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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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를 얻기 위함이 아닐까?  현실의 일상화된 제한과 억압에서 해방된 공간은 역시 하얀 백지 위일 수밖에 없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하얀 백지가 공포스러운 것은 사실이겠다. 그러나 순간의 공포란 자유를 얻기 위한 입구에 `그가' 들어섰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 문학은, 소설은, 새로운 형식과 신선한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어떤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훌륭한 문학은 탄생할 수가 있다.   

천명관의 <고래>는 천방지축 이야기 실타래가 엮이고 엮여 나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소설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묻기에 알맞은 작품이다.  인물과 배경과 사연이 한데 묶여 독특한 스토리를 짓는다.  이 소설이 독특한 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환상이 현실의 상관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나타나 살아있는 인물의 행로를 뒤바꿔 놓는다면,  세계는 거대한 무질서로 돌변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선 그것이 가능하다.  결국, 문학이기에 가능한 자유인 것이다. 

소설은 `붉은 벽돌의 여왕' 으로 호칭된 춘희(春姬)로 시작된다.  한 거지여자를 통해 마구간에서 태어난 몸무게 7 킬로그램의 아이는 열 네 살이 되기전 100 킬로그램으로 늘어났고, 그녀는 폐허가 된 도시의 외곽에서 벽돌을 만드는 `예인'으로 살고 있다.  벽돌을 예술 작품의 수준으로 찍어낼 수 있는 내공의 역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혼자 벽돌을 굽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고독해졌으며 고독해질수록 벽돌은 더욱 훌륭해졌다."  천명관 <고래>, p.407 

작가는 평대라는 광활한 원시적 공간을 거대한 개발 붐의 도시로 탈바꿈 시키더니,  결국 춘희와 함께 붉은 벽돌 공장을 짓고 폐허로 만든다.  시작과 끝, 은 이처럼 단순명확하다.  이제 독자가 찾아가야 할 것은 거대한 이야기의 맥락과 숲이다.  작가의 가이드를 통해 독자는 이 깊고 광활한 스토리의 늪으로 차츰 빠져들게 된다.  이야기는 평대의 국밥집 노파로 시작해서 춘희를 낳은 엄마 소녀 금복의 이야기로 흐른다.    이야기의 세가지 흐름은 각자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기묘하게 흐른다.  소설은 세 인물을 거치며 인생사 모든 질곡을 그 안에 담으려 한다.  돈과 권력, 사랑과 치정, 배신과 죽음, 인정과 비정함, 역사와 개인을 넘나든다.   

사업수완에 능하고 뛰어난 미모와 교태로 무장한 금복,  평생 국밥집을 해 모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은 노파, 그리고 괴력의 춘희 이야기가 인과속에 묶여 흐른다.  처음과 끝, 생경한 이야기의 만찬같은 소설은 줄곧 독자를 단단한 현실과 환상이 조합된 4차원의 세계로 이끈다.  소설의 본질이란 결국 진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있음을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된다.  인생에 대한 교훈과 진실의 탐구,는 소설 기능의 곁가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천명관은 소설의 이같은 본질로 독자를 안내하는 작가다.  그의 이야기는 재밌다.  교훈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은근슬쩍 끼워넣은 다채로운 법칙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해석한다. 

스토리의 끝을 마무리하는 인생의 법칙들은 단연 독창적이다. `세상의 법칙, 이념의 법칙, 사랑의 법칙, 거리의 법칙, 생식의 법칙', 끝없이 이어지는 소설안 법칙들을 읽다보면 웃음이 나올 뿐 아니라 촌철살인의 비유에 무릎을 치게 된다.  이것이 진귀한 이야기 끝에서 작가가 성취한 인생의 진실들 아니겠는가.  이야기의 흥미와 교훈을 자연스레 함께 엮어내는 그의 재능이 돋보인다. 

천명관은 <고령화 가족>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다.   <고령화 가족>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글쓰기는 생생하다.  영화 한장면을 소설 페이지가 대체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평생 모든 돈을 한번 써보지도 못한 `한'을 갖고 죽어버린 노파가 이야기의 흐름 안에 줄곧 등장해 코믹하고 절묘한 `씬'을 만들어낸다.  평대의 영화관이 불타는 장면에서 노파는 홀연 나타나 모든 비상구를 틀어막고 사라지더니, 괴력의 춘희가 교도소를 출소할 때는 두부파는 노파로 등장해 춘희에게 야릇한 미소를 던지고 사라진다.  이 생경함은 기묘함과 기발함을 낳는다. 

이같은 모습들은 얼마든지 영화로 만들어 관객의 웃음과 혼을 불러오고 빼놓을 수 있는 설정이다.  춘희의 아버지인 괴력의 사나이 `걱정'이 통나무를 온몸으로 막아내 사람들을 구한 `스펙타클'한 장면이나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나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이란 긴 호칭이 붙은 칼자국의 이야기는 쿠엔티 타란티노의 `킬빌' 한 장면 어떤 인물을 보는 듯 잔혹하고 흥미진진하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 천명관 <고래>, p.117 

진귀한 이야기와 생생한 영화적 `씬'으로 넘쳐나는 소설은 흔치 않다.  천명관은 문학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팔리지 않는 시나리오 쓰기를 그만두고 이제 소설을 한번 써보라는, 동생의 권유로 그는 이처럼 맛있고 신선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문학수업과 신춘문예 입상의 정규과정을 생략하고, 그는 당대 최고 이야기꾼의 자리에 올랐다.  요즘 소설들은 한결같이 문장과 형식에 있어 나무랄데 없다. 그러나, 스토리가 진부하고 신선하지 않다.  더구나 소설이 `당대'의 문제들에 집중하지도 못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저 침묵한다.  그러니 독자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훌륭한 이야기꾼 천명관은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양산하는 문학판에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될 듯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를 좋아하는 한국독자들이 넘쳐나는 것은, 그의 소설이 흥미와 생경함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토리가 독자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유아적인 `자기애'로 넘쳐나는 소설들을 읽고 어떻게 독자가 상상력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다채로운 상징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비트는 천명관의 글쓰기도 주목할만 하다.  소설은 자기의 이야기임에 동시에, 사회의 이야기여야 한다.   <1984>의 작가 조지오웰은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글을 쓸때 여지없이 자신의 문장이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형식과 내용에 있어 무한대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천명관은 소설속에서 수많은 법칙들을 인생의 공식인냥 나열한다.  그같은 법칙들은 현실의 삶과 맞아떨어지는 절묘함과 동시에 어떤 슬픔과 한계를 상징한다. 결국 법칙이란 항상 강제와 억압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다. 문학은 모든 한계를 떨쳐내야 하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생각을 한계짓는 것은 작가들에겐 당치않는 일이다.  

오늘 내가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문학이 생각의 자유, 삶의 자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실현하기 때문이다.  천명관의 작품은 `문학이란 결국 자유'를 향한 영원한 갈망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가 천방지축 엮이며,  소설과 영화의 형식을 넘나들며, 현실과 환상을 배합하였던 건 그같은 노력의 일부분이다.  그의 글쓰기를 보며, 하나의 문장에도 우주가 담길 수 있음을 간파했다.   문학의 세계는 그렇게 무한하며 깊다.  하여, 문학은 결국 `자유'인 것이다.  

 

 

20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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