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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책을 읽다보면 수많은 저자, 혹은 작가와 만난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만남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음에 있다. 책들의 울창한 산책로에 비견될 만한 저 도서관의 서가를 거닐어본적이 있는가. 우연하게 뽑아든 책 한 권에서 전해지는 메세지에 감동하여, 순간 작가에 한없이 빠져든 적이 있었는가. 만약, 그러한 작가가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경우라면 그 울림과 설레임은 배가 된다. 동시대의 작가에겐 옛 고전이 주는 깊이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나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정직한 시선, 부당함에 대한 울분, 어리석음에 대한 질책, 전망 같은 것들에서 갈증과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쓰는 작가와 책을 읽는 독자 사이에 공통점이자 최대의 혜택이랄 수 있는 건 그들에게 `은퇴'가 없다는 것이다. 절필을 선언하지 않는 한, 모든 작가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 곁에 선 독자도 마찬가지다. 추종할만한 작가를 만나는 순간, 독자들도 그의 글에서 은퇴하지 않는다.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모름지기 작가는 죽는 날까지 세상을 감시하고,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동시대 작가의 생명력은 그곳에 있다. 그들의 충성스런 독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척 단순하다. 생명력을 이어온 날카로운 붓끝이 무디어지지 않는 것이며, 시류에 영합하여 타락의 지점으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등단 이후 50년 가까이 쉼없이 달려왔다. 나의 세대가 애써 찾아읽지 않는다면 개발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다룬 그의 명작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젊은 독자들은 그렇게 부지런하지가 않는 법이다. 꾸준하게 새작품을 써내지 않아서 잊혀진 과거의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하면, 황석영은 독자들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다. 문학은 본래 배고픔의 산물이고, 고난의 열매 같은 것이니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노회한 그가 더이상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하여도, 탓할 수 없다. 그는 더이상 배고프지 않고, 그가 파헤친 개발독재의 망령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열정으로 넘치는 작가다. 작년 이맘 때, 녹슬지 않는 필력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강남제국의 형성사를 그려낸 수작 <강남몽> 이후, 그는 다시 올 6월 생애 최초의 전작 장편 <낯익은 세상>을 들고 중국 리장에서 날아왔다.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중국 윈난성의 고원도시 리장에서 그는 이 작품을 구상하고 쓰기 시작하여, 제주도에서 집필을 마무리했다. 왜 그는 그 먼 이국의 낯선 도시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강남몽>에서 강남을 형성하고 사는 세력들의 추한 과거를 들추어내며,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꼬집은 작가는 이제 <낯익은 세상>을 통해, 현대인의 무분별한 소비적 경향과 거기서 발원하는 천박한 욕망의 부산물로 뒤덮인 쓰레기의 섬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1980년대, 서울시의 쓰레기 매립지로 쓰였던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작가는 넝마주이로 살아가는 딱부리 가족의 일상을 구체적인 서사를 통해 재현해 낸다. 서울시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곳, 쉽게 버림받은 물건들이 가득한 곳, 하지만 누추한 쓰레기를 헤집으며 딱부리 가족과 꽃섬의 주민들은 활기찬 생계를 이어간다. 작가는 가난하고 굴곡진 가족사를 딛고 당당히 생을 일궈가는 딱부리와 엄마의 삶을 그리며, 도시 빈민의 일상에서 강한 삶에의 의지와 구체적인 생활의 풍경을 표현해 냈다. 어디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딱부리와 어딘가 모자란 듯 하지만 순수한 동생 땜통의 유쾌한 에피소드는 충분히 성장소설의 행로로 나아갈 만 하다.
소설은 딱부리와 땜통의 시선으로 꽃섬 주민들의 누추한 삶과 구체적인 일상을 그려보인다. 다시, 소설은 쓰레기 매립장이 아닌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꽃섬의 과거를 들추어 내는 방편으로, 환상적인 서술 기법을 동원한다. 바로, 김서방네 가족이 도깨비로 등장해 현실의 인물들과 섞여 작품의 핵심적인 메세지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는 구체적인 대사와 문장들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이 작품에서 무엇을 그리고, 반성하고, 되돌아보려 했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지금의 세상, 그 어디에서도 낯익은 우리 시대, 평균치의 문명과 자본주의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낯익은 세상>, 황석영 p.207 김서방네 할아버지의 대사 中
이 소설은 자본주의적 소비행태, 그 시스템이 굴러가는 하나의 경향으로서 무절제한 낭비와 훼손을 문제삼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무한 공급과 소비를 통해 유지되는 체제다. 그 시스템 안에선 언제나 `과거'란 혁신되어야 할 불완전한 상태로 규정된다. 어제의 제품은 잊어라. 오늘 시장과 소비자는 새롭고 낯선 물건들을 탐한다. 그들의 욕망에 맞추기 위해선, 자원은 무차별 고갈되어야 하고, 소비는 촉진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이 폭주기관차를 멈추게 할 순 없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나 지속가능할까? 이 지구가 무한대의 욕망을 버텨낼 수 있을까?
소설의 끝자락에서 꽃섬은 불타오른다. 사랑스럽고 천진한 소년 땜통은 딱부리가 선물한 전자오락기 슈퍼 마리오를 찾아 불타는 집안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슈퍼 마리오는 자본이 선물한 진귀한 소비재였을 것이고,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순진한 아이는 죽음의 음산한 전조가 비추이는 꽃섬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모자란 여인으로 등장하는 빼빼엄마는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터전에서 나름의 의식을 집전한다. 혁신과 소비란 미명하에 버려진 우리들의 `과거'를 지켜내고 간직하려는 샤모니즘적 의례다. 빼빼엄마가 당집의 마루판자에 고이 간직하는 물건들을 보라. 세련된 디자인이나 문명이 추구하는 극도의 편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옛시절 우리와 함께 했던 단순하고 가장 소박한 것들이다. 그저 하나씩 호명하며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향수와 애틋함이 묻어나는 물건들이라니...!
" 나무결이 갈라지고 터진 절굿공이. 끝이 모두 닳아 벌어진 수숫대 빗자루, 뒤축이 떨어져나간 남녀 고무신 한 짝씩,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 쪼개진 물소뿔 마고자 단추, 부러진 곰방대, 이 빠진 참빗, 실밥 터진 골무,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참나무 도끼자루, 옻칠 벗겨진 실패,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귀퉁이 떨어진 밥주걱, 앙증맞은 나무 팽이" 이러한 물건들은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한 사람의 생애와 함께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소비욕망이 과도한 사회에서 그것은 시대에 뒤쳐진 폐기물, 쓰레기로 전락한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 버리고 잊어버린 우리 자신의 분신 같은 것들 아닌가.
"이런 못쓰는 물건들은 왜 소중하게 감춰두는 거예요?
서루간에 정들어서 그러지.
그럼 저어기 쓰레기장 물건들은요?
빼빼엄마는 검댕이 잔뜩 묻은 더러운 얼굴을 돌리고 야멸치게 말했다.
저것들은 사람들이 정을 준 게 아니잖아! " <낯익은 세상>, 황석영 p.225 딱부리와 빼빼엄마의 대화 中
황석영의 붓끝은 죽지 않았다. 그의 필력은 보다 겸손해지고, 무디어진 것처럼 보인다. 딱부리와 땜통은 이 소설에서 투사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빈민으로서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대신, 황석영은 두 소년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꽃섬의 쓰레기장을 통해, 바로 현대 문명과 그 소비를 비껴갈 수 없는 모든 자본주의적 행태에 낯익은 인간들을 겨냥했다. 너무 낯익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이 그들에겐 가득하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는 오만으로 가득찬 인간들이 그 낯익은 세계에 움집해 있다.
이 낯익은 세계에 거주하는 평균치의 인간들의 특성은 단순하다. 사려깊지 않다. 자본주의 소비 행태를 닮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돈이 된다면 자연은 언제든 훼손 가능하다. 그것이 유휴지로 남는다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개발되어 이득을 남겨야 그 낯익은 세상에선 정의다. 그러니 5천년동안 아무 일없이 흘렀던 그 평화로운 4대강이 파헤쳐져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는다. 경제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소득이 좀더 늘어날 수만 있다면, 그래 더 풍족한 소비를 할 수만 있다면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양심이니, 장식품 같은 언어들은 모두 내다 팔 수 있도 있다, 고 사유한다.
이러한 세상의 그 `낯섬'이 아니라 역설적인 `낯익음'에 대하여 작가는 이 작품속에서 깊이 고민한다. 이것이 먼 이국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중국의 리장에서 이 작품을 구상하였던 이유다.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오류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이 소설에서 우린 작가 황석영의 존재감에 다시 눈뜨게 된다. 시류에 쉽쓸리지 않는 작가의 예리한 지성과 감시자로서의 눈빛이 고맙다. 한국 현대사의 개발 독재를 붓끝으로 비판해 온 이력으로, 그는 다시 이 시대 소비와 욕망에 익숙한 자본주의의 파국을 경고하고 나섰던 것이다.
"망할 것들아, 여기 니들만 사는 줄 알아? 니덜 사람 새끼 다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루야" <낯익은 세상>, 황석영 p.218 빼빼엄마의 독백 中
파국의 전조음이 들려오는 세상, 우리는 벼랑끝 부러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 절박한 순간에도 나뭇가지에 묻은 몇 조금의 꿀을 핥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인간이라면 그 찰나의 쾌락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사유와 행동에 나서리라.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낯익은 세상은 그저 옳은 것인가? 작가는 무심한 세상과 독자들을 향해 현대 문명이 쌓아올린 쓰레기 더미 한 가운데서, 그 쾌락과 무사유와 허례와 낭비와 소비의 꼭지점에서 하나의 경고장을 써 보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우린 보다 영민해 져야 한다. 낯익은 것들이 잘못되었다면 과감히 불살라야 하리라. 자본주의의 폐기물들이, 천방지축의 욕망들로 가득한 꽃섬이 소설의 끝자락에서 불타는 것은 그래서 차라리 희망적이다. 이 무심하게 낯익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건, MBA를 갖고 있는 경제박사도, 뉴타운을 공약하는 정치인도, 4대강을 누빌 첨단의 로봇 물고기도 아니다. 빼빼엄마처럼 평균치의 지능조차 갖지 못했지만, 자연앞에 겸허할 줄 알고 자연과 공존하려 애쓰는 그 순박한 `샤먼'들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희망이요, 빛이 아닐 것인가?

201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