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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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은 1989년에 발표됐다. 이 작품은 그에게 부커상을 안겼고, 그는 일약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게 됐다. 1982년 첫 작품을 발표한 이후로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작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행운이다. 소설를 읽으며 작가의 기질이나 인생을 상상하는 것은 초보적인 비평가에게나 가능한 고질적인 유혹 같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작가의 성격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경향이나 문화,예술적 취향을 읽게 된다. 상상의 작품 안에서도, 결국 문장안에 감추어진 지문같은 성향을 파악할 수 있고 결국 그것이 작가를 설명해주는 요체가 되곤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속에 등장하는 대저택 달링턴 홀을 관리하는 집사 스티븐스는 20세기 인물이라지만, 시쳇말로 `천연기념물' 같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20세기 초 평범한 영국인의 시선속에서도 그의 고지식한 성향은 자주 비꼼과 이해불가의 영역으로 치부되고 있어서다. 일이란 영역 이외에는 대화의 소재도, 취미도, 철학도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은 마치 피가 흐르는 인간이 아닌 심장이 없는 로봇처럼 그려진다. 소설의 문체는 주인공 스티븐스의 성향을 그려내기에 알맞다. 꾸밈과 화려함이 절제되고 그 자리를 지루한 만연체의 문장이 자리잡는다. 어떻게 저렇게 지루한 문장을 그렇게 성실하게 끝없이 쏟아낼 수 있을까, 할 정도다. 좋게 보면 성실함이요 달리 보면 무료함 아닌가. 내가 작가의 기질을 소설 문장안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즉 소설 속 고지식한 집사 스티븐스를 닮아 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가문이 200년 동안 소유하고 있던 대저택에서 수십 년간 집사로 일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이 집도 미국인 부호 패러데이 어르신에게 팔렸다. 달링턴 홀에서 일하던 많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남은 사람은 집사인 그를 포함해 겨우 4명에 지나지 않는다. 새 주인 패러데이는 `웅장하고 유서깊은 이 저택에 손색이 없는' 새 직원을 뽑아보라 하였지만, "요즘 시절에 만족할 만한 수준의 직원"을 찾아 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패러데이는 어느날, 스티븐스를 불러 자신이 미국에 돌아가 있는 5주 동안 집에만 있지 말고 휴가를 다녀오라고 권한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이 권유를 받고 집을 떠나 여행하는 6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티븐스는 6일간 여행하며 그 여정을 그리진 않는다. 그 여정 가운데서, 자신이 달링턴 홀에서 보낸 일생을 꼼꼼히 소설속에 복기하고 있는게 이 소설의 구성적 특성이다.  6일간, 여정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달링턴 홀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찾아가 달링턴 홀로의 복귀 의사를 타진해 보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 둘은 한때 `밀당'을 즐기던 상사와 부하였고, 결혼 적령기의 남녀였다.  켄턴 양은 수십년 전, 청혼을 받아들여 결국 달링턴 홀을 떠났다.  켄턴 양은 얼마전 스티븐스에게 결혼 생활을 끝장내고 달링턴 홀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만약 그들이 재회 한다면 황혼의 로맨스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직업적 소명의식이 남다른 사람이다. `집사'라는 직업은 21세기 독자들에게 낯설다. 가끔 드라마 속 조연이 맡은 구성적 설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 단어는 그대로 한 시대로 건너뛰는 타임머신 역할을 해낸다. 20세기 초반, 영국 귀족 사회의 잔재처럼 비춰지는 `집사'라는 직업은 이미 이 소설안에서도 그 생명력을 다한 듯하다.  주인공을 제외하고, 귀족가문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소명보다는 하나의 직업으로 자신의 일을 치부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스티븐스의 직분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르다. 그는 집사라는 직업에서 `품격'과 `위대함'이란 수식어를 끌어오며, 그것에 걸맞게 살아가려 전 인생을 건다. 그가 지금 청춘을 다 흘려보내고 노년에 이르러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품위 있는 집사'가 무엇이냐다.


품위와 위대함을 지닌 집사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전문적 역할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첫째는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다. 둘째는 집사로서 프로페셔널한 지식과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셋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스티븐스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이 원칙들을 지켜내기 위한 고단한 여정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가 일생 모셨던 존경받는 달링턴 경은 훗날 나치 부역자로 알려졌고, 말년에 재산과 명성을 모두 잃고 몰락했다. 스티븐스는 프로페셔널한 집사였을망정, 켄턴양이 자신에게 보내오던 관심과 사랑, 질투를 파악하지 못하는 목석연이었다. 스티븐스가 직업적 소명의식에 매몰 돼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아버지의 임종조차, 달링턴 홀의 업무를 핑계로 미루어버리는 일이다.


"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뵙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139쪽,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그의 아버지 또한 일생 품위와 위대함을 몸소 실천하신 업계 최고의 집사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말년 그는 아들 스티븐스가 일하는 달링턴 홀에서 허드렛일을 보조하다 자주 실수를 연발해 원성을 산다. 더군다나 뇌경색으로 임종하는 순간까지 아들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만을 내뱉지 않는다. 스티븐스는 주인 달링턴 경의 나치부역을 지금껏 옹호해 왔다. `위대한 집사'는 주인의 가치판단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제외하고, 이 소설속에서 그 누구도 스티븐스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은 없다. 한때 그의 청혼을 애타게 기다리던 켄턴 양은 스티븐스의 침묵과 목석같은 태도에 실망하고 그를 떠난다. 


스티븐스는 일생 주인에 대한 복종과 믿음, 일에 대한 헌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소명의식만으로 살아온 것이다. 황혼에 이르러 떠난 6일간의 여행에서, 그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본다.  그제서야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로 살아오는 동안, 젊은 시절의 사랑도, 아버지의 임종도,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하지만, 스티븐스가 삶을 돌아보는 자세는 회한보다는 여전히 집사로서 한 시대를 주름잡은 위대한 신사들을 자신이 모셨다는 자부심에 가닿고 있다. 스티븐스는 인류가 계급간 투쟁과 희생을 통해 쟁취해낸 인권, 민주주의, 자유, 권리라는 가치를 모두 무시하거나 소홀히 생각하는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그리고 홀 건너편, 내 시선이 머물고 있는 문 뒤, 방금 막 내 직무를 수행하고 나온 바로 그 방에는 유럽 최고의 실력자들이 우리 대륙의 운명을 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282쪽


스티븐스는 이 소설속에서 그 성격이 전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과거의 삶을 생각하며 작은 흔들림과 의심에 매몰되다, 곧바로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삶을 스스로 인정하고 만족해 한다. 그는 계급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는 전근대적인 인물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 순종적인 사람이다. 이 소설의 끝은 스티븐스가 새로운 주인인 `페러데이 어르신'에게 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끝난다.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사심없고 성실하며 충성심이 강한 주인공을 보며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나치 부역자 `아이히만'이다. 1960년 체포되어 법정에 선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기에 주위를 놀라게 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에게서 `악의 평범성'이란 철학적 문제를 건져올린다.


그는 나치 부역자로 일하며 죄책감보다는 직업적 소명의식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내적 갈등 없이 관료주의 안에서 업무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기술적인 임무에 충실했다고 발언한다. 아이히만, 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권위와 권력에 복종하는 경향이 짙고, 그 주요한 무대가 직업 현장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난 작가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를 이 소설에서 구현했다고 보진 않는다.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스티븐스이라는 이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인물에겐 보편적이며 숭고한 미덕이 존재한다. 더불어, 이 작품의 특별한 가치를 찾는다면 단연 평범한 사람들의 황혼에 찾아들기 마련인 회한의 감정에 대해, 작가가 어떤 위로와 격려의 근거를 해명하면서 독자를 위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300쪽


누구나 인생의 황혼에 도달하면, 자신의 삶을 후회하기 마련이다. 스티븐스처럼, 믿고 신뢰했던 주인이 나치 부역자로 허망하게 몰락했을 경우, 그 허탈함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집사로서의 품위와 위대함은 휴지조각이 돼 버린 상황이 아닌가.그럼에도 스티븐스는 마음을 추스리고 `진실되고 가치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자신의 삶을 평가한다. 모든 사람이 스티븐스가 모셨던 달링턴 홀의 방문객 같은 역사적 인물이 될 순 없다.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삶의 실체다.  반복되는 출퇴근길, 분주한 업무, 갈등과 희열, 소시민의 삶, 늙어감, 황혼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이 약속하는 소소한 과정이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남아 있는 나날>속 주인공 스티븐스를 통해,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 삶에 깃든 품격의 정체'를 해명하려 한다. 그것은 스티븐스가 소설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헌신, 성실과 열의를 통해 구현될 수밖에 없다. 고지식하고, 재미없고, 모든 걸 희생하며 지나온 스티븐스의 삶에는 시간이 지나도 상실되지 않을 귀중한 삶의 가치들이 담겨 있다. 어느 분야에서나 우리는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인정받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빈틈없이 완벽한 삶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황혼에 다가서면 삶에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켄턴 양이 짝사랑했던 스티븐스를 떠나 사랑하지 않았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이제는 그 오랜 시간속에서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고 스티븐스에게 고백하듯이, 삶의 오답이 때론 삶의 정답인 것이다.  이 작품은 평범함 속에 그 신비를 품어안은 삶의 요체를 해명하고 위로를 던지는 따뜻한 소설이다.  단, 구성과 문체가 스티븐스의 삶을 닮아 있는 듯하다. 느리고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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