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빙점 -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6-2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9
미우라 아야꼬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을 읽고 얼마 안있어 연달아 읽은 소설이 <빙점>의 후편인 (속) 빙점이다. <빙점>의 성공은 미우라 아야꼬를 무명의 보통사람에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빙점>은 잘 쓰여진 재미있는 소설이다. 인물간의 심리묘사나 인간 내면에 기생하는 악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이정도로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담은 소설을 찾아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소설 읽기의 재미 측면에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를 두루갖춘 빼어난 작품이란데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빙점>을 10년 사이에 두번 읽은 나이지만 이 작품의 후편인 (속)<빙점>을 읽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꼬와 요즘의 나는 코드가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다. 그는 젊은 시절 고뇌의 답을 신앙에서 찾은 사람이고, 그 답을 찾기까지 그가 겪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은 너무나도 처절해서 그가 수기로 적은 <길은 여기에>의 절절한 울림은 숱한 비신앙인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또한 스물 네살 때, 군대 서가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그 책 한 권으로 인간에게 종교적인 구원의 빛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산할 수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됐던 기억이 새롭다.

<빙점>은 이같은 아야꼬의 신앙적 체험과 깨달음을 죄의 본질과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해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을 보면,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며 또 친숙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아야꼬가 이 소설에서 나열한 인물들이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며,  소설속 범주가 현실의 우리 세계의 영역을 너무나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인물들간에 벌어지는 사건 또한 20세기나 21세기나 별 차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는 `불륜'이다.

그러나 `불륜'은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죄안에 갖힌 인간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큰 테마를 이끌어내는 소재 역활을 하고 있다. 전편에서 병원장 게이조오는 자신의 딸 루리꼬가 살해된 이유를 아내 나쓰에와 의사 무라이의 불륜으로 넘겨짚고, 아내에게 복수하고자 살인범의 딸 요오꼬를 몰래 데려와 아내에게 키우게 한다.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들끓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륜을 저지른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게이조오의 행동도 또한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잔인한 복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래 알게 된 나쓰에가 요오꼬를 구박하고, 요오꼬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살을 감행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끗함을 자신했던 요오꼬는 부모의 사악함을 알게되자, 자신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죄의 무게감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러면서 요오꼬는 마지막 유서에서 자신의 죄를 구원할 수 있을 `권위있는 존재'를 갈망한다.

(속)<빙점>에서 요오꼬는 살아나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살인범의 자식이 아니라는 오명을 벗었지만, 요오꼬는 자신의 출생이 어머니의 부정이라는 큰 오점에서 기인한 것을 알고,  어머니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든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속편은 요오꼬가 어머니를 용서하게 되는 기나긴 여정과 같은 것이다. 요오꼬는 때가 타지 않은 청순한 여인으로 자라나지만, 자신의 내면속에 흐르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깨끗한 자신이 부정한 어머니를 심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아야꼬는 이 부분에서 신약성서속 예수님의 일화를 그대로 가져온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르침을 이어가던 어느날,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으로 데리고 온다. 유대 율법에 간음한 여인은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이게 돼 있었다.  유대인들이 말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에 그녀를 감싸고 돈다면, 예수는 율법을 어기게 되고, 또 죽이자고 하면 자신이 가르쳤던 사랑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침묵을 지킨 예수가 군중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땅에 이렇게 썼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광경을 지켜본 유대인들은 하나둘씩 그 자리를 도망쳤다 한다. 

아마도 아야꼬는 이같은 예시를 통해 태생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같은 죄책감으로 어두움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누구나 예외없이 깨끗하지 않다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성경은 `의인은 없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요오꼬는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어머니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그렇게 순수했던 요오꼬도 마음속엔 죄의 씨앗인 `빙점'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게되자 자신이 죄많은 인간이라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경속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오꼬는 자신의 죄에서 이제 어떤 방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지 그 힌트를 얻게 된 것이다.


"요오꼬는 기다하라에게, 도오루에게, 게이조오에게, 나쓰에에게, 그리고 준꼬에게
지금 본 불타는 유빙의 놀라운 광경을 알려 주고 싶었다. 자기의 눈앞에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죄가 많다고 마음속으로 느꼈을 때 이상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던 불가 사의함
도 알리고 싶었다. " p.555
  (속) 빙점의 마지막 장인 `불타는 유빙'에서

전 문화부장관이자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이어령 선생님이 74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내 나이 막 스무살이 되던 해, 나는 그의 수필과 소설들에 잠깐 빠져지낸적이 있다.  그의 글엔 항상  윗트와 자신감이 넘쳤고,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뛰어난 문장들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왜 그 늦은 나이게 회심했을까? 그는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절대 고독 속에서 절대자를 느꼈으며, 지상의 언어가 헛되다는것을 50년만에 깨달았다" 고.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때, 우리는 신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야꼬가 <빙점>속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예외없이 죄짓는 우리가 진정 누구에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분이 누군인지 깨달았을때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쁨과 희망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아야꼬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듯 하다.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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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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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 그의 중국인 친구 빅터 챈이 지은 <용서>를 읽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용서하는 자는 용서받는 자보다 더 자비롭고 더 인내심이 필요하고 더 힘
든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일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누구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 책의 가르침은 그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 마음에 평화가 자리잡고 그것은 곧 용서하는 사람에겐 이득이 된다.  거창한 무엇을 위해 용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곧 나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다.


티벳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 그는 정치지도자이자 승려다. 생불로 일컬어지며 세인
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그!  그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온 중국인 친구 빅터 챈과 함께
그의 가르침, 용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 바로 그의 <용서>다. 이 책에서 만난 달라이
라마는  어떠한 수식어구로 치장된 범상치 않는 종교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소탈했고, 자신을 치
장하지 않았으며 어떤 위대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지도 않았다.  그의 삶과 그의 행동과
그의 언어가 곧 그의 가르침이었고 수행이었다.  저자 빅터 챈은 이것을 담으려고 그와 함께 여행
하고 그를 대면하는 일을 자주 만들었다.

그 과정을 꾸밈없는 티벳인들의 사진과 함께 엮고 있는 책!  달라이 라마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세심
하게 그리고 있는 이 책이 약간은 지루하게 보였지만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그같은 지루함이 작은
깨달음으로 독자앞에 보여진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용서에 관한 짧은
글 한 편은 내 마음의 공허감을 한번에 날려주었다. 왜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원한과 증오와 미움의 감정들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나는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2007.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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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키우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사회적 여건이나 교육, 또는 사상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저 만족감을 원한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커
다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서와 자비다.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굳이 서로를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나와 같은
단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움직이고, 미소 짓는 눈과 입을 가진 존재를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은 없다. 우리는 피부색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존재다. 살아 있는 어떤 존재라도 사랑
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무엇보다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다운 사랑이고 자비이다. 누가 우리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는가.
다름 아닌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
들이다.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분노와 미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삶에서 그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상대로 싸움과 살인을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모두 일시적이며, 결국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죽는가,
병으로 사망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어쨌든 우리가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기 마
련이고, 그러므로 결국 사라질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승리자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
이 없다. 진정한 자비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줄 아는 마음이다. 그의 고통에 책임을 느끼고,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마음을 기울일수록 우리 자신의
삶은 더욱 환해진다. 타인을 향해 따뜻하고 친밀한 감정을 키우면 자연히 자신의 마음도 편안해
진다. 그것은 행복한 삶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나는 한 명의 인간이자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이야기 할 뿐이다. 내가 하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면, 그대로 한번 실천해 보기 바란다.  

                                   - 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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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01-2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고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인데... 왜 이 좋은 말씀처럼 안 살아지는건지 원... 한 해, 한 해, 살아나가는 게 나이 먹을수록 벅차기만 합니다.

개츠비 2007-01-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게 안 살아집니다....^^

종이달 2021-10-29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햇빛출판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독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은 것도 그러고보면 올해로 딱 10년차에 접어든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목적을 갖지 않고 순수히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그리 많이 된 것
은 아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책을 고르고 책을 읽고 감상을 써 내려가는 법이 서툴고
언제나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을 적을 땐 긴장되기까지 한다. 때로는, 내가 단시간에
읽어내려간 책이, 또 그렇게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책이란 것이, 대부분 작자의 무한한
인내와 노력과 내공이 뒤섞인 땀의 결정체이자,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떠한 삶을 기
록해 놓은 것일수도 있다. 그러할때, 별다른 노고없이 이루어지는 나의 독서는 그저
사치스런 소일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6월초부터 지금껏 틈틈이 읽어내려간 신영복 선생님의 글은 한 개인의 내면이
도달할 수 있는 사색과 통찰, 그리고 인내와 인생이 활자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책으
로서 지금껏 내가 서술한 그 예에 적확히 해당하는 저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책을 읽을 때면 밀려오는 감회와 존경의 마음은 어떠한 미디어도 책을 대신할 수 없
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그래서 그 책에 대한 독서의 시간들은 더없이 소중하게 되
며, 내 손때가 묻은 작가의 저서가 그대로 내 짧은 독서인생의 값진 장서가 되어 버린
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저자가 1968년에 터진 통일혁명당 사건
으로 무려 20년 20일을 복역하고 1988년 8.15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부모님과 가족
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무슨 죄로 인해서 그는 20년이란 긴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을까 ? 그것이 가장 먼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통혁당 사건을
검색하면 이렇게 시작된다..



"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사건이라고...김종태(金鍾泰)는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통일혁명당(북한노동당의 在南地下黨)
을 조직.. 전(前)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
전복을 기도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李文奎) 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 네이버



시사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은 인터넷 검색에서야 겨우 찾을 수 있는 통혁당사건.
가끔 신문지상에서 박정희 독재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의 조작 간첩사건으로 지금은
밝혀진 이 사건에 그가 연루돼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와 숙명여대에서 경제학을 가
르쳤던 그는 사형을 언도받은후, 곧이어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받아, 20년 20일 감옥
에서 보낸 것이다. 전도유망하고 평탄한 학자의 삶이 독재권력의 망령된 폭력에
희생된 순간이다. 그는 20대의 후반과 30대의 전부를 그리고 40대의 초반을 사방
이 막힌 감옥에서 끝없는 인동의 시간으로 보내야 했다. 평범한 우리들로선 그
시간에 주눅들기 일수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상상이란 관념에 머문다. 그러나
20년이란 긴 세월을 감옥에서 실제로 살아내야 했을 당사자의 고통과 절망은 어떻게
상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동안 그는 감옥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것은 스무번
의 봄이자 스무번의 겨울이다. 왜 이렇게 표현해야 할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또
한 감옥 생활을 간접체험한 덕분이다. 그의 글대로라면, 징역생활은 `겨울을 인내
하여 봄을 맞이하는 일' 같단 생각이 들어서다. 20년간 반복된 편지글의 계절인사
를 읽다보면 단 한번도 그러한 유폐를 경험하지 못한, 독자들로서도 그러한 인사가
단순한 편짓글의 예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밖에서 살았던 27년이 관념이라면
감옥은 현실이고 세상의 밑바닥이었다. 사람도 환경도 모두 그러했다. 그래서 충분
히 그의 관념도 그렇게 추락할 수 있는 여건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편짓글들속에서
나는 환경이 누추해도 인간의 내면의 성숙이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책을 가까이 했고, 서예를 통한 글쓰기도
멈추지 않는다. 지나친 독서는 사색을 방해하고 방대한 지식은 실천이 배제된 환경
속에서 무용지물이 될 거란 고민을 하게 된다. 그의 편짓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수님과 계수님 앞으로 보내진 것들인데, 20년간 편지들은 놀랍게도 한결
같이 감정적인 기복과 흐트러짐이 없다. 변화없는 감옥 생활의 소소한 일상의 깨달
음, 밖에서 경험하지 못한 노동의 교훈, 개성이 남다른 죄수들과의 관계맺기 등을
서술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옥생활을 살아가면서도, 그는 인간과 학문에 대한 나름의 사
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내면의 힘을 키워온 학자의
기상과 의지, 그리고 그 긴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낸 인내를 본받을 수 있었다. `자유
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이 있듯이, 자유를 빼앗긴 인간은 절망하기 일수다.
그럼에도, 더구나 독재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삶 자체가 송두리째 훼손된 상황속에서
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법 없이 그 현실 자체를 `또렷한 의식'속에서 살아온
그의 정신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하다.



20년이란 긴 세월의 노고가 깃들인 글을 그 짧은 시간 동안, 가볍게 읽어 낸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오늘날 기교가 넘치고 세련된 글들을 생
산해 내고 있는가 ? 그러나 감동은 그러한 작문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짧은
서간문들 사이에서 발견한 작가의 진중한 삶의 기록은 결코 아무나 흉내내지 못할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러한 책을 발견해 내고, 또 선택하여 읽는 행위는 오직 독자의 몫
이지만 또 쉽지 않은 일이다. 쭉정이가 너무 많아 낱알을 고르기 힘든 것이 오늘날
독자들의 고민 아닌가 ? 나는 그래서 다시한번 현명한 독자로서 `책의 선택'을 강조
해 두고 싶다.



그의 첫 저서는 이 책이지만, 다음 기회에 그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와
<더불어 숲> 등의 저서를 읽어볼 계획이다.



------------밑줄긋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
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
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
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29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06.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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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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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 오래된 정원 / 류시화 옮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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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다. 그러나 한가하다. 오늘과 내일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교대 근무자인
나는 이렇게 어쩡쩡한 휴일을 맞는것이 일상사다. 남이 놀때 일하고 남이 일할땐 또 이렇게
쉰다. 휴일의 개념이 상실된지 오래다. 어떤 약속도 없다. 온전히 휴일이다. 그런 휴일을
맞는것이 두달만이다. 그러고보면 정말로 바쁘게 산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바빴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결국 올해 두달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 두 달동안 나의 생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기엔 물론 책 읽을 시간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딱 1년전 이맘때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펴들었다. <월든>의 작가, 소로우의 편지들을 엮은 책이다.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2005 서점에 들러서 직접 골랐다.


소로우는 200년전 미국 사람이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을 나왔을 정도면 학식도 갖추었고,나
름 생활도 윤택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연필 공장 사장이었다. 그는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가 가진 명함을 들여다볼까? 그는 우선 명상가였다. 자연주의자, 초월주의 사상
가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인도 힌두 사상에 일평생 깊이 몰입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귀농
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유기농업의 선구자이다. 또 자신의 재능을 살려 목수일도 했고, 가
끔 이웃의 측량작업도 해주고 생활비도 벌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일평생, 그가 돈을
벌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로 치면 백수이
자, 게으름뱅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고향 메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일대를 산책 하는 것, 또 자연을 관찰 하는 것,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것,
여행 하는 것, 사색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날 19세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작가들(나다니엘 호손, 에머슨, 월트휘트먼)사이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그 이름 소로우
다.


"우리가 가진 생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p.60


대학을 나와 별 직업없이 전전하던 소로우에게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다. 같은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헤리슨 블레이크란 사람이다. 블레이크도 소로우와 기질이 비슷했던가보다. 사회적 성
공과 부를 떨쳐버리고, 세속에서 멀어져서 영적인 삶을 추구하려던 그는, 허술한 듯 하면서도
깨달음이 가득한 삶을 실천하고 있던 소로우를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소로우
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13년동안이나 편지가 오고
간다. 이 편지들에서 소로우는 자신의 생활을 블레이크에게 전해줄 뿐이다. 소로우가 쓴 편지
는 자신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대한 몇가지 단상들 이겠지만, 그것은 블레이크에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숲속의 생활에서 탄생한 저서 <월든>에서 충분히 그 깊이가 드러나는 소로우의
소박한 삶의 철학이, 편지글 속에서 부연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2년 2개월이란 시간동안 소로우는 고향의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대학을
나와서 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고, 에메슨이라는 당대의 뛰어난 사상가 소유의 땅에 오두막을
손수 짓고 20대의 2년 2개월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숲속의 생활은 온전히 자급자족이었다.
집을 짓고, 식량을 구하고, 텃밭을 일구고, 물고기 낚시를 하는 것 등으로 육신을 돌보았다면,
그는 고요한 아침 나절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또 숲속을 방랑하며 나무와 동물들
을 관찰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면서, 영적인 성숙을 위해 노력했다. 몇평남짓한 오두막집을 짓
고 이 자연친화적 삶을 살겠다는 아이디어는, 그 후 많은 미국의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닮은 삶을 살아가려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2년 2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20대의 한창 나이를 군에서 보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세속에서 2년 2개월과
단절된 공간에서의 그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물론 소로우가 보낸 숲속의 생활만큼은 아닐지
라도, 그와 상당히 닮아 있는 시간일 수 있다. 강원도 전방 고지에서 보낸 시간들은 소로우의
삶을 체험해보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그때, 그 깊은 산속에서 나는 <월든>을 일부러 찾아 읽
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래서 그때, 나도 소로우를 조금은 흉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외부와 떨어진 자연속에 파묻혀 있었건만, 군대라는 생활의 제약
상 무수한 인간관계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기에, 그 실험은 실패였을게 분명하다. 아무튼, 그
의 <월든>을 감명깊게 읽은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그 삶속에 녹아있는 `자유분망함'을 갈망
하고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지닌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막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p.89


소로우 같은 삶을 오늘날 실천할 수 있을까? 오직 성공을 위해 달려나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겐
꿈같고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더 많이 가져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인간이
다. 어느 시대에나 돈과 권력은 인간이 탐내기 가장 쉬운 것들이었다. 비단 오늘날만이 아니라,
소로우의 시대에도 더 많은 소유를 통해 더 많은 노예를 갖고, 인디언을 몰살해서 그들의 땅
을 빼앗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이
다. 어찌보면, 소로우의 삶은 기행과도 같은 것이다. 더 많이 가질 수록 더 많이 행복한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돈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인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억
제대책을 기안했던 고위 공직자들이 강남에 아파트를 두채씩이나 가지고 있다해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격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거기엔 사람들의 은근한 시샘도 내포되어 있다. 그만큼
오늘날이나 몇백년전이나 소로우의 삶은 과히 누구나 실천하지 못하는 `소유'를 포기한 `존재'
중심적인 삶이다. 영적인 성장이 없이 물질적인 풍요만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삶은 소로우에겐
진정 사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는 데는 우리는 얼마나 즉각적입니까? 그러나
정신의 배고픔과 갈증을 충족시키는 데는 얼마나 느립니까? 너무도 현실적인 종
족인 우리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서는 차마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없
습니다." p.79


20대엔 혼자가 참 좋았다. 혼자가 마음 편하고 홀가분하고 간섭받지 않고 자유스러웠다. 그러
나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게 아니란걸 느낀다. 누군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평화롭고, 그
렇지 않으면 불안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다
고 얘기한다. 그러나 소로우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일평생 구
도자의 길을 갔던 소로우의 영혼의 깊이는 고독을 상쇄시키고도 남았겠지만, 우리같은 사람이
야 어디 그렇겠는가? 그러나 소로우의 말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에 닿아 있다. 언젠가
사람은 결국 혼자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결정적인 부분들에선 타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고 혼
자서 감당해 내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이 있다. 외롭다는 생각은 아마도 영혼의 더듬이가
오직 인간만을 향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 내가 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짜로 고독한 것은
혼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소로우는 이렇게 자신의 영
혼의 풍성함을 설명한다.



" 내 집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 나절이면 더욱
그렇다. 나의 상황을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다. 마
치 웃는 것 같은 특유의 소리를 내며 크게 울어 대는 저 아비새나 월든 호수가
외롭지 않듯이 나는 외롭지 않다. 저 외딴 호수에게 대체 어떤 벗이 있겠는가?
태양 역시 홀로 있는데, 안개 낀 날에는 간혹 둘로 보이는 때도 있지만 하나는
가짜 태양인 것이다. 신 역시 홀로 존재하지만 악마는 홀로 있는 법이 없다.악
마는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며 그 무리는 수도 없이 많다. 초원의 한 송이 할미
꽃이나 민들레, 콩잎, 괭이밥, 등에, 땅벌이 외롭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
도 외롭지 않다. 샛강이나 지붕 위에 풍향계, 북극성, 남풍, 4월의 소낙비, 정
월의 해빙, 새로 지은 집에 든 첫번째 거미가 고독하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
다." p. 72



소로우는 19세기 미국의 동양인으로 불린다. 그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들은 인도의 종교
서적들이다. 힌두서적인 <바가바드 키다>와 <마누 법전>을 그는 평생 읽고 명상했다. 소박
하고 자연친화적이며 영적인 삶은 이런 그의 사상에서 나왔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그러나
아무런 종교적 편견없이 그의 저서들을 대하면, 그의 사색들이 심오하면서도 독자의 마음
을 편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쁘고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사회의 정글에서 살아
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소로우는 깊은 가르침을 준다. 본말이 전도된 세상에서 인간은 자
신의 본질을 망각하기 쉽상이다. 200년전 소로우가 세속을 거부하고 산속의 오두막으로 들
어간 이유는, 삶을 제대로 누려보기 위해서였다. 영혼이 아니라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
이란 그저 삶의 유지일 뿐이지, `향유'가 되지 못한다. 소로우의 삶을 그대로 우리가 빼
닮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오늘 나의 삶을 반성하고 되돌아볼 기회는 된다. 그리고 기
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이 답답한 세속에서 벗어나 그처럼 자유분망한 생활을 꾸려가보며
생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절대적인 공감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대지가
봄기운으로 넘쳐나는 이때에, 영원한 자연인 소로우를 다시 만나게 돼 기뻤다.




200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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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류의 서적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문학이라고 하면
뭔가 무겁고 진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진리는 어려운 글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낯익은 일상을 담고 있는 글들에서 오히려 삶을 새롭게 발견
하는 위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올 봄에 읽은 두 권의 서적은 그 좋은 본보기다.
<내 생애 단 한번>과 <문학의 숲을 거닐다> 마음에 와닿는 작가를 만나기는 힘들 일이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결국엔 저자의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이다. 삶과 글이 건강한 삶의 자세와 조화를 맺고 있는 그녀의 글에는 당당함과
명징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그런 삶의 자세를 갖기까지 문학이 그녀에게 준 위안과 용기
가 어떤 것인지 이 책들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내 생애 단 한 번>이 그녀의 삶이 담겨
있는 일상사의 에세이라면, 신간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고전이라는 테마안에서 문학과
일상을 뒤섞여 거대한 바다와 같다는 고전들의 숲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모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그녀의 문학 칼럼을 모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의 출판은 좀더 늦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로 발병한 암 때문에, 저자가
불가피하게 연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번도 빠짐없이 써오던
기사를 어느날 중단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글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섭섭함 같은 것과 더
불어 그녀의 안타까움을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마지막장을 채우고 있는 `문학의
힘'이란 글에서였다. 그리고 글 속에서 평범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굴곡진 삶을 약간은 엿
볼 수 있게 된다. 장영희 님의 아버지 고 장왕록 박사는 유명한 번역가이다. 아버지를 따라
그녀도 번역가로 활동중이고,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어 교과서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화려한 성공에는 더불어 이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이면들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할 것 같다. 오히려 많은 삶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은 다양하다. 읽어본 책들은 저자의 소개에 반가웠고 새로운 책들에
대한 언급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책을 가까이하던 시절에는 나도 고전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 시절에 나의 손을 거쳐간 작가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스토옙
스키다.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그의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읽었을 때의 감흥의
기억들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과거 내가 지나쳐온 문학의 숲
길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다시금 돌아가고 싶기도 한 시절이다. 무언가에 순수하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것이 곧 열정이고 그 열정이 식었다는 것은,
삶에 그만큼의 생기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고전읽기에 대한 독려로서 비춰지는 장영희님
의 책. 일반독자들을 너무 고려한 나머지 때로는 당의정의 당도가 너무 지나친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지만, 소개글을 읽고 그 책을 한번쯤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전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추스려보면, 한번쯤 다시 읽고 싶단 책들이 있다. 그러나
책을 잡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책장의 먼지낀 책들만 먼발치서 바라
보고 그냥 지나친다. 내게 그러한 책이 몇 권 있는데,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이나
허만 멜빌의 <백경> 같은 책들이다. 고전은 읽을때에는 힘에 겹지만, 그러고보면 가장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에 남겨지는 책이다. 올해는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나는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겨지는 책을 읽고 싶다. 강렬한 자극을 받고 싶은 것이다.


-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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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서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었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p.318)



2005.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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