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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ㅣ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평점 :
네이버에 독서일기를 쓴 것이 몇 해 째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는 것은 이제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가끔 나의 블로그 명이 서평이 아닌 `일기'여야 하는지, 스스로 불만을 제기해본 적이 있다. 서평이라고 하면 어떤 서적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과 평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내가 맘편히 독서일기로 지칭한 것은 나의 글이 아직 무언가를 비평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책과 마주하고서도, 그 책의 지은이에 주눅들지 않고, 책의 주장에 반격할만한 내공이 한참은 부족한 것이다. 반면, 일기라고 하면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형식의 자유로움 때문에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듯' 어떤 책이나 작가에 대해선 날카로운 비평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네이밍'의 사유는 장정일 때문이다. 알다시피 장정일은 많은 시와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 한 편 때문에 구속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 작가다. 그런 치열한 글쓰기를 해 온 그지만, 1993년부터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책으로 펴내고 있다. 시간이 지나 그의 독서일기는 7 권째를 마지막으로 제목을 바꿨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는 이름을 바꾼 독서일기의 두번째 시리즈다.
그의 소설 한 편 읽어보지 못한 게으른 독자지만, 나는 그가 펴낸 첫번째 독서일기를 잊지 못한다. 1993년 1월부터 1994년 10월까지로 부제가 붙은 그 책에는 날짜와 그날의 일정과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이 담겨 있다. 일기 형식을 독후감과 혼합한 것이다. 어떤 날의 일기는 책을 빌리고, 레코드를 구입하고, 책정리를 한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 파격적인 독후감은 그 이후로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장정일이 독서일기를 시작한 그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나또한 그 형식을 좇아 인터넷에 독서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권 첫 장에는 아주 짧은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유명한 서문은 독서일기를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의욕과 동기를 불러올만 했다.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명쾌하게 `쾌락' 때문이라고 답변한 것. 작가로서 행복한 저자되기만큼 갈망하는 것이 어떤 책을 정성들여 읽은 후, 그 들뜸으로 나름의 후기를 적는 `행복한 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아 몸 가운데 눈을 가장 소중히 했다는 작가, 그의 쾌락 독서론은 2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바뀌었을까?
"무릇 책을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다." 서문,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온다, p.11
시간이 흐르고 군입대를 준비하며 독서로 소일하던 청년은 이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반면,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을 소망하던 작가는 문예이론을 가르치는 초빙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7권째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던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8번째부터 이름을 바꾼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서평을 더 이상 `일기'안에 담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어떤 무게와 전문성을 갖고, 세인의 이목을 받는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그는 좀더 격식을 필요로 했을까?
일기라는 형식을 버림으로써, 이 책은 전문 서평으로서 날개를 달았다. 작가의 일상을 훔쳐보던 독자들의 한가지 재미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책에 대한 장정일의 끊임없는 욕망과 서평자의 균형잡히고 날카로운 필력이다. 한 번의 필화사건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 있는 권력에 대고 쓴 소리를 할 줄 아는 작가다. 문단의 비중있는 작가들의 작품도 그의 비평적 균형감각의 예외가 될 수 없다. 권력과 권위 모두에 주눅들지 않는 서평자의 담담한 나레이션, 서평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일상이라는 흥미요소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의 서평은 흥미있다. 비평의 칼날을 벼리고 책과 저자와 해설자를 나름의 방식으로 요리하기 때문이다. 그의 서평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책과 저자에 맞서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비중있는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중량감 때문에 쉽게 비평하기 어렵다. 일단, 독자는 배우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글 뒤편에 실리는 일종의 주례사 비평들은 대개 칭찬 일색이다. 이중적인 견제를 받는 독자가 어떻게 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안을 갖겠는가?
그에 비하면 장정일이 책을 다하는 자세는 탈권위적이며, 자유분방하다.
"이 책을 땅바닥에 패대기치지 못한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p.372)
"아해(해설자)는 <심청>을 가리켜 `우리 문학사 전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부하고도 무시무시한 현존을 포착한 소설'이란다. `빨기' 대장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빨아줄 수 있죠? 이제 해설자는 자신이 쓴 <심청>의 찌라시를 꼭 자식들에게 읽혀야 할 것인데, 그 자식들이 아둔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이, 빨기대장, 비평이 뭐야?" (p.387)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의 무능력자로 판명될 공산이 큰 이명박의 연설 원고는, 지금 누가 쓰고 있는걸까? 모두 이바카체 같이 허다한 책을 읽고, 글을 갈고 닦는 자들임에 분명하다."(p.249)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에 굴복하는 것은 다르다. 책읽기를 통해 장정일은 쾌락에서 현실로 돌아왔다고 썼다. 그렇다면 책읽기의 궁극적 목적은 현실의 나를 찾는게 아닐까? 아니 현실의 나를 단련하는 것이다. 그 팽팽한 대결의 과정에서 비평은 탄생한다. 독서일기의 후신격인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은 분명하다. 일기가 비평이란 새옷을 입고 당당히 책과 맞서는 일이다. 그래서 장정일은 비평의 핵심을 객관, 공감, 비판 사이의 균형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균형을 갖추지 못한 서평은 제 정신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가끔은 책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책읽기를 돌아봐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반성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관행대로 가기 마련이다. 책읽기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만나는 한 권의 책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저자며,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장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르치려 한다. 당신이 줏대없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어쩌면 책을 읽을수록 바보가 될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는 책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서평 책이다. 이 책을 단순히 한 작가의 독서편력에 대한 궁금증으로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책읽기는 몹시도 주관적인 선택(취향)의 과정을 거친다. 그 선택에 관여할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표지 사진이 독특하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책들이 집안 곳곳에 탑모양으로 쌓여 있다. 열려진 문 사이로 무언가를 열중하며 읽는 장정일이 보인다. 시원스레 깍은 장정일의 까까머리가 빛난다. 내가 이십대 일 때도, 그는 이런 자세로 책을 읽었다. 작가의 나이 이제 지천명에 다다랐다. 그 시절, 정정일은 나의 책읽기의 길잡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처럼 많이 읽고, 그처럼 잘 쓰고, 그처럼 책읽는 삶을 동경하게 했다. 여전히 그는 변치 않고 책을 모으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가 책을 요리하는 솜씨가 부럽다. 장정일보다 많이 읽진 못했지만 나는 젊다. 더 많이 읽고 쓸 시간이 있다. 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여전히 장정일은 독자에겐 책읽는 사람의 미래다.

201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