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년중 잠시도 책과 떨어져 사는 날은 없다. 언제나 나는 무언가를 읽고 있다. 오늘 읽지 않아도 여전히 내 독서목록은 나를 강제하는 힘이 있다. 한동안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읽었다. 1천페이지가 약간 넘는 책이다. 고전을 읽기로 하고 도전한 책인데, 500페이지에 당도하고 잠시 손을 놓았다. 한달이 넘도록 내가 넘긴 책장은 500 페이지에 머물렀다. 한줄 한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한달 책 한 권을 가지고 버둥거리다 보니 이러다 1년 동안 몇 권 이나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고전 읽기는 버거운 일이다. 머리를 식혀줄 책 한 권을 찾다 신간 <지식인의 서재>가 내 손에 닿았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15명의 서재를 탐방하고 마치 기행문을 쓰듯, 사진과 느낌을 기록한 책이다. 물론 서재 주인장들의 생생한 육성까지도 담아냈다.
방송작가 한정원과 프로듀서 전영건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이들의 글과 사진속에 담긴 15명 지식인의 서재와 그네들의 독서하는 삶이 이 책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서재의 주인장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분들이다. 법학자 조국, 생물학자 최재천, 시인 김용택, 한복디자이너 이효재, 사진가 배병우, 사회 사업가 박원순, 영화감독 장진, 음악가 조윤범 등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크게 성공했고 영향력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분들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안에서 성공한 이들은 예외없이 서재를 꾸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재를 영적 성장의 중심으로 삼고, 수많은 책을 모으고 꾸준히 읽어왔으며, 지금도 생각하고 쓰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식인에게 서재는 삶의 무대 뒤편, 분장실이자 소품실 같은 공간이다.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그 공간에서 그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을 직함에 어울리는 지식에 얼굴을 입히고, 의상을 걸친다. 서재는 무대라는 전면에 나오기까지 그들이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공간이다. 그들은 객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한 사적 공간 서재에서 끊임없이 읽고 사색한다.
법학자 조국에게 서재는 죽비가 내리치는 공간이다. 책은 그에게 스승이자 동지이고, 친구이자 연인이며 훌륭한 적이다. 또한 서재는 `영혼이 안식을 얻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법학자로서 승승장구하던 자만의 세월을 잊고, 내면으로 온전히 침잠하고 부족한 부분을 알아채며, 그 부분을 다시 연마할 수 있었던 공간으로 조국은 자신의 서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요즘 법학자 조국은 각종 시집을 탐독한다. 시를 통해 법조인에게 부족한 감성을 보충하고 법의 적용 대상인 인간을 탐구하고 세상과 사람을 좀더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과학자 최재천은 서재를 `통섭원'이라 부른다. 서재는 세상과 제자들과의 소통의 공간이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소리 없는 전쟁과 평화를 거쳐 서로의 벽을 깨고 통섭되기를 바라는 공간이다. 최재천은 책을 읽을 때 줄을 긋거나 여기저기 뭔가를 쓰는 것을 싫어한다. 책이 귀했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습관으로 그의 서재에서 어떤 책을 골라잡아도 새것같지 않은 책이 없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서재는 자연의 숲을 닮았다. 그는 자신의 서재를 바깥 세상과는 상관없는 공간, 서재 그 자체가 마을이고 숲속이고, 자연이라 자랑한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서재를 가득 메운 책은 동족이다. 책의 원료는 나무이니까. 그에게 책을 읽는 일은 밥을 먹는 것과 숨을 쉬는 일이며 바람 같고 햇살 같은 것이다. 서재를 통해 그는 우주와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 시인으로서 그가 더없이 행복한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재는 이것을 가능케 해주는 황홀한 공간이다.
사진가 배병우에게 서재는 기초를 닦는 공간이다. 모든 배움에 있어 기초가 탄탄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사진에 혼을 불어넣는 예술가에게 책과 서재는 무한한 감성의 충전소이다. 그의 예술은 책을 통해 옷을 입었고, 혼을 부여받았다. 책이 아니었다면 그의 사진에 철학이 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도시 건축가 김진애에게 서재는 야성(野性)을 키우는 공간이다. 88만원 세대인 젊은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성질이 바로 야성이다.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포위한 불안을 잠재우고 그네들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건축가, 국회의원으로 분주한 그녀는 많은 시간 서재에 은둔하길 즐기는, 보기드문 책 중독자였다.
세상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세상엔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넘치고 넘친다. 어른들을 위한 전통적인 오락은 먹고 마시는 일이다. 이것을 이겨내고 책 속으로 풍덩 빠지는 일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 성인 10명 가운데 3명은 1년이 가야 책 한 권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만큼 남는 장사는 없다. 만날 술과 여흥에 빠져 지내다보면 축나는 것은 통장 잔고요, 버리는 것은 건강이다. 게임을 주야장천 3일 연속으로 하다 돌아가신 분들은 가끔 9시 뉴스를 장식하신다. 그러나 책에 빠져 살다 식음을 전폐하여 삶과 안녕을 고하신 분은 여지껏 못봤다. 그러나, 게임보다 여흥보다 더 재미있고 사람을 달뜨게 하는 존재가 책이다. 지식의 세계는 넓고 넓어서 한번 그 세계를 맛본 사람은 세상의 모든게 시시껄렁하게 보일게다. 그 책들이 당신을 유혹하는 공간이 서재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책읽는 일만큼 세상에 깨끗한 일은 없다,고 보증하셨다.
이 책에 소개된 책 마니아 15인은 모두 책에 일가견이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방법과 습관은 천차만별이다. 책에 빈틈없이 메모를 하는 분이 있는 반면, 책에 볼펜 자국하나 남기지 않는 분도 있다. 만화책을 거쳐 인문독서에 이른 분이 있고, 자신의 예술에 철학을 입히기 위해 책을 탐독한 분도 있다. 책에서 길을 찾다가 그 길이 이끄는대로 살아온 용기 있는 분도 계시다. 독자는 큰 위안을 얻을 터, 책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란걸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다. 책이 당신의 사고를 넓게하고, 깊게한다는 것을, 이들은 예시한다. 예외없이, 책을 모으는걸 즐기고 책읽는 일을 중시하며, 책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책을 통해 위안을 얻으며, 서재안에서 차 한잔을 놔두고 책장을 넘기는 시간을 사랑한다. 이 차이점과 유사함이 가득한 그네들의 서재 이야기는 독자의 흥미와 구미를 돋우며 여느 소설 못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서재가 오직 지식인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세상에서 유일한 서재는 가능하다. 그곳에서 우린 자신이 선호하고 즐기는 책과 만날 수 있다. 어떤 서재이건,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어떤 방식으로 서재를 꾸릴지, 어떤 책을 그 공간에 들일지, 모두는 그 서재를 가꾸는 이의 자유다. 그 곳에서 우리는 침묵하는 자유를 얻는다. 책은 함께 읽지 못한다. 책을 읽고 토론은 할 수 있을지언정 책을 고르고 읽어내는 일은 오직 혼자해야 하는 일이다. 서재는 침묵을 통해 몰입을 경험케 하는 공간이다. 침묵과 몰입은 보통의 사람이 가장 경험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침묵과 몰입은 행복의 입구가 될 수 있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듯이, 몰입에 의해서 창조의 과정이 완성되고 인간은 창의적인 순간에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어찌나 책이 재미있는지, 심지어 길을 걸을 때도 책을 읽으면서 걷다가 논두렁에 빠지는 일이 있었죠. 저에게 독서는 삶이고, 인생이고, 과거 수백만년 전의 역사로 가는 통로이자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는 교량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박원순의 서재
15명의 지식인들은 서로 다른 전공을 갖고, 서로 다른 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었지만, 서재라는 영혼의 공간을 하나씩 소유하고 있었다. 그저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누구나 서재를 꾸릴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책처럼 싸고 값나가는 물건은 또 이 세상에 없다. 화초를 키우듯 우린 서재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일을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책에 소개된 지식인 모두는 책을 통해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끔 기복이 있긴 하지만 꾸준히 한다는 것에 변함없는 나의 독서를 되돌아 보았다. 부족한 독서의 기술에 그들의 노하우를 차용할 수 있었고, 챕터의 말미에 소개된 추천 도서목록은 당장이라도 내 서재로 초빙하고 싶었다. 더불어, 책에 푹 빠져 지내는 책 마니아들의 이야기에 큰 격려와 위안을 받는다. 내 주위엔 1년 가야 책 한 권 보지 않는 그야말로 정신의 황무지에 먼지 풀풀 날리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사계절 내내 그들의 메마른 정신에서 발원한 황사가 날아든다. 문제는 황사의 발원지가 그들의 영혼이란 사실 자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사는가?' 라고 단 한번도 질문하지 않고, 그저 사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2011. 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