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결국엔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는 건 한가지 해답을 얻고자 하는 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단출한 질문에 여러 함의가 담겨 있다.  그 때문인지 이 질문은 사춘기 아이에게나 고희(古稀)에 이른 노인에게나 공통된 질문이 될 수 있다.  살고 있다는 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행위여야 한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영혼의 성장을 멈추게 된다.   물리적으로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을 때와 영혼에 존재에 대한 의혹이 일지 않을 때는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자못 리뷰를 진중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한 권의 철학 책을 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시간 책을 읽어왔다지만, 철학책 한 권을 읽은 후에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무겁게 생각하는 버릇을 버릴 수가 없나 보다.   철학엔 삶과 생각을 진지하게 되돌아 보게 하는 힘이 있고, 그게 내가 철학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젊은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은 몇 개월 간 내 서재에서 잠자다 겨우 내 눈에 띄었다.  그간 띄엄 띄엄 서양과 동양 편 챕터 한 두 개씩을 꾸준히 읽어왔다.  강신주는 인류 역사의 모든 철학자들을 사유의 링 한 가운데로 끌고 나와 그네들의 사상을 대결 시킨다.  실제의 링이 아니라, 철학자 강신주를 통해 걸러진 대결의 공간을 통해서다.  철학 용어 부록까지 합하면 무려 900여 페이지에 닿는 책을 읽어내기란 보통의 각오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서양과 동양 편 각각 28개 주제, 총 56개 테마로 인류의 역사에 존재했던 철학과 철학자들의 삶, 사상을 총괄적으로 담아냈다.   지금껏 어느 철학 책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편집과 서술 방법을 택했다.  단순히 편집의 독특함이 이 책의 모든 것은 아니다.  농익은 저자의 사유하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면, 독자는 이 거대한 사상의 싸움터에서 길을 잃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멀게는 고등학교의 윤리 교과목에서부터 대학 1학년 시절의 교양철학 시간까지, 우리는 철학에 대해 공부해 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시작했지만, 시작은 곧 끝인 격이다.  어렵고 딱딱하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철학을 심도있게 공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학생도 없다. 우리 철학 교육의 실태는 이처럼 빈곤하다.  인문학은 곧 문학,사학,철학, 즉 문사철을 학습하는 일이다.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은 "반도체, 휴대전화 공장에는 일손이 부족한데 청년실업률이 높은건 대학에서 `문사철'을 과잉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의 정책 실패와 무능으로 빚어진 고실업을 애꿎은 대학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떠넘겼다.  인문학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학문였을까 ? 

대학 강사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한 가지 일화를 들려준다.  대학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강의 첫시간에 반드시 그는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 여러분들은 지금 결단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스무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 살로 1학년을 보낼 것인가?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일류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사교육과 공교육의 세례를 맘껏 받은 학생들은 무려 20여년 간 자아를 잃고 살아왔다.  20년 동안, 그가 섭취한 지식이란 천편일률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체적인 자아가 아니라 공산품 자아로 `제조되어' 20살에 이르렀다.  저자의 질문 의도는 결국, 생각 없는 공산품으로 나머지 인생을 보낼 것이냐,  아니냐를 이제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 심오한 질문을 받은 것 자체가 행운이다.  고시 준비를 시작하라, 스펙을 쌓아라, 이게 주류 아닐까?  

공산품에서 특산품으로 변화하는 공간은 대학이어야 하고, 그 순간은 대학 1년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랑스런 1살로 시작할 수 있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학문이 다름 아닌 철학이라고, 강신주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인간의 삶의 방향과 좌표를 확인케 해주는 철학은 교양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 기본 과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제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거듭나, 스스로의 삶을 헤쳐 나갈 것이다.  인류 역사속 철학자들은 사유하는 근본에 충실한 인간들이었다.  철학은 철학자들의 철학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될 수 없다.  지구상에 똑같은 인간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없다.  철학의 무용론을 말할 때, 철학자들의 수만큼 철학이란 다채롭다, 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의 근본 목표는 사유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과 더불어 반성과 회의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 라고 말했다면 파스칼은 "인간은 허영을 가진 심정적 존재"라고 분석한다.   이성과 심정은 반대말이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르냐,는 단정지을 수 없다.  데카르트가 이성을 강조한 것은 사유의 주체가 합리적 이성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반면, 파스칼은 인간이 이성과 더불어 심정을 가진 직관적 다층적 존재로 분석한 것이다.  인간을 분석하는 그들의 언어는, 결국 인간의 총제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보탬이 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성하며 도달한 지점이 파스칼의 사유라고 평할 수 있다.   맹자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를 두고 논쟁한다.  맹자는 "인간은 선한 본성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고 순자는 "성선설 자체가 현실 사회의 공권력과 규범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모순에 그친다고 반박한다.  이 논박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 다층적임을 파악할 수 있다.  철학적 논의 자체가 본질에 대한 탐구의 생산성을 높인다.  

강신주는 철학의 역사 가운데 반대의 논증을 통해 대결을 일삼았던 철학자를 이처럼 한가지 핵심 논거를 통해 재대결 시킨다.  특징적인 것은 동양과 서양을 분명히 나눠 그들만의 리그로 엮어 냈다는 점이다.  칸트가 정약용과 대결 한 것이 아니고, 정약용이 주자와 대결 하는 식이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 철학이 맞붙을 것만 같은 제목(vs)만 보면 약간 싱거운 점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강신주는 선굵은 논쟁을 앞장세워 철학자들의 깊고 난해한 사유를 쉽게 해설하면서, 21세기의 현대 철학자가 가진 이점을 맘껏 활용한다.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누구의 철학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유를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그는 실연(實演)해 보인다. 

이 책의 끝에서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철학의 효용은 무엇일까?  이 시대엔 정말 어느 장관의 말처럼, 문사철이 취업에 방해나 되는 학문에 지나지 않는걸까?  왜 철학자들은 단순하게 살지 않고,  복잡한 이론과 사유에 집착했을까?  철학의 효용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점은, 강신주의 책을 읽는 이들이 가닿는 하나의 결실이다. 

자못 우리 시대는 재력의 유무가 사람을 평가하고, 삶의 질을 결정하고, 젊은 이들의 궁극적 삶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인기 드라마의 기본 구조에는 언제나 재력이 충만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연결 고리가 형성되지 못한다.  권력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은 돈이다.  권력은 임기가 있으나 재력은 영원하다.  그래서 어떤 재벌은 자신있게 현 정권의 경제 정책을 `낙제점'이라고 평가절하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인간을 보호하는 21세기에도 재벌은 맷값을 주면 사람을 폭행할 수 있다, 고 사유한다.   지금도 어느 대학에선 선후배 간의 폭력이 유대를 끈끈하게 하는 통과의례라고 믿는다. 그래서 폭행당한 후배는 인터뷰에서 당당히 선배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때렸다며 선배의 폭행을 두둔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카이스트나 서울대를 다니는 20대의 청춘들이 너무나 쉽게 생을 포기한다.  성적이 안 나오고, 고시에 떨어지고, 취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성적 하락과 고시와 취업 실패가 20대의 재기 발랄한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할 이유로서 충분한가?  이 어려운 질문에 철학은 답할 수 있고, 그것이 철학의 중요한 기능이다.   

나를 철학의 세계로 이끈 책이 한 권 있다. 20대에 나는 그 책을 통해 철학의 세계에 맛들였다.  20세기 미국의 아마추어 철학자이자 교육자, 자유 사상가였던 윌 듀란트의 저서 <철학이야기>다.  그 책의 서문에서 윌 듀란트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자유인으로 만들기는 할 것이다."    성경 구절과도 비슷한 이 문장에 이르렀을 때, 이 책을 읽어야 할 확신을 얻었다.  철학이 무엇을 탐구해야 하는지, 작은 힌트를 얻기도 했다.  자유인,  소크라테스가 불합리한 법을 지키면서까지 죽음을 선택한 것은 그의 죽음조차도, 불합리한 법조차도, 그를 감금하고 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육체의 문제 보다 영혼의 문제에 가깝다.  불교의 고된 수련 방법은 육체의 고통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자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다. 

윌 듀란트의 말이 바로 철학의 효용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생안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바이러스 뿐만은 아니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예방 접종을 맞는다.  영혼에 예방접종은 허나, 필수 사항이 아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의 나약한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며, 절망과 좌절에 맞선 예방 접종의 일환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유하지 않는 습관, 철학하지 않는 인간들은 쉽게 실언을 한다.  문사철이 청년실업의 주범이라 하는 것은, 전형적인 실언이다.  폭행이 미덕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적 발상이다. 재력이 삶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고, 돈만 벌어야 할 것이다.  실패의 아픔 까지도 인생의 귀중한 경험과 이력의 일부분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철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과 희망을 상실하고 하루하루 연명에 지친 노숙자들을 변화시킨것은 사람들의 은전이 아니라, 인문학 공부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란 답이 인문학, 곧 철학속에 있다.   철학 공부는 물고기 낚는 법을 배우는게 아니라 물고기를 낚아야 할 이유, 즉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한 권의 철학 텍스트는 하나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준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접하면, 우리는 그의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장자의 철학을 접하더라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이 철학자를 알게 된 것일까. 만약 이 철학자를 몰랐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시선을 얻지 못했을 거다'"   강신주, <철학vs철학> p.14 프롤로그 

너무 두꺼워서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 있다. 강신주의 책이 그렇다.  더군다나 모두가 따분해하는 철학이야기다.  도전하기에 쉽지 않다.  그러나, 책장을 열고 차근차근 짚어 나가다보면,  이 책은 누구나 커피 한 잔 놔두고 가볍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철학책 임을 깨닫게 된다.  강신주라는 실력있는 철학도가 철학 세계로의 여행을 인도 한다.  그의 철학 가이드는 친절하고, 쉽고, 재미있다.   서재에 앉기 전 타놓은 커피의 맛을 닮았다.  첫맛은 쓰지만 뒷맛은 달콤하며 더군다나 향기롭다.  풍부하고 아름답고 결코 가볍지 않은 맛이다.   입안에 가득 고인 커피향이 깊고 인상적이다.  이 맛에 커피를 다시 마시듯, 이 기억으로 앞으로 철학책을 다시 펴볼 수 있으리란, 확신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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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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