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보통의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언가에 얽매여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먹고 사는 일'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숙명이자 의무이고 존재의 기반 같은 것이다. 그런 고달픔을 잠시 잊기 위해 우린 짧은 여행을 자주 하곤 한다.  3년간, 자기의 근거지를 벗어나 먼 해외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별로 없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의 생활이란 힘들기 마련이다. 하여, 이것은 꼭 생활의 여유와도 관계가 없는 문제같기도 하다. 자기 인생을 주도하고픈 철학이 없는 사람에게 3년이란 긴 여행은 상상할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37살, 이제 막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던 시기 일본을 떠나 외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품었으니 그것은 여행이었으나 하루키는 해외에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상주하는 길을 택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상주여행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주로 상주한 곳은 과거 서양 문명의 중심지였던 그리스와 이탈리아였다. 1980년대 후반의 일이었으니 아무리 일본이라 해도 해외여행이 그렇게 붐을 일으키기 전이다.  하루키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는 글쓰는 장소를 바꿈으로서 작품에 그 기운이 스며들기를 원한 듯 하다. 3년간 유럽을 떠도는 동안, 그는 작가인생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둔 작품 두 편,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썼고, 수 편의 외국 작품을 번역했으며, 틈틈이 자신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겨 귀국 후 여행스케치를 책으로 펴냈다. 그 여행의 기록이 바로 <먼북소리>(문학사상사,2003)다. 


하루키 여행담은 초보적인 여행기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모두 피해간다. 그는 일기를 쓰듯, 평범한 일상을 꾸밈없이 그려나간다. 그것은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세계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백하게 포착한다. 아내와 자신, 단 둘이 그리스의 주요 섬들,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정주하는 과정과 일상을 적었다.  작업용 워드프로세서와 감상용 작은 오디오를 품에 안고 남유럽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글을 썼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이국적인 풍광들속에 휩싸여 그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키는 여행자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경험을 소설을 쓰는 틈틈이 기록했다.


잠시 정주한 곳에서 하루키의 일상은 비슷비슷하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숙소를 구한다. 숙소는 셋방이거나 때로 호텔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벽한 숙소는 없다.  난방이 안 되거나, 뜨거운 물이 안 나오거나, 무엇이 고장이거나, 영국에 잠시 거주할 땐 반지하에 살면서 글을 썼다.  숙소의 문제가 해결되면 먹거리가 고통이다. 각 지역마다 입에 맞는 음식을 구해 요리해 먹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스의 섬에 상주할 때는 음식 구하는 일이 날씨와 연관돼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면 상점은 문을 닫고, 레스토랑은 싱싱한 재료를 구하지 못해 제대로 된 음식을 내놓지 못한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상당 기간 체류하는 여행으로서 포착해 낼 수 있는 문화,정치,사회적 풍경들을 맛보는 것도 흥미롭다.


하루키의 글에 나타난 그리스 사람들의 특성은 외지인에게 호기심이 많아 때로 귀찮아 질 때가 많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하루키를 구태여 잡아 세우며, `뛰는 이유를' 친절하게 물을 정도였다. 그들은 친절하긴 하지만, 태만하고 여유가 넘친다. 차장과 술병을 주고받으며, 그리스의 협곡을 넘어가는 버스 운전사에 대한 묘사는 코믹하면서도 아찔하다. 그리스에서 선거날 투표는 의무이며, 선거날에는 술집에서 술을 팔아선 안 된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인들이 술을 먹고 토론을 하다, 불상사를 만들어내는 일이 많아서란다.  이탈리아 로마의 불안한 치안이나 엉망인 도심의 주차질서에 대한 묘사, 형편없는 우편업무에 대한 기억 등은 하루키가 겪은 여행의 피로가 그대로 전달 되는 듯 하다.


하지만, 불편과 고통이 따르지 않는 여행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루키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행자다. 그만큼 자주 해외에 나가는 작가도 흔치 않을 듯하다.  그는 자주 여행담을 책으로 묶어 펴낸다.  최근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여행기에서 봤던 하루키의 문체는 30년 간,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일상화된 여행기로 단련돼 왔던 것임을 알게 됐다. 마라톤을 일생 즐겨왔던 것처럼, 그에게 글쓰기와 여행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속에 있었다.  이 여행기를 읽다가,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관 혹은 그의 라이프 스타일을 깨닫게 된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쓰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일정 부분 베일속에 자신을 감추어두는 작가다.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기, 결혼생활에 대해 쓴 글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 여행기 내내 동행한 아내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행기는 자신의 생각과 삶을 드러내보일 수 있는 글이다. 그럼에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하루키의 여행담속에서 난 하루키의 사생활을 잘 살펴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시선을 언제나 밖에 두고 있다. 그의 여행담이 감상적이지 않고 객관성을 갖는 이유인 듯 보인다. 자신의 사생활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 결혼 생활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정치적인 견해나 사회적인 발언을 삼간다.  그리스 여행 중, 세계 분쟁 소식에 대한 신문을 집어들고 하루키가 내뱉는 이야기는 겨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야" (297쪽) 정도다.  그 정도의 발언은 고등학생도 속삭일 수 있는 수위다.  


"세계는 피로 물들고 여기저기서 사망자가 속출하며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날마다 로도스 해변가에서 버찌를 먹으며 일광욕을 하고 있는 동안에...(중략)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지 않다. 나는 로도스 섬에 있다. 여러가지 사정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해변의 의자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면서, 버찌를 먹으며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는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일종의 기정 사실로서." 405쪽, <먼북소리>


하루키는 이 여행기 가운데서, 절박하게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몇 번 짧게 언급한다. 장편 소설을 쓰면서 갑자기 이 소설을 완성하기 전까진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매몰된다. 지금 쓰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은 엄밀히 말해 내 인생이 아닐 것이라고, 비록 이 작품이 문학사에 남는 명작이 아닐지라도, 그는 그 순간 글쓰는 일의 간절함에 빠져든다. 하루키는 3년 동안, 여행하고 글만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동양인으로서, 남유럽의 풍경속에선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그 이방인의 시선으로 수천년 문명속에 담겨진 유럽 문화와 삶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의 여행기는 음식과 음악, 문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중시한다. 매번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그 장소의 별미를 즐기고, 당대의 유명 지휘자의 연주를 놓치지 않으려고 추위에 떨며, 몇시간이고 표를 구하려 줄을 서기도 한다. 1980년대 이 정도의 문화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레스토랑의 특색과 맛을 품평하거나 현지에서 직접 찾아가 듣는 클래식 연주회의 지휘자와 연주자의 특색을 비교,서술하는 장에서 나는 하루키가 이 여행기를 통해 결국 드러내고자 하는 글쓰기의 `전략' 혹은 독자에 대한 마케팅 방식을 읽어낸다. 즉,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중적인 글을 쓰면서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경험들을 열거한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일생 자신의 일상을 벗어난 긴 여행을 꿈꾸거나, 다른 세계의 삶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험대신 안정을 택하기에, 떠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루키 같은 상주여행자로서의 경험은 절대로 그들의 삶의 일부분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키의 여행담을 읽으며, 이 새롭고 가능하지 못한 경험을 간접체험한다.  하루키는 정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적 특성을 이용해, 일생 여행을 꿈꾸고만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판타지'의 체험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일생은 여행하고, 글쓰고, 마라톤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좋은 레스토랑의 미식을 즐기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되기 전, 7년 동안 식당일로 생업을 꾸렸다. 그 때, 하루키는 쉴 틈 없이 바빴다.  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가게 문을 닫은 새벽 시간이었다. 첫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그는 모든 이들이 잠든, 새벽녘 아파트의 식탁 테이블 위에서 썼다. 아마도, 하루키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는 우리처럼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글쓰기와 여행을 갈망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하루키는 운이 좋고 선택받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하루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과 작가로서의 열정에 부러움을 느끼고, 감염되기 쉽다. 그는 글쓰기의 욕망에 불을 지피는 작가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면 살아가면서 계속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잃고, 세상에서 끊임없이 미움받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358쪽


우리는 떠날 수 없다. 하루키처럼 3년이란 시간을 인생에서 잘라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영원히 정주하는 인생을 숙명인냥 여기며 살아간다. 그것은 달리말해, 한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감금하는 일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루키의 여행담은 전설 같은 문장으로 신비로움을 더하는게 아닐까. 하루키는 독자들의 불만섞인 자기비하를 예상 했는지,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고 결론 짓는다. 하루키처럼 살 수는 없어도 하루키처럼 자유로운 삶에 다가설 수는 있다.  그것을 나는 읽고 쓰는 일에서 찾는다.


하루키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고행에 가까운 여행을 나섰으나 그는 여행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감금해 읽고 쓰는 일에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글 한 편을 읽고, 글 한 편을 짓고 쓰는 일의 자유와 성취감을 그는 익숙한 공간의 탈출에서 배가시키려 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컨트롤하고 세계를 보는 나름의 관점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 지리멸렬한 일상속안에서도 새로운 자유와 느낌에 다가설 수 있다. 언젠가 시간과 여유가 주어졌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여행을 떠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그 여행에서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일 것이다.  하루키는 정직하게 세계를 바라보고, 간략하고 사실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루키에게 진정 부러워할 것이 있다면 37살에 떠날 수 있는 용기나 결단이 아니다.  세심한 관찰력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호기심, 그리고 독창적인 글쓰기의 방식이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곧 삶의 자유와 기쁨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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