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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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을 처음 만난 것은 소설 <28>을 통해서다. 인수공통 전염병으로 한 도시가 봉쇄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묵시록적으로 기록해낸 작품이다. 소설의 첫인상이 꽤 좋았고 신선했다.  순수소설과 장르소설의 경계를 오가며, 그의 글쓰기는 소설읽기의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 뒤 해에 읽은 <7년의 밤>은 근래에 보기드문 짜임새 있는 플롯과 서사의 긴장감이 독자를 빨려들게 했다. 그의 작품성과 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세번째 그의 독자가 되었다. 오래전 사놓고 책장에 잠들어 있던 신작 <종의 기원>(은행나무, 2016)을 잡았다. 소설 읽기를 한동안 못했고 또 이전에 읽은 두 편의 소설이 꽤 완성도가 높았기에, 기대가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잡은 정유정의 세번째 소설 <종의 기원>은 전작들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듯 보였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꽤 좋은 평가를 받고 문학상을 안겨준 청소년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가 수작이었다면, 네번째 소설에서 그는 소재와 주제의식의 빈곤, 고질적인 문제인 문장의 투박함과 감수성의 부족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28>과 <7년의 밤>에 대한 나의 서평은 극찬에 가까웠다. 그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소설을 집필했다. 미스터리를 통한 긴장감의 유발, 책을 놓지 못할 정도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건 전개의 박진감은 그의 특기였다. 또, 개성이 강한 악인의 등장과 잔혹한 설정과 묘사는 이야기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었다.


신작 <종의 기원>에서도 그의 특기는 여지없이 발휘된다. 그럼에도, 그 모든 그의 특기는 이 소설에서 빛을 발하지 못한다. 전작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집필방식의 매너리즘이 아닐까, 하고 의심이 갈 정도다.  매번 개성있는 인물을 빚어내던 그의 좋은 장기는 공교롭게도 이 작품속에선 개성이 아닌 기시감을 느껴질 정도로 친숙한 인물이거나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악인의 탄생'을 시연하고 만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 진화론을 신봉하는 듯한 작가는 우리의 진화가 `평범한 악을 예외없이 모든 인간의 유전자 속에 내재시킨 채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는 <종의 기원>을 통해, 그 악이란 본성을 사이코패스 가운데서도 최상위 등급인 `프레데터(포식자)'의 성향을 가진 등장인물 `한유진'을 통해 그려보이길 `희망'했다.  한유진은 어린 시절 의사인 이모의 관찰에 의해, 그 성향이 `발각'되고 만다.  그 이후 유진은 철저하게 포식자의 성향을 억누르는 약을 복용하며 엄마와 이모에 의해 `관리'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고 만 유진은 그 약의 복용을 피하게 되고 결국 `프레데터'의 본능을 발휘하게 된다. 이모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는 유진이 그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하려 하지만, 결국 유전자에 내재한 악의 본능을 목격하고 그를 애틋함과 증오의 감정으로 지켜본다. 


이 작품은 영리하게도 1인칭 시점을 통해 유진의 관점에서 자신의 악을 합리화시키고, 자신을 지켜보는 엄마와 이모의 관점에 대한 독자의 오해를 유인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트릭'으로 독자를 유진의 주관적 인지속에 가두어두면서 악의 실체를 교란시키는 관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진의 아버지와 형을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만, 유진의 비행에 대한 엄마와 유진의 관점 차이에 있다.  형을 종탑의 꼭대기에서 일부러 밀쳐 죽게 하였다는 시각은 엄마의 것이다.  반면, 유진의 주장은 형의 실책으로 벼랑으로 떨어진 것으로 서술된다. 이 두 관점이 연이어 서술되며 독자들은 누구의 관점을 신뢰할 것이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무죄와 무고를 주장하는 소설의 서술자 유진은 독자의 판단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이 소설이 유진의 관점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착시효과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그대로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죄책감과 동정심,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살인의 과정에선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범행을 감추기 위해 위장과 거짓말을 일삼을 때, 그는 매우 천재적인 감각과 연기력을 발휘한다. 모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기합리화에 능숙하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도 하지만, 악을 자행하는 유전자의 명령앞에선 그것은 무용지물이며 순응적이 된다. 작가 정유정은 이러한 악에 대한 유진의 경향이 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진화하면서 경쟁자인 그 누구를 제거하려는 것은 진화적 유전자가 품고 있는 인류의 비극 같은게 아닌가, 묻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학문적으로 범죄심리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정신병리학의 지지를 받는다. 작가 또한 이 작품을 쓰기 전에, 그같은 학문적인 감수를 거쳤음을 밝힌다.  유진을 작가는 이 소설속에서 `프레데터'로 그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공감능력이 상실된 냉혈한을 그리려던 본래의 목적이 빗나가면서, 그 이름만큼이나 유순하고 동정적인 프레데터로 그려지고 말았다. 이것이 이 소설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이유라고 본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작가가 그리고자 한 프레데터는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특히 매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그 무수한 엽기적인 사건의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면, 차라리 <종의 기원>속 유진은 사이코패스에는 끼지도 못할 지경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사이코패스 혹은 프레데터들이 권력을 틀어쥘 때가 아닌가?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생전 `과학이 인류의 지적 능력을 증거하고 그들을 진보시켰지만 어디까지나 인류의 미래는 그 과학을 다루는 인간의 자정능력에 달려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이미 인류는 지구의 도시들을 수천번이라도 반복해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를 비축해 놓은 상태이며, 미래에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의문을 표한적이 있다.  항상 우리는 21세기를 말하며 인류의 진보를 얘기해 왔다.  20세기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치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사기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 잔혹한 세기를 겪고나서,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매일 아침 핵전쟁을 입에 달고 사는 프레데터들의 거친 입씨름을 모닝 뉴스로 마주한다. 


정유정이 3년만에 내놓은 작품 <종의 기원>은 감히 역사적인 고전의 제목을 차용하면서까지 작품의 무게감과 문제의식을 자신있게 드러내놓았다. 작품의 제목이야 작가 맘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센세이셔널한 작품명을 차용할 땐,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는 있겠단 생각이 든다.  <종의 기원>이 과연 이 소설의 제목으로 알맞은가?  독자인 나로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인간진화에 내재한 채 공진화하는 인류와 악의 관계는 고전적인 철학적 문제였다. 기원전부터 맹자와 순자는 성선설과 성악설로 논쟁을 일으킨다. 매번 악한을 등장시키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이야기 전개의 핵심축으로 설정하며, 치밀하게 묘사한 긴박감 넘치는 서술은 정유정 소설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매번 소설을 그렇게 써 나간다면 독자는 기시감과 식상함을 느낄 수 있다.


성급하게 작품을 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껏 내놓은 작품들로도 충분히 그는 실력있고 색깔있는 작가임을 증명했다. 그가 최근에 펴낸 작품들은 그 어떤 유명 작가들의 인기에 비할 바 없는 독자를 끌어모았고,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이제 정유정 작가가 매번 재탕에 가까운 스타일을 보여주기 보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느리고 진중하게,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글을 써 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지난 서평에서 아쉬움으로 남겨두었던 문장의 감수성이란 소설 읽기의 흥미와 박진감을 넘어,  철학을 담아내고 인간의 고민을 찾아내는 글쓰기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쓰는 것보다는 읽기에 치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어야 한다.  독서를 게을리 하면 글도 새로움을 잃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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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2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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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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