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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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를 얻기 위함이 아닐까?  현실의 일상화된 제한과 억압에서 해방된 공간은 역시 하얀 백지 위일 수밖에 없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하얀 백지가 공포스러운 것은 사실이겠다. 그러나 순간의 공포란 자유를 얻기 위한 입구에 `그가' 들어섰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 문학은, 소설은, 새로운 형식과 신선한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어떤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훌륭한 문학은 탄생할 수가 있다.   

천명관의 <고래>는 천방지축 이야기 실타래가 엮이고 엮여 나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소설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묻기에 알맞은 작품이다.  인물과 배경과 사연이 한데 묶여 독특한 스토리를 짓는다.  이 소설이 독특한 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환상이 현실의 상관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나타나 살아있는 인물의 행로를 뒤바꿔 놓는다면,  세계는 거대한 무질서로 돌변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선 그것이 가능하다.  결국, 문학이기에 가능한 자유인 것이다. 

소설은 `붉은 벽돌의 여왕' 으로 호칭된 춘희(春姬)로 시작된다.  한 거지여자를 통해 마구간에서 태어난 몸무게 7 킬로그램의 아이는 열 네 살이 되기전 100 킬로그램으로 늘어났고, 그녀는 폐허가 된 도시의 외곽에서 벽돌을 만드는 `예인'으로 살고 있다.  벽돌을 예술 작품의 수준으로 찍어낼 수 있는 내공의 역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혼자 벽돌을 굽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고독해졌으며 고독해질수록 벽돌은 더욱 훌륭해졌다."  천명관 <고래>, p.407 

작가는 평대라는 광활한 원시적 공간을 거대한 개발 붐의 도시로 탈바꿈 시키더니,  결국 춘희와 함께 붉은 벽돌 공장을 짓고 폐허로 만든다.  시작과 끝, 은 이처럼 단순명확하다.  이제 독자가 찾아가야 할 것은 거대한 이야기의 맥락과 숲이다.  작가의 가이드를 통해 독자는 이 깊고 광활한 스토리의 늪으로 차츰 빠져들게 된다.  이야기는 평대의 국밥집 노파로 시작해서 춘희를 낳은 엄마 소녀 금복의 이야기로 흐른다.    이야기의 세가지 흐름은 각자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기묘하게 흐른다.  소설은 세 인물을 거치며 인생사 모든 질곡을 그 안에 담으려 한다.  돈과 권력, 사랑과 치정, 배신과 죽음, 인정과 비정함, 역사와 개인을 넘나든다.   

사업수완에 능하고 뛰어난 미모와 교태로 무장한 금복,  평생 국밥집을 해 모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은 노파, 그리고 괴력의 춘희 이야기가 인과속에 묶여 흐른다.  처음과 끝, 생경한 이야기의 만찬같은 소설은 줄곧 독자를 단단한 현실과 환상이 조합된 4차원의 세계로 이끈다.  소설의 본질이란 결국 진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있음을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된다.  인생에 대한 교훈과 진실의 탐구,는 소설 기능의 곁가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천명관은 소설의 이같은 본질로 독자를 안내하는 작가다.  그의 이야기는 재밌다.  교훈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근슬쩍 끼워넣은 다채로운 법칙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해석한다. 

스토리의 끝을 마무리하는 인생의 법칙들은 단연 독창적이다. `세상의 법칙, 이념의 법칙, 사랑의 법칙, 거리의 법칙, 생식의 법칙', 끝없이 이어지는 소설안 법칙들을 읽다보면 웃음이 나올 뿐 아니라 촌철살인의 비유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것이 진귀한 이야기 끝에서 작가가 성취한 인생의 진실들 아니겠는가.  이야기의 흥미와 교훈을 자연스레 함께 엮어내는 그의 재능이 돋보인다. 

천명관은 <고령화 가족>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다.   <고령화 가족>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글쓰기는 생생하다.  영화 한장면을 소설 페이지가 대체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평생 모든 돈을 한번 써보지도 못한 `한'을 갖고 죽어버린 노파가 이야기의 흐름 안에 줄곧 등장해 코믹하고 절묘한 `씬'을 만들어낸다.  평대의 영화관이 불타는 장면에서 노파는 홀연 나타나 모든 비상구를 틀어막고 사라지더니, 괴력의 춘희가 교도소를 출소할 때는 두부파는 노파로 등장해 춘희에게 야릇한 미소를 던지고 사라진다.  이 생경함은 기묘함과 기발함을 낳는다. 

이같은 모습들은 얼마든지 영화로 만들어 관객의 웃음과 혼을 불러오고 빼놓을 수 있는 설정이다.  춘희의 아버지인 괴력의 사나이 `걱정'이 통나무를 온몸으로 막아내 사람들을 구한 `스펙타클'한 장면이나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나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이란 긴 호칭이 붙은 칼자국의 이야기는 쿠엔티 타란티노의 `킬빌' 한 장면 어떤 인물을 보는 듯 잔혹하고 흥미진진하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 천명관 <고래>, p.117 

진귀한 이야기와 생생한 영화적 `씬'으로 넘쳐나는 소설은 흔치 않다.  천명관은 문학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팔리지 않는 시나리오 쓰기를 그만두고 이제 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동생의 권유로 그는 이처럼 맛있고 신선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문학수업과 신춘문예 입상의 정규과정을 생략하고, 그는 당대 최고 이야기꾼의 자리에 올랐다.  요즘 소설들은 한결같이 문장과 형식에 있어 나무랄데 없다. 그러나, 스토리가 진부하고 신선하지 않다.  더구나 소설이 `당대'의 문제들에 집중하지도 못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저 침묵한다.  그러니 독자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훌륭한 이야기꾼 천명관은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양산하는 문학판에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될 듯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를 좋아하는 한국독자들이 넘쳐나는 것은, 그의 소설이 흥미와 생경함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리가 독자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유아적인 `자기애'로 넘쳐나는 소설들을 읽고 어떻게 독자가 상상력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다채로운 상징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비트는 천명관의 글쓰기도 주목할만 하다.  소설은 자기의 이야기임에 동시에, 사회의 이야기여야 한다.   <1984>의 작가 조지오웰은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글을 쓸때 여지없이 자신의 문장이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형식과 내용에 있어 무한대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천명관은 소설속에서 수많은 법칙들을 인생의 공식인냥 나열한다.  그같은 법칙들은 현실의 삶과 맞아떨어지는 절묘함과 동시에 어떤 슬픔과 한계를 상징한다. 결국 법칙이란 항상 강제와 억압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다. 문학은 모든 한계를 떨쳐내야 하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생각을 한계짓는 것은 작가들에겐 당치않는 일이다.  

오늘 내가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문학이 생각의 자유, 삶의 자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실현하기 때문이다.  천명관의 작품은 `문학이란 결국 자유'를 향한 영원한 갈망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가 천방지축 엮이며,  소설과 영화의 형식을 넘나들며, 현실과 환상을 배합하였던 건 그같은 노력의 일부분이다.  그의 글쓰기를 보며, 하나의 문장에도 우주가 담길 수 있음을 간파했다.   문학의 세계는 그렇게 무한하며 깊다.  하여, 문학은 결국 `자유'인 것이다.  

 

 

20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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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 - 당신을 위한 글쓰기 레시피
김민영 지음 / 청림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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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책읽기에 빠져든 시절, 내겐 두가지 욕망이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책을 읽어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흡수하는 것, 그래서 세상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갖고자 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보다 많이 알고 싶다는 지적 욕망은 허영이 아니라 어떤 갈망 같은 것이었다.  두번째 욕망은 보편적인 시각에서 인정받는 글을 써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른말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이 욕망이 발원한 시점은 20대 초반이었으니 이제 20여년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 나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고 만족할만한 글을 써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책읽기와 글쓰기는 내가 평생을 추구해야 할 과업 같은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일년가야 100권의 책을 읽지 못하고, 여전히 내 글쓰기는 전진에 속도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다는 생각은 계속 읽고 쓰는 데 큰 힘을 실어준다.  나처럼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글을 써보자 하는 이 꿈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망으로 변화하는 시절을 맞고 있다.  요즘 글쓰기 열풍은 심상치 않다.  서점에 가보면 글쓰기 관련 서적만 모아놓은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글쓰기에 관한 대중의 관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일까?   유명 작가들은 글쓰기 입문서 하나씩은 내놓는 시절이다.    오직 글을 잘 쓰고 싶단 욕망 하나로 지금껏 나는 많은 글쓰기 책을 읽어왔다.  

그러나, 한 권의 글쓰기 책을 읽고 난 후 뭇 사람이 곧바로 글을 잘 쓰게 되진 못한다.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영어 공부를 한창 하던 시절, 내가 즐겨 읽었던 책은 영어공부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책들을 따라 한동안 영어공부를 해봤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어공부는 시들해졌고, 나는 지금도 영어공부를 십수년째 하고 있다.  방법론 대로 따라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목표와 동기를 갖는게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또 한 권의 글쓰기 방법론에 관한 책을 읽었다.  신간 소식을 듣자 곧장  책을 주문했다.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할 것 같은 느낌.  읽지 않으면 내 글쓰기가 앞으로 한참동안 어떤 미로를 헤맬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이버 책,교육 분야 파워 블로거이자 글쓰기 전문 강사인 김민영의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는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온 책이다.  활발한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가 몇 해 전 내 블로그의 리뷰 한 편에 대해 첨삭을 해준적이 있다.  그는 첨삭 댓글을 달면서 내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이런 식으로 고쳤으면 좋겠단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 나는 쑥스러웠지만, 무척 기쁘고 고마웠다. 그 이후, 그의 블로그를 통해 글쓰기에 관한 글을 읽고 큰 도움을 받았고, 저자의 책과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글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책과 글쓰기에 관해 이론과 실전에 능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그는 평소 다양한 책을 사모았지만, 글쓰기 관련 서적을 거의 빠짐없이 구입해 연구하고 교육에 활용해왔다.  이 책은 그간의 모든 관심과 연구의 결과물이다.   

이 책의 구성은 특히 글쓰기 입문자에게 유용하다.  글감이 없어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머리속의 빨간 펜을 잊고,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글을 쉽게 써보라고 권유한다.  대부분의 글쓰기 입문자들이 잘 쓰겠단 강박관념에서 실패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 조언은 적절하다.  전반부에서 탄탄한 글쓰기를 위한 얼개 짜기, 단락의 개념 학습,  단락 연결 기술을 통해 매끄러운 글쓰기 비법 등을 다룬다. 후반부로 들어와선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글쓰기 방법에 관한 조언이 가득하다.  잘 읽히기 위해서 간결하게 쓰고, 묘사를 통한 생생한 글쓰기, 글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기교와 초고를 퇴고하는 노하우를 전한다.  이 책의 주제는 그간 우리가 보아왔던 글쓰기 책과 크게 차이가 없다.  글쓰기의 동기를 부여하고,  잘 쓴 글을 분석하여 생명력이 있는 글쓰기 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글쓰기 초심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 `무엇'때문에 수많은 글쓰기 책 가운데서도 이 책은 단연 돋보인다.  

"종일 글을 썼습니다. 강의가 없는 날이었거든요. 중간에 카레를 만들어 먹은 것 말고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붙잡고 있던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목표량을 달성한 지금, 기분 최고예요! 이제부터라도 나가 놀고 싶은 심정이네요(새벽2시에 이런 소망이라니...) 아무튼 컨디션이 매우 좋습니다. 요가도 못 가고, 읽고 싶은 책도 못 봤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에 행복합니다.  종일 집에서 지내며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는 글을 써야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고요. "    행복한 글쓰기  p.18 , 김민영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 

글쓰기의 노하우와 방법론만 전한 책이었다면 책장을 다 덮은 후 내게 별 감흥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필요하면 다시 찾아봐야할 글쓰기 참고서로 각인됐을 테니까. 그러나 이 책의 기저를 줄곧 떠받치고 흐르는 하나의 메세지가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열망'이다.  부자가 되겠다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오직 글을 잘 쓰는 것이 꿈이었고, 글쓰기를 직업으로 갖고 싶은 열망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이 열망은 이 책의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간 저자가 블로그에 공개한 개인적인 글들을 방법론적인 글쓰기의 예시로 가져와 설명하는 것도 독특하지만, 그 방법론적 예시들이 주는 메세지 자체가 글쓰기에 관한 하나의 큰 가르침이자 이 책의 독창성을 드러낸다.  

한때 저자는 잘 나가던 증권사를 그만두고 글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꿈을 이루고자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했다.  탄탄한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방송작가, 영화평론가, 지방지 기자, 잡지사 기자로 떠돌았다.  오직 자신의 글을 쓰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말이다.  오늘날 그는 독서교육 전문회사의 이사로,  인터넷 서점과 포탈의 파워블로거로, 글쓰기 전문강사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꿈을 향한 인내와 각고의 노력이 오늘날 그를 최고의 글쓰기 전문가로 키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책읽고 글쓰는 시간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전문가로 발돋음했지만, 여전히 그의 소망은 글 잘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글쓰는 시간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결국 글을 써야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이 책의 독자들이 저자의 방법론을 눈여겨봐야할 테지만, 그의 태도와 열망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가 믿은 건 오직 버티는 실력과 노력뿐이었다. 달은 물론 6펜스까지 얻게 된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갖고 싶은데 방법이 있겠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버틸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버텨야 하는 건 당연히 가난이다. (....) 대신 읽고 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특히 쓰기를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표현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매일 쓰고, (온라인에) 올려야 한다. 이게 쌓여 브랜드가 되고, 직업으로 연결된다.  오래 읽고 쓴 사람은 강하다. "    p.208 , 김민영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경제학에서 유명한 문구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대가 즉,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을 치뤄야 한다.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당신은 무엇을 걸 수 있는가?   어느날 갑자기 글쓰기 입문서 한 권을 읽고,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그건 과욕이다.   그런 책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방법론을 모두 안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글은 머리에서만 나오지 않고, 가슴에서도 나온다.  가슴에서 흘러 나온 글이 진짜 글이다.  그러한 글을 쓰기 위해선 수많은 시간 읽고 쓰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읽고 쓰는 것을 반복하는 일은 여간 쉽지 않다.  그것은 가슴 저 깊이에서 더 많이 알고, 느끼고, 써보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저자의 일념이 이 책의 방법론보다 가치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알 수 없는 충만감이 나를 감쌌다. 난,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기 위해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탄탄한 직장을 박차고 나올 용기또한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에 관한 열망은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 저자보다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쓰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현실과 욕망의 균형을 유지하며 삶을 평화롭게 하는 길이다.  항상  내 안에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책을 읽기 시작하던 그 시점부터 함께 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20대 시절, 읽은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의 한 귀절을 잊지 못한다.  소설속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는 "인식하고 표현하려는 용기, 그것은 바로 문학이며 인문정신"이라고 단언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보편적인 것이다.  오늘날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글을 써야 행복한 사람임을 자각했다.  이 발견은 신선한 것이다.  저자의 고백은 그대로 나의 것이었다.  이 반가움은 책을 읽는 내내 줄곧 공감과 지지로 이어졌다.   저자의 솔직한 자기고백이 버무려진 글쓰기 책,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라>가 이제 많은 글쓰기 입문자들을 설레게 할 것 같다.   꿈을 갖고 노력하면 잘 쓸 수 있다, 는 것을 그의 이력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글쓰기 책의 범주를 뛰어넘어, 글을 잘 쓰려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듯 하다.  지금도 잘 쓰고자 열망하는 삶을 살고 있는 저자가 행복한 책읽기와 즐거운 글쓰기의 세계로 당신을 이끈다.   

기교나 기술은 열망 뒤에 오는 것이다.  열망이야말로 글쓰기의 모든 것이다.    열망이 당신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지금 잘 쓰지 못해도 간절히 원하면 앞으로 잘 쓸 수 있다.   간절함은 스스로 도울 길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레시피이자 글쓰기에 관한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 열망을 닮고 싶어하는 당신에게 하나의 지름길을 보여줄 것이다.



20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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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김선주 세상 이야기
김선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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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시절 나는 새벽마다 신문을 배달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에 실패했고 이것 저것 해보다 한 물류업체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트럭에 가득 실린 타이어를 자동차 공장의 야치장에 차곡차곡 쌓는 일을 해야 했다.  한달 4일을 쉬고 세금 제하면 알량한 월급이래야 백만원을 겨우 넘겼다.  부족한 월급에 보탬이 될까 해서 아침마다 신문을 돌렸다.  꼬박 2년간 나는 그 도시에서 한겨레 신문을 배달했다.  내가 그 일을  2년간이나 한 것은 인생이 맘처럼 잘 풀리지 않아서 이기도 했지만,  내가 배달하는 신문이 조중동이 아니라 한겨레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실과 정의에 닿아 있는 언론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시절 한겨레 지면의 여러  칼럼 가운데 내가 가장 즐겨 읽었던 칼럼이 있다.  바로 김선주 칼럼이다.   2003년 9월자 김선주 칼럼의 제목은 `공상가가 직업이 되는 세상'이다.  그 칼럼의 시작은 제법 흥미롭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서문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장정일의 책을 다시 펴본다. 

"어린 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누가 이것을 소박한 꿈이라고 조롱할 수 있으랴.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건 원대한 꿈이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서문 中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칼럼은 돈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보다는 적게 벌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21세기 신유목민 세대를 논한다.  김선주가 장정일의 문장을 인용한것도 좋았지만, 그가 그 넓은 세대의 차이에도 신유목민의 행태를 전혀 낯설게 바라보지 않고 지지 하는 듯한 논조를 유지한게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취업에 실패한 나또한 그런 유목민의 행태로 삶을 살아가고자 했으니까. 

그 이후 장정일의 꿈은 곧 나의 꿈이 되었다.  김선주와 장정일, 나의 꿈이 하나로 묶여진 것이 그날 그 칼럼을 읽은 후부터였다.  그 시절도 책읽고 신문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책과 신문 읽는 시간은 나의 궁핍한 삶 한 가운데 빳빳한 자존감을 내게 실어주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여전히 정신은 깨어 있고 영혼이 깨어 있는 한 내게 미래는 있다, 뭐 이런 자존감을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새벽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날랐던 그 한겨레 신문과 고된 육체 노동의 시간들로 채워졌던 도시를 떠났다.  그 1년 후, 정말로 운이 좋아서 수험생에서 반듯한 직장인으로 환생했고 나는 더이상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의 힘겨웠던 시절, 빛나는 칼럼으로 내 청춘을 위로했던 김선주의 글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소식을 작년에 들었다.  보배로운 청춘의 한 시절을 건져올리듯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떤 글에 대해 갖는 독자의 기억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대작으로 기억되는 작가가 있는 반면,  단 몇 줄의 글로서도 독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문장가들이란 글 한 편 한 편이 버릴게 없다.  15년간 한겨레의 칼럼에 연재된 김선주의 글을 묶어서 읽고나니 그 말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사회 모든 문제를 짚고 있는 칼럼이지만, 짙은 문학성을 내보인다.  칼럼 하나하나가 필자의 사소한 삶의 일부분에서 차용하지 않는게 없어서일까?  故 노무현 대통령 또한 그의 칼럼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칼럼은 소박하지만, 강단있고, 소신있다.  흥분되어 목소리를 키우지 않지만,  잔잔히 세태를 비판하고 준엄히 꾸짖는다.   1970년대 서슬퍼런 유신의 시절,  뿌리채 흔들린 언론의 자유를 외치며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하다 해직된 이력을 그는 갖고 있다.   조선 일보에 근무하던 시절, 선배였던 칼럼니스트 이규태와 그가 나누었던 설전은 언론인 김선주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케 한다. 

이규태가 김선주에게 했다는 그 조용한 충고는 대강 이렇다. " 이봐, 김선주, 그만 설쳐, 역사를 보라구, 암흑시대가 이백 년도 넘게 계속되고도 했어. 그냥 조용히 살라구, 설치지 말라구......"  이에 김선주는 혈기방장한 신입언론인으로 이렇게 답했다 한다. " 아니 그럼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암흑 시대에 살아야 한단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 못해요. 못참아요. 지금 시대에 어떻게 암흑시대가 이백년이나 계속된단 말이에요. 일제 시대도 오래갈 것 같았지만 삼십육 년으로 끝났잖아요. 이광수도 최남선도 일제 시대가 영원히 계속 될 것이라고 믿고 친일을 했지만, 결국 암흑시대는 끝났잖아요. 이 선배는 평생을 암흑시대다 하고 나 죽었다 하고 살건가요?" 

그렇게 김선주는 조선일보에서 쫓겨나 훗날 한겨레 신문에 둥지를 틀고 여성언론인으로 크게 성장한다.  문화부장에 논설위원, 출판본부장, 논설주간에 이르고 여성 언론인의 본보기가 되어 여러 후배 언론인들을 끌어준다.  반대로 이규태는 조선일보에서 `설치지 않고 조용히' 명칼럼을 쓰다, 몇 해 전 세상을 등졌다.   김선주는 어느 칼럼에서 한국의 언론인이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신문사 사주의 길들이기에 넘어가, 세상을 곡해하고 기자가 고급 월급쟁이로 전락한 시점을 1970년대,  언론인 대량 해직의 시절로 규정한다.  그 이후, 해직된 언론인은 원상복구 되지 않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해직언론인을 돈으로 회유하려는 사주들의 시도만 계속되었다. 

나나, 노무현 대통령이나, 아니 김선주의 칼럼을 좋아하는 그 누구라도 그의 글을 좋아하는 데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신문사의 칼럼은 아무나 쓰지 않는다. 그 신문의 논조를 대표하는 것은 사설이지만, 칼럼은 보다 격조높게 신문의 색깔을 규정하기 마련이다. 색깔은 독자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에 대한 공평무사함과 도덕성, 그리고 세상을 정의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기자의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김선주 칼럼은 내가 짐작하는 정의에 가장 가깝다.  그의 칼럼엔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묻어 난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곳곳에 담겨 있다.  정치권력에 곁눈질 하지 않고 언론인으로서 한길에 충직하려했고, 그 때문에  강단있는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의 칼럼을 좋아하는 것은 인생을 욕심없이 관조하고 그렇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그의 문장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내가 존경해온 사람은 창작을 위해 전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비록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 해도 전업 예술가로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보통 사람이 못 갖는 충족감으로 가득 찬 한차원 높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들은 전업작가고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국민연금도 없다. 누군가의 불운을 보고 자신의 처지에 안도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긴 하다. 우리 부부 국민연금을 합치면 150만 원 정도 되니까 이들에 비하면 나는 대재벌이다. 나보고 부자라니! 잠시 억울하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김선주, p.76 

김선주의 책이 나오자 내 청춘의 잊혀진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 났다.  새벽 신문, 고된 노동, 열악한 임금, 암담한 미래, 그러나 그 시절 긍정적인 청춘의 희망도 함께 내 기억을 노크한다. 젊음, 책, 작가, 신문칼럼, 글쓰기, 꿈, 자유, 타향의 익명성, 정처없이 떠났던 여행. 시간은 흘렀고 이제 나는 장정일이 독서일기의 서문에서 밝힌 책읽는 하급 서기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장정일의 꿈을 이뤘다고 해야 하나?   

그 시절,  장정일의 글에 절대 공감했고 비로소 그의 소박한 꿈은 나의 꿈이 됐다.  김선주의 글을 통해 세상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책에 대한 허기에 찬 그같은 삶에도 희망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읽고 쓰는 일은 힘에 벅차고 세상은 조용히 책읽는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책이 눈에 들어오질 않고, 한줄 문장 읽을 여유조차 없이 생활이 나를 짓누르기도 한다.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다.  매번 쓰는 글이라지만, 쓸 때마다 어렵고 써놓은 글은 나를 낯뜨겁게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억의 저편에서 어느 시절 나의 절망과 나의 꿈, 희망을 확인케 해주는 것은 역시 한 권의 책이고,  반가운 저자다.   김선주라는 한 칼럼니스트이자 언론인의 글속에서 나의 청춘을 회고하고, 다시 미래를 기약한다.   여전히 세상은 알 수 없지만  한 권의 책과 공감가는 저자를 만나는 일은 즐겁고 아름답지 않은가?  삶이 한없이 힘들어도 그 시절을 견디듯, 지금의 삶을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 책의 끝에서 김선주는 다음생을 소망한다. 

"다음 생에선 진정한 로맨티스트로 살아야겠다."  그의 이모는 인생의 고저가 확연히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모험을 자주했다.  그는 `온 식구가 밥을 굶은 날 밤에도 조그만 등을 켜놓고 조용히 글을 썼던" 작가였다.  김선주는 그런 이모를 한결같은 로맨티스트로 동경하며 사랑했다, 고 고백한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분투했던 어머니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이모의 삶 또한 목을 빼고 길게 동경하며 산 것'이 자신의 자화상이었다고 밝힌다.  김선주의 칼럼들을 읽으며 여유와 주장이 확고한 그의 글쓰기를 닮고 싶었다.  어느 글 하나 버릴 게 없이 고갱이로 가득한 책을 만나는 일은 여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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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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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년중 잠시도 책과 떨어져 사는 날은 없다.  언제나 나는 무언가를 읽고 있다.  오늘 읽지 않아도 여전히 내 독서목록은 나를 강제하는 힘이 있다.  한동안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읽었다.  1천페이지가 약간 넘는 책이다.  고전을 읽기로 하고 도전한 책인데, 500페이지에 당도하고 잠시 손을 놓았다.  한달이 넘도록 내가 넘긴 책장은 500 페이지에 머물렀다.  한줄 한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한달 책 한 권을 가지고 버둥거리다 보니 이러다 1년 동안 몇 권 이나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고전 읽기는 버거운 일이다.  머리를 식혀줄 책 한 권을 찾다 신간 <지식인의 서재>가 내 손에 닿았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15명의 서재를 탐방하고 마치 기행문을 쓰듯, 사진과 느낌을 기록한 책이다.  물론 서재 주인장들의 생생한 육성까지도 담아냈다.   

방송작가 한정원과 프로듀서 전영건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이들의 글과 사진속에 담긴 15명 지식인의 서재와 그네들의 독서하는 삶이 이 책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서재의 주인장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분들이다.  법학자 조국,  생물학자 최재천, 시인 김용택,  한복디자이너 이효재, 사진가 배병우, 사회 사업가 박원순, 영화감독 장진, 음악가 조윤범 등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크게 성공했고 영향력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분들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안에서 성공한 이들은 예외없이 서재를 꾸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재를 영적 성장의 중심으로 삼고, 수많은 책을 모으고 꾸준히 읽어왔으며, 지금도 생각하고 쓰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식인에게 서재는 삶의 무대 뒤편, 분장실이자 소품실 같은 공간이다.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그 공간에서 그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을 직함에 어울리는 지식에 얼굴을 입히고, 의상을 걸친다.   서재는 무대라는 전면에 나오기까지 그들이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공간이다.  그들은 객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한 사적 공간 서재에서 끊임없이 읽고 사색한다.   

법학자 조국에게 서재는 죽비가 내리치는 공간이다.  책은 그에게 스승이자 동지이고, 친구이자 연인이며 훌륭한 적이다.  또한 서재는 `영혼이 안식을 얻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법학자로서 승승장구하던 자만의 세월을 잊고, 내면으로 온전히 침잠하고 부족한 부분을 알아채며, 그 부분을 다시 연마할 수 있었던 공간으로 조국은  자신의 서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요즘 법학자 조국은 각종 시집을 탐독한다.  시를 통해 법조인에게 부족한 감성을 보충하고 법의 적용 대상인 인간을 탐구하고 세상과 사람을 좀더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과학자 최재천은 서재를 `통섭원'이라 부른다.  서재는 세상과 제자들과의 소통의 공간이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소리 없는 전쟁과 평화를 거쳐 서로의 벽을 깨고 통섭되기를 바라는 공간이다.  최재천은 책을 읽을 때 줄을 긋거나 여기저기 뭔가를 쓰는 것을 싫어한다. 책이 귀했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습관으로 그의 서재에서 어떤 책을 골라잡아도 새것같지 않은 책이 없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서재는 자연의 숲을 닮았다.  그는 자신의 서재를 바깥 세상과는 상관없는 공간, 서재 그 자체가 마을이고 숲속이고, 자연이라 자랑한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서재를 가득 메운 책은 동족이다.  책의 원료는 나무이니까.  그에게 책을 읽는 일은 밥을 먹는 것과 숨을 쉬는 일이며 바람 같고 햇살 같은 것이다. 서재를 통해 그는 우주와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   시인으로서 그가 더없이 행복한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재는 이것을 가능케 해주는 황홀한 공간이다. 

사진가 배병우에게 서재는 기초를 닦는 공간이다.  모든 배움에 있어 기초가 탄탄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진에 혼을 불어넣는 예술가에게 책과 서재는 무한한 감성의 충전소이다.  그의 예술은 책을 통해 옷을 입었고,  혼을 부여받았다.  책이 아니었다면 그의 사진에 철학이 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도시 건축가 김진애에게 서재는 야성(野性)을 키우는 공간이다.   88만원 세대인 젊은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성질이 바로 야성이다.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포위한 불안을 잠재우고 그네들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건축가, 국회의원으로 분주한 그녀는 많은 시간 서재에 은둔하길 즐기는,  보기드문 책 중독자였다.  

세상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세상엔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넘치고 넘친다.  어른들을 위한 전통적인 오락은 먹고 마시는 일이다.  이것을 이겨내고 책 속으로 풍덩 빠지는 일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 성인 10명 가운데 3명은 1년이 가야 책 한 권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만큼 남는 장사는 없다.  만날 술과 여흥에 빠져 지내다보면 축나는 것은 통장 잔고요,  버리는 것은 건강이다.  게임을 주야장천 3일 연속으로 하다 돌아가신 분들은 가끔 9시 뉴스를 장식하신다. 그러나 책에 빠져 살다 식음을 전폐하여 삶과 안녕을 고하신 분은 여지껏 못봤다.  그러나, 게임보다 여흥보다 더 재미있고 사람을 달뜨게 하는 존재가 책이다.  지식의 세계는 넓고 넓어서 한번 그 세계를 맛본 사람은 세상의 모든게 시시껄렁하게 보일게다.   그 책들이 당신을 유혹하는 공간이 서재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책읽는 일만큼 세상에 깨끗한 일은 없다,고 보증하셨다.   

이 책에 소개된 책 마니아 15인은 모두 책에 일가견이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방법과 습관은 천차만별이다.  책에 빈틈없이 메모를 하는 분이 있는 반면,  책에 볼펜 자국하나 남기지 않는 분도 있다.   만화책을 거쳐 인문독서에 이른 분이 있고, 자신의 예술에 철학을 입히기 위해 책을 탐독한 분도 있다.  책에서 길을 찾다가 그 길이 이끄는대로 살아온 용기 있는 분도 계시다.  독자는 큰 위안을 얻을 터,  책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란걸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다.  책이 당신의 사고를 넓게하고, 깊게한다는 것을, 이들은 예시한다.   예외없이, 책을 모으는걸 즐기고 책읽는 일을 중시하며, 책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책을 통해 위안을 얻으며, 서재안에서 차 한잔을 놔두고 책장을 넘기는 시간을 사랑한다.  이 차이점과 유사함이 가득한 그네들의 서재 이야기는 독자의 흥미와 구미를 돋우며 여느 소설 못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서재가 오직 지식인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세상에서 유일한 서재는 가능하다.  그곳에서 우린 자신이 선호하고 즐기는 책과 만날 수 있다.  어떤 서재이건,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어떤 방식으로 서재를 꾸릴지, 어떤 책을 그 공간에 들일지, 모두는 그 서재를 가꾸는 이의 자유다.  그 곳에서 우리는 침묵하는 자유를 얻는다.  책은 함께 읽지 못한다.  책을 읽고 토론은 할 수 있을지언정 책을 고르고 읽어내는 일은 오직 혼자해야 하는 일이다. 서재는 침묵을 통해 몰입을 경험케 하는 공간이다.  침묵과 몰입은 보통의 사람이 가장 경험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침묵과 몰입은 행복의 입구가 될 수 있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듯이,  몰입에 의해서 창조의 과정이 완성되고 인간은 창의적인 순간에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어찌나 책이 재미있는지, 심지어 길을 걸을 때도 책을 읽으면서 걷다가 논두렁에 빠지는 일이 있었죠.  저에게 독서는 삶이고, 인생이고, 과거 수백만년 전의 역사로 가는 통로이자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는 교량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박원순의 서재 

15명의 지식인들은 서로 다른 전공을 갖고, 서로 다른 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었지만, 서재라는 영혼의 공간을 하나씩 소유하고 있었다.  그저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누구나 서재를 꾸릴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책처럼 싸고 값나가는 물건은 또 이 세상에 없다.   화초를 키우듯 우린 서재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일을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책에 소개된 지식인 모두는 책을 통해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끔 기복이 있긴 하지만 꾸준히 한다는 것에 변함없는 나의 독서를 되돌아 보았다.  부족한 독서의 기술에 그들의 노하우를 차용할 수 있었고, 챕터의 말미에 소개된 추천 도서목록은 당장이라도 내 서재로 초빙하고 싶었다.  더불어, 책에 푹 빠져 지내는 책 마니아들의 이야기에 큰 격려와 위안을 받는다.   내 주위엔 1년 가야 책 한 권 보지 않는 그야말로 정신의 황무지에 먼지 풀풀 날리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사계절 내내 그들의 메마른 정신에서 발원한 황사가 날아든다.  문제는 황사의 발원지가 그들의 영혼이란 사실 자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사는가?' 라고 단 한번도 질문하지 않고, 그저 사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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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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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결국엔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한가지 해답을 얻고자 하는 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단출한 질문에 여러 함의가 담겨 있다.  그 때문인지 이 질문은 사춘기 아이에게나 고희(古稀)에 이른 노인에게나 공통된 질문이 될 수 있다.  살고 있다는 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행위여야 한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영혼의 성장을 멈추게 된다.   물리적으로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을 때와 영혼에 존재에 대한 의혹이 일지 않을 때는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자못 리뷰를 진중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한 권의 철학 책을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시간 책을 읽어왔다지만, 철학책 한 권을 읽은 후에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무겁게 생각하는 버릇을 버릴 수가 없나 보다.   철학엔 삶과 생각을 진지하게 되돌아 보게 하는 힘이 있고, 그게 내가 철학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젊은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은 몇 개월 간 내 서재에서 잠자다 겨우 내 눈에 띄었다.  그간 띄엄 띄엄 서양과 동양 편 챕터 한 두 개씩을 꾸준히 읽어왔다.  강신주는 인류 역사의 모든 철학자들을 사유의 링 한 가운데로 끌고 나와 그네들의 사상을 대결 시킨다.  실제의 링이 아니라, 철학자 강신주를 통해 걸러진 대결의 공간을 통해서다.  철학 용어 부록까지 합하면 무려 900여 페이지에 닿는 책을 읽어내기란 보통의 각오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서양과 동양 편 각각 28개 주제, 총 56개 테마로 인류의 역사에 존재했던 철학과 철학자들의 삶, 사상을 총괄적으로 담아냈다.   지금껏 어느 철학 책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편집과 서술 방법을 택했다.  단순히 편집의 독특함이 이 책의 모든 것은 아니다.  농익은 저자의 사유하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면, 독자는 이 거대한 사상의 싸움터에서 길을 잃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멀게는 고등학교의 윤리 교과목에서부터 대학 1학년 시절의 교양철학 시간까지, 우리는 철학에 대해 공부해 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시작했지만, 시작은 곧 끝인 격이다.  어렵고 딱딱하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철학을 심도있게 공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학생도 없다. 우리 철학 교육의 실태는 이처럼 빈곤하다.  인문학은 곧 문학,사학,철학, 즉 문사철을 학습하는 일이다.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은 "반도체, 휴대전화 공장에는 일손이 부족한데 청년실업률이 높은건 대학에서 `문사철'을 과잉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의 정책 실패와 무능으로 빚어진 고실업을 애꿎은 대학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떠넘겼다.  인문학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학문였을까 ? 

대학 강사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한 가지 일화를 들려준다.  대학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강의 첫시간에 반드시 그는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 여러분들은 지금 결단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스무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일류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사교육과 공교육의 세례를 맘껏 받은 학생들은 무려 20여년 간 자아를 잃고 살아왔다.  20년 동안, 그가 섭취한 지식이란 천편일률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공산품 자아로 `제조되어' 20살에 이르렀다.  저자의 질문 의도는 결국, 생각 없는 공산품으로 나머지 인생을 보낼 것이냐,  아니냐를 이제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 심오한 질문을 받은 것 자체가 행운이다.  고시 준비를 시작하라, 스펙을 쌓아라, 이게 주류 아닐까?  

공산품에서 특산품으로 변화하는 공간은 대학이어야 하고, 그 순간은 대학 1년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랑스런 1살로 시작할 수 있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학문이 다름 아닌 철학이라고, 강신주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인간의 삶의 방향과 좌표를 확인케 해주는 철학은 교양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 기본 과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제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거듭나, 스스로의 삶을 헤쳐 나갈 것이다.  인류 역사속 철학자들은 사유하는 근본에 충실한 인간들이었다.  철학은 철학자들의 철학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될 수 없다.  지구상에 똑같은 인간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없다.  철학의 무용론을 말할 때, 철학자들의 수만큼 철학이란 다채롭다, 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의 근본 목표는 사유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과 더불어 반성과 회의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 라고 말했다면 파스칼은 "인간은 허영을 가진 심정적 존재"라고 분석한다.   이성과 심정은 반대말이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르냐,는 단정지을 수 없다.  데카르트가 이성을 강조한 것은 사유의 주체가 합리적 이성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반면, 파스칼은 인간이 이성과 더불어 심정을 가진 직관적 다층적 존재로 분석한 것이다.  인간을 분석하는 그들의 언어는, 결국 인간의 총제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보탬이 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성하며 도달한 지점이 파스칼의 사유라고 평할 수 있다.   맹자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를 두고 논쟁한다.  맹자는 "인간은 선한 본성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고 순자는 "성선설 자체가 현실 사회의 공권력과 규범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모순에 그친다고 반박한다.  이 논박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 다층적임을 파악할 수 있다.  철학적 논의 자체가 본질에 대한 탐구의 생산성을 높인다.  

강신주는 철학의 역사 가운데 반대의 논증을 통해 대결을 일삼았던 철학자를 이처럼 한가지 핵심 논거를 통해 재대결 시킨다.  특징적인 것은 동양과 서양을 분명히 나눠 그들만의 리그로 엮어 냈다는 점이다.  칸트가 정약용과 대결 한 것이 아니고, 정약용이 주자와 대결 하는 식이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 철학이 맞붙을 것만 같은 제목(vs)만 보면 약간 싱거운 점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강신주는 선굵은 논쟁을 앞장세워 철학자들의 깊고 난해한 사유를 쉽게 해설하면서, 21세기의 현대 철학자가 가진 이점을 맘껏 활용한다.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누구의 철학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유를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그는 실연(實演)해 보인다. 

이 책의 끝에서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철학의 효용은 무엇일까?  이 시대엔 정말 어느 장관의 말처럼, 문사철이 취업에 방해나 되는 학문에 지나지 않는걸까?  왜 철학자들은 단순하게 살지 않고,  복잡한 이론과 사유에 집착했을까?  철학의 효용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점은, 강신주의 책을 읽는 이들이 가닿는 하나의 결실이다. 

자못 우리 시대는 재력의 유무가 사람을 평가하고, 삶의 질을 결정하고, 젊은 이들의 궁극적 삶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인기 드라마의 기본 구조에는 언제나 재력이 충만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연결 고리가 형성되지 못한다.  권력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은 돈이다.  권력은 임기가 있으나 재력은 영원하다.  그래서 어떤 재벌은 자신있게 현 정권의 경제 정책을 `낙제점'이라고 평가절하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인간을 보호하는 21세기에도 재벌은 맷값을 주면 사람을 폭행할 수 있다, 고 사유한다.   지금도 어느 대학에선 선후배 간의 폭력이 유대를 끈끈하게 하는 통과의례라고 믿는다. 그래서 폭행당한 후배는 인터뷰에서 당당히 선배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때렸다며 선배의 폭행을 두둔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카이스트나 서울대를 다니는 20대의 청춘들이 너무나 쉽게 생을 포기한다.  성적이 안 나오고, 고시에 떨어지고, 취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성적 하락과 고시와 취업 실패가 20대의 재기 발랄한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할 이유로서 충분한가?  이 어려운 질문에 철학은 답할 수 있고, 그것이 철학의 중요한 기능이다.   

나를 철학의 세계로 이끈 책이 한 권 있다. 20대에 나는 그 책을 통해 철학의 세계에 맛들였다.  20세기 미국의 아마추어 철학자이자 교육자, 자유 사상가였던 윌 듀란트의 저서 <철학이야기>다.  그 책의 서문에서 윌 듀란트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자유인으로 만들기는 할 것이다."    성경 구절과도 비슷한 이 문장에 이르렀을 때, 이 책을 읽어야 할 확신을 얻었다.  철학이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지, 작은 힌트를 얻기도 했다.  자유인,  소크라테스가 불합리한 법을 지키면서까지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의 죽음조차도, 불합리한 법조차도, 그를 감금하고 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육체의 문제 보다 영혼의 문제에 가깝다.  불교의 고된 수련 방법은 육체의 고통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자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다. 

윌 듀란트의 말이 바로 철학의 효용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생안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바이러스 뿐만은 아니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예방 접종을 맞는다.  영혼에 예방접종은 허나, 필수 사항이 아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의 나약한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며, 절망과 좌절에 맞선 예방 접종의 일환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유하지 않는 습관, 철학하지 않는 인간들은 쉽게 실언을 한다.  문사철이 청년실업의 주범이라 하는 것은, 전형적인 실언이다.  폭행이 미덕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적 발상이다. 재력이 삶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고, 돈만 벌어야 할 것이다.  실패의 아픔 까지도 인생의 귀중한 경험과 이력의 일부분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철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과 희망을 상실하고 하루하루 연명에 지친 노숙자들을 변화시킨것은 사람들의 은전이 아니라, 인문학 공부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란 답이 인문학, 곧 철학속에 있다.   철학 공부는 물고기 낚는 법을 배우는게 아니라 물고기를 낚아야 할 이유, 즉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한 권의 철학 텍스트는 하나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준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접하면, 우리는 그의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장자의 철학을 접하더라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이 철학자를 알게 된 것일까. 만약 이 철학자를 몰랐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시선을 얻지 못했을 거다'"   강신주, <철학vs철학> p.14 프롤로그 

너무 두꺼워서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 있다. 강신주의 책이 그렇다.  더군다나 모두가 따분해하는 철학이야기다.  도전하기에 쉽지 않다.  그러나, 책장을 열고 차근차근 짚어 나가다보면,  이 책은 누구나 커피 한 잔 놔두고 가볍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철학책 임을 깨닫게 된다.  강신주라는 실력있는 철학도가 철학 세계로의 여행을 인도 한다.  그의 철학 가이드는 친절하고, 쉽고, 재미있다.   서재에 앉기 전 타놓은 커피의 맛을 닮았다.  첫맛은 쓰지만 뒷맛은 달콤하며 더군다나 향기롭다.  풍부하고 아름답고 결코 가볍지 않은 맛이다.   입안에 가득 고인 커피향이 깊고 인상적이다.  이 맛에 커피를 다시 마시듯, 이 기억으로 앞으로 철학책을 다시 펴볼 수 있으리란, 확신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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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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