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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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은 운명이 될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변화의 촉매가 될 수 있다.  문학 작품은 정적인 감동을 안기지만, 과감히 행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알레프>는 지금 내게 여행을 강권한다.  많이 읽지 못해서 항상 내면의 허기짐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내게, 마치 그것이 앎의 유일한 통로인것 마냥 착각하고 살던 내게, 한 편의 소설은 일관된 사유를 쪼개는 벼락 그 자체다.  일상의 여행이란 이제 가족 야유회 정도로 가치 전락한 시기에, "나는 사막과 도시와 산과 길 위에 있을 때만 내 영혼과 대화할 수 있다(p.100)"고 말하는 작가의 속삭임은 이 안이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생을 통렬히 반대한다.  그래, 떠나야 한다.  

러시아 국경안을 통과하는 거리만 9288Km 라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아니어도 좋다.  너저분한 일상을 정리하고 떠나는 파격적인 여행이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우리 삶이 본래 여행이었고, 여행이야말로 정체된 삶을 바꿀 수 있는 지혜를 건네주는 것임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 간단한 사실을 알려주는 파울로 코옐료의 심오한 가르침이다.  미리 발표된 자서전 같은 문체로 그는 생의 두번째로 계획한 영혼의 순례길을 한 편의 소설로 뒤바꿔 놓았다.  거기서, 그는 사실과 허구를 섞는 신비로운 작법으로 독자에게 진중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나'의 스승 J는 나에게 여행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 성공한 작가로, 세상 모두가 그의 작품을 읽고 그를 알아보고 그를 사랑하는 순간에도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나는 목마르다. 이 권태는 정체감이며, 이 지지부진함은 삶의 모든 것에 무의미함을 채색한다. 이미 충분히 떠돌아 다녔고 이제 여행은 지루한 일상에 지니지 않다는 항변에도 J는 그 반대로 나를 설득한다. " 아니, 충분하지 않아, 충분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걸세"(p.27)  스승은 지난 성공에도 여전히 막막한 삶에 대한 해답이 여행 가운데 있음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유럽 북페어로 많은 독자와 출판사 관계자들과 만나는 일정을 소화하다 러시아 관계자들과 만나 오래도록 간직한 꿈을 발설한다.   그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르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출발한 열차는 6박 7일간 달려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까지 총 60 여개의 역에서 정차한다. 유럽 대륙과 중국을 거쳐 극동에 이르는 이 기나긴 여행은 바이칼 호를 넘고 이르쿠츠크, 예카테린부르크 등 러시아의 주요 도시를 거치는 세상에서 가장 긴 철도 노선이며, 여정이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이 여행에 예순에 다다른 작가인 나는 지금 그걸 실행하려 한다.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p.99) 

여행엔 반드시 사건과 사람이 엮인다.  여행중에 어떤 인물과 사건에도 엮이지 않는다면 어떤 가르침도 얻을 수 없다.  나는 이 여정에서 한 명의 여인 힐랄을 만난다.  그는 스물 한 살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나의 독자다.  어린 시절 그는 평소 친절하고 사려깊은 이웃집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일화를 드러내놓는다.  상처는 오래도록 그를 파괴해왔다. 힐랄은 나의 독자가 되어서야, 나를 통해 치유받은 듯 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스물 한 살 처녀가 예순이 된 작가의 작품을 사랑할 수 있지만, 작가 자신을 사랑할 순 없다.  이 거부감은 시베리아 횡당 열차를 타고 달리는 여정 동안 내가 감당할 숙제로 등장한다. 

소설은 우연히 만난 독자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알레프의 순간이 온다.  전생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 기가 흐르는 지점, 모든 것이 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지점이다.  내게 집착하는 힐랄과 나는 이미 중세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중세 이단심문장에서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대에 오른다. 나는 그 재판을 보조하는 도미니크회 수도사다.  하지만, 나와 그녀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오래도록 알고 지냈다.  성직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평생을 함께 했을 것이다.   엄격한 이단재판관에게 단 한 마디만 해준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다.  나는 그러지 못하고, 그녀를 외면한다.  종교적 엄숙함은 17살 청초한 소녀를 마녀로 믿게 한다.  나는 힐랄에게 죄를 지었다.  알레프,를 통해 나는 전생의 죄를 확인한다.  

하지만, 생의 본질은 변화다.  알레프의 지점을 통해 전생의 인연을 확인했다고 현존의 인연을 부정할 수 없다.  나에게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그녀는 화가이며,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객실안에 존재하는 나는 수천킬로 떨어진 아내의 존재를 매순간 확인한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이며, 힐랄이 되어선 안 된다.  내가 이 여행에서 바라는 것은 힐랄과 함께 정체되는 삶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힐랄은 어린 시절의 성추행이란 범죄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알레프의 순간을 통해, 힐랄에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밤낮으로 달려가는 이 열차안에서, 이 여정안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 삶의 본질이 생의 윤회와 같은 여정과 여행임을 알면, 과거를 잊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윤회에 성공하는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나와 힐랄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생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우리를 해롭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도 그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마다 당신에게 그토록 상처 주었던 것이 당신의 재능으로 바뀌었음을 기억해요.(p.349) 

정착지를 떠나 인간이 매순간 순례길을 계획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 필연이다.  작가는 인류와 코스모스의 본질이 변화와 순례에 있다고 믿는다.  정착하는 순간, 여행을 기피하는 시간들이 오래될수록 사람은 생이 가진 본연의 흐름을 망각한다.  삶이 매순간 보물과 기적으로 가득하다는 것, 그 보물과 기적을 건지는 방법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무엇을 보여주려 했든 이 작품은 결국 여행이란 주제로 가닿는다. 파울로 코엘료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다.  전세계 73개국 언어로 작품이 번역돼 1억부가 넘게 팔렸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브라질 태생으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그는 여행하는 걸 즐기고 갈망한다.  다양한 생의 이력을 거쳐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1986년, 잘 나가던 음반회사의 중역이란 자리를 내놓고 떠난 산티아고 여행 덕분이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작 <순례자>를 내놓는다. 이십여년이 지난 2006년 다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그 여행의 기록이 바로 소설 <알레프>로 탄생했다.  여행을 통해 재미를 봤다고 해야하나?  아니 성공을 이뤘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우리 삶이 불행한 것은 여행할 줄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를 되묻는 작품이다.  길 위에서 삶을 배웠고,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여행에서 얻은 것들이라 단언하는 작가의 말은 과장된 표현이 결코 아니다.  소설과 경험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레프>를 읽다보면 혼란스러울 때가 온다. 북페어 여정과 시베리아 철도 여행을 뒤섞고, 여행길에서 만난 한 여인에 대한 삽화를 끼워넣는 듯 보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작가는 여행을 통해 넓혀진 생의 전망을 독자에게 전파한다.  그리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고 질타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엔 공감하지만, 작가의 안이한 인물설정과 전달방식은 문제가 있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흐릿한 것은 사실감을 더하지만, 독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작가의 존재가 소설속에서 맨얼굴로 등장하는 형식은 독자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다.  작품의 설정이긴 하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나와 스물 한 살 처자와의 로맨스는 그렇게 살갑고 공감할만한 요소는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단조로움은 자칫 그 여행의 의미마저 단순화 시키는 위험성을 드러낸다.  실제 여행을 소설의 재료로 가져와 쓰다보니,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플롯과 서사에 달라붙지 못했다.  

이런 약점에도,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파울로 코엘료를 처음 만났고 그가 다루는 인생의 깊이와 깨달음의 언어들에 심취했다.  마침, 나는 이 소설을 기차안에서 대부분 읽었다.  기차 출퇴근, 그리고 1박 2일의 짧은 여행길에 가져가 집이 아닌 길 위에서 그의 문장들과 만났다.  오랜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난 여행과 코엘료의 문장들은 여행에 게을렀던 나의 삶의 위험성을 질책했다.  전망의 부재, 과거에의 몰입, 안정만을 추구하는 삶, 매일 아침 집을 나서지만 그것은 일점일획도 다르지 않는 출퇴근 길이었을 뿐.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나는 허기졌고 <알레프>의 `나'처럼 과거와 미래에만 매달린채, 현재를 누리지 못했다.  

여행은 그 정체된 나를 파괴하는 시간이다.  과거, 미래,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길 위에서 현재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여정이 끝나는 시점에 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고, 가슴깊은 울림을 전해오는 한 장과 만났다.  생이 여정이라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여정 가운데 만나는 모든 것을 피하지 마라. 받은 잔은 마셔야 하고, 주어진 삶은 걸어가야 한다.  생이 주는 모든 것은 고통과 불행일지라도 또다른 축복일지니 용기있게 받아들이자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작품은 삶이 본래 여행이었음을 가르쳐준 생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독자의 삶에 변화의 촉매제가 될만한 소설이다.  결국 우린 `여행'하고 읽어야 한다.  그 둘은 하나다.  

"신께서 계획하신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건 실수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겁니다. 무언가를 정말로 경험하지 않고도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진정으로 당신의 일부가 되지는 못할 겁니다."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 p.33


20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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