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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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은 1989년에 발표됐다. 이 작품은 그에게 부커상을 안겼고, 그는 일약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게 됐다. 1982년 첫 작품을 발표한 이후로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작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행운이다. 소설를 읽으며 작가의 기질이나 인생을 상상하는 것은 초보적인 비평가에게나 가능한 고질적인 유혹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작가의 성격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경향이나 문화,예술적 취향을 읽게 된다. 상상의 작품 안에서도, 결국 문장안에 감추어진 지문같은 성향을 파악할 수 있고 결국 그것이 작가를 설명해주는 요체가 되곤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속에 등장하는 대저택 달링턴 홀을 관리하는 집사 스티븐스는 20세기 인물이라지만, 시쳇말로 `천연기념물' 같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20세기 초 평범한 영국인의 시선속에서도 그의 고지식한 성향은 자주 비꼼과 이해불가의 영역으로 치부되고 있어서다. 일이란 영역 이외에는 대화의 소재도, 취미도, 철학도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은 마치 피가 흐르는 인간이 아닌 심장이 없는 로봇처럼 그려진다. 소설의 문체는 주인공 스티븐스의 성향을 그려내기에 알맞다. 꾸밈과 화려함이 절제되고 그 자리를 지루한 만연체의 문장이 자리잡는다. 어떻게 저렇게 지루한 문장을 그렇게 성실하게 끝없이 쏟아낼 수 있을까, 할 정도다. 좋게 보면 성실함이요 달리 보면 무료함 아닌가. 내가 작가의 기질을 소설 문장안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즉 소설 속 고지식한 집사 스티븐스를 닮아 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가문이 200년 동안 소유하고 있던 대저택에서 수십 년간 집사로 일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이 집도 미국인 부호 패러데이 어르신에게 팔렸다. 달링턴 홀에서 일하던 많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남은 사람은 집사인 그를 포함해 겨우 4명에 지나지 않는다. 새 주인 패러데이는 `웅장하고 유서깊은 이 저택에 손색이 없는' 새 직원을 뽑아보라 하였지만, "요즘 시절에 만족할 만한 수준의 직원"을 찾아 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패러데이는 어느날, 스티븐스를 불러 자신이 미국에 돌아가 있는 5주 동안 집에만 있지 말고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한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이 권유를 받고 집을 떠나 여행하는 6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티븐스는 6일간 여행하며 그 여정을 그리진 않는다. 그 여정 가운데서, 자신이 달링턴 홀에서 보낸 일생을 꼼꼼히 소설속에 복기하고 있는게 이 소설의 구성적 특성이다.  6일간, 여정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달링턴 홀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찾아가 달링턴 홀로의 복귀 의사를 타진해 보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 둘은 한때 `밀당'을 즐기던 상사와 부하였고, 결혼 적령기의 남녀였다.  켄턴 양은 수십년 전, 청혼을 받아들여 결국 달링턴 홀을 떠났다.  켄턴 양은 얼마전 스티븐스에게 결혼 생활을 끝장내고 달링턴 홀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만약 그들이 재회 한다면 황혼의 로맨스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업적 소명의식이 남다른 사람이다. `집사'라는 직업은 21세기 독자들에게 낯설다. 가끔 드라마 속 조연이 맡은 구성적 설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 단어는 그대로 한 시대로 건너뛰는 타임머신 역할을 해낸다. 20세기 초반, 영국 귀족 사회의 잔재처럼 비춰지는 `집사'라는 직업은 이미 이 소설안에서도 그 생명력을 다한 듯하다.  주인공을 제외하고, 귀족가문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소명보다는 하나의 직업으로 자신의 일을 치부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스티븐스의 직분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르다. 그는 집사라는 직업에서 `품격'과 `위대함'이란 수식어를 끌어오며, 그것에 걸맞게 살아가려 전 인생을 건다. 그가 지금 청춘을 다 흘려보내고 노년에 이르러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품위 있는 집사'가 무엇이냐다.


품위와 위대함을 지닌 집사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전문적 역할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첫째는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다. 둘째는 집사로서 프로페셔널한 지식과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셋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스티븐스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이 원칙들을 지켜내기 위한 고단한 여정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가 일생 모셨던 존경받는 달링턴 경은 훗날 나치 부역자로 알려졌고, 말년에 재산과 명성을 모두 잃고 몰락했다. 스티븐스는 프로페셔널한 집사였을망정, 켄턴양이 자신에게 보내오던 관심과 사랑, 질투를 파악하지 못하는 목석연이었다. 스티븐스가 직업적 소명의식에 매몰 돼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아버지의 임종조차, 달링턴 홀의 업무를 핑계로 미루어버리는 일이다.


"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뵙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139쪽,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그의 아버지 또한 일생 품위와 위대함을 몸소 실천하신 업계 최고의 집사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말년 그는 아들 스티븐스가 일하는 달링턴 홀에서 허드렛일을 보조하다 자주 실수를 연발해 원성을 산다. 더군다나 뇌경색으로 임종하는 순간까지 아들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만을 내뱉지 않는다. 스티븐스는 주인 달링턴 경의 나치부역을 지금껏 옹호해 왔다. `위대한 집사'는 주인의 가치판단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제외하고, 이 소설속에서 그 누구도 스티븐스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은 없다. 한때 그의 청혼을 애타게 기다리던 켄턴 양은 스티븐스의 침묵과 목석같은 태도에 실망하고 그를 떠난다. 


스티븐스는 일생 주인에 대한 복종과 믿음, 일에 대한 헌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소명의식만으로 살아온 것이다. 황혼에 이르러 떠난 6일간의 여행에서, 그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제서야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로 살아오는 동안, 젊은 시절의 사랑도, 아버지의 임종도,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하지만, 스티븐스가 삶을 돌아보는 자세는 회한보다는 여전히 집사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은 위대한 신사들을 자신이 모셨다는 자부심에 가닿고 있다. 스티븐스는 인류가 계급간 투쟁과 희생을 통해 쟁취해낸 인권, 민주주의, 자유, 권리라는 가치를 모두 무시하거나 소홀히 생각하는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282쪽


스티븐스는 이 소설속에서 그 성격이 전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과거의 삶을 생각하며 작은 흔들림과 의심에 매몰되다, 곧바로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삶을 스스로 인정하고 만족해 한다. 그는 계급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는 전근대적인 인물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 순종적인 사람이다. 이 소설의 끝은 스티븐스가 새로운 주인인 `페러데이 어르신'에게 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끝난다.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사심없고 성실하며 충성심이 강한 주인공을 보며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나치 부역자 `아이히만'이다. 1960년 체포되어 법정에 선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주위를 놀라게 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에게서 `악의 평범성'이란 철학적 문제를 건져올린다.


그는 나치 부역자로 일하며 죄책감보다는 직업적 소명의식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내적 갈등 없이 관료주의 안에서 업무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기술적인 임무에 충실했다고 발언한다. 아이히만,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권위와 권력에 복종하는 경향이 짙고, 그 주요한 무대가 직업 현장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난 작가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를 이 소설에서 구현했다고 보진 않는다.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스티븐스이라는 이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인물에겐 보편적이며 숭고한 미덕이 존재한다. 더불어, 이 작품의 특별한 가치를 찾는다면 단연 평범한 사람들의 황혼에 찾아들기 마련인 회한의 감정에 대해, 작가가 어떤 위로와 격려의 근거를 해명하면서 독자를 위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300쪽


누구나 인생의 황혼에 도달하면, 자신의 삶을 후회하기 마련이다. 스티븐스처럼, 믿고 신뢰했던 주인이 나치 부역자로 허망하게 몰락했을 경우, 그 허탈함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집사로서의 품위와 위대함은 휴지조각이 돼 버린 상황이 아닌가.그럼에도 스티븐스는 마음을 추스리고 `진실되고 가치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모든 사람이 스티븐스가 모셨던 달링턴 홀의 방문객 같은 역사적 인물이 될 순 없다.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삶의 실체다.  반복되는 출퇴근길, 분주한 업무, 갈등과 희열, 소시민의 삶, 늙어감, 황혼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이 약속하는 소소한 과정이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 있는 나날>속 주인공 스티븐스를 통해,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 삶에 깃든 품격의 정체'를 해명하려 한다. 그것은 스티븐스가 소설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헌신, 성실과 열의를 통해 구현될 수밖에 없다. 고지식하고, 재미없고, 모든 걸 희생하며 지나온 스티븐스의 삶에는 시간이 지나도 상실되지 않을 귀중한 삶의 가치들이 담겨 있다. 어느 분야에서나 우리는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인정받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빈틈없이 완벽한 삶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황혼에 다가서면 삶에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켄턴 양이 짝사랑했던 스티븐스를 떠나 사랑하지 않았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이제는 그 오랜 시간속에서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고 스티븐스에게 고백하듯이, 삶의 오답이 때론 삶의 정답인 것이다.  이 작품은 평범함 속에 그 신비를 품어안은 삶의 요체를 해명하고 위로를 던지는 따뜻한 소설이다.  단, 구성과 문체가 스티븐스의 삶을 닮아 있는 듯하다. 느리고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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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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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을 처음 만난 것은 소설 <28>을 통해서다. 인수공통 전염병으로 한 도시가 봉쇄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묵시록적으로 기록해낸 작품이다. 소설의 첫인상이 꽤 좋았고 신선했다.  순수소설과 장르소설의 경계를 오가며, 그의 글쓰기는 소설읽기의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 뒤 해에 읽은 <7년의 밤>은 근래에 보기드문 짜임새 있는 플롯과 서사의 긴장감이 독자를 빨려들게 했다. 그의 작품성과 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세번째 그의 독자가 되었다. 오래전 사놓고 책장에 잠들어 있던 신작 <종의 기원>(은행나무, 2016)을 잡았다. 소설 읽기를 한동안 못했고 또 이전에 읽은 두 편의 소설이 꽤 완성도가 높았기에, 기대가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잡은 정유정의 세번째 소설 <종의 기원>은 전작들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듯 보였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꽤 좋은 평가를 받고 문학상을 안겨준 청소년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가 수작이었다면, 네번째 소설에서 그는 소재와 주제의식의 빈곤, 고질적인 문제인 문장의 투박함과 감수성의 부족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28>과 <7년의 밤>에 대한 나의 서평은 극찬에 가까웠다. 그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소설을 집필했다. 미스터리를 통한 긴장감의 유발, 책을 놓지 못할 정도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건 전개의 박진감은 그의 특기였다. 또, 개성이 강한 악인의 등장과 잔혹한 설정과 묘사는 이야기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었다.


신작 <종의 기원>에서도 그의 특기는 여지없이 발휘된다. 그럼에도, 그 모든 그의 특기는 이 소설에서 빛을 발하지 못한다. 전작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집필방식의 매너리즘이 아닐까, 하고 의심이 갈 정도다.  매번 개성있는 인물을 빚어내던 그의 좋은 장기는 공교롭게도 이 작품속에선 개성이 아닌 기시감을 느껴질 정도로 친숙한 인물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악인의 탄생'을 시연하고 만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듯한 작가는 우리의 진화가 `평범한 악을 예외없이 모든 인간의 유전자 속에 내재시킨 채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는 <종의 기원>을 통해, 그 악이란 본성을 사이코패스 가운데서도 최상위 등급인 `프레데터(포식자)'의 성향을 가진 등장인물 `한유진'을 통해 그려보이길 `희망'했다.  한유진은 어린 시절 의사인 이모의 관찰에 의해, 그 성향이 `발각'되고 만다.  그 이후 유진은 철저하게 포식자의 성향을 억누르는 약을 복용하며 엄마와 이모에 의해 `관리'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고 만 유진은 그 약의 복용을 피하게 되고 결국 `프레데터'의 본능을 발휘하게 된다. 이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는 유진이 그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하려 하지만, 결국 유전자에 내재한 악의 본능을 목격하고 그를 애틋함과 증오의 감정으로 지켜본다. 


이 작품은 영리하게도 1인칭 시점을 통해 유진의 관점에서 자신의 악을 합리화시키고, 자신을 지켜보는 엄마와 이모의 관점에 대한 독자의 오해를 유인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트릭'으로 독자를 유진의 주관적 인지속에 가두어두면서 악의 실체를 교란시키는 관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진의 아버지와 형을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만, 유진의 비행에 대한 엄마와 유진의 관점 차이에 있다.  형을 종탑의 꼭대기에서 일부러 밀쳐 죽게 하였다는 시각은 엄마의 것이다.  반면, 유진의 주장은 형의 실책으로 벼랑으로 떨어진 것으로 서술된다. 이 두 관점이 연이어 서술되며 독자들은 누구의 관점을 신뢰할 것이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무죄와 무고를 주장하는 소설의 서술자 유진은 독자의 판단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이 소설이 유진의 관점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착시효과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그대로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죄책감과 동정심,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살인의 과정에선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범행을 감추기 위해 위장과 거짓말을 일삼을 때, 그는 매우 천재적인 감각과 연기력을 발휘한다. 모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기합리화에 능숙하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악을 자행하는 유전자의 명령앞에선 그것은 무용지물이며 순응적이 된다. 작가 정유정은 이러한 악에 대한 유진의 경향이 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진화하면서 경쟁자인 그 누구를 제거하려는 것은 진화적 유전자가 품고 있는 인류의 비극 같은게 아닌가, 묻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학문적으로 범죄심리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정신병리학의 지지를 받는다. 작가 또한 이 작품을 쓰기 전에, 그같은 학문적인 감수를 거쳤음을 밝힌다.  유진을 작가는 이 소설속에서 `프레데터'로 그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공감능력이 상실된 냉혈한을 그리려던 본래의 목적이 빗나가면서, 그 이름만큼이나 유순하고 동정적인 프레데터로 그려지고 말았다. 이것이 이 소설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이유라고 본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작가가 그리고자 한 프레데터는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특히 매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그 무수한 엽기적인 사건의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면, 차라리 <종의 기원>속 유진은 사이코패스에는 끼지도 못할 지경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사이코패스 혹은 프레데터들이 권력을 틀어쥘 때가 아닌가?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생전 `과학이 인류의 지적 능력을 증거하고 그들을 진보시켰지만 어디까지나 인류의 미래는 그 과학을 다루는 인간의 자정능력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이미 인류는 지구의 도시들을 수천번이라도 반복해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를 비축해 놓은 상태이며, 미래에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의문을 표한적이 있다.  항상 우리는 21세기를 말하며 인류의 진보를 얘기해 왔다.  20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치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사기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 잔혹한 세기를 겪고나서,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매일 아침 핵전쟁을 입에 달고 사는 프레데터들의 거친 입씨름을 모닝 뉴스로 마주한다. 


정유정이 3년만에 내놓은 작품 <종의 기원>은 감히 역사적인 고전의 제목을 차용하면서까지 작품의 무게감과 문제의식을 자신있게 드러내놓았다. 작품의 제목이야 작가 맘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작품명을 차용할 땐,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는 있겠단 생각이 든다.  <종의 기원>이 과연 이 소설의 제목으로 알맞은가?  독자인 나로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인간진화에 내재한 채 공진화하는 인류와 악의 관계는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였다. 기원전부터 맹자와 순자는 성선설과 성악설로 논쟁을 일으킨다. 매번 악한을 등장시키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이야기 전개의 핵심축으로 설정하며, 치밀하게 묘사한 긴박감 넘치는 서술은 정유정 소설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매번 소설을 그렇게 써 나간다면 독자는 기시감과 식상함을 느낄 수 있다.


성급하게 작품을 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껏 내놓은 작품들로도 충분히 그는 실력있고 색깔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가 최근에 펴낸 작품들은 그 어떤 유명 작가들의 인기에 비할 바 없는 독자를 끌어모았고,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이제 정유정 작가가 매번 재탕에 가까운 스타일을 보여주기 보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느리고 진중하게,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글을 써 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지난 서평에서 아쉬움으로 남겨두었던 문장의 감수성이란 소설 읽기의 흥미와 박진감을 넘어,  철학을 담아내고 인간의 고민을 찾아내는 글쓰기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쓰는 것보다는 읽기에 치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어야 한다.  독서를 게을리 하면 글도 새로움을 잃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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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자 (양장) - 버려서 얻고 비워서 채우다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7
노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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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을 때의 인상적인 느낌은 공자가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는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제자들에게 언성을 높이며 호통칠 땐, 평범한 스승으로 다가왔지만 덕(德)과 인(仁)을 강조하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질 때 진정 성인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문명사에서 공자가 예수나 부처, 소크라테스와 함께 4대 성인으로 추앙받아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논어>에서 도덕적이자 완벽한 인간에 대한 이상형을 설정하였고 그것은 곧 공자로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동양의 모든 도덕적 가치가 <논어>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인할 순 없다.  그는 내세를 관장하는 귀신에 대해선 경원(敬遠), 즉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말함으로써 완벽한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유토피아가 있다면 공자는 내세가 아니라 지금 바로, 지상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당대 최고의 성인이었던 공자와 노자라는 인간의 만남이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싱겁고 놀랍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예(禮)를 묻는 공자에게 일장 훈계조로 노자가 내뱉은 몇 마디 말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마천에 따르면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와서는 제자들에게 노자를 묘사하면서 그를 용이란 영험한 존재로 신비화시킨다. 사마천의 <사기> `노자한비열전'을 읽은 독자들은 이 뜻밖의 만남과 평가에 대해 주목할 것인데, 그것은 동양에서 신비주의적 아우라를 뽐내는 사람인 노자의 등장 때문이다. 

노자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현인인 공자에게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그 말을 하기 전에, 공자의 뒷통수를 따갑게 만드는 말을 한마디 곁들인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히 숨겨두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하고 하였소"  노자의 말은 공자가 그 반대로 살아왔다는 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온 공자가 제자들에게 노자와의 만남을 서술하는데, 그 기록이 정확하다면 우리는 공자의 인내심을 통해 진정 그를 성인으로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새는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中

이런 정황을 통해, 사마천은 노자를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인식한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2500년 전 이야기다.  신약성서가 나오기 약 500여년 전 중국 대륙에서 태어난 노자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던 사관(史官)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천의 이야기일 뿐이고, 노자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노자의 저술로 알려진 <도덕경>은 지인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쓰여졌다고 알려졌지만 그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현재 <노자>라는 저술은 5,200자의 단어로 중국 고전 가운데 가장 적은 글자수를 기록한다. <한비자> 같은 저술이 10만자를 넘는 것을 볼때 <노자>가 얼마나 적은 문장으로 인생론,정치론,우주론을 담아냈는지 알 수 있다.  

글자수가 적고 산문이 아니라 시어로 기록되다보니, 해독이 난해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특히, 공자가 그를 용이란 존재로 신비화 한 것은 괜한 호들갑이 아니었다.  그 의미가 불명확한 도(道)를 사상의 중심에 두고 있는 <노자>를 사마천은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단정지었다.  현대의 독자들이 그 난해함에 안도하고 노자를 읽어야 할 이유기도 하다.  <노자>의 5200자를 해설한 주석서가 283종이나 되는 것은 고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가졌는지 단적으로 증명하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노자의 언어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반어와 역설로 점철된 문장들을 통해, 삶의 정체와 진실에 다가서는 모양새는 무릎을 칠 정도의 탁견으로 가득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와 세계, 우주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도가 말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이 이름 지을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 노자 전체 81장 가운데 제 1 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노자의 철학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무위(無爲)라고 명할 수 있다. 무위란 작위의 반대말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 인위를 배제한 것, 자연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했는데, 노자 1장은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한 노자의 일갈이다. 공자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말하며, 그 무엇이 되고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선 먼저 그 이름 짓는 일을 우선했다.  하지만, 노자는 어떤 개념이 언어로 포장되는 순간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진다고 역설한다. 도(道)가 만물의 본질이라면 인간의 언어는 그것을 담아낼 수 없고, 오히려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18장은 노자 철학의 역발상이 분명히 드러나는 구절이다.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아버지,자식,형,동생,남편,아내,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大道廢 有仁義 (대도폐 유인의) 六親不和 有慈孝 (육친불화 유자효) 國家昏亂 有忠臣(국가혼란 유충신)"  이 모두는 공자의 유가철학에서 가장 강조되며 일생 소중히 여겨야할 가치로 등장하지만, 노자철학에선 그것이 등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같은 가치가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인과 의,효과 충을 북돋을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자연의 이치(道)를 따르지 않았기에 제도와 예법이 생겨났다는 역발상적 해석에 가닿는다.  

<사기> 노자 편을 마무리하며 사마천은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고 적었다. 18장을 보면, 공자의 반대편에서 정확히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노자가 보인다.  

처세론과 인생론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을 보자.  22장 "굽으면 [도리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아지며, 움푹하게 되면 채워지고, 해지면 새로워지며,[지식이] 적으면 얻게 되고, 많아지면 미혹된다"  23장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希言自然(희언자연),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그것들을] 이렇게 하는가?  천지(자연)이다. 58장 "화란 복이 기대어 있는 바이며, 복이란 화가 엎드려 있는 바구나. 누가 그 궁극을 알겠는가?  아마도 정도라는 것은 없으니, 정도가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선함이 다시 요사스런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된 그날들이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이 때문에 성인은 반듯하지만 가르지 않고, 예리하지만 상처주지 않으며, 올곧지만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지만 번쩍거리지는 않는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살고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역설과 반어속에 세상 이치가 들어 있는 문장들이다.

노자는 공자의 철학과 상극처럼 보이나 71장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서술에서는 반갑게도 그 의견이 일치한다. [스스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최상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병이다. 知不知上(지부지상) 不知知病 (부지지병), 오직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병이 아닌 것이다. 성인은 병이 없으니 병을 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병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공자의 <논어> 위정 편과 대구를 이룬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을 가르쳐줄까?  어떤 것을 알면 그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 是知也(부지위부지 시지야)"

노자의 정치론을 보자.  "가장 뛰어난 자[군주]는 그가 있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지 못한다. 太上(태상) 不知有之(부지유지), 그 다음은 [아래 사람들이] 그를 가깝게 여기고 기린다.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그를 업신여긴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란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즉, 정치에서 최고의 단계는 백성들이 정치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 말은 현대 대의민주주의와는 좀 맞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권력을 위임한 통치자를 감시하는 것이 유권자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치자의 자질이나 능력,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면 국민은 먹고사는 일에 보태어, 정치와 정치인을 감시하는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 여러모로 피곤하다.  노자는 최고의 정치란 백성이 신경쓰지 않아도, 그 정치와 사회가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상황에 대입해도 탁견이다. 

5200자의 언어로 이루어진 <노자>안에는 반복해 읽고 읽을수록 뜻에 가닿고, 이치에 맞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간략히 소개한 문장들은 그저 맛보기에 지나지 않고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 한없이 눈에 들어온다. <노자>라는 책은 반어와 역설, 그리고 역발상을 통해 도(道)를 해명하고 있다.  도는 인간을 초월해 세계와 우주, 작게는 사회가 운행되는 길을 말한다.  공자가 인과 예, 덕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해, 이상적인 사회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노자는 인간의 노력 자체가 오히려 일을 방해하고, 망친다고 보고 있다.  노자는 자연(自然)처럼 `스스로 그러함'을 숭상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꾸민다는 것이지만, 궁리하여 잘못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때, 우리는 자연이 운행되는 이치로 눈을 돌리게 된다.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제국은 통일하였지만, 불로장생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통일이 작위라면 죽음은 자연이다.  인간의 삶은 자연을 거슬러 작위를 추구하지만 결국엔 그 한계를 깨닫기 마련이며 누구도 그러한 이치를 거스르지 못한다.  <노자>철학은 물의 철학이라고 빗대어진다. <노자>의 유명한 명구인 "上善若水(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비유 때문이다.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언명한 것은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것이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물은 만물을 생육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둘째,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의 성질은 순서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비유할 때, 우리는 물과 같다고 쓴다. 셋째,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점이다.  즉, 가장 낮은 곳에 임한다.  물은 높은 계곡을 지나 강을 건너 땅보다 낮은 바다로 향한다. 물을 통해 우리는 노자가 말한 물의 덕을 배운다.  노자에게 자연은 인간이 닮아가야 할 도의 표본이며, 교과서이다.

<논어>에 이어 <노자>를 읽었다.  사실 읽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일생 곁에 두고, 계속 읽어가야 할 책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맹자><묵자>,<장자>,<순자>,<한비자> 등 아직 섭렵하지 못한 책들로 눈을 돌리게 된다.  동양철학이 가진 오묘한 이치와 논리를 맛보는 것 자체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즐거움이자 쾌락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을 읽는 이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이 지혜를 주고 있어서기도 하지만, 내 독서의 가벼움을 질책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있다. <논어>와 대척점에 있는 <노자>를 읽으며 독자는 진리의 상대성을 배운다.  우리의 독서가 그 경계를 허물고 끝없이 확장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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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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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언가에 얽매여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숙명이자 의무이고 존재의 기반 같은 것이다. 그런 고달픔을 잠시 잊기 위해 우린 짧은 여행을 자주 하곤 한다.  3년간, 자기의 근거지를 벗어나 먼 해외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별로 없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의 생활이란 힘들기 마련이다. 하여, 이것은 꼭 생활의 여유와도 관계가 없는 문제같기도 하다. 자기 인생을 주도하고픈 철학이 없는 사람에게 3년이란 긴 여행은 상상할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37살, 이제 막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던 시기 일본을 떠나 외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품었으니 그것은 여행이었으나 하루키는 해외에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상주하는 길을 택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상주여행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주로 상주한 곳은 과거 서양 문명의 중심지였던 그리스와 이탈리아였다. 1980년대 후반의 일이었으니 아무리 일본이라 해도 해외여행이 그렇게 붐을 일으키기 전이다.  하루키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글쓰는 장소를 바꿈으로서 작품에 그 기운이 스며들기를 원한 듯 하다. 3년간 유럽을 떠도는 동안, 그는 작가인생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둔 작품 두 편,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썼고, 수 편의 외국 작품을 번역했으며, 틈틈이 자신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겨 귀국 후 여행스케치를 책으로 펴냈다. 그 여행의 기록이 바로 <먼북소리>(문학사상사,2003)다. 


하루키 여행담은 초보적인 여행기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모두 피해간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범한 일상을 꾸밈없이 그려나간다. 그것은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세계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백하게 포착한다. 아내와 자신, 단 둘이 그리스의 주요 섬들,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정주하는 과정과 일상을 적었다.  작업용 워드프로세서와 감상용 작은 오디오를 품에 안고 남유럽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글을 썼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이국적인 풍광들속에 휩싸여 그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키는 여행자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경험을 소설을 쓰는 틈틈이 기록했다.


잠시 정주한 곳에서 하루키의 일상은 비슷비슷하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숙소를 구한다. 숙소는 셋방이거나 때로 호텔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벽한 숙소는 없다.  난방이 안 되거나, 뜨거운 물이 안 나오거나, 무엇이 고장이거나, 영국에 잠시 거주할 땐 반지하에 살면서 글을 썼다.  숙소의 문제가 해결되면 먹거리가 고통이다. 각 지역마다 입에 맞는 음식을 구해 요리해 먹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스의 섬에 상주할 때는 음식 구하는 일이 날씨와 연관돼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면 상점은 문을 닫고, 레스토랑은 싱싱한 재료를 구하지 못해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지 못한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상당 기간 체류하는 여행으로서 포착해 낼 수 있는 문화,정치,사회적 풍경들을 맛보는 것도 흥미롭다.


하루키의 글에 나타난 그리스 사람들의 특성은 외지인에게 호기심이 많아 때로 귀찮아 질 때가 많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하루키를 구태여 잡아 세우며, `뛰는 이유를' 친절하게 물을 정도였다. 그들은 친절하긴 하지만, 태만하고 여유가 넘친다. 차장과 술병을 주고받으며, 그리스의 협곡을 넘어가는 버스 운전사에 대한 묘사는 코믹하면서도 아찔하다. 그리스에서 선거날 투표는 의무이며, 선거날에는 술집에서 술을 팔아선 안 된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인들이 술을 먹고 토론을 하다, 불상사를 만들어내는 일이 많아서란다.  이탈리아 로마의 불안한 치안이나 엉망인 도심의 주차질서에 대한 묘사, 형편없는 우편업무에 대한 기억 등은 하루키가 겪은 여행의 피로가 그대로 전달 되는 듯 하다.


하지만, 불편과 고통이 따르지 않는 여행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루키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행자다. 그만큼 자주 해외에 나가는 작가도 흔치 않을 듯하다.  그는 자주 여행담을 책으로 묶어 펴낸다.  최근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여행기에서 봤던 하루키의 문체는 30년 간,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일상화된 여행기로 단련돼 왔던 것임을 알게 됐다. 마라톤을 일생 즐겨왔던 것처럼, 그에게 글쓰기와 여행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속에 있었다.  이 여행기를 읽다가,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관 혹은 그의 라이프 스타일을 깨닫게 된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쓰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일정 부분 베일속에 자신을 감추어두는 작가다.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기, 결혼생활에 대해 쓴 글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 여행기 내내 동행한 아내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행기는 자신의 생각과 삶을 드러내보일 수 있는 글이다. 그럼에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하루키의 여행담속에서 난 하루키의 사생활을 잘 살펴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시선을 언제나 밖에 두고 있다. 그의 여행담이 감상적이지 않고 객관성을 갖는 이유인 듯 보인다. 자신의 사생활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 결혼 생활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정치적인 견해나 사회적인 발언을 삼간다.  그리스 여행 중, 세계 분쟁 소식에 대한 신문을 집어들고 하루키가 내뱉는 이야기는 겨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야" (297쪽) 정도다.  그 정도의 발언은 고등학생도 속삭일 수 있는 수위다.  


"세계는 피로 물들고 여기저기서 사망자가 속출하며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날마다 로도스 해변가에서 버찌를 먹으며 일광욕을 하고 있는 동안에...(중략)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지 않다. 나는 로도스 섬에 있다. 여러가지 사정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해변의 의자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면서, 버찌를 먹으며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는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일종의 기정 사실로서." 405쪽, <먼북소리>


하루키는 이 여행기 가운데서, 절박하게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몇 번 짧게 언급한다. 장편 소설을 쓰면서 갑자기 이 소설을 완성하기 전까진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매몰된다. 지금 쓰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엄밀히 말해 내 인생이 아닐 것이라고, 비록 이 작품이 문학사에 남는 명작이 아닐지라도, 그는 그 순간 글쓰는 일의 간절함에 빠져든다. 하루키는 3년 동안, 여행하고 글만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동양인으로서, 남유럽의 풍경속에선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그 이방인의 시선으로 수천년 문명속에 담겨진 유럽 문화와 삶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의 여행기는 음식과 음악, 문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중시한다. 매번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그 장소의 별미를 즐기고, 당대의 유명 지휘자의 연주를 놓치지 않으려고 추위에 떨며, 몇시간이고 표를 구하려 줄을 서기도 한다. 1980년대 이 정도의 문화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레스토랑의 특색과 맛을 품평하거나 현지에서 직접 찾아가 듣는 클래식 연주회의 지휘자와 연주자의 특색을 비교,서술하는 장에서 나는 하루키가 이 여행기를 통해 결국 드러내고자 하는 글쓰기의 `전략' 혹은 독자에 대한 마케팅 방식을 읽어낸다. 즉,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중적인 글을 쓰면서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경험들을 열거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일생 자신의 일상을 벗어난 긴 여행을 꿈꾸거나, 다른 세계의 삶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험대신 안정을 택하기에, 떠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루키 같은 상주여행자로서의 경험은 절대로 그들의 삶의 일부분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키의 여행담을 읽으며, 이 새롭고 가능하지 못한 경험을 간접체험한다.  하루키는 정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적 특성을 이용해, 일생 여행을 꿈꾸고만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판타지'의 체험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일생은 여행하고, 글쓰고, 마라톤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좋은 레스토랑의 미식을 즐기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되기 전, 7년 동안 식당일로 생업을 꾸렸다. 그 때, 하루키는 쉴 틈 없이 바빴다.  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가게 문을 닫은 새벽 시간이었다. 첫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그는 모든 이들이 잠든, 새벽녘 아파트의 식탁 테이블 위에서 썼다. 아마도, 하루키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는 우리처럼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글쓰기와 여행을 갈망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하루키는 운이 좋고 선택받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하루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과 작가로서의 열정에 부러움을 느끼고, 감염되기 쉽다. 그는 글쓰기의 욕망에 불을 지피는 작가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면 살아가면서 계속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잃고, 세상에서 끊임없이 미움받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358쪽


우리는 떠날 수 없다. 하루키처럼 3년이란 시간을 인생에서 잘라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영원히 정주하는 인생을 숙명인냥 여기며 살아간다. 그것은 달리말해, 한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감금하는 일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루키의 여행담은 전설 같은 문장으로 신비로움을 더하는게 아닐까. 하루키는 독자들의 불만섞인 자기비하를 예상 했는지,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고 결론 짓는다. 하루키처럼 살 수는 없어도 하루키처럼 자유로운 삶에 다가설 수는 있다.  그것을 나는 읽고 쓰는 일에서 찾는다.


하루키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고행에 가까운 여행을 나섰으나 그는 여행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감금해 읽고 쓰는 일에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글 한 편을 읽고, 글 한 편을 짓고 쓰는 일의 자유와 성취감을 그는 익숙한 공간의 탈출에서 배가시키려 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컨트롤하고 세계를 보는 나름의 관점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 지리멸렬한 일상속안에서도 새로운 자유와 느낌에 다가설 수 있다. 언젠가 시간과 여유가 주어졌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여행을 떠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그 여행에서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일 것이다.  하루키는 정직하게 세계를 바라보고, 간략하고 사실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루키에게 진정 부러워할 것이 있다면 37살에 떠날 수 있는 용기나 결단이 아니다.  세심한 관찰력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호기심, 그리고 독창적인 글쓰기의 방식이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곧 삶의 자유와 기쁨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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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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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쓰는 일은 고통스럽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읽는 행위보다 쓰는 행위가 더 능동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과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글과 삶의 불일치가 글쓰기의 고통 가운데서도 가장 큰 고통이다.  그것은 달리 자기배반이다.  자기배반에 왜 들어설까?  얻을 게 있기 때문이다.  명성이거나 한 자리이거나 금전이거나, 그런 것들이다.  작가 김훈은 말과 언어가 가진 관념성에 깃든 거짓을 고통스럽게 파악하고 있다.  그는 매우 신중하게 소설을 쓴다. 유명한 일화지만 <칼의 노래>를 쓸 때, 보조사인 `은과 는'을 가지고 몇날을 고심했다는 사람이다.  

소설 <남한산성>은 이 말과 언어에 대한 작가의 또다른 고민이 얽혀 있는 작품이다.  삶과 글이 불일치하는 가장 극명한 역사의 장을 김훈은 담아내려 했다.  400년 전, 서울 땅 <남한산성>이란 고립무원의 성에서 인조와 당대 과거를 통과한 최고의 엘리트들이 나눈 말과 글이 이 작품의 핵심을 점령하고 있다. 작가는 역사적 사건의 서술보다, 이 말과 언어로 구성된 관념이 현실을 왜곡하는 현장을 포착한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더 유명한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은 그 결말이 너무나 허망하다. 2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을 징벌한 청태종은 46일간 1만 2천명으로 남한산성속에 들어가 숨어버린 조선 왕 인조를 치욕스럽게 항복시킨다. 항복의식으로 `3배 9고두' 즉 3번 큰 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게 했고 인조의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삼전도에 차려진 높은 단 위에서 청태종은 황제의 권위로서 내려다 보았다.  이 역사에서 도대체 가르칠 것이 무엇인가.  치욕말고는 없다.

임진왜란을 겪고 겨우 40년 만에 다시 겪은 참화였다. 하지만, 치욕이라고 해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볼 때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겪는 것에서 새로운 삶과 미래를 궁리할 수 있다. 소설은 김상헌이 인조의 뒤를 따라 혼자 송파강을 건너며 늙은 뱃사공의 목을 치는 장면을 인상깊게 다룬다.  뱃사공은 인조의 어가행렬을 무사히 강 너머로 인도했고 이제 김상헌의 도하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청군이 오면 그들의 도하도 도울 것이란 말을 건넨다.   인조의 행렬에서 얻은건 군사들의 강압 밖에 없었지만, 청군에게선 곡식이라도 조금 얻지 않을까 하는 무지렁이 백성의 소망이었다.  김상헌은 "이것이 백성이구나"고 개탄하며 품속의 환도를 꺼내든다.  그가 바로 조선 후기에 절개와 지조, 척화의 상징적 존재로 추앙받은 김상헌이다.

김상헌의 언어에선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이 매순간 드러난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명을 배신하고 오랭캐에 지나지 않는 청에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66세의 노대신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든 처지였지만,  끝까지 청에 맞서 항전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소설속에서 주화파인 최명길이 구차하게 써내려간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고, 임금 앞에서 최명길과 긴 논쟁을 이어가는 척화파의 중심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싸워야만 화친의 길이 열리고 싸우지 않으면 화친할 길도 마침내 없다는 논리를 편다. 이 말 뜻은, 결국 죽을 때까지 싸워보고 난 후 나아갈 길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현실은 어땠을까?  산성안에는 군민이 겨우 50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성벽에 서 있기조차 버거운 1만 2천의 군사가 있을 뿐이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143쪽, <남한산성>, 김훈 

최명길은 김상헌보다 16살 젊었다.  젊었기에 그가 실리적인 사고를 했는지도 모른다.  최명길의 언어에는 일관되게 현실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김상헌의 반대편에서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에 항복하고, 그들과 화친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언어에선 매번 자기비하가 전제 돼 있다.  명분이 아니라 뭇 생명들의 생존권이 더 앞서야 한다는 현실 논리를 내세운다. 그것을 위해선, 그 누구의 비난과 모함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를 엿보인다.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줄 아오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주옵소서"(144쪽)  최명길의 언어는 실속이고 생명이며 현실로 곧게 뻗어 있다.  

소설 속에서 인조는 주화파와 척화파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인조의 언어는 모호하다. 그는 모든 것을 듣고서 판단하지 않는다. 힘이 밑바탕 되어주지 못한 최고 권력자의 침묵의 언어는 슬프다. 임금의 무능과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심한 무력감이 극치에 달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12월에 성에 든 인조는 새해 첫날을 맞아 북경을 향하여 명의 천자에게 올리는 의식인 망궐례를 행한다.  임금과 세자가 함께 음악에 맞춰 곤룡포를 휘날리며 춤을 춰 명에 대한 공경과 복종을 표하는 일이다.  20만 청군이 자그마한 성을 포위하고, 임군의 거처인 산성의 행궁을 망월봉에서 내려다보며 홍이포를 조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조와 대신들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망궐례를 예에 걸맞게 행할 수 있는지를 놓고 난상토론 한다.  과연 동방예의지국이다.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치욕이 기다리는 넓은 세상을 향해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 것이었다."  236쪽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이 빚어내는 풍경"을 묘사하려 했을 뿐, 어떤 역사담론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가하려 한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치열하게 이분법으로 나뉜 이 소설의 서사와 자신이 거리감을 두겠다는 표현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작가의 해명처럼 작품은 차분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병자호란의 시대속으로 쉽게 빨려들어간다. 하지만, 이 전망과 희망과 힘이 없는 시대와 거리를 두고 싶은게 작가만은 아니다. 독자들 누구도 이 소설 속 그 어떤 인물도 되어보고 싶지 않고, 그 시대속에 감정이입하기 싫다.  대세가 이미 기운 상황에서 주화파와 척화파의 말싸움은 하나의 넌센스가 돼 버리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언어는 쓸모없이 진중하다.  길은 하나인데, 상상속의 길을 두개 만들어서 그것을 또 하나의 길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패기나 용기도 아니요, 절개와 지조도 아니다.

칼을 쓰는 자 앞에서 유창한 논리와 궤변으로 그 칼에 맞서려는 자는 어리석다. 하지만, 어제까지 천자로 모신 왕을 바꿔 섬긴다는 것은 유학의 나라에서 입신양명한 이들의 자기부정이 될 것이기에, 오늘의 기준으로 그들을 평가하는 것도 무리다.  지조와 절개는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어느정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정신이다.  시류와 사익에 따라 당을 옮겨다니는 정치인들을 비하하며 우린 `철새'라고 부르길 주저치 않는다. 조폭세계의 불문율은 `의리', 즉 보스에 대한 지조와 절개다.  400년 전 세상과 지금의 국제정치 환경도 다를 바 없다.  여전히 한국은 그 대상만 달라졌을 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칫밥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많은 외침을 이겨내고 나라를 빼앗기는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아직 우리의 국력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강대해지는 중국, 6.25의 혈맹 미국 사이에서 사드 배치를 놓고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다.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는 척화파와 사드를 반대하는 주화파가 건곤일척의 싸움을 일삼는다.  여기서,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순간 우리는 여지없이 병자호란의 두 대신의 상황에 처해지고 만다. 김훈은 사대는 약소국의 생존술로 그것대로 역사로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과 한국 사회가 조선시대 못지 않게 관념의 늪에 빠져 있다고 일갈한다. 그 단적인 예로, "북한이 주적이냐 아니냐"와 같은 쓸데 없는 논쟁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듣고 싶은 대답은 "북한을 주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친북이다." 정도 아닌가. 정치권에서 이 뻔한 드라마의 대사를 지겹지도 않는지 분단 60년 동안 재방송으로 틀어대고 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 46일간  당대 최고 엘리트 관료들과 답이 없는 입씨름을 하던 사이,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 청의 약탈과 살육의 제물이 됐다.  현실의 문제를 치유하고 해결할 실질적 힘도 없고, 명예롭게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용기와 기백도 없는 남한산성의 척화파와 주화파는 백성과 군인들을 남한산성에 가두고 거친 입씨름으로 시간을 허송했다. 특히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은 조선 후기의 권력을 틀어쥔 서인,노론,안동김씨 세도정치로 맥을 이으며 `절개의 의인'으로 과대 포장됐다.  실리의 길을 가고자 했던 주화파 최명길은 많은 사대부들로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자'로 낙인 찍혔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고 보면, 그깟 사대를 누구에게 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후, 조선 역사는 사대의 대상을 바꿔가며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일들'의 연속 아니었는가. 

김상헌과 최명길은 모두 사대주의자였다.  그들이 명과 청을 선택한 것은 그 두 나라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느 편에 붙는 것이 조선에 더 이익이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였다면, 나름 그들은 역사속에서 평가받아야 할 점이 있다.  세계는 공평하지 않다.  평등하지도 않다.  사회속에선 강자와 약자가 있고, 나라간에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있다.  약자로서 처신하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숙명인 경우가 많다.  영원한 강자는 없다.  하여, 영원한 사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위로를 던지자면, 그들은 시간과 죽음속에서 평등하다.  소설속 작가의 표현처럼 `치욕을 덮는 삶의 영원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삶은 명예보다, 치욕보다, 더 무겁다.  소설 <남한산성>은 약소국으로 살았던 조선의 슬픈 자화상이 깃든 작품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굴욕조차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일 같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한낱 호기이며 허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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