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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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당시 성균관 대학교에선 흥미로운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기자회견을 이끈 것은 우리 시대 대표적 한문학자들이었다.  여기서 안대회 성균관 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는 그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정조의 어찰(왕의 편지), 297통을 공개한다.  지금껏 한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건 이 편지들이 정조시대 특정인에게 발송되었고,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비밀스런 약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세상 그 누구도 그들이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어찰첩은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였던 노론벽파의 수장,  심환지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들이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4년간 정조는 무려 297통의 편지를 심환지에게 보낸다.  편지가 오고가는 것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졌다.  어찰의 배달은 정조가 신임하는 심복의 손을 거쳤고,  그것도 모자라 수신자인 심환지에게 어찰을 매번 폐기 처분토록 지시했다.  어찰 배달인에 대한 관리또한 엄격했다.  세상 모두가 아는 정치적 숙적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비밀에 부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정조는 어찰을 통해 국정의 여러 현안을 숙적과 논의하며 국정을 조율하기까지 했다.  이 어찰첩이 우리의 역사적 상식을 뒤흔드는 건 이 때문이다.  어찰은 흔히 왕이 신하 혹은 친인척에게 일상적으로 발송하던 편지였다.  그러나 정조의 어찰첩은 몇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첫째, 조선의 왕 가운데 어찰을 이렇게 많이 남긴 왕이 없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자풍의 왕이어서 그랬을까?   역사적으로 정조를 제외하곤 조선 왕 중에서 100통의 어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 양과 형식(비밀)에서 정조어찰의 등장은 역사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둘째, 심환지(1730-1802)라는 노론벽파의 최고 관료에게 4년간 집중적으로 보낸 편지라는 것이다.  정조의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병사이지만,  역사학계의 일부에선 끊임없이 독살설을 주장해 왔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정조와 비밀편지를 4년간이나 주고받았던 심환지다.   

셋째, 어찰첩이 정조의 폐기명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료로서 보존돼 왔다는 것이다.  심환지는 정조의 폐기명령을 어기고, 가문에 이를 전승시켰다.  정조는 무엇을 감추고 싶어했고, 심환지는 왜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이 편지들을 보존했던 것일까?   역사의 내밀한 결에 존재하는 왕과 반대파 수장의 심리와 의도를 읽을 수 있음이 흥미롭다.  

넷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공식적인 역사기록에서 제외된 진실들을 파악할 수 있다.  공식 역사와 다른 사정이 어찰첩에서 발견되곤 하는데, 이것은 역사의 이면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현장을 중계한다.  공식적인 역사가의 기록이 담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을 어찰첩은 증명하고 있다.  역사가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집요함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다섯째, 개혁군주이자 학문을 사랑했던 성군으로서 고정된 정조의 이미지를 혁파할 수 있다.  어찰첩에 새겨진 문장들을 통해, 정조의 의심많고 급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정치적 숙적으로 알려진 심환지와 내밀히 정사를 논하는 모습은 정치적으로 노련한 군주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 다섯가지 관점에서 이 책은 정조 어찰첩의 가치를 평가하고 분석한다.  297통의 편지 가운데, 간간히 소개되는 정조 어찰들을 통해 왕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왕과 숙적 신하가 비밀리에 나누고자 했던 200년 전 사연들을 엿보는 것 자체가 또한 흥미롭다.  결국 정조의 비밀어찰첩은 정조가 탕평책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각 당파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모가 나게 행동하는 것이다. 

"내 평생 정국 운영에서 모가 나지 않고 쓸데 없는, 골동품 버릇과 기상을 몹시 증오했다."  p.80 

정조는 당파의 경쟁을 통해 정국의 조종자로서 국왕의 역할과 위치를 자리매김하려 한다.  하여, 국왕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어깃장을 놓는 노론벽파와도 적극적 소통을 추구했다.    권력의 편중과 독식을 경계하며, 그는 당파의 경쟁을 통해 왕권의 견고함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바라보려했던 작가와 학자들은 정조가 반대파인 심환지 일당에게 독살을 당했다는 독살설을 제기해 왔지만 그같은 주장이 정조 비밀 어찰첩의 등장을 통해 이제 불식될 기회를 맞았다.  어찰첩 공개를 이끈 안대회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이 들떠 기자회견을 열었고, 대중이 크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 진실이 가치있는 사료를 통해 수정되는 진귀한 현장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297통의 비밀어찰첩 일부를 짧게 인용하는 방식으로 어찰첩을 요약, 분석, 해설하면서 어찰첩이 보존돼온 과정과 발견, 그리고 해석, 그 의미를 짧은 한 권의 책으로 집약했다.  이 책을 쓴 안대회 교수의 글을 통해 학자들이 이 `진실'된 사료를 발견하고 느꼈던 희열이 전해져 오는 듯 하다.  그도 그럴것이 정조시대의 몇가지 논쟁들이 그 주인공의 입을 통해 명확히 기록되고,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어찰첩은 더군다나 비밀 편지였고, 사람은 누구나 비공식적이자 비밀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토로하기 마련이다. 

심환지와 나눈 정치 현안에 관한 대화도 흥미롭지만,  이 시대 독자의 눈에 정조의 일상과 인간미가 묻어나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국정을 돌보고 학문을 사랑했던 왕으로서 정조는 자신의 일상을 언뜻언뜻 이 편지들에서 내보인다.  왕의 일상과 근심이 200년의 시공간을 넘어 독자에게 전해오는 느낌은 특별하다. 

"나는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일이라. 나는 조금 나아졌고 앞으로 더욱 나아질 것이다.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나 늙고 지쳐간다.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  사흘 동안 눈을 붙이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일하느라 피곤하지만 요행히 몸져눕는 것만은 면했다. 나는 일을 보느라 바빠 틈을 잠깐도 내기가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었으니, 지쳐 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될 뿐이라"   p.94 

선대의 역사를 해석하고 과오를 밝히는 일은 후대 역사가의 주임무다.  문제는 부족한 사료로 진실이 왜곡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끊임없이 사료를 찾아 헤매고 그것을 분석하는 일에 매진한다.  정조가 노론벽파에게 독살됐는지 아닌지, 정사를 빗겨난 역사의 어떤 진실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다행히 정조는 독살설의 주인공 숙적 심환지와 무려 300여통에 달하는 편지들을 나눈 사이임을 드러내며, 역사가의 진실탐구에 도움을 줬다.  

200여년 전의 과거 역사도 `진실'을 찾기 위해 우린 고군분투한다.  하물며 100여 년도 되지 않은 현대사를 왜곡하는 현장들을 우린 요즘 간간히 지켜본다.   공영방송 KBS는 최근 모당 취재를 하면서 갓 서른을 넘긴 기자가 도청 취재를 했다는 의혹을 사더니,  최근 간도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의 친일파 백선엽을 6.25 영웅으로 미화하는 다큐를 내보냈다.   광복회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1985년 전두환 시절, 청와대 경호실장 지냈고,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1997년 징역 2년6개월이 확정돼 복역했던 하나회 출신 장군 안현태의 국립묘지안장을 보며, 국립묘지는 대체 어떤 분들이 가시는 곳인지 국민들은 분명 헷갈리지 않았을까?  

이 책에 부록처럼 실린 정조가 죽던 날의 풍경은 자못 시사하는 바가 많다.  성군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대로 성군으로 남는다는 것을 이 글이 보여준다.   살아생전 정조와 알현한 적이 많고, 벽파와 대립각을 세웠던 시파의 대표적 인물 심로숭이 정조가 죽던 날의 풍경을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 선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25년 사이에 큰 덕망과 지극히 인자하심이 백성들에게 깊이 스몄는데, 돌아가신 날 나라 안에서 울부짖고 통곡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졌다.  파주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주막집 노파와 시골 노인네가 눈물을 비오듯 쏟으면서 `하늘도 착하지 못하시지. 어째서 네 댓 해만 더 빌려주어 우리 세자빈이 궁궐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하시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는 말이 너무도 간절하여 정말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서 나도 자연스레 말 위에서 목을 놓아 울면서 `이것이 이른바 백성들의 떳떳한 양심이다'라고 말했다. " P.143 

옛 조선의 민초들이나 우리 시대의 서민들이나 성군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지 않을까?   민초들의 눈은 정직한 역사가의 기록 못지 않다.  역사는 왜곡하려 해서 왜곡 되는 것이 아니다.  후대의 눈은 정직하며 정확하다.  언젠가 진실은 반드시 왜곡된 사료의 바깥으로 뛰쳐 나오기 마련이다.   역사왜곡이 부질없는 이유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정조의 어찰이 그랬던 것처럼, 후대의 역사가들과 정직하고 사려깊은 민초들을 통해 선대 역사와 인물은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정조의 비밀 어찰들이 공식적인 사료들의 오류를 수정하며, 역사의 섬세한 결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자신과 가족의 희생을 각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광복회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공영방송 KBS는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는데 공이 혁혁한 친일파 백선엽 다큐를 방송하는데 주저치 않았다. 5.18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이 제대로 치유받지도 못했음에도, 전두환 쿠테타 세력의 충복[忠僕]였던 안현태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 오류와 모순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은 후대 역사가의 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떳떳한 양심의 소리가 먼저 우릴 괴롭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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