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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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역사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자니 내 블로그의 리뷰 분류 항목엔 `역사'가 없음을 깨달았다.  믿기질 않지만 사실 그랬다.  역사가 홀대받는 시대에 나또한 은밀히 동참했단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고등학교에선 2004년부터 역사 과목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었고, 주요한 국가고시에서 한국사는 제외되었다.  역사란게 얼마나 공부하기 까다롭나?  외울것 투성인게 역사다. 출제자가 수험생을 골탕먹이려면 영어나 수학 못지 않게 어려울 수 있는게 역사과목이다.  그래서 수험생은 제도가 바뀌는 시점에 당당히 역사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    

우스개 소리로 요즘 초등학생들은 3.1절을 유관순 누나 생일날 쯤으로 안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은 그래도 괜찮다.  고등교육을 받는 고등학생들조차 자기가 발딛고 있는 땅덩어리의 역사를 모른데서야 말이 될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걸 정치권에서 깨달은건지,  요며칠 전 당정이 한국사 교육을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뉴스를 자세히 들어보니 수능 필수과목 선정에는 난색을 표했다 한다.  여전히 정치권은 국민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데 소홀하지 않다.  점수에 목매달아 울고 웃는 영악한 아이들이 수능에도 나오지 않을 역사과목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까 ?  답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고등교육 자체가 수능 점수를 잘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니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하고,  또 수능에 필수 과목으로 지정이 된다해도 제대로 된 역사공부가 될 리 없다.  역사는 이해가 아닌, 암기로 전락한지 오래니까.  그리고 학교 교육이 주도하는 역사 교육은 `객관적 역사'가 아닌 `국사(National History)' 아닌가?  국사를 배운 이들이 닿게 되는 지점은 자민족 중심주의로 무장한 배타적 애국주의다.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이 가야 할 지향점은 애국주의인가?   우린 정부가 주도하고 심의해 논 국정 교과서안의 국사가 아닌, 진정한 역사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인류의 삶에 대한 애정이란 결국 독서를 통해 심화된 역사안으로 발디딜 때만 가능하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의 책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는 국정 교과서 안의 역사를 넘어서, 아니 그 안에선 결코 배우지 못할 지식을 발굴하며 우리에게 20세기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는 책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자'다.   학문과 국경의 경계와 틀을 넘어서는 역사학을 주창하는 그는 다소 파격적으로 이 책에서  `만들어진 역사'나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국사가 결국 세계사의 진실을 외면케 하고 역사를 통해 인류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철학자로서 풍부한 지식과 남다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20세기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을 이끌었던 역사안의 인간들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 대상은 스탈린과 같은 공산주의자,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  우리 현대사의 두 독재자, 김일성과 박정희,  영원한 혁명 아이콘 체 게바라, 아우슈비츠를 탐색한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  동양 유림의 스승 공자에게까지 뻗어있다.  이 박식한 역사학자는 그들에게 1:1로 편지를 쓴다.  마치 친분있던 지인에게 부치는 편지인냥 가볍게 인사말을 하고 안부를 묻지만 그것 뿐이다.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론에 들어가서는 역사적 과오를 묻고 따지며, 때론 은밀한 약점을 파고들어 공격한다.  당신, 왜 그 따위로 살았냐? 고 매섭게 공격할 때 죽은이가 묘지에서 일어날까 섬뜩할 지경이다. 

20세기 세계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이 책을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는 시대니, 이 재기충만한 역사학자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문장은 편지체 임에도 다소 딱딱하고,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무게와 지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읽다보니 20세기 세계사가 인물을 통해 해체되고,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인물위주로 역사를 톺아본다는 것은 겉핥기가 아니라 그 내면의 결로 파고든다는 장점이 있다.  시작할 때보다 책장을 덮고 나서 더 큰 만족과 지적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그의 책에 도전한 것은 몇 해 전인데 임지현은 그 많은 인물 가운데 역사가 사이드를 첫장에 불러온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이 서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지리'라 주장했다.  이 기막힌 용어엔 서양의 동양 지배 논리가 숨어 있었다.  언제나 동양의 발전 과정엔 서양이란 기준이 있었고, 동양인 스스로 자신을 비하할 수밖에 없는 매카니즘인 오리엔탈리즘으로 굳어진 경위를 파헤쳤던 팔레스타인 출신 하버드 대학 교수, 언젠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아이들과 함께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진 속의 그에게, 임지현은 그의 <오리엔탈리즘>이 `상상의 지리'라는 개념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세계사라는 개념 자체가 바뀔 수 있었음을 고마워한다.   그 바뀐 개념속에서 우리는 서양사나 동양사가 아닌 그저 인류의 `역사'를 공부해야 할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했고, 1937년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김일성.  재미학자 서대숙에 따르면 일본군이 당시 그의 목에 걸었던 현상금이 중국인 공산주의자보다 세 배가 많은 1만엔이었다고 한다.  항일 투쟁에 대한 긍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북한을 건국한 후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일제의 천황제에서 얻은 지배 노하우를 바탕으로 유례없는 개인 숭배 문화를 개발하고, 정치종교화 시킨 장본인. 임지현은 그에게 역사의 주체가 당신인가, 민중인가? 라고 따져 묻고 있다.  잘 살아보자는 대중의 욕망을 등에 엎고, 유신을 선포 같은 시기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던 독재자 박정희에게 쓰는 편지에선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김일성과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를 지냈던 박정희를 비교하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대학생의 충격과 당혹감은 어떤 것이었을까? 되묻고 있다.  김일성과 박정희를 독재자라는 공통의 분모로 묶어 내면서도,  박정희에 대해선 김일성에게 가졌던 광복전의 콤플렉스를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여 민족주의와 개발독재로 극복하려 했다고 분석해 낸 점은 독창적이며 신선하다.

폴란드의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는 스탈린과 레닌,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자가 걸었던 길과 다른 제 3 의 마르크스주의를 택했던 로자에 대한 임지현의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다.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 피에 굶주린 로자 등 공적인 평가와 갈리는 로자는 작은 키에 매부리코, 불완전한 걸음걸이와 고급 취향에 항상 돈이 쪼들려 궁색했고, 친구의 아들과 스캔들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는 개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모순과 양면성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며, 로자를 변호하는 임지현의 글은 현실 사회주의에 실망한 한 역사학자가  때묻지 않는 순수 마르크시즘에 갖는 관념적 애정으로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기획자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취재하면서 악의 평범성 문제를 들고 나온 한나 아렌트, 나치의 우두머리인 아이히만을 잡아놓고 보니 그가 괴물이 아닌 보통이하의 평범한 남자였음에서 유추한 `악의 평범성' 테제는 폴란트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악의 합리성: 근대는 야만이다' 라는 연구 주제로 가 닿는다. 이들의 소신있는 역사 연구를 통해, 시오니즘으로 무장한 이스라엘과 유대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기억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이 글속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이면,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을 묵인했던 시오니스트들의 정치적 악마성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나치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려 한 것, 멸절하려 한 것, 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려한 시오니스트들의 이해가 맞물려 있다는 점은 역사가 가진 이면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20세기 세계사의 안쪽을 역사적 인물들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개인의 치부와 공적을 두루 살피는 과정에서, 역사가 한 개인의 능력과 철학을 통해 형성되었고, 옳고 그른 방향으로 지금 이 시간도 구획되고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섬뜩하기조차 하다.  역사의 주체는 민족, 종교, 이념과 같이 거시적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언제나 개인이다.  임지현이 세계사 편지를 개인에게 띄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21세기 우리가 처한 삶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민족에 갇힌 역사적 상상력을 국경을 넘고 이념을 넘는 지점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주창하는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결론이다.  역사를 국경앞에 가두면, 20세기의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2차 세계대전의 포화, 간간히 들려오는 우리 시대의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는 경계 안에 갖힌 역사가 맞이할 필연의 결과일지 모른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역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하는가?   임지현은 `역사적 책임'이란 말로 답한다.  외울것만 가득한 역사과목을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수능필수 과목 선정엔 난색을 표하는 역사에 대한 개념과 소신이 없는 정치인들에게, 이 책의 결론을 선물하고 싶다. 

"결국 책임이라는 말은 누구에겐가 대답한다는 거지요.  이때의 누군가란 곧 이웃이겠지요. 그중에서도 소외되고 배제되고 타자화된 이웃 말입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그들은 폴란드의 유대인일 수도,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일 수도, 미국 남부의 흑인일 수도, 멕시코 정글의 원주민일 수도, 헝가리의 집시일 수도, 르완다의 투치족일 수도, 세르비아의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책임이란 바로 이들의 고통스러운 물음과 신음에 이웃의 한 사람으로서 반응하고 답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이들의 신음과 고통에 뒤돌아 반응하고 답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  임지현, <세계사 편지>,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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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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