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 철학의 진로를 바꾼 17세기 두 천재의 위험한 만남
매튜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사에서 무척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그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17세기 대륙 합리론(합리주의 철학)을 이끈 삼총사로 통했다. 합리주의는 `비합리적 ·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理性的) ·논리적 ·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태도'를 말하며, 경험주의 철학과 대립하여 모든 인식이 수학 법칙처럼 논증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섭리를 세뇌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분석하여 깨달으려는 시도, 그것이 합리주의다. 스피노자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후손이었다. 그도 어렸을 적엔 유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사회에서 영특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는 유대인에게 무척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던 유대인들이었기에 처신에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스피노자는 1656년 7월 27일 유대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파문의 명목은 스피노자가 저주받아 마땅한 생각을 퍼뜨린다는 소문 때문이다. `모세 5경은 인간이 쓴 것이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고 신은 물질 덩어리'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파문된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리에 반기를 든 불경죄를 저질렀고 둘째, 네덜란드의 주류인 기독교인의 심사를 건드릴 가능성을 유대교회에서 사전에 차단하려 했기 때문이다. 파문절차를 진행하기 전, 한 랍비가 그를 회유한다. 교회의 신앙에 대해 형식적이라도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5백 달러 정도의 연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청년 스피노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어느 다락방에 숨어, 낮엔 렌즈를 연마해 생계를 유지하고 밤엔 오랜시간 자신의 철학을 주저 <에티카(윤리학)>에 담아내는 일에 일생을 건다.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었다. 동시대를 반분한 미적분학의 발견자이자 모나드(monad)론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다. 그는 스피노자보다 10살 정도 어렸지만 다방면에 박식한 천재였다. 그는 제후들과 왕의 법률 담당 추밀고문관으로, 외교관으로, 공작의 궁정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연봉 계약을 연이어 체결하며, 부와 명예로 가득한 일생을 보냈다. 지질학, 천문학, 역사학, 철학 등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다방면을 연구, 업적을 남겼다. 수학 분야에 남긴 미적분학 창안과 최초 계산기의 구상, 물리학에서는 훗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예견하기까지 한다. 스피노자의 검소하고 명성에 초탈한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평생 명성과 부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지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창안한 모나드론과 예정조화설을 기반으로한 기독교 철학을 가다듬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의 중심인 모나드론의 핵심은 간명하다. 인간 개체 모두가 신으로부터 부여된 작은 신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우주며, `모사된 신이자 원형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흔히 `창이 없는 모나드'라고 불리우는 그것은 신을 통한 예정 조화를 통해 관계짓기를 시작한다. 긍정적인 선과 세계에 난립한 악의 존재 자체도 신이 미리 계획해 둔(예정조화), 하나의 질서이며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사물의 내재적인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란 말로 정리한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 신은 그것이 촉발한 것 `안에'
존재하며, 그것과 `함께' 한다. 시계공은 시계의 외재적(타동적)원인이지 내재적 원인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을 실체라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실체는 그 본 뜻이 어떻든 흔히 `자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속에, 인간속에, 물질속에, 함께 거주하는 것이지 계시와 창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의 주장은 당시 이단적이고 불경스러웠다.
1676년 11월 18일, 네덜란드 헤이그 파빌륜스흐라흐트의 작은 이층 다락방엔 두 남자가 있었다. 비록 명성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따돌림을 한몸으로 받아온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신의 존재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을 구하러 스피노자를 찾아 먼 여행길 끝에 그 초라한 다락방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며칠에 걸쳐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신을 죽이려는 자와 신을 살리려는 자의 대결은 뭇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당대 최고의 지성을 자부했던 그들이었기에, 나름 처절했을 논쟁은 `신들린 자들의 싸움'으로 뒷날 불리울만 했다.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원제: The Courtier and the Heretic>의 저자 메튜 스튜어트는 바로 여기에 착안해 한 편의 소설같은 철학서를 집필했다. 저자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프린스턴과 옥스포드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여러 회사를 상대로 경영컨설턴트로 일했다. 학문과 오랜 시간 담쌓고 지내던 철학도가 한 권의 철학서를 집필해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본래 소설이나 시나리오로 계획되었던 것을 교양 철학서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게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다. 저자는 동시대의 이 거목 철학자들이 은밀히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도 평생 한번의 비밀회동이었으니 궁금증을 불러온다. 물론 평소 스피노자를 못마땅해 한 라이프니츠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책은 그 중심되는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삶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해설하며 비평한다. 그들의 철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과 개인적 삶을 양념처럼 바르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저자의 재능앞에 17세기의 주류 철학이 이 책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제멋대로인 상상력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게 된 우리 인간은 시시때때로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면 무엇이든 신에게 귀속시키곤 한다. 그러나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그러한 속성들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코끼리나 당나귀를 완전하게 만드는 속성들을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다' 라고 스피노자는 블레이엔뷔르흐를 조롱했다. 스피노자는 덧붙여 말한다. `만일 삼각형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삼각형은 신이 눈에 띄게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p.300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두 철학자가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자료도 남아있질 않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자신의 논지를 꼿꼿히 세우고 서로를 논박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도덕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며 스피노자를 옥죄었을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행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라며 내세에 대한 보상을 부정했을 것이다. 이들이 신의 존재를 놓고 세기의 대결을 벌인 것은 단순히 신앙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평생 교회를 거의 출석하지 않은 이름뿐인 신자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스피노자를 향해 신의 존재 증명을 모나드론과 예정조화설로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정치원리로서 기독교주의를 깔고 있다. 성서를 부정하고, 기존의 오랜 종교를 거부하는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파문을 당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층 하숙집의 좁은 방안에서 평생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오해다. 그를 지지하는 부유한 상인과 친구들은 서로 그에게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검소한 스피노자는 이를 매번 거부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정(神政)국가에 위협이 될만한 것이다. 무엇보다 스피노자는 신을 `변덕스러운 인격으로 보지 않고 우주의 영속적인 법칙'으로 정의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정국가안에서 평화와 질서를 이상으로 추구했다면, 스피노자는 종교의 바탕이 인간의 무지와 불안의 소산으로 해석한다. 즉, 종교지도자들이 대중의 불안과 무지를 기반으로 군림한다고 라이프니츠를 직격했던 것이다.
저자 매튜 스튜어트는 이 책에서 결코 공정하지 않다. 눈에 띄게 그는 스피노자주의자인척 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모든 근대 철학자에 대해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스피노자라는 인물과 그의 철학이 후대에 남긴 영향력의 정도를 표현한다. 그의 철학은 모든 것을 회의하고, 모든 것을 내 지성으로 검토하지 않을 때, 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스피노자는 핍박받던 소수의 유대인이었지만, 그 비좁은 유대인 그룹 안에서도 스스로 핍박받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자신이 탐구한 철학을 세상 모든 편리함, 명예, 부귀와 바꾼 것이다. 그가 평생 소망한 것은 자유였고, 평안한 마음 상태였다. 죽기 4년 전 그의 명성은 자자했고 라인 팔라틴 선제후 칼 루드비히는 그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직을 제안하지만, 스피노자는 평안 하기를 원한다며, 거절한다. 그가 죽은 후 남긴 유산은 생활 잡기 정도라 모두 팔아도 장례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검소한 삶과 인품은 그를 신에 대한 영원한 지적 사랑을 실천했던 철학자로 기억하게 한다.
그의 주저인 <에티카>는 기하학 책을 연상할 정도로 정리와 주석, 증명이 가득하다. 그는 이 책을 일평생 반복해 수정하며, 완성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이해하려는 독자도 그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할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생전 그의 주저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일찌기 지구상에 존재했던 무신론자 중에서 가장 불경스러운 무신론자'라 칭했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라이프니츠는 평생 뛰어난 업적과 명성, 부를 쌓았고 스피노자보다 무려 40년을 더 살았지만 그의 말년은 그리 영예롭지 못했다. 1716년 70세로 생을 마감한 라이프니츠의 장례식엔 참석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묘지에 쓸쓸히 매장 되었다.
이 책은 독자를 17세기의 지적 풍토와 사상의 대결장으로 안내한다. 중세를 넘고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숱한 공격을 받아왔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기성의 종교와 사상, 정치를 앞에 두고 두뇌 싸움을 벌인다. 그들의 철학에 최종적인 승자는 없다. 우리 시대, 여전히 기독교가 유럽에서 쇠퇴하긴 했지만 아시아와 미국을 중심으로 번창하고, 열정적인 무론자들은 우리 주위에 잡풀처럼 흔하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신의 `운명'을 건 논리대결은 이 책의 흥미를 돋운다. 책 한 권으로 그들이 일평생 갈고 닦은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자만이며, 욕심일 뿐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공부하는 기회와 동기를 얻는데서 만족해야 한다.
신이 여전히 인간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무신론으로 의심살만한 철학을 주장했던 스피노자는 대담하고 심오했다. 그의 렌즈 연마의 일상은 단촐해 보인다. 한 저술가는 스피노자를 역설적이게도 `최후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어떤 독자는 라이프니츠의 명예와 부에 대한 욕망에서 비속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류사회에 공헌한 연구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10년 뒤 미적분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아이작 뉴턴과 훗날 저작권 다툼을 벌이긴 했지만, 라이프니츠는 미적분법의 최초 창안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저자의 지나친 스피노자 편들기는 눈에 거슬리는 점이지만, 스피노자를 칭송한 것은 저자뿐만은 아니었다. 1882년 스피노자 서거 200주년 기념식 때, 헤이그에 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자금을 모집한 적이 있다. 문명 세계의 곳곳에서 기부금이 쇄도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기념사를 끝맺었다.
"이 온화한 사상가의 동상에 비난을 퍼부으며 지나가는 자에게는 재앙이 있으라. 그러한 자들은 모든 비속한 자들이 벌을 받는 원인인 바로 그 비속함 때문에, 그리고 신성한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분은 화강암 좌대 위에서 그가 찾아 낸 행복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을 지나가는 교양 있는 나그네는 마음속으로 말하리라. `여기서 신의 가장 참된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

201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