 자기가 발딛고 있는 땅덩어리의 역사를 모른데서야 말이 될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걸 정치권에서 깨달은건지,  요며칠 전 당정이 한국사 교육을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뉴스를 자세히 들어보니 수능 필수과목 선정에는 난색을 표했다 한다.  여전히 정치권은 국민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데 소홀하지 않다.  점수에 목매달아 울고 웃는 영악한 아이들이 수능에도 나오지 않을 역사과목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  답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고등교육 자체가 수능 점수를 잘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니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하고,  또 수능에 필수 과목으로 지정이 된다해도 제대로 된 역사공부가 될 리 없다.  역사는 이해가 아닌, 암기로 전락한지 오래니까.  그리고 학교 교육이 주도하는 역사 교육은 `객관적 역사'가 아닌 `국사(National History)' 아닌가?  국사를 배운 이들이 닿게 되는 지점은 자민족 중심주의로 무장한 배타적 애국주의다.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이 가야 할 지향점은 애국주의인가?   우린 정부가 주도하고 심의해 논 국정 교과서안의 국사가 아닌, 진정한 역사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인류의 삶에 대한 애정이란 결국 독서를 통해 심화된 역사안으로 발디딜 때만 가능하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의 책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는 국정 교과서 안의 역사를 넘어서, 아니 그 안에선 결코 배우지 못할 지식을 발굴하며 우리에게 20세기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는 책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자'다.   학문과 국경의 경계와 틀을 넘어서는 역사학을 주창하는 그는 다소 파격적으로 이 책에서  `만들어진 역사'나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국사가 결국 세계사의 진실을 외면케 하고 역사를 통해 인류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철학자로서 풍부한 지식과 남다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20세기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을 이끌었던 역사안의 인간들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 대상은 스탈린과 같은 공산주의자,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  우리 현대사의 두 독재자, 김일성과 박정희,  영원한 혁명 아이콘 체 게바라, 아우슈비츠를 탐색한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  동양 유림의 스승 공자에게까지 뻗어있다.  이 박식한 역사학자는 그들에게 1:1로 편지를 쓴다.  마치 친분있던 지인에게 부치는 편지인냥 가볍게 인사말을 하고 안부를 묻지만 그것 뿐이다.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론에 들어가서는 역사적 과오를 묻고 따지며, 때론 은밀한 약점을 파고들어 공격한다.  당신, 왜 그 따위로 살았냐? 고 매섭게 공격할 때 죽은이가 묘지에서 일어날까 섬뜩할 지경이다. 

20세기 세계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이 책을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는 시대니, 이 재기충만한 역사학자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문장은 편지체 임에도 다소 딱딱하고,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무게와 지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읽다보니 20세기 세계사가 인물을 통해 해체되고,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인물위주로 역사를 톺아본다는 것은 겉핥기가 아니라 그 내면의 결로 파고든다는 장점이 있다.  시작할 때보다 책장을 덮고 나서 더 큰 만족과 지적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그의 책에 도전한 것은 몇 해 전인데 임지현은 그 많은 인물 가운데 역사가 사이드를 첫장에 불러온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이 서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지리'라 주장했다.  이 기막힌 용어엔 서양의 동양 지배 논리가 숨어 있었다.  언제나 동양의 발전 과정엔 서양이란 기준이 있었고, 동양인 스스로 자신을 비하할 수밖에 없는 매카니즘인 오리엔탈리즘으로 굳어진 경위를 파헤쳤던 팔레스타인 출신 하버드 대학 교수, 언젠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함께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진 속의 그에게, 임지현은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상상의 지리'라는 개념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세계사라는 개념 자체가 바뀔 수 있었음을 고마워한다.   그 바뀐 개념속에서 우리는 서양사나 동양사가 아닌 그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해야 할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했고, 1937년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김일성.  재미학자 서대숙에 따르면 일본군이 당시 그의 목에 걸었던 현상금이 중국인 공산주의자보다 세 배가 많은 1만엔이었다고 한다.  항일 투쟁에 대한 긍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북한을 건국한 후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일제의 천황제에서 얻은 지배 노하우를 바탕으로 유례없는 개인 숭배 문화를 개발하고, 정치종교화 시킨 장본인. 임지현은 그에게 역사의 주체가 당신인가, 민중인가? 라고 따져 묻고 있다.  잘 살아보자는 대중의 욕망을 등에 엎고, 유신을 선포 같은 시기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던 독재자 박정희에게 쓰는 편지에선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김일성과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를 지냈던 박정희를 비교하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대학생의 충격과 당혹감은 어떤 것이었을까? 되묻고 있다.  김일성과 박정희를 독재자라는 공통의 분모로 묶어 내면서도,  박정희에 대해선 김일성에게 가졌던 광복전의 콤플렉스를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여 민족주의와 개발독재로 극복하려 했다고 분석해 낸 점은 독창적이며 신선하다.

폴란드의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는 스탈린과 레닌,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자가 걸었던 길과 다른 제 3 의 마르크스주의를 택했던 로자에 대한 임지현의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다.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 피에 굶주린 로자 등 공적인 평가와 갈리는 로자는 작은 키에 매부리코, 불완전한 걸음걸이와 고급 취향에 항상 돈이 쪼들려 궁색했고, 친구의 아들과 스캔들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는 개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모순과 양면성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며, 로자를 변호하는 임지현의 글은 현실 사회주의에 실망한 한 역사학자가  때묻지 않는 순수 마르크시즘에 갖는 관념적 애정으로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기획자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면서 악의 평범성 문제를 들고 나온 한나 아렌트, 나치의 우두머리인 아이히만을 잡아놓고 보니 그가 괴물이 아닌 보통이하의 평범한 남자였음에서 유추한 `악의 평범성' 테제는 폴란트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악의 합리성: 근대는 야만이다' 라는 연구 주제로 가 닿는다. 이들의 소신있는 역사 연구를 통해,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이스라엘과 유대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기억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이 글속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이면,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을 묵인했던 시오니스트들의 정치적 악마성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나치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려 한 것, 멸절하려 한 것, 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려한 시오니스트들의 이해가 맞물려 있다는 점은 역사가 가진 이면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20세기 세계사의 안쪽을 역사적 인물들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개인의 치부와 공적을 두루 살피는 과정에서, 역사가 한 개인의 능력과 철학을 통해 형성되었고, 옳고 그른 방향으로 지금 이 시간도 구획되고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섬뜩하기조차 하다.  역사의 주체는 민족, 종교, 이념과 같이 거시적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언제나 개인이다.  임지현이 세계사 편지를 개인에게 띄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21세기 우리가 처한 삶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민족에 갇힌 역사적 상상력을 국경을 넘고 이념을 넘는 지점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주창하는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결론이다.  역사를 국경앞에 가두면, 20세기의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2차 세계대전의 포화, 간간히 들려오는 우리 시대의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는 경계 안에 갖힌 역사가 맞이할 필연의 결과일지 모른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역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하는가?   임지현은 `역사적 책임'이란 말로 답한다.  외울것만 가득한 역사과목을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수능필수 과목 선정엔 난색을 표하는 역사에 대한 개념과 소신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이 책의 결론을 선물하고 싶다. 

"결국 책임이라는 말은 누구에겐가 대답한다는 거지요.  이때의 누군가란 곧 이웃이겠지요. 그중에서도 소외되고 배제되고 타자화된 이웃 말입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그들은 폴란드의 유대인일 수도,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일 수도, 미국 남부의 흑인일 수도, 멕시코 정글의 원주민일 수도, 헝가리의 집시일 수도, 르완다의 투치족일 수도, 세르비아의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이들의 고통스러운 물음과 신음에 이웃의 한 사람으로서 반응하고 답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이들의 신음과 고통에 뒤돌아 반응하고 답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  임지현, <세계사 편지>,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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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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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지음, 임지호 옮김 / 경당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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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고 곧바로 리뷰를 써 올리는 것보다 침묵속에서 읽은 내용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해야만 한다.  진정한 책읽기의 마무리는 독후감이 아니라 차분한 사색과 행함에 있음을 알게 해주는 책을 만났다.   내게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는 바로 그런 책이었다.  제목처럼 `예술가의 길' 쯤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제목만 보아서는 예술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양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장을 파고들면서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처음과 끝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저자의 필력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술가로 성장하는 길을 이야기하지만 예술가를 특징지우진 않는다.  누구나 예술가의 본질을 갖고 태어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본질을 발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그는 반복해 강조한다.   

예술가의 핵심적인 바탕은 창조성에 있다.  신은 창조적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진정 창조적이지 않다면 세상엔 이처럼 다양한 종들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기질을 본받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기질을 아이가 물려받듯이 신의 창조적 특성은 인간에게 전이 돼 있다.  그러나, 누구는 예술가로 대성하고 누구는 평범한 일상인이 된다.  그는 존재하는 것을 만족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 생계를 유지하고,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는 일상을 보낸다.  그는 전혀 창조적이지 않는 기계의 모습을 닮았다.  예술가와 일상인을 비교하자면 삶을 즐기는 자와 견디는 자로 대별할 수밖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획득하진 못한다.   삶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는 존재하나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느끼고 사랑하고 발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성을 인간의 본바탕으로 설정하는 이 책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저자인 줄리아 카메론은 뉴욕의 멘하튼과 뉴멕시코 고산지대를 오가며 작가로 다양한 이력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다.   흥행에 성공한 `마이에미 바이스'라는 TV 시리즈물 대본 작가였고, <God's Will>이라는 영화로 런던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문예창작 강사로, 작곡가로도 일하고 있다.  그의 가장 이채로운 이력은 <택시 드라이버> <뉴욕 뉴욕>을 연출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결혼했었다는 것이다.  훗날 그들은 결별한다.   마틴 스콜세지와 이혼 후 그는 우울증과 알콜중독으로 오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의 창조성이 본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발견의 과정에서 얻은 창조성 회복 과정을 기록한 책이 바로 그의 <아티스트 웨이>였다.  이 책은 창조성 프로그램의 교재로 쓰이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 일반인들의 삶에 창조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인간의 본령이 아티스트라는 걸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우선 무엇이 필요한가?  저자는 창조성 회복이란 기적의 도구로 이 책에서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를 소개한다.  이 도구들은 존재하나 의식이 없는 당신의 창조성에 훌륭한 인공호흡법의 역할을 할 것이다.  왜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질까?  영혼에 감추어진 창조성을 이 책을 통해 회복하고 복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관통하여 이 기적의 도구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12주에 걸친 회복의 여정을 프로그램화 시켰다. 

12주에 걸쳐 우리가 써야 할 모닝페이지는 대체 무엇일까?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은 당신은 하얀 백지위나 모니터 위에 이제 두 세장 정도로 생각의 흐름을 적어 넣는다.  모닝페이지는 우리 내부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과정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내가 무엇에 상처 받았는지 그곳에 기록한다. 무엇을 쓴다고 해서 물리적인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계를 잊을 것이다. 나를 설정하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 조건들, 억압의 요소들을 마음껏 수정하고 고치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모닝 페이지 위에서 우리의 억압받은 창조성은 자신의 본래적 기능을 점차 회복한다.  그 안엔 잊혀진 꿈이 있고, 발설하고 싶은 언어가 있고, 상처받은 자아가 숨어 있다.  그를 불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창조성에 용기를 북돋는 일이 아닐까? 새로운 가능성을 기획하는 일이 아닐까?

모닝페이지와 더불어 12주간 우린 아티스트 데이트를 진행해야 한다.  아티스트 데이트는 일종의 산책이다. 혼자 하는 산책이 아니라 내면의 창조성이란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서 그에게 응석을 부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다.  하루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돈은 많이 들지 않지만 시간과 관심이 필요한 일이다.  무엇이든 좋다.  영화보기, 해변 산책, 자전거 타기, 아이쇼핑, 운동복 차림의 죠깅.  창조성을 불러내는 일은 일상의 업무나 의무에 짓눌려 있으면 불가능하다.  오직 목적없는 유희의 순간을 만들어 낼때만 우리의 창조성은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걸어 온다. 

"모닝 페이지와 아티스트 데이트라는 두 가지 도구의 배합을 라디오에 비유해보자.  그것은 송신하고 수신하는 쌍방향 과정이다.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자아와 꿈의 세계, 불만과 희망을 송신한다.  그리고 아티스트 데이트를 통해서는 통찰력과 영감, 지시를 수신하는 것이다."   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p.44

이 두 과정을 통해, 우린 본능적인 창조성이 어떻게 불모의 영역으로 내몰렸는지 깨닫는다.   왜 예술가들이 일반인과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하며 살아가는지 힌트를 얻게 된다.  예술가는 창조적 자아를 보살피고 키우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예술가로 살아갈 수 없다.  일반인이 생계를 예술로 꾸릴 수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본래 예술가의 기질을 내면에 품고 태어났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사람들은 일상에 매몰 돼 살아가지만, 가끔 음악이나 미술, 글쓰기 분야에서 재능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 재능이 전문성을 띄지 못할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창조성을 발휘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런 욕구를 내면에 품고 있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가끔 아내에게 농담처럼 듣는 말이 있다.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고, 그림을 그릴테니 이젤을 사달라는 것이다.  살림에 온통 정신을 쏟는 사람에게 듣는 말은 사실 농담이 아니라, 내면의 창조적 자아가 내보내는 진실의 언어였던 것이다. 

우리는 쓸 수 있는 시가 있으면 그것을 써야 하고,  그릴 수 있으면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  내면에 창조되기를 바라고 잉태된 모든 창조성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서 가치를 갖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창조성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 고 카메론은 주장한다.  이 책이 뭇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내면의 자아가 상상했던 것보다 무궁한 창조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창조적 인간으로 회복되어야 하고, 될 수 있음을 확신케 되는 것이다.

작가로서 창조성의 고갈앞에 서 있는 당신이라면,  아니 평범한 일상인이 무언가를 써보고자 하는데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줄리아 카메론의 다음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글쓰기가 막히는 지점의 문제점을 간파했다.  내면에 없던 것은 글쓰기로 나오지 않는다.  좋은 글은 미사여구가 가득 들어간 느끼한 언어속에 있지 않다.  바로 나의, 당신의, 그 누추한 삶속에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새로운 무언가를 억지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적는 것이다.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p.204  

글을 쓰고자 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심과 노력을 들이는가?  글이 잘 쓰여지지 않는 이유는 카메론의 말처럼 분명해졌다.  우리가 내면이 아닌, 밖을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든 답은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밖으로 표출돼 나올 때 그것은 소설이 되고, 조각품이 되고,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된다.   내면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내면의 자아, 내면의 창조성이 자신의 본령을 마음껏 뽐내고 드러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기를 세워주는 것이다.

줄리아 카메론은 창조성이 막혀 있는 사람들에게 독서는 중독의 일환이라는 섬뜩한 말을 한다. 독서가 창조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건 무슨 뜻일까 ?  많이 읽지 못해서 창조성이 부족한게 아니라 많이 읽어서 창조성을 훼손한다는 뜻이다.  독서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사고와 느낌을 제대로 소화하기보다는, 자신의 재료로 직접 요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에 따르면, 지나친 독서가 슬럼프를 가져올 때 그것을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일주일간 책읽기를 중단하는 것이며,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탈출구는 없다.   끊임없이 책읽기를 이어가는 것이 창조성을 발현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 경험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과거 너무 많이 읽어서 슬럼프에 빠졌던 날이 분명히 있었다.

지식과 예술의 가치와 영역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비평가와 소설가의 차이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비평가의 비평은 창조적인 활동은 아니다.  그는 분석적 언어를 쓸지언정 창조적 언어를 쓰지 못한다.  창조된 언어에 메스를 가할지언정, 창조성이 담긴 언어 자체를 생산하진 못한다.  그래서 비평가는 잉태되지 못한 예술가이며, 예술적 사생아가 아닌가.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말로 상상력, 즉 창조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책은 예술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나 일상에 매몰돼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나, 자신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며 살아왔던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다.  모두가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술가였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내 안의 창조적 자아를 키우기 위해 줄리아 카메론이 가르쳐 준 모닝페이지와 아티스트 웨이를 적극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휴일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날 가벼운 걸음으로 아내와 함께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날,  내가 그 산책길에서 눈길 주었던 모든 것들에서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느낀다.   그렇게 삶은 예술로 변질될 수 있는것 아닐까?   이 책은 긍정의 확신을 보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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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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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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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한동안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가?  사람들은 경제에 대해서 할말들이 많았지만,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작정해 본 이는 별로 없을 듯 하다.  온갖 수식과 전문용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차트로 이루어진 경제학 교수들의 논문을 읽는 것은 감히 일반인들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지금도 경제학 교수들의 논문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일반독자는 흔치 않다.  이건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다.  경제학과 경제학 교수들은 그렇게 높고 높은 철옹성을 쌓고 대학과 연구실이란 높은 성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그네들만의 용어와 분석틀로 연구하고, 그 결과물들을 고차원적인 논문으로 쏟아냈다.  그 논문의 독자는 물론 경제학을 연구한 교수나 학생들 정도이지만 말이다.

일반 독자들을 위한 교양 수준의 경제 서적들이 출판가를 휩쓸고, 감히 경제학을 다루는 책이 베스트셀러 1위를 달려본 일은 최근의 현상이 아닐까?  경제학이 철옹성의 담을 넘어 세상에 그 민낯을 드러내 보여준 것은 대단한 현상임엔 분명하다.  논리적이면서 쉽고, 그 흔한 도표하나 없이 수필처럼 읽어낼 수 있는 경제서적을 만났을 때 독자들은 얼마나 반갑고 기뻤던가.   지금껏, 경제학 전문가들이 왜 시답짢은 용어사전이나 펴내고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장하준은 바로 쉬우면서 논리적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수긍할만한 경제학 서적들을 펴내고 있는 학자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존재다.  그가 한국 독서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것은 두가지 현상으로도 증명된다.

첫째, 2008년 국방부가 금서목록에 올린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가 바로 장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장하준은 훗날 국방부의 이 발표에 고개숙여 감사했다. 금서목록에 오르자 책이 더 잘 팔렸던 것 !   둘째, 2011년 올해의 현상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초 출입기자들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장하준 교수를 "학계에서 비주류 경제학의 대표 학자로 우리나라의 국가적 자산"이라고 치켜세웠다.  국가기관인 국방부와 재정부 장관이 장하준에 대해 전혀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한쪽에선 금서라고 차단하더니, 한쪽에선 자산이라며 칭찬한다. 이 현상만 놓고 봤을때, 장하준이 그네들에게 던진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공포와 여유',  그들의 반응이 이처럼 헷갈리는 이유다.

지금껏, 누구도 신자유주의,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의 모순과 해악을 대중이 알아먹을 수 있는 쉬운 언어의 경제학으로 풀어 써내지 못했다는 반증 아닌가?  장하준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이렇게 독자들의 지지를 받자, 이곳저곳 보수와 진보측 가릴 것 없이 경제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현상은 흥미롭다.  보수측의 비판은 이해가 가지만, 진보측의 비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장하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나 자유시장 등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활개치게 만든 경제학과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로 비판한다. 심지어 그는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을 먹여살리는 수단으로는 무척 유용하다"라는 말을 인용해 경제학이 실제 경제 운용과 큰 관계도 없으며, 경제학이 오히려 경제에 해롭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이처럼 뭇 경제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생존권까지 위협하는데 장하준이 곱게 보이겠는가?

그의 성공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 독자들은 확실히 알게 됐다.  선진국들이 날때부터 선진국이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그네들도 오늘날의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을 거치고 현재의 대한민국 같은 개발도상국을 거쳐, 오늘의 미국과 영국같은 선진국이 되었다는 이 당연한 사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선진국으로 올라설 때 써먹은 보호무역, 높은 관세,  보조금,  국영 기업이란 사다리를 21세기가 되자 감쪽같이 치워버렸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는 물론 후진국이 이제 멀리서 발견해 기쁜 마음으로 오르려는 찰라에 있는 물건이고,  개발도상국은 사다리에 오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꼭대기에 올랐다고 그걸 먼쳐 치운다면 그것만큼 치사한게 어딨겠는가?

"나쁜 사마리아인인 부자 나라들은 이런 것들이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특별 대우'라고 항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 대우를 한다는 것은 그 대우를 받는 사람에게 불공정한 우위를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는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위한 승강기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브레일 점자를 `특별 대우'라고 부르던가?  마찬가지로 개발도상국들이 부가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고율의 관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보호 수단을 `특별 대우'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이는 상이한 능력과 필요를 가진 국가들에 대한 차별적인 (그리고 공정한) 대우일 뿐이다."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P.332

이제 장하준은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선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해 사람들이 가진 몇 가지 오해를 수정한다.  전작에서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선진국들의 모순된 행태를 비판했다면,  신작에서 그는 선진국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국내 정부의 철학없는 자유시장 정책을 하나씩 짚어나가며 조목조목 반론한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전설적인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관해 보이지 않는 손과 이기적인 개인에 관해 언급한다. 시장은 통제없이 가만히 놔두면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 추구에 앞장섬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장의 균형과 발전이 이룩된다는 설명이다.  혹여 국가라는 인위적인 `보이는 손'을 타게 되면, 시장 질서는 왜곡되고 경제 발전에도 득이 될 것이 없다, 고 그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처럼 설명했다.  "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장하준은 철저히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형성하고 있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행태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더이상 빵집 주인이나 푸줏간 주인처럼 소시민이 아니라, 거대 자본력을 형성한 재벌이자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그들의 파워는 국가 경제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를 공황으로까지 몰고갈 수 있다.  2008년 무분별한 금융자본의 행태로 세계는 제2의 대공항을 맞았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주장하듯,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 조각을 만들어주면, 결국에는 전체 파이가 커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파이도 역시 늘어난다는 트리클 다운 이론은 실제론 미미할 뿐이고, 늘어난 부는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그쳤다.  글로벌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기업을 사고 파는 행위가 자유로워졌지만, 그 목적은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간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고 빠른 시간내에 되팔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 국가 내의 직원들은 해고되고 장기투자가 줄어들어 결국 생선성이 떨어진다.  탈산업시대가 왔기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은 재조업보다는 서비스 산업을 키워야 한다, 고 주장하지만 개발도상국이 산업화 단계를 뛰어 넘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중국이 차분하게 고성장을 이룩하는 비결은 세계의 공장이란 별명에 걸맞게 재조업을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하준은 23가지에 걸쳐,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모순된 주장에 반기를 든다.  

장하준은 자본주의가 다른 경제시스템 보다 조금 덜하지만, 나쁜 경제 시스템이라고 단정한다.  나쁜 경제 시스템이 된 이유는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대로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시장에 좀더 많은 자유를 주어야, 부자들이 투자를 하고 투자를 해야 고용과 성장으로 갈 수 있으며,  나눌 파이가 커진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파이만 커졌을 뿐 세상엔 아무런 변화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하준은 이 책에서 나쁜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를 절대로 자유속에 놓아두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기적인 개인은 그저 이기적일 뿐이며 결국 시장을 이기적으로 만들게 된다.  방법은 정부에 의한 통제 뿐이다.  올바른 정책에 의한 적절한 시장 통제를 통해서만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장의 결과에 대해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할 때만이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식 회사 경영자들이 받는 천문학적인 보수를 제한하기 위해 주식 시장과 기업 지배 구조를 개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중략...)  시장의 결과는 `자연의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p.334

장하준의 결론은 분명해졌다.  모순에 가득찬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조금 덜 나쁜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통제라면, 그 통제는 결국 정부의 몫이다.   그런데,  정부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쉽게 말해 `가재(정부)가 게(신자유주의,재벌,통제받지 않는 글로벌 금융)편' 이라면 어떻게 될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물가 통제에 앞장서야 할 한국 은행은 정부의 눈치를 보며 금리 인상을 늦추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한국 은행은 정부의 눈치를 보면 안되는 독립 기관이다.  떨어지는 집값을 떠받치기 위해,  정부는 한동안 온갖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을 추진했다.   서민을 위한 임대 주택 보급이나 전세 대책은 뒤로하고 집이 없는 서민들이 결국엔 집을 사게 만드는 정책을 오랫동안 구사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뛰는 물가, 전세 대란이란 흉흉한 시절을 맞이하고 있다.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조금 덜 나쁜 자본주의로 환생할 수 있다는 장하준의 결론은 맞다.  그러나, 그 말은 좋은 정부만이 국민에게 좋은 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는 말로 약간 수정되어야 한다.   즉, 좋은 자본주의는 좋은 정부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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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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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이다 - 중국의 大문호 왕멍, 이 시대 젊은이들과 인생을 말한다
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 / 들녘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지난 20대는 내게 형이상학의 시대였다.  내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독서를 통해서였다.  부족한 지식으로 삶이 무엇이냐, 존재가 무엇이냐,를 사색하려 했다.  서양 철학, 문학 등을 줄기차게 읽었다.  그 시절 내 정신에 가장 깊은 자국을 남긴 작가들은 알베르 카뮈나 사르트르, 쇼펜하워, 프로이트, 토마스 만 등이었다.  고상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음악도 클래식만 선곡해 들었다.  그러한 노력이 한동안 정신의 고양(高揚)에는 도움이 되었다.  특히 좋아했던 알베르 카뮈가 내게 준 긍정과 부정의 영향력은 1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의 <시지프의 신화>는 내게 인생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  지나고 보니, 이것은 하나의 지적 해프닝였던게 아닌가 생각한다.   

부족한 경험과 식견으로 삶의 본질에 다가간 책들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인 자가 겪게 되는 혼란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양 저작들을 읽던 내게 한줄기 빛을 던져준 책이 있었다. 그것은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린위탕(林語堂)의 <생활의 발견>을 읽게 된 것이다.  중국의 작가이자 문명 비평가이기도 했던 린위탕은 미국에 거주하며 유네스코 예술문학 부장과 프린스턴 대 교수를 역임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서양 문명을 비평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중국인이었지만,  서양과 동양의 철학에 두루 능통했다.  린위탕은 <생활의 발견>에서 중국철학을 `진리를 안다는 것보다는 인생을 알려고 하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는 철학'이라 정의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서양 철학이 현실과 생활에 밀착되지 못하고, 연구실에서 지적이고 논리적인 탐구로만 인생을 분석하려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서구 철학자는 항상 논리에 열중해 있고,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지식의 가능성의 문제를 설정하는 인식론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 인생 그 자체를 안다는 문제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린위탕은 유머스럽게 비꼰다.  전쟁에는 나가지 않고서 보무당당 행진하는 영국 군대처럼 싱겁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20대 초입의 시간들은 이제 까마득하다.  독서와 사색이 시작됐지만 어떤 편협으로 빠져든 시절은 가 버렸다.  내가 그 시절을 어떻게 회상하든 오늘 내 지적 바탕에 긍정적 영향을 준 시간도 그 때이므로, 온전히 그 시간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아무튼, 우린 서양의 지적 전통 위에 살고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번역서들이, 신간들이,  대부분 미국의 저작들이다.  곁에 13억의 대국인 중국이 있지만 여전히 공자나 맹자를 읽는 데 그친다.    

현대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주미중국인협회로부터 네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작가, 열 네 살의 나이로 중국 혁명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자신이 쓴 단편 소설 한편 때문에 우파로 낙인찍혀 16년간이나 중국의 한 귀퉁이인 신장지구에 유배되었던 사람.  그 오랜 고통의 유배시절을 이겨내고, 1979년 복권 돼 중국 공산당 전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고, 다시 1989년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며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  오늘날엔 20세기 초의 대작가 루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겨룰만하다고 평가받는 작가,  바로 왕멍이다.  그가 최근 한 편집자로부터 인생을 논하는 책 한 권을 청탁받아 쓴 책이 있었다.  

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서 내가 읽어야 할 책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겸손하고 간결한가?  세상을 겪을대로 겪어 인생을 안다고 할만한 고희(古稀)의 나이에 이르러,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13억 인구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 자신을 학생이다, 라고 낮춰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독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맞다.  그는 인생이 배움의 연속이고, 그 배움을 통해 인생의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서술할 것이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인생론의 범주에 드는 책이다.  어떻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자기 계발서는 읽지 않는다. 읽어봤자 뻔하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읽듯 재미가 없다.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다,는 반발심만 인다.  왕멍도 이 책에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살아라, 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전혀 다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거쳐온 인생의 교훈들을 열거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독창적인 것이다. 이 책이 인생론이지만, 뻔하지 않은 이유다.  고로 재미있고, 교훈적이고, 닮아 행하고 싶다.  인생에 특별한 비법이나 왕도는 없다고, 그는 잘라 말한다.  긴 인생에서 고난이 없다, 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왕멍은 그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 예방법을 이야기 하지만,  그 이후의 대처법도 이야기 한다.  권력으로부터 밀려나 위구르인들의 자치구인 중국 신장지구에서 16년간 노동과 빈곤의 삶을 인내했을 당시, 그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훗날 문화부장관이 되었을 때, 지인들은 대놓고 그에게 물었다. " 왜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영문도 모를 재난이 다가왔을 때 당신은 명곡을 감상하고, 꽃과 나무를 가꾸고 애완견을 기르고, 시 한두 수를 쓰는 것이 좋다. 자기의 특기가 쓸모 없을 때, 당신은 다른 특기를 개발하는 것이 좋다. 내가 신장에서 살 때 나는 창작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나는 위구르어와 한어를 번역하는 일을 했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아가는 지역에서 번역은 아주 중요하다."   p.211, 왕멍 <나는 학생이다>

인생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명구다. 그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인생의 모든 고난이 닥쳐왔을 때에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움이란, 책을 통한 지식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위구르어는 소수어이고, 배우기에 어렵다고 한다. 16년간, 그는 위구르어를 배웠고 그 배움을 통해, 훗날 50를 바라보는 나이에 영어 공부를 시작해서 영어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배움과 그 가치를 무수히 강조한다.  배움은 절대적인 개념이다. 배움에는 조건이 없고 그 어떤 조건에서도 배울 수 있다. 책이 있어도 배우고 없어도 배운다. 신체가 튼튼할 때나 병상에 누워서도 배울 수 있다.   

인생 자체를 학습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고 즐거움을 얻었기 때문에, 그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을 그는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며, 그의 생각들이 편협하지 않고, 개방적이고 발랄하며 시대에 뒤쳐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게 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실천력 때문임은 자명하다. 그에게 배움과 인생은 동의어였다.   그는 인생을 비극과 희극, 어느 쪽으로도 규정하지 않으면서 오직 배움안에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려 한다. 중국 철학이 형이상학을 논한다기보다는 `인생을 논하는'데 치우친다는 린위탕의 언급처럼,  크게 봐서 왕멍의 인생철학도 실용과 현실에 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학생이었다!  내가 일생 동안 학생의 신분이었다는 이 깨달음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렇다!  나는 학생일 뿐이었다. 비록 나의 학력은 고등학교 일 학년에서 그쳤지만, 그 이후 나는 조금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읽었으며, 각 분야의 지식들을 쌓아나갔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셨고, 곳곳에 나의 교실이 있었고, 시시각각 언제나 학기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공무원 이력서 출신 칸을 살펴보니, 거기에도 이미 학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p.55 왕멍, <나는 학생이다>  

이러한 인생론은 참 독특하다. 그러나, 그간 내가 생각해 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 생활은 얼마나 시시껄렁한 일들의 연속인가?  의의를 다지기 위해, 술잔을 높이 치켜세운다.  술을 잘 먹는것이 능력이 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고리타분하다.  천편일륜적인 회식문화를 살펴보라. 토론이 없고, 술잔을 기울일수록 실수만 연발된다.  술자리에서 토론이 가능하다면 왜 커피한잔을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용기는 없는걸까?  술이 거나하게 되면, 간혹 싸움이 일고 미친듯이 위하여를 외치지만, 잔혹한 담배연기속에서 상하는 것은 자신의 위와 폐 뿐이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술을 잘 마셔야 한다.  맞는 말이다.  높은 분들가운데 술 못마시는 분들 많이 못봤다. 그분들이 거기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술을 퍼 마셨겠는가?  그러니, 4,50대에 돌연사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세계적인 나라가 된지 오래고 간혹 간이 못쓰게 돼 자식들의 생간을 이식해야 하는 간이식 성공률 1위의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이런 불합리한 회식 문화에 반대하며 일체 회식에는 참여하지 않는 저명인사들이 있다.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아니면, 회식 문화를 술이 없는 건전한 식사와 대화의 시간, 차와 음료로 담소를 나누는 시간으로 바꿔야 하는것 아닌가?  죽기 살기로 마셔대는 통에, 인생이 40대에 종을 친다면 이건 인생희극이다.  무절제한 회식보다는 자기계발과 독서에 투자할 시간을 가지는게 회사와 자신을 위해서 더 낫지 않나, 생각해 볼때가 가끔 있었다.  이 모든게 다 왕멍이 말한 배움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치우치는 삶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승진을 위해 공부를 하지만, 진정 인생을 위해 독서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왕멍처럼, 배움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러니, 퇴직하곤 할일이 없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면 퇴직후 그의 인생은 공허로 가득할 것이다.  인생의 가치를 배움에 두고, 배움을 통해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왕멍은 우리에게 시시하는 바가 많다.  인간으로서 취미를 갖고, 배움에서 도락을 삼는다면, 두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고희에 이른 노작가이자, 13억 중국인의 스승인 왕멍의 책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 왔다.  주위를 둘러봐도 책에서 도락을 삼는 이가 별로 없고, 배움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도 흔치 않다.  돈과 술과 담배와 향락에 포위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가득한게 사회이다.  어디서 젊은이들은 지혜를 구할 것인가?  인생의 가치는 결국 책에 있고,  배움에 있다.  이 명확한 진실을 말해주는 저자를 만난건 반갑고 기쁜 일이다.  생명과 생활이 위협받는 16년간의 유배 생활에서도 그 어렵다는 위구르어를 헌신적으로 학습하는 자세로 그는 그 언어를 마스터했다.  마흔 중반에 방문한 미국의 어느 공항에서 자신을 비롯한 방문객 한 사람도 영어를 할 줄 몰라, 곤욕을 치른 후 영어공부에 매진해 영어에 능통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마스터하면,  보다 넓은 아량, 개방적인 두뇌, 새로운 사물에 대한 흥취, 더 넓은 가능성, 사색의 습관 등을 얻게 된다고 왕멍은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배움속에 인생의 답이 있다는 것, 둘째, 외국어를 두려움 없이 습득하자는 것 !  이제  13억의 스승은 온전히 나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가르침에 수긍하며 책 전체가 밑줄로 가득하다. 이런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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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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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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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과 <1984>를 지은 작가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 1946)'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심리를 묘사한 바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글쓰기는 복잡한 인간적 본능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그걸 정의할 순 없다.  그러나,  그 에세이에서 조지오웰은 어쩌면 가장 공감할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작가의 글쓰기가 결국 `정치적 목적'에 가닿을 수밖에 없다, 고 일갈했기 때문이다.  

왜 작가의 글쓰기가 좀더 고상한 데 이르지 못하고, 정치와 같은 난잡하고 때론 혐오스런 분야를 지향해야 할까?   인간의 삶 자체가 정치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인간 삶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정치와 맞닿아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신의 섭리일 수 있지만,  그가 어머니의 자궁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대면해야 하는 것은 운명적인 그 세계의 `정치 사회상'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사회에 태어나는 인간과 억압과 감시, 차별과 특권이 판치는 독재 국가에 태어나는 것은 생의 터전을 천국과 지옥으로 가른다.  결국, 한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개별적 인간의 운명과 삶 전체를 주관할만한 위력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정치적 동물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한 시대의 영혼들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가 겪는 아픔과 마주한 운명은 그에게 진실을 고발하고, 그것을 결국엔 `쓰게' 이끈다.  숨막히는 독재의 상황은 인간의 자유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탁월한 견해처럼 영혼의 고발자인 작가의 모든 글쓰기는 암묵적으로 정치적 뉘앙스를 함유하게 된다.   201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페루 출신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권력구조의 지도를 그려내고 개인의 저항·반역·좌절을 통렬한 이미지로 포착해냈다"고 설명했다.  선정 이유에서 보듯, 그의 작품들이 숱한 정치성을 띠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노벨상 수상작 선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작품은 소설 <염소의 축제>라고들 한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무려 32년간이나 도미니카 공화국을 지배했던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의 폭정에 관한 이야기로, 권력에 빌붙어 트루히요의 충직한 `개들'로 살았던 권력자들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그에 희생되고 상처받은 무고한 시민들과 여성들을 회고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세계 독자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독재를 이미 경험했거나,  현재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추스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다.  더불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근본적인 악마성을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해 복원하는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솜씨는 세계문학의 진수를 맛보기에 충분하다.

도미니카 공화국, 그 역사적 배경

20세기 초 세계적인 독재자를 키워낸 땅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품고 있을까?  도미니카 공화국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 사이에 존재하는 인구 800만 정도의 섬 국가다.  이 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가 세계 최빈국 아이티요, 나머지 3분의 2의 땅덩어리를 도미니카 공화국이 메우고 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섬을 점령했고, 섬의 원주민인 타이노 족은 서서히 백인과 그들이 데려온 흑인 노예의 등살에 멸족하기에 이른다.  처음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땅은 아이티 흑인 노예들의 혁명을 통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  아이티 혁명을 통해 섬은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지고, 흑인들을 피해 백인들이 넘어온 땅이 바로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이 되었다.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의 종족 90%를 이루는 뮬라토는 그때 넘어온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다.  도미니카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 독립했지만, 20세기 초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되고 1930년 육군 장성인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는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1961년 산크리스토발 고속도로 부근에서 정적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암살되기 전까지 무려 32년간, 도미니카 공화국를 1인 지배했다.  그는 여느 독재자들의 변명처럼, 재임 기간 경제와 정치를 안정 시키고 국민 소득을 증대시켰으며,  뛰어난 리더쉽으로 물렁한 국가를 반석뒤에 올려 놓았다고 평가받길 원했다.   그러나 국가 발전이란 성과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인과 강간,  권위적 무소불위의 폭정과 측근들의 축재가 만연된 사회상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게 옳은 것이며 가야할 길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소설 염소의 축제 -  세 가지 이야기에 녹아든 독재의 참상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1,2권으로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이다.  이야기가 맥을 잡아내는 1권은 읽기에 힘이 든다.  그러나 2권은 물 흐르듯 흥미롭게 빠르게 전개된다.  바르가스 요사의 필력이 흠잡을 데 없는 번역에 실려,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즐거움보다는 분노와 공분에 닿아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큰 줄기에서 세 가지로 나뉜다.  상원의원 아구스틴 카브랄 의원의 딸, 우라니아는 뉴욕의 성공한 변호사다.  그는 하버드를 나왔고, 세계 은행에서 일한다. 마흔 아홉이지만 미혼이다.  14살 때 도미니카를 떠난 이후, 그는 한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편지에도 숱한 세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중병에 걸려 말없이 초점없는 눈빛을 내보이는 아버지 앞에 그는 35년만에 마주하고 앉았다.  우라니아는 왜 35년간, 아버지를 증오했을까?  그는 왜 조국을 찾지 않았을까?  상원의원 카브랄은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고 조국에 왜 그는 등을 돌렸던 것일까?

두번째 이야기는 7명의 암살자들을 따라간다. 안토니오 델라 마사, 안토니오 임베르트, 아마티도,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 토니 임베르트, 페드로 리비오 세데뇨, 터키인. 이들은 1961년 5월 30일 염소를 죽이는 축제를 계획한다.  여기서 염소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별칭이다.  염소는 강한 번식력이 있는 동물이다. 흐리멍텅한 국가를 반석위에 세웠다고 자부하는 트루히요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도미니카를 재건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32년간 독재를 이어오면서 그는 주변국의 대통령 암살에 관여하고, 천주교 주교들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미국의 미움을 사고, 미주기구들로부터 경제 제제를 받는다.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시인이자 문필가인 발라게르 박사를 세우고, 자신은 후견인 노릇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그는 발정난 염소처럼, 공화국의 무수한 여인들의 처녀성을 노린다.  측근의 아내를 취하며 즐기는 것은 보통이고,  한밤중 남편과 시간을 보내는 여인들에게조차 치근거린다.  누구도 공화국의 `수령'이자 `원수'인 트루히요의 요구에 `노우'라 말할 수 없다.  이 짐승같은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이 공화국 시민의 존엄과 자유를 쟁취하는 일이라 믿는,  7명의 암살자들은 국방부 장관 푸포의 쿠테타 약속을 믿고, 거사를 진행한다.  5월 30일 밤,  발정난 염소를 죽이는 성대한 축제는 성공했을까?  놀랍도록 사실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로서 요사는 독재자의 허망한 최후와 암살자들의 고통스런 고문장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세번째 이야기는 트루히요의 통치와 그들의 측근들에 관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다.  공화국을 아이티의 침략과 경제적 수난, 열강의 압박으로부터 구했다고 자부하는 트루히요는 여성을 취하는 것을 그 보상으로 생각한다.  그의 절대권력은 측근이 내뱉은 한마디의 말 실수로 권력의 상층부를 갈아치울 정도로 막강하다.  그에게 충성하고 아부하는 측근들은 그를 신처럼 모신다.  트리히요의 은혜를 하늘처럼 여기고, 따르는 자들에겐 재산과 권력과 안락이 제공된다.  트루히요의 친인척은 국가 재산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국외 은행에 국부를 빼돌리며, 그것을 암묵적으로 허락받는다.  의심많은 트리히요는 경호부장 조니 아베스의 비밀 요원인 칼리에들을 통해 끊임없이 정적을 살해하고, 감옥에 가둔다.  그는 공화국 내에서 32년간이나 신처럼 행세한다.  어리석은 국가와 국민을 궁지에서 구원한 사자처럼 생각하지만,  전립선의 병 때문에 시시때때로 소변을 저린다.  그의 방광은 유일하게 그의 의지를 거부한다. 그는 고장난 방광을  감추려 들고,  몹시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러한  모습은 독재자의 카리스마에 어울리지 않게도 애처롭다.  끊임없이 여성들을 농락하면서 숙청 대상에 오른 최측근 카브랄 상원의원의 딸인, 14살 소녀 우라니아를 범하는 모습은 독재자의 본질이 악마성에 닿아 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독재자의 보편적인 악마성을 고발하다

이 소설은 독재자의 곁에서 그에게 충성을 다 받치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자들의 비열함을 드러낸다.  카브랄 상원의원은 트루히요의 신임에서 멀어지자,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낸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란 두려움에서 자신의 외동딸을 재단의 재물처럼 트루히요에게 바치고자 한다.  카브랄의 비상식적인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자신의 딸을 수령에게 보냄으로써,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동결된 게좌가 풀리고, 다시 상원위원장으로 복귀될 희망을 품는다. 트루히요의 쿠테타가 성공하던 시점에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일으켜 세운다는, 각오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독재의 시간이 흐르자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양심조차 실종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한다는, 속설이야말로 트루히요의 독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세가지 이야기를 자신의 유려한 서사속에 담는다.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세가지 큰 줄기를 전후좌우로 오간다. 1권이 끝나자 이런 서술 방식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엮는 그의 유능한 솜씨에 감탄케 된다.  생소한 먼 나라 독재자 이야기는 작가의 탄탄한 재능위에 흥미와 긴장감을 이어간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어느 순간 독자는 하나의  질문에 가 닿는다.  그것은 단순명쾌하다.   ` 독재가 왜 나쁜것일까?' 

많은 답이 있을 수 있겠다.  독재의 해악은 인간의 악마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떠오르는 한가지로 답하고 싶다. `그것이 생명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생명은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인 목숨을 상징하는건만은 아니다. 그건 사람들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자존심, 자존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살아도 사는게 아닐 수 있다.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독재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파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르니아는 14살의 나이로 70살의 독재자의 품에 안겼다.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성적 학대를 통해,  그의 영혼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돋아난다.  조국을 떠나,  뉴욕에서 성공한 변호사로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연애도, 결혼도, 생각해본적이 없이 늙어가고 있다.  독재의 참상은 우르니아의 고백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난 공부했고 직업도 있고, 돈도 잘 벌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아직도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 (중략) 고모와 너희들도 문제가 있고, 힘든 시기를 보냈고, 실망하고 절망하기도 했어.  그러나 가족이 있고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친척도 있고 조국도 있어. 그런 게 바로 인생이겠지. 하지만 아빠와 총통은 나를 불모지로 만들었어."  염소의 축제 2, p.365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탁월한 재능으로 독재자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 안에 숨겨진 악마성을 폭로한다.  그가 그리고 있는 독재자 트루히요는 전혀 개성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보편적인 세계 시민이다.  다만, 그가 독재자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역사를 통틀어 독재자는 트루히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면 국가와 시민은 영원히 구원될 수 없을거란 과대 망상을 앓는다.  쿠테타로, 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독재의 본색을 드러낼 때,  몰락의 나락에 선다.  그래서, 일찍이 철학자 플라톤은 부로 인해 마음이 들뜬 장사꾼이나 군인이 쿠테타로 군사정권을 수립할 때, 국가의 파멸이 온다고 예언했던 것이다.

뛰어난 서사, 선명한 이미지로,  작가는 <염소의 축제>에서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는 순간,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가임을 의심하지 못한다.   문학이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대상은 상처받은 세상의 생물과 무생물이다.   그건 역사와 개인을 포괄한다.  우라니아의 비극적인 인생은 우리에게 한가지 교훈을 남긴다.  독재자는 죽어도, 그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인물은 살아남는다는 것.  트루히요의 시체위에서 광분하는 수하들을 보라.  몸통과 깃털은 한 몸이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처녀성을 뺏기지 않기 위해  우린 정치를 눈여겨봐야 한다.  세상이 정치를 통해서만 바뀔 수 있다는 간단한 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정치적 무관심이야말로, 언제든지 또다른 우라니아의 비극을 만들 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소설이 시민에게 던지는 교훈이자 가르침이다.

조지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되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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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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