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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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의 저자는 춘추전국 시대 오나라 합려()를 섬기던 명장 손무(:BC 6세기경)로 알려져 있다. 손자는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예로부터 손자병법은 우리나라의 많은 무장들이 즐겨 읽었던 병법서였다.  짧고 단호한 문장속에 병법의 기본과 지혜가 모두 담겨 있었기에 무장이라고 하면 이 책을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가장 유명한 명구,  "지피지기(己) 백전불태(殆) 즉,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뿐만 아니라,  손자병법 안에는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인 군주와 무장들이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명구가 가득하다. 

MBN 기자인 지은이 강상구는 평소 고전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손자병법>을 보다 쉽고 재밌게 읽는 하나의 편법을 제공한다.  이 책,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이란 제목에서 보듯이 저자는 고전을 개인적 경험의 영역에서 풀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같은 책도 스무살에 읽는 것과 마흔에 읽는 책은 분명 다르다.  그것이 시덥짢은 책이 아니고 무려 이천년의 세월동안 인류가 손에 잡고 읽어온 책이라면 책을 읽는 순간순간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않겠는가? 

이 책이 독특한 것은 손자병법의 명구들을 실제 일어났던 전쟁의 예화에서 불러와 풀이하려 한 점이다. 것도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수많은 전쟁사를 되돌아 본 것이다. 예화의 대부분은 삼국사기를 참고했으나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쟁사 전체를 포괄한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해박한 역사와 고전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수많은 전쟁사의 자료는 책의 충실성을 더한다.  

병법서는 전쟁의 기술이라 할만 하다.  전쟁을 많이 겪고 전쟁의 속성을 간파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손자병법>은 전쟁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란 점은 특이하다.  병법서의 핵심을 찌르는 명구가 손자병법엔 기록되어 있다.  손자병법의 모공편(謀攻篇)에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선 중의 선(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책이란 것이다. 

2006년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부시 대통령에게 손자병법을 선물한적이 있다.  후주석이 이 책을 백악관의 부시대통령에게 준 이유는 명쾌했다.    ‘부전이굴(不戰而屈)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란 지혜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부시는 이라크를 무력침공했고, 아프칸에서 탈레반 소탕 작전에 열을 올렸다.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는 경쟁국의 수장에게 본국의 고전 한 권을 선물하며 그 책안의 평화의 메세지를 건네준 것이다.  부시는 그 뜻을 알고 있었을까?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이 백전백승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은이는 손자병법의 명구를 이용해 풀이한다.  명장 이순신의 뛰어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철저히 원칙을 지켰기에 가능한 신화였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항상 이길 수 있는 싸움만 나섰다.  질 가능성이 있는 싸움이라면 아예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것이고,  그게 곧 손자병법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손자병법은 병법서의 범주로 두기엔 아까운 책이다.  왜냐하면, 전쟁의 기술이란 곧 인간의 심리와 관계속에서 발전해 온 것이다.  하여, 이 책은 곧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 철학과 처세로서의 가르침을 준다.  명구들 하나하나가 전쟁과 세상사에 대한 촌철살인의 지혜를 담는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은 어떤가? 

"천하의 영웅호걸은 얼굴은 성벽만큼이나 두껍고 속은 석탄처럼 시커매야 한다"
"모든 곳을 지키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 

첫 문장은 리더의 과묵함과 차분함을 알려주는 말이고, 두번째 문장은 선택과 집중의 전략으로 풀이가 가능하다.  오늘날 많은 처세서 들이 나돌고 있지만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즉, 고전을 새롭고 풀이하고 새롭고 응용한 것의 연장이란 얘기다.  <손자병법>은 하여, 무수한 응용과 풀이가 가능한 책이다.  마흔에 읽을 책이 아니고, 곁에 두고 가끔 명구를 명상하며 음미해야 할 책이라고 할 만 하다.   

책의 제목은 무척 살갑고 개인적인데,  페이지를 넘길 수록 전쟁이란 관점에서만 책을 풀이한 것은 아쉽다.  이 책을 고른 독자들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인생사가 스토리텔링으로 더 녹아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전쟁의 기술을 얘기하면서 전쟁을 되도록 피하도록 권고하는 <손자병법>은 진정한 평화의 가치를 담고 있는 책이라 할 만 하다.  저자 손무(武)의 철학이 휴머니즘에 닿아 있다고 해석해도 좋겠다.  마음 먹고 읽기 힘든 고전에 접근하는 하나의 편법으로서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은 나름 일독의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살아온 날들이 많아지면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잦아진다. 흑과 백으로 편을 가르기보다는 회색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인생의 목적은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절하고 모양 빠지고, 그래서 비겁해지지만, 산다는 게 그런 것이라는 걸 알아가는 게 또한 산다는 것이다. "    머리말 p.8 


 

 

201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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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드™ 2011-10-15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자병법 훌륭한고전중에 하나죠. 님의소개로 멋진 손자병법에관한 책을 만났네요. ^^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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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무언가에 단정하는 듯한 말투를 쓰는 사람들을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그것이 `종교'에 이르렀을 땐  더 그렇다.  인간이라면 존재가 가진 철학적이요 형이상학의 문제를 어느 순간 심각히 고민해야 될 때가 찾아온다.  충실한 신자도, 냉정한 무신론자도, 그 언어를 단정적으로 사용해선 안된다는 것이 내가 형이상학의 영역에 들어설 때, 최소한 지금껏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몇 해 전,  도쿄의 작은 예배당에서 한국의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 시대 대표 지성 이어령 씨가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던 75살까지 무신론자로 살아왔다.   그는 그 나이까지 종교를 지성의 영역으로 치부했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 그가 기독교 세례를 받고 신자로 환생한 것이다.  그렇게 당당하게 무신론자의 길을 걸어왔던 이가,  왜 느지막한 나이에 종교로 귀의했을까?   

그 곡진한 사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신과 종교의 가르침은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저 너머에 있다.  종교를 이성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그가 단정적인 어투와 확신으로 일평생을 살아왔던 데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형이상학의 영역에 들어설 때, 인간은 철학적 진실과 신학적 사실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자세로 시작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오류를 언제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  한계에 대한 절박한 겸손, 그것은 자신의 영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길이다.   역사상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을 확신했던 자들의 교조주의[敎條主義]적 신념이 얼마나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불러왔던가?  그 대표적인 사건이 중세사를 가로지르는 십자군 전쟁이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반포하고 사망한 즈음,  로마는 동.서로 분리된다.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으로도 불렸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오늘날 이스탄블)이었고, 국교는 그리스정교였다.  십자군이 형성된 시기는 서유럽이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며 느슨한 정치연합체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서유럽은 로마카톨릭의 영향하에 신권과 왕권의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같은 그리스도교를 믿지만, 교리상 차이를 보였던 그리스정교와 로마카톨릭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이 교황을 수장으로 하지만, 그리스 정교는 우두머리 없이 세계 공의회의 합의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11세기 말 그리스정교회의 상징적 수장인 비잔틴제국 황제가 카톨릭 교회 수장인 로마 교황에게 원군을 요청해 왔다. 7세기 전반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 소아시아를 점령했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코앞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은 그간 끊임없이 서유럽에 이슬람의 위협을 이유로 원군을 요청했지만, 묵묵무답이었다. 하지만, 11세기 말의 정세는 이 침묵을 깨기에 충분했다.  우선,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정치,종교적 입지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1077년,  전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의 인사권를 놓고 세속의 왕, 하인리히와 권력 다툼을 벌인다.  결과는 교황의 완벽한 승리다.  황제 하인리히가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얉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1월의 눈밭'에서 삼일밤낮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권력에 대한 신권의 승리를 상징하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그러나, 교황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혈기방장한 황제 하인리히는 이 굴욕 이후, 복수를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궁지에 넣는다.  황제는 군사력으로 교황을 몰아붙였고 동시에 대립교황을 세워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는 결국 로마가 아닌 도피처 살레르노에서 죽는다.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 교황의 신임을 얻고, 후임자로 결정되었지만 로마 교황의 거처 라테라노 궁전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라테라노 궁전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에게 기증한 것이었고, 800년 가까이 로마 교황이 집무를 보아왔던 공간이다.  결국,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강력한 신성로마제국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로마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하는 수단을 망명지 프랑스에서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들에게 `신의 휴전'을 선포하고, 이교도에 점령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향한 무력 순례의 길, 즉 십자군 전쟁을 제안한 것이다. 이 제안은 꽤 잘 먹혔다. 십자군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신의 구원을 보장받고, 영생을 얻을 것이며 그 길에 신이 함께 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구슬렸기 때문이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문학,철학을 공부했다. 그런 그가 이탈리아 유학을 계기로 그리스, 로마사 연구에 매진한다.  로마제국의 흥망사를 다룬 1992년의 <로마인 이야기>는 2006년 15권을 마지막으로 완결되었다. 그는 이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이방인으로서 수많은 현지방문과 자료조사를 통해, 그는 그리스 로마 연구의 대중 집필가로 명성을 얻었다.  2010년부터 그가 새롭게 집필을 시작한 <십자군 이야기>는 3권까지 예정돼 있으며, 그는 이 책의 첫 장에,  서문을 대신해 간명한 자신의 집필 목표를 기록해 두었다.  십자군은 믿음과 구원, 신의 사랑과 성지 회복이라는 성스러운 목적 아래 시작되었지만,  왕권과 교황권의 첨예한 대립 상황을 일소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   신의 군대를 자청한 십자군 군대는 이례적 잔혹성을 드러내 보인다.   이교도에 대한 철저한 죽임과 응징을 일삼고,  종교적 목적을 가장한 정치,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려는 기만이 가득한 것이 또한 그것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반복되는 인간 욕망의 천박함이 뒤섞여 있는 십자군의 역사를,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하나의 명징한 테마로 엮어낼 것임을 그는 이 서문에서 다짐한다. 

"이 책은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되길 희망하는 내가 온 정성을 다해 조사하며 기록해나간 전쟁 역사이다. - 시오노 나나미"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은 정치적 배타성과 이권에 대한 욕망이 개입된 것이 아니다. 정치와 이권은 그 자체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살육은 정지된다.  그 기저에는 반드시 이념, 즉 종교적 가치가 내재해 있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신념을 주고, 살육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종교가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고, 경전에 `나 이외의 신을 믿지 말 것'을 교리로 하였을 경우에,  이교도에 대한 모든 행위는 순간 정의로 탈바꿈 한다.  성스러운 십자군이 인육을 먹었을 정도로 잔인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의 모태가 되었던 중세 서유럽의 정치, 사회적 환경을 조망하면서 그들이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을 제후들의 전쟁 전략과 전술로 분석한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사료들을 참고하여 천년의 시간을 복기[復棋]하는 저자의 열정이 그의 문장속에서 꿈틀거린다.   

십자군에 참여한 자들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중엔 남루한 수도복을 걸치고 당나귀를 타고서 돌아다녔던 순회 설교자, 은자 피에르도 끼어 있었다.  그는 유창한 연설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종교적 열정으로 수많은 중세 하층민을 회유하여 민중십자군을 형성한다.  물론,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은 정치,경제,종교적 목적을 염두해 둔, 교황에겐 무척 쓸모없는 존재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실제로 그들은 서유럽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정에 굶거나 역병에 걸리거나 이슬람의 셀주크투르크 병사들에게 몰살 당하고 말았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선 이후 출발하는 중무장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제후들의 십자군에 도움을 준다.  그들이 이슬람에 미끼를 던져 방심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 무방비한 민중 십자군은 오합지졸이었기에 쉽게 몰살 당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교황보다 신심이 두터운 이들이 아니었을까 상상할 수 있다.  무방비한 상태로 이슬람이 점령한 중근동 지역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기적을 갈망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십자군의 주력 부대는 서유럽에 영지를 확보하고 있던 제후들의 연합병력이다. 그들은 각기 친족적인 일가를 이룬 영지의 봉건 제후들로, 부하 병사들은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제후들은 각기 다른 개성과 욕망을 품고 있어서 연합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다툼과 이견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혈족였음에도 이권다툼으로 단합하지 못한 이슬람의 셀주크투르크 세력에 비해 성지탈환이라는 종교적 목적에 충실한 면이 있었다.  이것이 십자군의 단결을 가져왔고 연승을 가능케했다.  그 일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출정한 아데마르 주교는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사망한다.  예루살렘 함락 후 실질적인 왕으로 추대됐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는 1100년 성지에서 최후를 맞는다. 블루아 백작 에티엔은 십자군 순례길에서 도피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아내에게 야단을 맞고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전투중 사망한다. 프랑스 왕의 동생 위그는 에티엔과 함께 전사한다. 노르망디 공작과 플랑드르 백작은 예루살렘을 함락후 신에 대한 서약을 지켰다는 명목으로 유럽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죽는다.  연합군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자 동료들과 불화를 일으키던 툴루즈 백작 레몽은 1105년, 이슬람과 전투중 기사답게 전사한다.  이슬람측에 소문이 돌 정도로 가장 용맹했던 전사였던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는 레몽이 죽은지 6년 후 자기 영지 풀리아에서 사망하고, 가장 젊은 나이에 참전한 탄크레디는 서른 여섯이라는 나이로 병사한다. 1118년 고드프루아를 이어 예루살렘을 통치한 보두엥도 사망한다.  같은해 십자군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알력 관계를 유지하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도 사망하며 1118년을 기점으로 십자군 제 1세대는 전원 퇴장하게 된다.  이후, 십자군은 200년간 이슬람 세력과 공방전을 이어가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1>가 다루는 것은 제 1세대 십자군의 활약이 끝나는 지점까지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되짚어 보기 위함이다. 이 책은 십자군의 형성 배경, 활약상을 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해박한 역사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십자군의 의미는 천년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 우리 시대의 종교와 세계사, 문명과 인간의 운명을 되돌아보게 한다.  

로마 교황의 신심 가득한 연설, 즉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선언 아래 모였던 중세 서유럽의 인간들은 성서적 진실을 어디까지 확고히 믿었는지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중세 십자군은 분명히 신심 가득한 제후들과 기사들의 자발성에 상당 부분 의지했을 듯 하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십자군의 대순례를 가능케 한, 그 믿음이 현대 서유럽에 존재할까?   지금 서유럽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후퇴가 눈에 띄게 확연하다.   신심 깊은 이들은 인구의 10%도 되지 않고,  매주 교회 출석률을 따지고 들면 더 형편없다. 서유럽에서 전체 기독교 인구는 후퇴중이다.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던 로마제국 이래, 신심으로 불타올랐던 중세를 거치고, 2차 세계 대전의 살육을 거쳐, 이제 유럽은 기독교와 거리를 두게 된 듯 보인다.  이천년의 역사 끝에 종교적 신심은 하락했다.  기독교 인구의 급속한 상승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와 대조적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 십자군은 수많은 공방전을 중근동의 도시들에서 겪는다.  간간히 찾아오는 역병과 전투때마다 이어지는 사망자,  보급품의 부족으로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두를 이겨내고 견고한 이슬람의 성,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야 만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순간,  제후들과 그들의 수하 기사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했다, 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어지는 이슬람인에 대한 살육은 한바탕 축제를 연상시킨다.  성안의 모든 이교도를 죽였다고 한다.  `신이 그것까지 바라셨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살육조차도 신의 뜻으로 해석했던 듯 하다.   

역사의 기록을 통해 씁쓸해지는 것이 이 지점이다.  성서의 일획일점까지도 믿었던 중세적 교조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였기에 가능했었던 것인가?  오늘 팔레스타인을 보면 중세가 연상되는건 어찌된 건가?  천년 전의 십자군은 지금도 예루살렘 땅에서 살육을 이어가고 있다.  단지,  로마 카톨릭이 주도했던 십자군을 이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기독교가 주도하고 있을 뿐이다.  중동은 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화약고다.   중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찾아오지 않을 듯 하다.  중세의 기사들은 신앙을 핑계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지만 현대의 서유럽과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에게 영토는 `석유'로 대체 된다.   

그들이 얄미운 것은 중세의 교황처럼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중세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교도가 점령한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이유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고 대중을 선동했다.  실제 목적은 교황권력의 확장과 경제적 실익 때문이었다.  오늘날 중동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이유로, 미국의 침공과 서유럽의 공습이 정당화 된다.  지금 이 시간도 리비아는 카다피의 제거를 명목으로 서유럽 전폭기들의 공습을 받고 있다.  천년 전처럼,  이슬람은 여전히 뿔뿔히 흩어진 반면 서유럽은 유럽연합(EU)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는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서술한 역사서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사, 우리들의 종교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되묻게 한다.  종교는 성직자들을 통해 대중을 기만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왕권에 대립해 세상을 놓고 권력투쟁을 일삼던, 교황권력은 현대 그저 상징적인 종교의 수장으로 물러나 있다.  과거의 그 포악한 야망과 날카로운 이빨은 어디로 감추어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린 종교 세력이 세속 권력만큼이나 탐욕스러웠다는 것을 배운다.   

그 모든 과거를 모른체 하는 것은 얌체 같은 짓이다.   작가는 이 책을 집필하며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되길 희망한다, 고 썼다.  종교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조주의가 약화된 현대 문명에서도 이교도에 대한 살육은 어느 순간 `정의'로 탈바꿈 할 것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무비판적 신앙과 종교지도자들의 허무맹랑한 선동이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일상다반사한 일이다.  우린 역사를 통해 그들의 욕망은 거세된 것이 아님을 기억한다.   

십자군, 그들은 정말 구원을 받고 천국에 입성했을까?  살육의 축제를 벌인 이들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맹신은 무신론보다 해롭다.  신앙인은 건전한 생활인이자, 윤리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 상식을 벗어날 때, 신앙은 기만이 되고 천국은 거짓이 된다.  십자군의 역사는 인간의 도리와 상식을 지지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다시 인간은 교조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20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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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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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당시 성균관 대학교에선 흥미로운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기자회견을 이끈 것은 우리 시대 대표적 한문학자들이었다.  여기서 안대회 성균관 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는 그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정조의 어찰(왕의 편지), 297통을 공개한다.  지금껏 한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 이 편지들이 정조시대 특정인에게 발송되었고,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비밀스런 약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세상 그 누구도 그들이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어찰첩은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였던 노론벽파의 수장,  심환지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들이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4년간 정조는 무려 297통의 편지를 심환지에게 보낸다.  편지가 오고가는 것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졌다.  어찰의 배달은 정조가 신임하는 심복의 손을 거쳤고,  그것도 모자라 수신자인 심환지에게 어찰을 매번 폐기 처분토록 지시했다.  어찰 배달인에 대한 관리또한 엄격했다.  세상 모두가 아는 정치적 숙적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비밀에 부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정조는 어찰을 통해 국정의 여러 현안을 숙적과 논의하며 국정을 조율하기까지 했다.  이 어찰첩이 우리의 역사적 상식을 뒤흔드는 건 이 때문이다.  어찰은 흔히 왕이 신하 혹은 친인척에게 일상적으로 발송하던 편지였다.  그러나 정조의 어찰첩은 몇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첫째, 조선의 왕 가운데 어찰을 이렇게 많이 남긴 왕이 없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자풍의 왕이어서 그랬을까?   역사적으로 정조를 제외하곤 조선 왕 중에서 100통의 어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 양과 형식(비밀)에서 정조어찰의 등장은 역사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둘째, 심환지(1730-1802)라는 노론벽파의 최고 관료에게 4년간 집중적으로 보낸 편지라는 것이다.  정조의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병사이지만,  역사학계의 일부에선 끊임없이 독살설을 주장해 왔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정조와 비밀편지를 4년간이나 주고받았던 심환지다.   

셋째, 어찰첩이 정조의 폐기명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료로서 보존돼 왔다는 것이다.  심환지는 정조의 폐기명령을 어기고, 가문에 이를 전승시켰다.  정조는 무엇을 감추고 싶어했고, 심환지는 왜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이 편지들을 보존했던 것일까?   역사의 내밀한 결에 존재하는 왕과 반대파 수장의 심리와 의도를 읽을 수 있음이 흥미롭다.  

넷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공식적인 역사기록에서 제외된 진실들을 파악할 수 있다.  공식 역사와 다른 사정이 어찰첩에서 발견되곤 하는데, 이것은 역사의 이면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현장을 중계한다.  공식적인 역사가의 기록이 담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을 어찰첩은 증명하고 있다.  역사가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집요함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다섯째, 개혁군주이자 학문을 사랑했던 성군으로서 고정된 정조의 이미지를 혁파할 수 있다.  어찰첩에 새겨진 문장들을 통해, 정조의 의심많고 급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정치적 숙적으로 알려진 심환지와 내밀히 정사를 논하는 모습은 정치적으로 노련한 군주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 다섯가지 관점에서 이 책은 정조 어찰첩의 가치를 평가하고 분석한다.  297통의 편지 가운데, 간간히 소개되는 정조 어찰들을 통해 왕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왕과 숙적 신하가 비밀리에 나누고자 했던 200년 전 사연들을 엿보는 것 자체가 또한 흥미롭다.  결국 정조의 비밀어찰첩은 정조가 탕평책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각 당파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모가 나게 행동하는 것이다. 

"내 평생 정국 운영에서 모가 나지 않고 쓸데 없는, 골동품 버릇과 기상을 몹시 증오했다."  p.80 

정조는 당파의 경쟁을 통해 정국의 조종자로서 국왕의 역할과 위치를 자리매김하려 한다.  하여, 국왕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어깃장을 놓는 노론벽파와도 적극적 소통을 추구했다.    권력의 편중과 독식을 경계하며, 그는 당파의 경쟁을 통해 왕권의 견고함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려했던 작가와 학자들은 정조가 반대파인 심환지 일당에게 독살을 당했다는 독살설을 제기해 왔지만 그같은 주장이 정조 비밀 어찰첩의 등장을 통해 이제 불식될 기회를 맞았다.  어찰첩 공개를 이끈 안대회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이 들떠 기자회견을 열었고, 대중이 크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 진실이 가치있는 사료를 통해 수정되는 진귀한 현장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297통의 비밀어찰첩 일부를 짧게 인용하는 방식으로 어찰첩을 요약, 분석, 해설하면서 어찰첩이 보존돼온 과정과 발견, 그리고 해석, 그 의미를 짧은 한 권의 책으로 집약했다.  이 책을 쓴 안대회 교수의 글을 통해 학자들이 이 `진실'된 사료를 발견하고 느꼈던 희열이 전해져 오는 듯 하다.  그도 그럴것이 정조시대의 몇가지 논쟁들이 그 주인공의 입을 통해 명확히 기록되고,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어찰첩은 더군다나 비밀 편지였고, 사람은 누구나 비공식적이자 비밀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토로하기 마련이다. 

심환지와 나눈 정치 현안에 관한 대화도 흥미롭지만,  이 시대 독자의 눈에 정조의 일상과 인간미가 묻어나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국정을 돌보고 학문을 사랑했던 왕으로서 정조는 자신의 일상을 언뜻언뜻 이 편지들에서 내보인다.  왕의 일상과 근심이 200년의 시공간을 넘어 독자에게 전해오는 느낌은 특별하다. 

"나는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 나는 조금 나아졌고 앞으로 더욱 나아질 것이다.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나 늙고 지쳐간다.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  사흘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일하느라 피곤하지만 요행히 몸져눕는 것만은 면했다. 나는 일을 보느라 바빠 틈을 잠깐도 내기가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었으니, 지쳐 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될 뿐이라"   p.94 

선대의 역사를 해석하고 과오를 밝히는 일은 후대 역사가의 주임무다.  문제는 부족한 사료로 진실이 왜곡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끊임없이 사료를 찾아 헤매고 그것을 분석하는 일에 매진한다.  정조가 노론벽파에게 독살됐는지 아닌지, 정사를 빗겨난 역사의 어떤 진실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다행히 정조는 독살설의 주인공 숙적 심환지와 무려 300여통에 달하는 편지들을 나눈 사이임을 드러내며, 역사가의 진실탐구에 도움을 줬다.  

200여년 전의 과거 역사도 `진실'을 찾기 위해 우린 고군분투한다.  하물며 100여 년도 되지 않은 현대사를 왜곡하는 현장들을 우린 요즘 간간히 지켜본다.   공영방송 KBS는 최근 모당 취재를 하면서 갓 서른을 넘긴 기자가 도청 취재를 했다는 의혹을 사더니,  최근 간도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의 친일파 백선엽을 6.25 영웅으로 미화하는 다큐를 내보냈다.   광복회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1985년 전두환 시절, 청와대 경호실장 지냈고,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1997년 징역 2년6개월이 확정돼 복역했던 하나회 출신 장군 안현태의 국립묘지안장을 보며, 국립묘지는 대체 어떤 분들이 가시는 곳인지 국민들은 분명 헷갈리지 않았을까?  

이 책에 부록처럼 실린 정조가 죽던 날의 풍경은 자못 시사하는 바가 많다.  성군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대로 성군으로 남는다는 것을 이 글이 보여준다.   살아생전 정조와 알현한 적이 많고, 벽파와 대립각을 세웠던 시파의 대표적 인물 심로숭이 정조가 죽던 날의 풍경을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 선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25년 사이에 큰 덕망과 지극히 인자하심이 백성들에게 깊이 스몄는데, 돌아가신 날 나라 안에서 울부짖고 통곡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졌다.  파주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주막집 노파와 시골 노인네가 눈물을 비오듯 쏟으면서 `하늘도 착하지 못하시지. 어째서 네 댓 해만 더 빌려주어 우리 세자빈이 궁궐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하시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는 말이 너무도 간절하여 정말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서 나도 자연스레 말 위에서 목을 놓아 울면서 `이것이 이른바 백성들의 떳떳한 양심이다'라고 말했다. " P.143 

옛 조선의 민초들이나 우리 시대의 서민들이나 성군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지 않을까?   민초들의 눈은 정직한 역사가의 기록 못지 않다.  역사는 왜곡하려 해서 왜곡 되는 것이 아니다.  후대의 눈은 정직하며 정확하다.  언젠가 진실은 반드시 왜곡된 사료의 바깥으로 뛰쳐 나오기 마련이다.   역사왜곡이 부질없는 이유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정조의 어찰이 그랬던 것처럼, 후대의 역사가들과 정직하고 사려깊은 민초들을 통해 선대 역사와 인물은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정조의 비밀 어찰들이 공식적인 사료들의 오류를 수정하며, 역사의 섬세한 결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자신과 가족의 희생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광복회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공영방송 KBS는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는데 공이 혁혁한 친일파 백선엽 다큐를 방송하는데 주저치 않았다. 5.18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이 제대로 치유받지도 못했음에도, 전두환 쿠테타 세력의 충복[忠僕]였던 안현태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 오류와 모순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은 후대 역사가의 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떳떳한 양심의 소리가 먼저 우릴 괴롭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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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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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저자, 혹은 작가와 만난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만남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음에 있다.  책들의 울창한 산책로에 비견될 만한 저 도서관의 서가를 거닐어본적이 있는가.  우연하게 뽑아든 책 한 권에서 전해지는 메세지에 감동하여,  순간 작가에 한없이 빠져든 적이 있었는가.   만약, 그러한 작가가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경우라면 그 울림과 설레임은 배가 된다.  동시대의 작가에겐 옛 고전이 주는 깊이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나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정직한 시선, 부당함에 대한 울분, 어리석음에 대한 질책, 전망 같은 것들에서 갈증과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쓰는 작가와 책을 읽는 독자 사이에 공통점이자 최대의 혜택이랄 수 있는 건 그들에게 `은퇴'가 없다는 것이다.  절필을 선언하지 않는 한, 모든 작가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 곁에 선 독자도 마찬가지다.  추종할만한 작가를 만나는 순간, 독자들도 그의 글에서 은퇴하지 않는다.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모름지기 작가는 죽는 날까지 세상을 감시하고,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동시대 작가의 생명력은 그곳에 있다.  그들의 충성스런 독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척 단순하다.  생명력을 이어온 날카로운 붓끝이 무디어지지 않는 것이며,  시류에 영합하여 타락의 지점으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등단 이후 50년 가까이 쉼없이 달려왔다.  나의 세대가 애써 찾아읽지 않는다면 개발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다룬 그의 명작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젊은 독자들은 그렇게 부지런하지가 않는 법이다.  꾸준하게 새작품을 써내지 않아서 잊혀진 과거의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하면, 황석영은 독자들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다.  문학은 본래 배고픔의 산물이고, 고난의 열매 같은 것이니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노회한 그가 더이상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하여도, 탓할 수 없다.  그는 더이상 배고프지 않고, 그가 파헤친 개발독재의 망령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열정으로 넘치는 작가다.   작년 이맘 때, 녹슬지 않는 필력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강남제국의 형성사를 그려낸 수작 <강남몽> 이후,  그는 다시 올 6월 생애 최초의 전작 장편 <낯익은 세상>을 들고 중국 리장에서 날아왔다.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중국 윈난성의 고원도시 리장에서 그는 이 작품을 구상하고 쓰기 시작하여,  제주도에서 집필을 마무리했다.   왜 그는 그 먼 이국의 낯선 도시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강남몽>에서 강남을 형성하고 사는 세력들의 추한 과거를 들추어내며,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꼬집은 작가는 이제 <낯익은 세상>을 통해, 현대인의 무분별한 소비적 경향과 거기서 발원하는 천박한 욕망의 부산물로 뒤덮인 쓰레기의 섬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1980년대, 서울시의 쓰레기 매립지로 쓰였던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작가는 넝마주이로 살아가는 딱부리 가족의 일상을 구체적인 서사를 통해 재현해 낸다. 서울시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곳,  쉽게 버림받은 물건들이 가득한 곳, 하지만  누추한 쓰레기를 헤집으며 딱부리 가족과 꽃섬의 주민들은 활기찬 생계를 이어간다.  작가는 가난하고 굴곡진 가족사를 딛고 당당히 생을 일궈가는 딱부리와 엄마의 삶을 그리며,  도시 빈민의 일상에서 강한 삶에의 의지와 구체적인 생활의 풍경을 표현해 냈다.  어디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딱부리와 어딘가 모자란 듯 하지만 순수한 동생 땜통의 유쾌한 에피소드는 충분히 성장소설의 행로로 나아갈 만 하다.  

소설은 딱부리와 땜통의 시선으로 꽃섬 주민들의 누추한 삶과 구체적인 일상을 그려보인다. 다시, 소설은 쓰레기 매립장이 아닌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꽃섬의 과거를 들추어 내는 방편으로, 환상적인 서술 기법을 동원한다. 바로, 김서방네 가족이 도깨비로 등장해 현실의 인물들과 섞여 작품의 핵심적인 메세지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는 구체적인 대사와 문장들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이 작품에서 무엇을 그리고, 반성하고, 되돌아보려 했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지금의 세상, 그 어디에서도 낯익은 우리 시대, 평균치의 문명과 자본주의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낯익은 세상>, 황석영  p.207   김서방네 할아버지의 대사 中 

이 소설은 자본주의적 소비행태, 그 시스템이 굴러가는 하나의 경향으로서 무절제한 낭비와 훼손을 문제삼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무한 공급과 소비를 통해 유지되는 체제다.   그 시스템 안에선 언제나 `과거'란 혁신되어야 할 불완전한 상태로 규정된다.  어제의 제품은 잊어라.  오늘 시장과 소비자는 새롭고 낯선 물건들을 탐한다.  그들의 욕망에 맞추기 위해선, 자원은 무차별 고갈되어야 하고, 소비는 촉진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이 폭주기관차를 멈추게 할 순 없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나 지속가능할까?  이 지구가 무한대의 욕망을 버텨낼 수 있을까? 

소설의 끝자락에서 꽃섬은 불타오른다.  사랑스럽고 천진한 소년 땜통은 딱부리가 선물한 전자오락기 슈퍼 마리오를 찾아 불타는 집안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슈퍼 마리오는 자본이 선물한 진귀한 소비재였을 것이고,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순진한 아이는 죽음의 음산한 전조가 비추이는 꽃섬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모자란 여인으로 등장하는 빼빼엄마는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터전에서 나름의 의식을 집전한다.  혁신과 소비란 미명하에 버려진 우리들의 `과거'를 지켜내고 간직하려는 샤모니즘적 의례다.   빼빼엄마가 당집의 마루판자에 고이 간직하는 물건들을 보라. 세련된 디자인이나 문명이 추구하는 극도의 편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옛시절 우리와 함께 했던 단순하고 가장 소박한 것들이다.  그저 하나씩 호명하며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향수와 애틋함이 묻어나는 물건들이라니...!    

" 나무결이 갈라지고 터진 절굿공이. 끝이 모두 닳아 벌어진 수숫대 빗자루, 뒤축이 떨어져나간 남녀 고무신 한 짝씩,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 쪼개진 물소뿔 마고자 단추, 부러진 곰방대, 이 빠진 참빗, 실밥 터진 골무,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참나무 도끼자루, 옻칠 벗겨진 실패,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귀퉁이 떨어진 밥주걱, 앙증맞은 나무 팽이"   이러한 물건들은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한 사람의 생애와 함께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소비욕망이 과도한 사회에서 그것은 시대에 뒤쳐진 폐기물, 쓰레기로 전락한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 버리고 잊어버린 우리 자신의 분신 같은 것들 아닌가.

"이런 못쓰는 물건들은 왜 소중하게 감춰두는 거예요?
서루간에 정들어서 그러지.
그럼 저어기 쓰레기장 물건들은요?
빼빼엄마는 검댕이 잔뜩 묻은 더러운 얼굴을 돌리고 야멸치게 말했다.
저것들은 사람들이 정을 준 게 아니잖아! "      <낯익은 세상>, 황석영  p.225   딱부리와 빼빼엄마의 대화 中

황석영의 붓끝은 죽지 않았다.  그의 필력은 보다 겸손해지고, 무디어진 것처럼 보인다.  딱부리와 땜통은 이 소설에서 투사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빈민으로서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대신, 황석영은 두 소년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꽃섬의 쓰레기장을 통해, 바로 현대 문명과 그 소비를 비껴갈 수 없는 모든 자본주의적 행태에 낯익은 인간들을 겨냥했다. 너무 낯익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이 그들에겐 가득하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는 오만으로 가득찬 인간들이 그 낯익은 세계에 움집해 있다.  

이 낯익은 세계에 거주하는 평균치의 인간들의 특성은 단순하다. 사려깊지 않다.  자본주의 소비 행태를 닮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돈이 된다면 자연은 언제든 훼손 가능하다.  그것이 유휴지로 남는다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개발되어 이득을 남겨야 그 낯익은 세상에선 정의다.  그러니 5천년동안 아무 일없이 흘렀던 그 평화로운 4대강이 파헤쳐져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는다.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소득이 좀더 늘어날 수만 있다면,  그래 더 풍족한 소비를 할 수만 있다면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양심이니, 장식품 같은 언어들은 모두 내다 팔 수 있도 있다, 고 사유한다. 

이러한 세상의 그 `낯섬'이 아니라 역설적인 `낯익음'에 대하여 작가는 이 작품속에서 깊이 고민한다.   이것이 먼 이국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중국의 리장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였던 이유다.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오류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이 소설에서 우린 작가 황석영의 존재감에 다시 눈뜨게 된다.  시류에 쉽쓸리지 않는 작가의 예리한 지성과 감시자로서의 눈빛이 고맙다.  한국 현대사의 개발 독재를 붓끝으로 비판해 온 이력으로, 그는  다시 이 시대 소비와 욕망에 익숙한 자본주의의 파국을 경고하고 나섰던 것이다.  

"망할 것들아, 여기 니들만 사는 줄 알아?  니덜 사람 새끼 다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루야"   <낯익은 세상>, 황석영  p.218   빼빼엄마의 독백 中 

파국의 전조음이 들려오는 세상, 우리는 벼랑끝 부러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 절박한 순간에도 나뭇가지에 묻은 몇 조금의 꿀을 핥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인간이라면 그 찰나의 쾌락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사유와 행동에 나서리라.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낯익은 세상은 그저 옳은 것인가?   작가는 무심한 세상과 독자들을 향해 현대 문명이 쌓아올린 쓰레기 더미 한 가운데서, 그 쾌락과 무사유와 허례와 낭비와 소비의 꼭지점에서 하나의 경고장을 써 보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우린 보다 영민해 져야 한다. 낯익은 것들이 잘못되었다면 과감히 불살라야 하리라. 자본주의의 폐기물들이, 천방지축의 욕망들로 가득한 꽃섬이 소설의 끝자락에서 불타는 것은 그래서 차라리 희망적이다.  이 무심하게 낯익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건,  MBA를 갖고 있는 경제박사도,  뉴타운을 공약하는 정치인도,  4대강을 누빌 첨단의 로봇 물고기도 아니다.  빼빼엄마처럼 평균치의 지능조차 갖지 못했지만,  자연앞에 겸허할 줄 알고 자연과 공존하려 애쓰는 그 순박한 `샤먼'들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희망이요, 빛이 아닐 것인가?



201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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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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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회

단편집을 자주 읽을 기회가 없는 내게 만남 자체가 가슴 설레는 책이 있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이다.  1회 수상 작품집을 읽은 것이 벌써 일년 전인가?  풋풋한 감성과 기발한 상상력을 앞세운 작가들의 작품집은 내 기억을 여전히 잠식하고 있었나보다. 그간 간간히 소설책을 읽어왔지만 1년이 지나 다시 잡은 2회 수상작품집은 기대와 떨림으로 책장을 펴들게 했다.  우리가 용감하고, 굳건하게 이 생을 견디고 뚜벅뚜벅 한해를 걸어왔듯이 동시대의 작가들도 지난한 인생을 지나 힘겨운 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는 반가움이 앞섰다.  1회 수상에 이어, 2회에 연속해 수상한 작가들의 이름을 보자마자 잊혀진 연인의 과거와 현재가 아스라이 겹치는 이 소회, 무엇이라 할까?  

지난 1월 타계한 故 박완서 작가는 이 수상작품집의 본심 심사에 참여했다.  생전 병상의 마지막까지 쓰기와 읽기라는 작가의 본분에 충실했던 그는 후배 작가들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수상작 4편을 추천한다.  본심 심사가 있던 날, 그는 황망하게 이승을 뜨고 말았다. 작가로 평생을 살아왔고, 죽는 날까지 작품 활동을 했으며, 떠나는 날까지 후배들의 작품을 읽었던 그를 독자로서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총 7 명의 작가, 7 편의 단편이 담긴, 이 작품집에서 나는 문득 어떤 비감(悲感)과 마주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작가는 시대와 공명하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는 동시대의 민감한 리트머스요, 다층적 스펙트럼이어야 한다. 재기 충만한 젊은 작가들, 그들의 문장안에서 나는 내 욕망과 그들의 욕망이 어떻게 겹치고 갈라서는지 확인할 것이요, 시대를 바라보는 공통된 시각과 차이를 발견케 될 것이었다.  한 시대를 온전히 긍정하기란 어렵다.  문제의식 없이, 작가의 길을 갈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며, 소리없는 총성이 오가는 삶의 전장에서 무엇을 기록하고 있을까?  이 작품집을 헤집는 나의 눈길이 더없이 분주하다.  

 

2) 풍경들
 

"인간은 동료 인간이 맞닥뜨린 궁지가 속속들이 묘사될 때 감동을 받는다"   도러시아 브랜디 <작가수업> 中

신은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는가?  이 물음은 문명의 역사와 함께 해온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구원은 이 질문안에 있다.  종교는 경전을 통해 여기에 답하지만, 문학은 묘사와 모방을 통해 이 풍경을 그저 그려낼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곤궁을 그릴 때, 어떤 절박함을 안고 있어야 한다.  절박함이란 절제된 통곡이 평이한 문장속에서 변이하며 독자의 심장에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은 재난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재난은 자연적인 것만은 아니다.  은밀한 문장들을 통해 김애란은 사회적 재난의 전형을 `고발'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재난이 지닌 다층적이요, 가학적인 성질을 드러내는데 탁월하다.

물과 전기가 끊긴 재개발 아파트 거주자, 투쟁끝에 의문사한 건설 노동자 아버지, 남편의 죽음에 분노하다 당뇨 쇼크로 사망한 엄마, 그리고 긴 장마와 폭우로 고립되어 가는 재개발 아파트, 엄마의 시신을 떠메고 탈출을 감행하는 풍경,을 작가는 분명하고 또렷한 어조로 묘사한다.  이 난망한 상황을 구제해 줄 사람이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그 높은 건설 크레인을 삼켜버린 폭우앞에 절규해 보지만 풍경은 무심히 대답조차 없다.  그를 현재 구제하고 있는 것은 집안의 문짝을 뜯어내 만든 나무배와 페트병 노가 전부다.  무심히 내리는 빗줄기에서 무력한 인간의 힘과 통제불능 자연을 상대로 삶에의 의지를 다진다.  문제는 이 재난의 풍경속에 감추어진 비자연적인 요소의 비정함이다.  누가, 그들을, 유령이 출몰할 재개발 아파트의 폐허 위에 살게 했는가.  아버지의 죽음은 타살였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작가는 담아냈다.

개인의 짓누르는 공포와 억압의 결과를 그리고 있는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는 아버지와 세상에 대해 언제나 `예스'로 답하며 살아왔던 `나'의 분노가 인생의 어느 하루, 극과 극으로 분출하는 현상과 풍경을 포착한다.  나른한 오후 상사 A를 `몽둥이처럼 생긴 커다란 선인장'으로 때려주는 상상을 온전히 A의 `금빛 메뉴큐어' 때문이라고 해명하며, 선량하고 고분고분한 `나'는 국밥집의 친절한 아주머니를 살해한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분노가 이유없는 살인을 부른 것까지야 좋다지만, 대체 왜 죄책감조차 없단 말인가?   분노의 정체가 이처럼 흐릿한 것은 어쩌면 분노의 대상을 오인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되묻게 된다.

가장 소극적인 모습은 가장 적극적인 의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김유진의 <여름>과 이장욱의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공간이 가진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해설함으로써 독자를 현실과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Y와 B가 거주하는 공간이자 마주한 작업장에서의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을 특별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가는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을 묘사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의 시간들을 빠짐없이 그려내는데 열중한다.  이장욱은 러시아라는 이질적 공간,  주인공이 기거한 어느 작가의 방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들을 들려주며 독자를 섬뜩하지만 낯선 사연과 함의가 담긴 공간으로 초대한다. 

"욕실에 물을 튼 것이 나라고? 부엌에 가스불을 켠 것도?   이봐, 농담은 그만하라구. 옆방의 신음소리도 나의 것이란 말인가?"  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P.121

이들 작품들에서 적극적인 의미와 주장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소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란 작가의 개입없이도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특별한 암묵적 분위기가 형성된다는데 있다. 이 분위기는 물론 동시대의 기운이라 불러야 한다.  이들 작가들의 무심한 문장들을 통해 `수상한 시대'를 외면하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유폐된 작가들의 현재를 엿볼 수 있다.

편견과 인간의 무절제를 다룬 작품들로서 정용준의 <떠떠떠, 떠>와 김이환의 <너의 변신>이 까다로운 미식가 체질 독자의 기대에 부응한다.  정용준의 작품은 다른 특성, 특별한 개성을 가진 상대에 대해 갖는 부절적한 편견을 질타한다.  말더듬과 간질이란 질병으로 구체화 되었지만  상대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로서 기본적 문법임을 이 작품은 강조하는 것이다.  김이환의 작품은 성형이 만연화된 우리 시대의 어두운 미래를 그려보여 준다. 개성이 사라지고 표준화된 미인들이 미디어를 점령한 시대, 우리는 왜 조작된 아름다움에 열광하는지, 되묻고 있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종말의 시대, 남겨진 아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검은 구멍이 가득한 지상의 어느 지점에 떠 있는 집과 세계에 남겨진 소녀와 소년은, 빈 집을 불태우고 마트에 남은 식량으로 연명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옅은 과거의 추억이자 확신할 수 없는 미래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 그들은 성장하고 있었다.  작가가 설정한 이 역설은 희망인가, 절망인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 P.209

3) 시대의 악몽을 변주하다 

한 작가의 작품 모음집도 아닌 여러 작가의 수상 작품집에서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포착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들은 사회성과 개인성을 넘나들었고, 상징과 은유를 섞어 인생과 시대를 나름의 작품안에 담아냈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 작가', 라는 하나의 조건에서 또 `동시대' 라는 또하나의 주제에서 이 작품집을 구성하는 일곱 개의 개성을 하나로 묶어내고 싶다.

대상 수상작인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을 제외하곤, 어느 작품도 이 시대의 곤궁함을 직접적으로 항의하고, 묘사하진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당면한 현실적인 상황속에서 각개 약진의 자세로 생을 헤쳐나가려 한다.  거대한 폭풍이 다가올 때 가장 안전한 공간은 익숙한 자신의 거처라고 우린 쉽게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쓰나미의 위력에서 보았듯 세상에서 안전한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앞에 겸허해 지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나? 

이 작품집에 수록된 수상작들은 하나 행복이나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이 문제일까?  젊음의 특권은 부정과 회의여서, 아니다.  그들의 절망엔 이유가 있다.  이유없는 절망은 허무주의에 닿는다.  그들의 절망이 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세심한 독자는 눈치챘으리라.  이 사회의 가진 자들이, 이 사회의 지도층들이, 매일 아침 신문의 1면에 등장하는 주제와 형식을 보라.  도대체, 권력과 기득권과 재력에는 좀체 인연이 없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타락과 추함에 주눅들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정도다. 

탐욕으로 물든 사회에서 희망이 거처할 공간은 희박하다.  희망을 지켜내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선 불가능하다.  희망이 광장의 연대속에 피어나는 결실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시대는 양심과 도덕이 실종되었다.  그것뿐인가. 배알도 없고 원칙도 없고, 공정도 없다.  거짓말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전쟁의 길로 가면서 평화를 입에 올린다.   그러나, 말은 공정과 사랑과 원칙과 양심을 이야기 한다.  언어와 현실이 거꾸로 가는 이 시대에 정직한 작가라면 악몽에 시달려야 한다.

그 증상들은 다양하다. 이 작품집에서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이 이 난관의 풍경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걸 보았다.  또한, 그들은 악몽을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김애란은 신과 세상에 맨몸으로 절규하고 김유진은 다가오는 공포를 침묵으로 무시하려든다. 이장욱은 환상으로 도피하며 김사과는 이유없이 분노한다.  김성중은 종말의 살벌함을 경고하고, 김이환은 인공적 세상을 비꼬며, 정용준은 관용과 사랑을 해법으로 주장한다.  모두 이 시대의 악몽을 글로써 변주하는 나름의 작법이다.

"우리는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 때문에 쓴다"   윌리엄 서머싯 몸

무력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변주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시대의 악몽엔 끝이 있기 때문이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공간에도 `풍경'은 존재한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손 끝이다.  악몽의 시대에 잘 쓰여진 글 한 편은,  훗날 잊지 못할 교훈을 남길 것이다.   희망은 결국 그들의 붓끝에서 부활할 것이다.  이 작품집에서 결국 나는 `희망'을 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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