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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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운명이 될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변화의 촉매가 될 수 있다.  문학 작품은 정적인 감동을 안기지만, 과감히 행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알레프>는 지금 내게 여행을 강권한다.  많이 읽지 못해서 항상 내면의 허기짐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내게, 마치 그것이 앎의 유일한 통로인것 마냥 착각하고 살던 내게, 한 편의 소설은 일관된 사유를 쪼개는 벼락 그 자체다.  일상의 여행이란 이제 가족 야유회 정도로 가치 전락한 시기에, "나는 사막과 도시와 산과 길 위에 있을 때만 내 영혼과 대화할 수 있다(p.100)"고 말하는 작가의 속삭임은 이 안이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생을 통렬히 반대한다.  그래, 떠나야 한다.  

러시아 국경안을 통과하는 거리만 9288Km 라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아니어도 좋다.  너저분한 일상을 정리하고 떠나는 파격적인 여행이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우리 삶이 본래 여행이었고, 여행이야말로 정체된 삶을 바꿀 수 있는 지혜를 건네주는 것임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 간단한 사실을 알려주는 파울로 코옐료의 심오한 가르침이다.  미리 발표된 자서전 같은 문체로 그는 생의 두번째로 계획한 영혼의 순례길을 한 편의 소설로 뒤바꿔 놓았다.  거기서, 그는 사실과 허구를 섞는 신비로운 작법으로 독자에게 진중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나'의 스승 J는 나에게 여행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 성공한 작가로, 세상 모두가 그의 작품을 읽고 그를 알아보고 그를 사랑하는 순간에도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나는 목마르다. 이 권태는 정체감이며, 이 지지부진함은 삶의 모든 것에 무의미함을 채색한다. 이미 충분히 떠돌아 다녔고 이제 여행은 지루한 일상에 지니지 않다는 항변에도 J는 그 반대로 나를 설득한다. " 아니, 충분하지 않아, 충분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걸세"(p.27)  스승은 지난 성공에도 여전히 막막한 삶에 대한 해답이 여행 가운데 있음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유럽 북페어로 많은 독자와 출판사 관계자들과 만나는 일정을 소화하다 러시아 관계자들과 만나 오래도록 간직한 꿈을 발설한다.   그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르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출발한 열차는 6박 7일간 달려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까지 총 60 여개의 역에서 정차한다. 유럽 대륙과 중국을 거쳐 극동에 이르는 이 기나긴 여행은 바이칼 호를 넘고 이르쿠츠크, 예카테린부르크 등 러시아의 주요 도시를 거치는 세상에서 가장 긴 철도 노선이며, 여정이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이 여행에 예순에 다다른 작가인 나는 지금 그걸 실행하려 한다.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p.99) 

여행엔 반드시 사건과 사람이 엮인다.  여행중에 어떤 인물과 사건에도 엮이지 않는다면 어떤 가르침도 얻을 수 없다.  나는 이 여정에서 한 명의 여인 힐랄을 만난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나의 독자다.  어린 시절 그는 평소 친절하고 사려깊은 이웃집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일화를 드러내놓는다.  상처는 오래도록 그를 파괴해왔다. 힐랄은 나의 독자가 되어서야, 나를 통해 치유받은 듯 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스물 한 살 처녀가 예순이 된 작가의 작품을 사랑할 수 있지만, 작가 자신을 사랑할 순 없다.  이 거부감은 시베리아 횡당 열차를 타고 달리는 여정 동안 내가 감당할 숙제로 등장한다. 

소설은 우연히 만난 독자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알레프의 순간이 온다.  전생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 기가 흐르는 지점, 모든 것이 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지점이다.  내게 집착하는 힐랄과 나는 이미 중세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중세 이단심문장에서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대에 오른다. 나는 그 재판을 보조하는 도미니크회 수도사다.  하지만, 나와 그녀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오래도록 알고 지냈다.  성직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평생을 함께 했을 것이다.   엄격한 이단재판관에게 단 한 마디만 해준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다.  나는 그러지 못하고, 그녀를 외면한다.  종교적 엄숙함은 17살 청초한 소녀를 마녀로 믿게 한다.  나는 힐랄에게 죄를 지었다.  알레프,를 통해 나는 전생의 죄를 확인한다.  

하지만, 생의 본질은 변화다.  알레프의 지점을 통해 전생의 인연을 확인했다고 현존의 인연을 부정할 수 없다.  나에게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그녀는 화가이며,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객실안에 존재하는 나는 수천킬로 떨어진 아내의 존재를 매순간 확인한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이며, 힐랄이 되어선 안 된다.  내가 이 여행에서 바라는 것은 힐랄과 함께 정체되는 삶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힐랄은 어린 시절의 성추행이란 범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알레프의 순간을 통해, 힐랄에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밤낮으로 달려가는 이 열차안에서, 이 여정안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 삶의 본질이 생의 윤회와 같은 여정과 여행임을 알면, 과거를 잊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윤회에 성공하는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나와 힐랄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생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우리를 해롭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도 그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마다 당신에게 그토록 상처 주었던 것이 당신의 재능으로 바뀌었음을 기억해요.(p.349) 

정착지를 떠나 인간이 매순간 순례길을 계획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 필연이다.  작가는 인류와 코스모스의 본질이 변화와 순례에 있다고 믿는다.  정착하는 순간, 여행을 기피하는 시간들이 오래될수록 사람은 생이 가진 본연의 흐름을 망각한다.  삶이 매순간 보물과 기적으로 가득하다는 것, 그 보물과 기적을 건지는 방법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무엇을 보여주려 했든 이 작품은 결국 여행이란 주제로 가닿는다. 파울로 코엘료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다.  전세계 73개국 언어로 작품이 번역돼 1억부가 넘게 팔렸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브라질 태생으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그는 여행하는 걸 즐기고 갈망한다.  다양한 생의 이력을 거쳐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1986년, 잘 나가던 음반회사의 중역이란 자리를 내놓고 떠난 산티아고 여행 덕분이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작 <순례자>를 내놓는다. 이십여년이 지난 2006년 다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그 여행의 기록이 바로 소설 <알레프>로 탄생했다.  여행을 통해 재미를 봤다고 해야하나?  아니 성공을 이뤘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우리 삶이 불행한 것은 여행할 줄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를 되묻는 작품이다.  길 위에서 삶을 배웠고,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여행에서 얻은 것들이라 단언하는 작가의 말은 과장된 표현이 결코 아니다.  소설과 경험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레프>를 읽다보면 혼란스러울 때가 온다. 북페어 여정과 시베리아 철도 여행을 뒤섞고, 여행길에서 만난 한 여인에 대한 삽화를 끼워넣는 듯 보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작가는 여행을 통해 넓혀진 생의 전망을 독자에게 전파한다.  그리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고 질타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엔 공감하지만, 작가의 안이한 인물설정과 전달방식은 문제가 있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흐릿한 것은 사실감을 더하지만, 독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작가의 존재가 소설속에서 맨얼굴로 등장하는 형식은 독자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다.  작품의 설정이긴 하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나와 스물 한 살 처자와의 로맨스는 그렇게 살갑고 공감할만한 요소는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단조로움은 자칫 그 여행의 의미마저 단순화 시키는 위험성을 드러낸다.  실제 여행을 소설의 재료로 가져와 쓰다보니,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플롯과 서사에 달라붙지 못했다.  

이런 약점에도,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파울로 코엘료를 처음 만났고 그가 다루는 인생의 깊이와 깨달음의 언어들에 심취했다.  마침, 나는 이 소설을 기차안에서 대부분 읽었다.  기차 출퇴근, 그리고 1박 2일의 짧은 여행길에 가져가 집이 아닌 길 위에서 그의 문장들과 만났다.  오랜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난 여행과 코엘료의 문장들은 여행에 게을렀던 나의 삶의 위험성을 질책했다.  전망의 부재, 과거에의 몰입, 안정만을 추구하는 삶, 매일 아침 집을 나서지만 그것은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는 출퇴근 길이었을 뿐.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나는 허기졌고 <알레프>의 `나'처럼 과거와 미래에만 매달린채, 현재를 누리지 못했다.  

여행은 그 정체된 나를 파괴하는 시간이다.  과거, 미래,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길 위에서 현재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여정이 끝나는 시점에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고, 가슴깊은 울림을 전해오는 한 장과 만났다.  생이 여정이라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여정 가운데 만나는 모든 것을 피하지 마라. 받은 잔은 마셔야 하고, 주어진 삶은 걸어가야 한다.  생이 주는 모든 것은 고통과 불행일지라도 또다른 축복일지니 용기있게 받아들이자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작품은 삶이 본래 여행이었음을 가르쳐준 생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독자의 삶에 변화의 촉매제가 될만한 소설이다.  결국 우린 `여행'하고 읽어야 한다.  그 둘은 하나다.  

"신께서 계획하신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건 실수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겁니다. 무언가를 정말로 경험하지 않고도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진정으로 당신의 일부가 되지는 못할 겁니다."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 p.33


20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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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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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다"란 말이 있다.  20세기 영국의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의 말이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복잡 다단한 일인가?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일들 투성이가 바로 인생일 수 있다.  그렇게 억압받는 개인은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다. 하루  한번 하늘조차 바라볼 여유도 없다.  하지만, 그가 발딛고 서 있는 지구는 우주적 관점에선 하찮은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별의 우주적 부피는 티끌보다도 더 적을 수 있다.  인생이 비극으로 느껴질 때,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을까?  인생에 유머와 같은 여유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삶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사람은 행복한 삶을 원한다.  우주는 너무 멀리 있고 그래서 쉽게 우리의 관심대상에서 멀어진다. 먼 우주의 어느행성에는 또다른 지능을 가진 존재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코스모스의 광대함은 우리의 비속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지만,  인간은 어찌되었든 지구라는 연약한 별에 발딛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적 존재다.  사람들이 행복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이 실존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가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어떤이는 삶을 비극으로 혹은 해피엔딩으로 연출한다.  어떻게 우린 행복한 드라마의 작가나 연출가로 인생을 구성할 수 있을까?   

`하버드 대학고 인생성장보고서' 라는 부제가 붙은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은 바로 가까이서 바라본 개인의 삶을 평생 연구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로 유례가 없는 세계 최장기 성인발달연구를 세가지 집단을 통해 진행했다.  연구의 목적은 `인간의 행복'과 `성공적인 나이듬'에 관해서였다.  고학력과 부유층(하버드 졸업생), 평범한 소시민(이너시티), 아이큐 140 이상의 천재아(터먼 여성)은 193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연구원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삶을 설문으로 작성하고, 건강상태를 체크받았다. 이 연구의 최종적 결과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연구대상들이 모두 사망해야 궁극적으로 연구가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결과물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연구 집단이 이미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기다릴 정도로 나이들었기 때문이다. 

선정된 연구 대상이 비교적 소수집단이긴 하지만,  인생 전체를 추적관찰하는 연구는 지금껏 없었다.  아동 발달은 그 기간이 짧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긴 했지만, 성인의 삶을 종단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은 인생 전체를 조망해야 하는 난관과 마주해야 한다.  쉽게 성인발달연구를 진척시킬 수 없는 이유다.  아무튼, 조지 베일런트는 하버드의 선배 연구자로부터 이 연구의 바톤을 이어받아 지속적인 기업의 후원속에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총 3개집단, 814명의 연구대상을 10대 시절부터 평균 60여년 동안 추척관찰했고, 인간이 성장하고 늙어가면서 성공적인 삶에 안착하는 이유와 실패하는 삶의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했다.  결국 이 연구가 얻어내고자 한 것은 행복한 삶에 이르는 길이다. 

다양한 집단을 통해 연구자들이 실험한 것은 그들의 유년, 성장의 과정이 훗날 노년에 영향을 미치는가였다. 혹은 지능지수가 행복한 나이듬에 깊이 연관돼 있는가,  학력이 행복에 영향을 주는가?  이 책은 개인들의 인생을 몇 가지 큰 주제로 묶어내면서 행복에 이르는 이론을 도출해 내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자면, `사람은 안밖으로 어떻게 성숙하는가'란 장에선 사회적 지평의 확장과 발달과업의 완수, 욕망과 억압의 균형잡기: 방어기제의 성숙' 같은 것을 총괄적으로 개인의 삶에서 분석,유추하고, 개인의 구체적 삶을 세밀한 인터뷰로 엮는 것이다. 그 인터뷰 속에서 연구대상은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풀이한다.  자신의 삶이 행복했는가?  행복했다면 무엇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연구원은 이들이 평생 제출한 설문지와 나이대로 인터뷰한 답변을 기초로, 한 인간의 인생을 탐구한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바라보고 정의하는 것은 제각각이다. 평균적으로 학력이 높은 사람들(하버드)이 사회적 지위가 물론 높았다. 특이한 것은 소시민 집단(이너시티)보다 그들의 수명이 더 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강도와 연관돼 있는 듯 하다.  천재아(터먼여성)은 이너시티와 수명에 별 차이가 없었고, 사회적 지위와도 크게 연관돼 있지 않다.  유년의 상처와 고난이 훗날 성년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는 특이하다. 일정한 나이에까지 영향을 주다가, 성년에 이르러서는 유년의 고통이 필연적인 성인발달을 결정하진 않는다.  50대까지의 신체적인 건강상태가 노년의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진 않는다. 50살의 콜레스트롤 지수가 말년의 건강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노년의 건강은 오히려 총괄적인 정신상태에 더 의지한다, 고 이 책은 분석한다.  

"젤다 마우스의 삶에서 진짜 비극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사람을 거의 사랑하지 않는 데 있다."(p.406)    

"내가 겪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세상에는 나보다 더 큰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본질적으로 자기 안에 있어요"(p.252)
"이너시티(소시민) 출신 연구 대상자들의 삶을 지켜보면서도 몇 번이고 절실하게 느끼는 바지만, 인간의 말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사랑의 빈곤이다"(p.268)
"만족스러운 노년, 성숙한 방어기제, 생산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이었다"(p.353)
"인생을 통해 깨달은 지혜가 있다면 무엇인지 묻자 `매순간 감사하면서 충실하게 살아야 해요. 현재는 안중에도 없이 과거에만 빠져 있거나 미래만 기다린다면, 삶이 주는 놀라운 기적들을 놓치고 말지요' 라고 말했다. (p.400) 

노년에 이르러 이러한 책을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가 아직 젊다면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고, 현재에 갖혀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고자 한다면 먼저 살아본 사람들의 경험에서 삶을 배워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는 최선의 길은 먼저 실패한 사람들과 성공한 사람들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  이 책이 주는 성공적이자 행복한 인생의 비법은 크게 색다르지 않다.  행복한 나이듬을 결정하는 것은 재력이나 학력, 집안 배경이나 성장환경, 뛰어난 아이큐 등과 같은 선천적인 조건들이 아니었다.  아이큐가 뛰어난 여성들은 언제나 지혜롭지 않았고,  하버드를 나온 재력가의 자손은 훗날 알콜중독에 빠져 실패한 인생에 도달하기도 한다.  오히려 소시민 집단(이너시티) 가운데, 인생에서 언제나 배우고 감사하는 태도를 견지한 사람들이 행복한 노년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비율은 비슷비슷해서, 어떤 조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님을 이 연구는 드러낸다.  

인생을 불행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물리적 요소를 이 책안에서 두가지 발견했다.  첫째, 알콜중독이다.  알콜중독은 모든 인간을 예외없이 파괴했다.  그가 어떤 조건을 갖든, 그가 어떤 정신 상태로 살아가려 하든 말이다. 알콜중독자 대부분의 말년이 불행했고, 빨리 죽었다.  둘째, 실패한 결혼생활이다.  모든 점에서 낙오한 사람들이라도 늦게라도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면 재기할 수 있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곧 행복한 인생과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벤자민 플랭클린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검소하고 부지런한 아내를 둔 것이 인생의 성공조건이었다며 영국속담을 인용한다.  " 성공하려면 아내를 잘 두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린 거창한 것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데는 정답이 없다. 왕도도 없다.  왜 그러한가?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오직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평생 인생을 배우며 살아라, 는 말에 담긴 의미가 그것이다.  우린 인생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 배우지도 않으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있을까?  행복은 거저오는 행운 같은게 아니다.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그 순간부터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끊임없이 행복해지려고 배우고 노력하며 살지 않는다면, 외부적 조건이 좋다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조지 베일런트의 성인발달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행복이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삶에 호기심과 열정을 갖고 사람들과 어울려 존중과 배려의 삶을 살아간다면,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20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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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드™ 2011-10-15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의 조건. 책제목때문이라도 많이관심을 가질듯싶네요.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조은서평 감사합니다. 책의선택도 좋습니다.^^

개츠비 2011-10-22 09:27   좋아요 0 | URL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읽어보시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것인지 어떤 힌트를 얻으실거라 생각해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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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독서일기를 쓴 것이 몇 해 째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는 것은 이제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가끔 나의 블로그 명이 서평이 아닌 `일기'여야 하는지, 스스로 불만을 제기해본 적이 있다.   서평이라고 하면 어떤 서적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과 평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내가 맘편히 독서일기로 지칭한 것은 나의 글이 아직 무언가를 비평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책과 마주하고서도, 그 책의 지은이에 주눅들지 않고, 책의 주장에 반격할만한 내공이 한참은 부족한 것이다.  반면, 일기라고 하면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형식의 자유로움 때문에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듯' 어떤 책이나 작가에 대해선 날카로운 비평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네이밍'의 사유는 장정일 때문이다.  알다시피 장정일은 많은 시와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 한 편 때문에 구속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 작가다.  그런 치열한 글쓰기를 해 온 그지만,  1993년부터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책으로 펴내고 있다.  시간이 지나 그의 독서일기는 7 권째를 마지막으로 제목을 바꿨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는 이름을 바꾼 독서일기의 두번째 시리즈다.   

그의 소설 한 편 읽어보지 못한 게으른 독자지만, 나는 그가 펴낸 첫번째 독서일기를 잊지 못한다.  1993년 1월부터 1994년 10월까지로 부제가 붙은 그 책에는 날짜와 그날의 일정과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이 담겨 있다.  일기 형식을 독후감과 혼합한 것이다.  어떤 날의 일기는 책을 빌리고, 레코드를 구입하고, 책정리를 한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 파격적인 독후감은 그 이후로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장정일이 독서일기를 시작한 그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나또한 그 형식을 좇아 인터넷에 독서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권 첫 장에는 아주 짧은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유명한 서문은 독서일기를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의욕과 동기를 불러올만 했다.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명쾌하게 `쾌락' 때문이라고 답변한 것.  작가로서 행복한 저자되기만큼 갈망하는 것이 어떤 책을 정성들여 읽은 후, 그 들뜸으로 나름의 후기를 적는 `행복한 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아 몸 가운데 눈을 가장 소중히 했다는 작가,  그의 쾌락 독서론은 2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바뀌었을까?  

"무릇 책을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다."  서문,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온다,  p.11 

시간이 흐르고 군입대를 준비하며 독서로 소일하던 청년은 이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반면,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을 소망하던 작가는 문예이론을 가르치는 초빙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7권째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던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8번째부터 이름을 바꾼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서평을 더 이상 `일기'안에 담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어떤 무게와 전문성을 갖고, 세인의 이목을 받는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그는 좀더 격식을 필요로 했을까?  

일기라는 형식을 버림으로써, 이 책은 전문 서평으로서 날개를 달았다. 작가의 일상을 훔쳐보던 독자들의 한가지 재미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책에 대한 장정일의 끊임없는 욕망과 서평자의 균형잡히고 날카로운 필력이다. 한 번의 필화사건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 있는 권력에 대고 쓴 소리를 할 줄 아는 작가다.  문단의 비중있는 작가들의 작품도 그의 비평적 균형감각의 예외가 될 수 없다.  권력과 권위 모두에 주눅들지 않는 서평자의 담담한 나레이션, 서평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일상이라는 흥미요소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의 서평은 흥미있다.  비평의 칼날을 벼리고 책과 저자와 해설자를 나름의 방식으로 요리하기 때문이다.  그의 서평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책과 저자에 맞서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비중있는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중량감 때문에 쉽게 비평하기 어렵다. 일단, 독자는 배우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글 뒤편에 실리는 일종의 주례사 비평들은 대개 칭찬 일색이다. 이중적인 견제를 받는 독자가 어떻게 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안을 갖겠는가?  

그에 비하면 장정일이 책을 다하는 자세는 탈권위적이며, 자유분방하다.

"이 책을 땅바닥에 패대기치지 못한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p.372)
"아해(해설자)는 <심청>을 가리켜 `우리 문학사 전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부하고도 무시무시한 현존을 포착한 소설'이란다. `빨기' 대장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빨아줄 수 있죠?  이제 해설자는 자신이 쓴 <심청>의 찌라시를 꼭 자식들에게 읽혀야 할 것인데, 그 자식들이 아둔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이, 빨기대장, 비평이 뭐야?" (p.387)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의 무능력자로 판명될 공산이 큰 이명박의 연설 원고는, 지금 누가 쓰고 있는걸까?  모두 이바카체 같이 허다한 책을 읽고, 글을 갈고 닦는 자들임에 분명하다."(p.249)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에 굴복하는 것은 다르다. 책읽기를 통해 장정일은 쾌락에서 현실로 돌아왔다고 썼다.  그렇다면 책읽기의 궁극적 목적은 현실의 나를 찾는게 아닐까?   아니 현실의 나를 단련하는 것이다.  그 팽팽한 대결의 과정에서 비평은 탄생한다.  독서일기의 후신격인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은 분명하다.  일기가 비평이란 새옷을 입고 당당히 책과 맞서는 일이다.   그래서 장정일은 비평의 핵심을 객관, 공감, 비판 사이의 균형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균형을 갖추지 못한 서평은 제 정신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가끔은 책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책읽기를 돌아봐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반성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관행대로 가기 마련이다. 책읽기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만나는 한 권의 책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저자며,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장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르치려 한다.  당신이 줏대없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어쩌면 책을 읽을수록 바보가 될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는 책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서평 책이다.  이 책을 단순히 한 작가의 독서편력에 대한 궁금증으로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책읽기는 몹시도 주관적인 선택(취향)의 과정을 거친다.  그 선택에 관여할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표지 사진이 독특하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책들이 집안 곳곳에 탑모양으로 쌓여 있다.  열려진 문 사이로 무언가를 열중하며 읽는 장정일이 보인다. 시원스레 깍은 장정일의 까까머리가 빛난다. 내가 이십대 일 때도, 그는 이런 자세로 책을 읽었다.  작가의 나이 이제 지천명에 다다랐다.  그 시절, 정정일은 나의 책읽기의 길잡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처럼 많이 읽고, 그처럼 잘 쓰고, 그처럼 책읽는 삶을 동경하게 했다.  여전히 그는 변치 않고 책을 모으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가 책을 요리하는 솜씨가 부럽다.  장정일보다 많이 읽진 못했지만 나는 젊다. 더 많이 읽고 쓸 시간이 있다.  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여전히 장정일은 독자에겐 책읽는 사람의 미래다. 


20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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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속고 있는 28가지 재테크의 비밀 - 현 자산관리사가 폭로하는 금융사의 실체와 진짜 부자 되는 법
박창모 지음 / 알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이런 책 제목 딱 질색이다.  책 제목은 좀 은유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님 고상하던지. 이렇게 직설적으로 내부고발자라도 되는 척 드러내 놓는다는건 책 제목에서 또다른 음모(?)를 유추하게 한다.  이 책을 통해 돈좀 벌어보겠다?  이유야 어쨌든 별 다섯개를 주고픈 책이다.   세상사 모두가 그렇듯이 돈이 얽히는 세계엔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다.  속고, 속이는 건 투전판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게 말끔하고 공정한 일상의 금융거래일 수도 있다,는 상식을 이 책은 가르친다. 

현직 자산관리사로 자신을 밝힌 지은이 박창모는 네이버 카페 `자산관리는 거북이처럼'의 운영자다.  이제 지은이가 자신의 이력을 바탕으로 금융업계가 어떻게 당신의 돈을 정당하게(?) 갈취하는지 알려주겠다고 선포한다. 그런 호언장담은 믿음이 가지 않지만, 책을 읽어갈 수록 머리가 복잡해짐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넣은 보험, 연금, 적금 등이 어쩌면 금융업자의 영업전략에 말려든 결과물일지도 모른단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불쾌한 의심은 안타깝게도 책장을 덮은 후 확신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럼에도 저자의 이야기는 생소한 것이 아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금융업자의 본심과 선량한 미소를 구별하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다가온 모든 금융업자는 본질적으로 선량한 척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사로 금융상품을 팔기 위해 찾아오는 그 말끔한 금융업자들을 보라.  마치 당신에게 일확천금을 안기겠다는 의지나 당장에 부자가 될 수 있는 놀라운 상품을 소개하겠다는 태도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리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보험 혹은 저축성 보험 상품을 팔러 다니는 그 금융잡상인의 감언이설에 속아, 오늘도 운영기간이 거의 직장인 수명에 가까운 상품에 덜컹 사인하고 만다.  

나도 그랬고 당신도 그랬다. 이제,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저자는 직장 초년생에게 무척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돈을 벌기 위한 첫걸음은 재테크에 있지 않다.  돈관리에 있다.   그래서 지은이가 주장하는 것은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완벽한 현금흐름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새나가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저자는 통장을 세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나의 통장을 사용하면 무엇이 나쁠까?  월말에 고정 지출되는 돈까지도 여유자금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있다. 급여로 들어왔다 바로 나가는 돈은 내돈은 아닌 것이다. 자동이체일이 급여일 이후라면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신용카드를 버려라.  대신 체크카드를 사용할 것이며 잔액통보는 SMS로 연계시켜라.  신용카드의 편리함과 다양한 혜택이 아깝다고?  신용카드사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두가지다.  지갑에 든 신용카드는 언제든 확 긁어버릴 수 있다.  다양한 혜택의 기십배가 한순간 사라진다.  술이 깨면 내가 왜 긁었나?  의아하지. 

이 책의 하일라이트로 넘어가자. 챕터 제목이 `빛 좋은 개살구, 비과세 저축보험의 정체'다.  요즘 가는곳마다 이 상품을 추천한다.  근데 이게 빛좋은 개살구라?  저축보험을 팔러온 금융잡상인은 이렇게 읊퍼댄다. 시중은행보다 금리가 높아서 좋고, 더군다나 복리로 운영되서 좋고, 10년 이상만 넣으면 비과세로 세금이 한푼도 없다.  노후 자금으로 30만원 정도 넣으시면 좋죠?  그리고 고객이 혹해서 사인이 끝나고 나면 지나가는 소리로 짧게 말한다. 사업비가 있고(몇% 라고 말하지 않는다),  10년 안에 찾으시면 손해입니다.  맞다. 이 상품 사업비가 무려 10%다.  매달 넣는 불입금 가운데 10%를 7년간 뗀다. 그러니까 30만원을 넣으면 실제로 27만원만 적립되는 것이다. 10%를 지고 들어가는데 어떻게 비과세로 그걸 따라잡겠다는건지, 저자는 `도적놈들'이란 과격한 표현까지 쓰신다.  7년안에 해지하면 해약금이 원금보다 적다.  10년간 불입하면 되지 않냐고?  10년간 예,적금을 운용했을때 오히려 예,적금의 수익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고 나면 도대체 금융업자들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진다.   

직장초년 시절, 무료재무설계를 내세우며 접근하는 보험설계사들을 많이 만난다.  하나같이 깔끔한 용모와 매너, 친절함이 그득한 그들은 누구일까?  그간 넣은 보험상품이나 재테크에 대해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었던 그녀들.  몇 년이 지난 후 보면 그녀들이 추천한 상품에 한 두개씩은 가입해 있곤한다.   이 책은 무료 재무설계를 내세우며 당신에게 접근하는 그들의 영업전략을 놀랍도록 상세히 적고 있다.  친절함 속에 날카로운 비수 하나씩을 품고 당신에게 접근했던 것을 알게 되리라.  교과서적인 영업 메뉴얼대로 그들은 친절, 친교, 설득, 가입이란 단계를 거쳐 당신에게 금융 상품을 팔아먹었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속속들이 알려준다.  

문제는 그들이 소비자에게 득이 되는 상품 (싸고, 질좋은)을 판 것이 아니라, 설계사 수당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설계사와 그 회사에 득이되는) 상품을 당신에게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상품이 `변액유니버설보험'이나 `종신보험' 같은 것이다.  저자는 변액유니버셜보험을 보험설계사의 희망으로 비유한다. 희망=꿈?  보험이기에 적립금 가운데 사업비를 떼이고, 해약환급금은 일정 기간 동안 원금보다 적으며,  펀드와 연계되다보니 수익이 반토막 날 수도 있는데,  설계사는 절세효과와 고수익과 노후자금 마련을 이유로 고객을 설득한다. 이유는 단 한가지?  설계사 수당이 다른 상품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많기 때문이다.  종신보험도 마찬가지다.  쓸데없이 보장기간을 길게 잡고 특약을 많이 넣어 효율성이 높은 정기보험보다는 비싼 상품인 종신보험을 팔아먹는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금융산업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금융산업의 본질은 착취산업이라고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금융기관의 실적은 고객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수료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 금융기간과 고객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새롭게 출시되는 상품들은 고객에게 더 좋은 조건으로 대우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합리적으로 교묘하게 고객의 돈을 착취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일 뿐이다. "  p.298 

의심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애매한 경우가 있다.  금융상품을 팔아치우는 업자들의 본심은 그들의 선량한 미소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껏, 그들의 말끔한 용모와 매너에 속아 그들의 본심과 본질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을 통해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보다 많은 상품을 높은 가격에 팔아먹어야 그들은 돈을 벌고,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거였다.  우리는 그들이 건네는 친절과 사탕발림의 본질을 애써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려 했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   그들이 걸으면 달리고, 그들이 달리면 날자.  이것이 인정사정볼것 없는 재테크의 세계다.  

지금껏 읽은 재테크 서적이 몇 권 되지 않는다.  재테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적이 있다. 난 위험한 투자는 안했으니까.  난 주식투자는 안하니까, 스스로 안심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유혹과 사기의 손길이 여기저기서 무지한 우리의 돈을 노리고 있었다.  정체가 불분명하고, 애프터서비스가 의심스럽고, 질이 애매한 상품을 팔아먹고 다니는 자를 `잡상인'이라 부른다.  우리가 회사에서, 집에서, 누군가의 권유와 소개로, 만나게 되는 그 금융업자들은 그저 `금융잡상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금융상품은 내가 속속들이 알고 가입하는 것이지 권유와 설득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님을 이 책은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속이는 자만큼 속아넘어가는 자도 나쁘다.  그들은 앎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20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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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 철학의 진로를 바꾼 17세기 두 천재의 위험한 만남
매튜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사에서 무척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그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17세기 대륙 합리론(합리주의 철학)을 이끈 삼총사로 통했다.  합리주의는 `비합리적 ·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 ·논리적 ·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태도'를 말하며, 경험주의 철학과 대립하여 모든 인식이 수학 법칙처럼 논증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섭리를 세뇌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분석하여 깨달으려는 시도, 그것이 합리주의다.  스피노자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후손이었다. 그도 어렸을 적엔 유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사회에서 영특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는 유대인에게 무척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던 유대인들이었기에 처신에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스피노자는 1656년 7월 27일 유대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파문의 명목은 스피노자가 저주받아 마땅한 생각을 퍼뜨린다는 소문 때문이다.  `모세 5경은 인간이 쓴 것이며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고 신은 물질 덩어리'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파문된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리에 반기를 든 불경죄를 저질렀고 둘째, 네덜란드의 주류인 기독교인의 심사를 건드릴 가능성을 유대교회에서 사전에 차단하려 했기 때문이다.   파문절차를 진행하기 전,  한 랍비가 그를 회유한다.  교회의 신앙에 대해 형식적이라도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5백 달러 정도의 연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청년 스피노자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어느 다락방에 숨어, 낮엔 렌즈를 연마해 생계를 유지하고 밤엔 오랜시간 자신의 철학을 주저 <에티카(윤리학)>에 담아내는 일에 일생을 건다.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었다.  동시대를 반분한 미적분학의 발견자이자 모나드(monad)론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다.   그는 스피노자보다 10살 정도 어렸지만 다방면에 박식한 천재였다.  그는 제후들과 왕의 법률 담당 추밀고문관으로, 외교관으로, 공작의 궁정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연봉 계약을 연이어 체결하며, 부와 명예로 가득한 일생을 보냈다.  지질학, 천문학, 역사학, 철학 등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다방면을 연구, 업적을 남겼다.   수학 분야에 남긴 미적분학 창안과 최초 계산기의 구상, 물리학에서는 훗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예견하기까지 한다.  스피노자의 검소하고 명성에 초탈한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평생 명성과 부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지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창안한 모나드론과 예정조화설을 기반으로한 기독교 철학을 가다듬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의 중심인 모나드론의 핵심은 간명하다.  인간 개체 모두가 신으로부터 부여된 작은 신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우주며, `모사된 신이자 원형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흔히 `창이 없는 모나드'라고 불리우는 그것은 신을 통한 예정 조화를 통해 관계짓기를 시작한다.  긍정적인 선과 세계에 난립한 악의 존재 자체도 신이 미리 계획해 둔(예정조화), 하나의 질서이며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사물의 내재적인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란 말로 정리한다.  내재적인 원인으로서 신은 그것이 촉발한 것 `안에' 

존재하며, 그것과 `함께' 한다.  시계공은 시계의 외재적(타동적)원인이지 내재적 원인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을 실체라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실체는 그 본 뜻이 어떻든 흔히 `자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속에, 인간속에, 물질속에, 함께 거주하는 것이지 계시와 창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의 주장은 당시 이단적이고 불경스러웠다.  

1676년 11월 18일, 네덜란드 헤이그 파빌륜스흐라흐트의 작은 이층 다락방엔 두 남자가 있었다.  비록 명성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따돌림을 한몸으로 받아온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신의 존재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을 구하러 스피노자를 찾아 먼 여행길 끝에 그 초라한 다락방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며칠에 걸쳐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신을 죽이려는 자와 신을 살리려는 자의 대결은 뭇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당대 최고의 지성을 자부했던 그들이었기에, 나름 처절했을 논쟁은 `신들린 자들의 싸움'으로 뒷날 불리울만 했다.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원제: The Courtier and the Heretic>의 저자 메튜 스튜어트는 바로 여기에 착안해 한 편의 소설같은 철학서를 집필했다.  저자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프린스턴과 옥스포드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여러 회사를 상대로 경영컨설턴트로 일했다.  학문과 오랜 시간 담쌓고 지내던 철학도가 한 권의 철학서를 집필해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본래 소설이나 시나리오로 계획되었던 것을 교양 철학서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게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다.  저자는 동시대의 이 거목 철학자들이 은밀히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도 평생 한번의 비밀회동이었으니 궁금증을 불러온다.  물론 평소 스피노자를 못마땅해 한 라이프니츠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책은 그 중심되는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삶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해설하며 비평한다.   그들의 철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과 개인적 삶을 양념처럼 바르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저자의 재능앞에 17세기의 주류 철학이 이 책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 제멋대로인 상상력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게 된 우리 인간은 시시때때로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면 무엇이든 신에게 귀속시키곤 한다. 그러나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그러한 속성들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코끼리나 당나귀를 완전하게 만드는 속성들을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다' 라고 스피노자는 블레이엔뷔르흐를 조롱했다. 스피노자는 덧붙여 말한다. `만일 삼각형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삼각형은 신이 눈에 띄게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p.300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두 철학자가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자료도 남아있질 않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자신의 논지를 꼿꼿히 세우고 서로를 논박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도덕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며 스피노자를 옥죄었을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행복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라며 내세에 대한 보상을 부정했을 것이다.  이들이 신의 존재를 놓고 세기의 대결을 벌인 것은 단순히 신앙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라이프니츠는 평생 교회를 거의 출석하지 않은 이름뿐인 신자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스피노자를 향해 신의 존재 증명을 모나드론과 예정조화설로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정치원리로서 기독교주의를 깔고 있다.  성서를 부정하고, 기존의 오랜 종교를 거부하는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파문을 당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층 하숙집의 좁은 방안에서 평생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오해다.  그를 지지하는 부유한 상인과 친구들은 서로 그에게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검소한 스피노자는 이를 매번 거부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정(神政)국가에 위협이 될만한 것이다.  무엇보다 스피노자는 신을 `변덕스러운 인격으로 보지 않고 우주의 영속적인 법칙'으로 정의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정국가안에서 평화와 질서를 이상으로 추구했다면,  스피노자는 종교의 바탕이 인간의 무지와 불안의 소산으로 해석한다. 즉,  종교지도자들이 대중의 불안과 무지를 기반으로 군림한다고 라이프니츠를 직격했던 것이다.   

저자 매튜 스튜어트는 이 책에서 결코 공정하지 않다.  눈에 띄게 그는 스피노자주의자인척 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모든 근대 철학자에 대해 "그대는 스피노자주의자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스피노자라는 인물과 그의 철학이 후대에 남긴 영향력의 정도를 표현한다. 그의 철학은 모든 것을 회의하고, 모든 것을 내 지성으로 검토하지 않을 때, 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스피노자는 핍박받던 소수의 유대인이었지만,  그 비좁은 유대인 그룹 안에서도 스스로 핍박받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자신이 탐구한 철학을 세상 모든 편리함, 명예, 부귀와 바꾼 것이다.  그가 평생 소망한 것은 자유였고, 평안한 마음 상태였다.   죽기 4년 전 그의 명성은 자자했고 라인 팔라틴 선제후 칼 루드비히는 그에게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직을 제안하지만, 스피노자는 평안 하기를 원한다며, 거절한다.  그가 죽은 후 남긴 유산은 생활 잡기 정도라 모두 팔아도 장례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검소한 삶과 인품은 그를 신에 대한 영원한 지적 사랑을 실천했던 철학자로 기억하게 한다. 

그의 주저인 <에티카>는 기하학 책을 연상할 정도로 정리와 주석, 증명이 가득하다.    그는 이 책을 일평생 반복해 수정하며, 완성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이해하려는 독자도 그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할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생전 그의 주저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일찌기 지구상에 존재했던 무신론자 중에서 가장 불경스러운 무신론자'라 칭했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라이프니츠는 평생 뛰어난 업적과 명성, 부를 쌓았고 스피노자보다 무려 40년을 더 살았지만 그의 말년은 그리 영예롭지 못했다.  1716년 70세로 생을 마감한 라이프니츠의 장례식엔 참석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묘지에 쓸쓸히 매장 되었다.   

이 책은 독자를 17세기의 지적 풍토와 사상의 대결장으로 안내한다.  중세를 넘고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숱한 공격을 받아왔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기성의 종교와 사상, 정치를 앞에 두고 두뇌 싸움을 벌인다.  그들의 철학에 최종적인 승자는 없다.  우리 시대,  여전히 기독교가 유럽에서 쇠퇴하긴 했지만 아시아와 미국을 중심으로 번창하고,  열정적인 무론자들은 우리 주위에 잡풀처럼 흔하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신의 `운명'을 건 논리대결은 이 책의 흥미를 돋운다.  책 한 권으로 그들이 일평생 갈고 닦은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자만이며, 욕심일 뿐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공부하는 기회와 동기를 얻는데서 만족해야 한다.  

신이 여전히 인간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 무신론으로 의심살만한 철학을 주장했던 스피노자는  대담하고 심오했다.  그의 렌즈 연마의 일상은 단촐해 보인다.  한 저술가는 스피노자를 역설적이게도 `최후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어떤 독자는 라이프니츠의 명예와 부에 대한 욕망에서 비속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류사회에 공헌한 연구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10년 뒤 미적분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아이작 뉴턴과 훗날 저작권 다툼을 벌이긴 했지만, 라이프니츠는 미적분법의 최초 창안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저자의 지나친 스피노자 편들기는 눈에 거슬리는 점이지만, 스피노자를 칭송한 것은 저자뿐만은 아니었다.   1882년 스피노자 서거 200주년 기념식 때,  헤이그에 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자금을 모집한 적이 있다. 문명 세계의 곳곳에서 기부금이 쇄도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기념사를 끝맺었다. 

"이 온화한 사상가의 동상에 비난을 퍼부으며 지나가는 자에게는 재앙이 있으라. 그러한 자들은 모든 비속한 자들이 벌을 받는 원인인 바로 그 비속함 때문에, 그리고 신성한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분은 화강암 좌대 위에서 그가 찾아 낸 행복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을 지나가는 교양 있는 나그네는 마음속으로 말하리라. `여기서 신의 가장 참된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

 

20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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