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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ㅣ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살아오면서 무언가에 단정하는 듯한 말투를 쓰는 사람들을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그것이 `종교'에 이르렀을 땐 더 그렇다. 인간이라면 존재가 가진 철학적이요 형이상학의 문제를 어느 순간 심각히 고민해야 될 때가 찾아온다. 충실한 신자도, 냉정한 무신론자도, 그 언어를 단정적으로 사용해선 안된다는 것이 내가 형이상학의 영역에 들어설 때, 최소한 지금껏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몇 해 전, 도쿄의 작은 예배당에서 한국의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 시대 대표 지성 이어령 씨가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던 75살까지 무신론자로 살아왔다. 그는 그 나이까지 종교를 지성의 영역으로 치부했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 그가 기독교 세례를 받고 신자로 환생한 것이다. 그렇게 당당하게 무신론자의 길을 걸어왔던 이가, 왜 느지막한 나이에 종교로 귀의했을까?
그 곡진한 사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신과 종교의 가르침은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저 너머에 있다. 종교를 이성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그가 단정적인 어투와 확신으로 일평생을 살아왔던 데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형이상학의 영역에 들어설 때, 인간은 철학적 진실과 신학적 사실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자세로 시작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오류를 언제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 한계에 대한 절박한 겸손, 그것은 자신의 영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길이다. 역사상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을 확신했던 자들의 교조주의[敎條主義]적 신념이 얼마나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불러왔던가? 그 대표적인 사건이 중세사를 가로지르는 십자군 전쟁이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반포하고 사망한 즈음, 로마는 동.서로 분리된다.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으로도 불렸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오늘날 이스탄블)이었고, 국교는 그리스정교였다. 십자군이 형성된 시기는 서유럽이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며 느슨한 정치연합체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서유럽은 로마카톨릭의 영향하에 신권과 왕권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같은 그리스도교를 믿지만, 교리상 차이를 보였던 그리스정교와 로마카톨릭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이 교황을 수장으로 하지만, 그리스 정교는 우두머리 없이 세계 공의회의 합의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11세기 말 그리스정교회의 상징적 수장인 비잔틴제국 황제가 카톨릭 교회 수장인 로마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해 왔다.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 소아시아를 점령했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코앞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은 그간 끊임없이 서유럽에 이슬람의 위협을 이유로 원군을 요청했지만, 묵묵무답이었다. 하지만, 11세기 말의 정세는 이 침묵을 깨기에 충분했다. 우선,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정치,종교적 입지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1077년, 전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의 인사권를 놓고 세속의 왕, 하인리히와 권력 다툼을 벌인다. 결과는 교황의 완벽한 승리다. 황제 하인리히가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얉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1월의 눈밭'에서 삼일밤낮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권력에 대한 신권의 승리를 상징하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그러나, 교황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혈기방장한 황제 하인리히는 이 굴욕 이후, 복수를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궁지에 넣는다. 황제는 군사력으로 교황을 몰아붙였고 동시에 대립교황을 세워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는 결국 로마가 아닌 도피처 살레르노에서 죽는다.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 교황의 신임을 얻고, 후임자로 결정되었지만 로마 교황의 거처 라테라노 궁전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라테라노 궁전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에게 기증한 것이었고, 800년 가까이 로마 교황이 집무를 보아왔던 공간이다. 결국,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강력한 신성로마제국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로마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하는 수단을 망명지 프랑스에서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들에게 `신의 휴전'을 선포하고, 이교도에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향한 무력 순례의 길, 즉 십자군 전쟁을 제안한 것이다. 이 제안은 꽤 잘 먹혔다. 십자군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신의 구원을 보장받고, 영생을 얻을 것이며 그 길에 신이 함께 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구슬렸기 때문이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문학,철학을 공부했다. 그런 그가 이탈리아 유학을 계기로 그리스, 로마사 연구에 매진한다. 로마제국의 흥망사를 다룬 1992년의 <로마인 이야기>는 2006년 15권을 마지막으로 완결되었다. 그는 이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이방인으로서 수많은 현지방문과 자료조사를 통해, 그는 그리스 로마 연구의 대중 집필가로 명성을 얻었다. 2010년부터 그가 새롭게 집필을 시작한 <십자군 이야기>는 3권까지 예정돼 있으며, 그는 이 책의 첫 장에, 서문을 대신해 간명한 자신의 집필 목표를 기록해 두었다. 십자군은 믿음과 구원, 신의 사랑과 성지 회복이라는 성스러운 목적 아래 시작되었지만, 왕권과 교황권의 첨예한 대립 상황을 일소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 신의 군대를 자청한 십자군 군대는 이례적 잔혹성을 드러내 보인다. 이교도에 대한 철저한 죽임과 응징을 일삼고, 종교적 목적을 가장한 정치,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려는 기만이 가득한 것이 또한 그것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반복되는 인간 욕망의 천박함이 뒤섞여 있는 십자군의 역사를,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하나의 명징한 테마로 엮어낼 것임을 그는 이 서문에서 다짐한다.
"이 책은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되길 희망하는 내가 온 정성을 다해 조사하며 기록해나간 전쟁 역사이다. - 시오노 나나미"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은 정치적 배타성과 이권에 대한 욕망이 개입된 것이 아니다. 정치와 이권은 그 자체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살육은 정지된다. 그 기저에는 반드시 이념, 즉 종교적 가치가 내재해 있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신념을 주고, 살육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종교가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고, 경전에 `나 이외의 신을 믿지 말 것'을 교리로 하였을 경우에, 이교도에 대한 모든 행위는 순간 정의로 탈바꿈 한다. 성스러운 십자군이 인육을 먹었을 정도로 잔인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의 모태가 되었던 중세 서유럽의 정치, 사회적 환경을 조망하면서 그들이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을 제후들의 전쟁 전략과 전술로 분석한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사료들을 참고하여 천년의 시간을 복기[復棋]하는 저자의 열정이 그의 문장속에서 꿈틀거린다.
십자군에 참여한 자들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중엔 남루한 수도복을 걸치고 당나귀를 타고서 돌아다녔던 순회 설교자, 은자 피에르도 끼어 있었다. 그는 유창한 연설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종교적 열정으로 수많은 중세 하층민을 회유하여 민중십자군을 형성한다. 물론,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은 정치,경제,종교적 목적을 염두해 둔, 교황에겐 무척 쓸모없는 존재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실제로 그들은 서유럽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정에 굶거나 역병에 걸리거나 이슬람의 셀주크투르크 병사들에게 몰살 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선 이후 출발하는 중무장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제후들의 십자군에 도움을 준다. 그들이 이슬람에 미끼를 던져 방심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 무방비한 민중 십자군은 오합지졸이었기에 쉽게 몰살 당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교황보다 신심이 두터운 이들이 아니었을까 상상할 수 있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슬람이 점령한 중근동 지역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기적을 갈망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십자군의 주력 부대는 서유럽에 영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후들의 연합병력이다. 그들은 각기 친족적인 일가를 이룬 영지의 봉건 제후들로, 부하 병사들은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제후들은 각기 다른 개성과 욕망을 품고 있어서 연합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다툼과 이견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혈족였음에도 이권다툼으로 단합하지 못한 이슬람의 셀주크투르크 세력에 비해 성지탈환이라는 종교적 목적에 충실한 면이 있었다. 이것이 십자군의 단결을 가져왔고 연승을 가능케했다. 그 일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출정한 아데마르 주교는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사망한다. 예루살렘 함락 후 실질적인 왕으로 추대됐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는 1100년 성지에서 최후를 맞는다. 블루아 백작 에티엔은 십자군 순례길에서 도피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아내에게 야단을 맞고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전투중 사망한다. 프랑스 왕의 동생 위그는 에티엔과 함께 전사한다. 노르망디 공작과 플랑드르 백작은 예루살렘을 함락후 신에 대한 서약을 지켰다는 명목으로 유럽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죽는다. 연합군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자 동료들과 불화를 일으키던 툴루즈 백작 레몽은 1105년, 이슬람과 전투중 기사답게 전사한다. 이슬람측에 소문이 돌 정도로 가장 용맹했던 전사였던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는 레몽이 죽은지 6년 후 자기 영지 풀리아에서 사망하고, 가장 젊은 나이에 참전한 탄크레디는 서른 여섯이라는 나이로 병사한다. 1118년 고드프루아를 이어 예루살렘을 통치한 보두엥도 사망한다. 같은해 십자군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알력 관계를 유지하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도 사망하며 1118년을 기점으로 십자군 제 1세대는 전원 퇴장하게 된다. 이후, 십자군은 200년간 이슬람 세력과 공방전을 이어가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1>가 다루는 것은 제 1세대 십자군의 활약이 끝나는 지점까지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되짚어 보기 위함이다. 이 책은 십자군의 형성 배경, 활약상을 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해박한 역사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십자군의 의미는 천년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와 세계사, 문명과 인간의 운명을 되돌아보게 한다.
로마 교황의 신심 가득한 연설, 즉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선언 아래 모였던 중세 서유럽의 인간들은 성서적 진실을 어디까지 확고히 믿었는지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중세 십자군은 분명히 신심 가득한 제후들과 기사들의 자발성에 상당 부분 의지했을 듯 하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십자군의 대순례를 가능케 한, 그 믿음이 현대 서유럽에 존재할까? 지금 서유럽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후퇴가 눈에 띄게 확연하다. 신심 깊은 이들은 인구의 10%도 되지 않고, 매주 교회 출석률을 따지고 들면 더 형편없다. 서유럽에서 전체 기독교 인구는 후퇴중이다.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던 로마제국 이래, 신심으로 불타올랐던 중세를 거치고, 2차 세계 대전의 살육을 거쳐, 이제 유럽은 기독교와 거리를 두게 된 듯 보인다. 이천년의 역사 끝에 종교적 신심은 하락했다. 기독교 인구의 급속한 상승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와 대조적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 십자군은 수많은 공방전을 중근동의 도시들에서 겪는다. 간간히 찾아오는 역병과 전투때마다 이어지는 사망자, 보급품의 부족으로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두를 이겨내고 견고한 이슬람의 성,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야 만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순간, 제후들과 그들의 수하 기사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했다, 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어지는 이슬람인에 대한 살육은 한바탕 축제를 연상시킨다. 성안의 모든 이교도를 죽였다고 한다. `신이 그것까지 바라셨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살육조차도 신의 뜻으로 해석했던 듯 하다.
역사의 기록을 통해 씁쓸해지는 것이 이 지점이다. 성서의 일획일점까지도 믿었던 중세적 교조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였기에 가능했었던 것인가? 오늘 팔레스타인을 보면 중세가 연상되는건 어찌된 건가? 천년 전의 십자군은 지금도 예루살렘 땅에서 살육을 이어가고 있다. 단지, 로마 카톨릭이 주도했던 십자군을 이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기독교가 주도하고 있을 뿐이다. 중동은 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화약고다. 중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찾아오지 않을 듯 하다. 중세의 기사들은 신앙을 핑계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지만 현대의 서유럽과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에게 영토는 `석유'로 대체 된다.
그들이 얄미운 것은 중세의 교황처럼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중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교도가 점령한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이유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고 대중을 선동했다. 실제 목적은 교황권력의 확장과 경제적 실익 때문이었다. 오늘날 중동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이유로, 미국의 침공과 서유럽의 공습이 정당화 된다. 지금 이 시간도 리비아는 카다피의 제거를 명목으로 서유럽 전폭기들의 공습을 받고 있다. 천년 전처럼, 이슬람은 여전히 뿔뿔히 흩어진 반면 서유럽은 유럽연합(EU)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는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서술한 역사서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사, 우리들의 종교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되묻게 한다. 종교는 성직자들을 통해 대중을 기만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왕권에 대립해 세상을 놓고 권력투쟁을 일삼던, 교황권력은 현대 그저 상징적인 종교의 수장으로 물러나 있다. 과거의 그 포악한 야망과 날카로운 이빨은 어디로 감추어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린 종교 세력이 세속 권력만큼이나 탐욕스러웠다는 것을 배운다.
그 모든 과거를 모른체 하는 것은 얌체 같은 짓이다. 작가는 이 책을 집필하며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되길 희망한다, 고 썼다. 종교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조주의가 약화된 현대 문명에서도 이교도에 대한 살육은 어느 순간 `정의'로 탈바꿈 할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무비판적 신앙과 종교지도자들의 허무맹랑한 선동이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일상다반사한 일이다. 우린 역사를 통해 그들의 욕망은 거세된 것이 아님을 기억한다.
십자군, 그들은 정말 구원을 받고 천국에 입성했을까? 살육의 축제를 벌인 이들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맹신은 무신론보다 해롭다. 신앙인은 건전한 생활인이자, 윤리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 상식을 벗어날 때, 신앙은 기만이 되고 천국은 거짓이 된다. 십자군의 역사는 인간의 도리와 상식을 지지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다시 인간은 교조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201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