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
김영진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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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포탈 시스템을 검색하던 중 공고문 하나를 발견했다. 사내 사보기자 모집 공문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지원서를 써 보냈다. 일주일 뒤 연락이 왔다. 합격! 자기소개와 경력에다 지금껏 글을 쓰며 얻은 나름의 감투를 잘 포장한게 도움이 됐나? 그렇게 해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내 사보기자로 선정됐다. 며칠 전 본사로 신입기자 워크숍도 다녀왔다.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내 습벽 때문이다. 과연 나는 사보에 기사를 잘 써낼 수 있을까? 서평이나 영화평 정도를 끄적였던 내가 기사를 발굴,기획하고 사진과 글을 조합해서 매달 한 편 정도는 써 내야 하는데 부담감이 만만찮다. 그럼에도, 할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자신감과 해보자는 무대포 기자정신이 벌써 꿈틀거린다.

 

글쓰기를 배우는 모든 사람들은 공통된 소망을 품게 마련이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먼 훗날 달리기를 꿈꾸듯, 세상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알아주고 내 글에 고료를 챙겨주는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원고지나 모니터 위에 습관처럼 쓰던 글이 어느날 갑자기 금전으로 환산된다는 걸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글쓰기의 신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글쓰기로 돈을 버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적 생산수단이 아닌 지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됐다는 명백한 반증이다. 글쓰기는 자기실현의 장치인데, 그것으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게 또 얼마나 큰 희열인가? 작가들의 직업만족도가 최고점을 찍는덴 이유가 있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우리들의 환상과 선망은 여기에 기원한다.

 

우리 시대 직업적 글쓰기로 밥을 먹고 사는 13명 필자들의 글쓰기 노하우를 묶어 펴낸 <나는 어떻게 쓰는가>는 바로 이 환상과 선망에 대한 작가들의 답변이자 고백으로 읽힌다. 필자라고 통칭하긴 했지만, 그들의 명함은 다채롭다. 영화평론가, 기자, 시인, 동화작가, 카피라이터, 철학자, 시나리오 작가, 칼럼니스트, 소설가 등이다. 때로 이들은 직업과 병행해 글을 쓰기도 한다. 변호사나 철학자, 미술평론가, 목사 등의 직업군은 전업작가라 말할 수 없고, 글쓰기가 부업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등장한 필자들은 눈에 익다. 듀나는 전설적인 익명의 소설가이자 영화평론가이고, 반이정은 개성 뚜렷한 미술 평론가요, 임범의 칼럼은 내가 평소 즐겨 읽고 좋아한다. 그들은 모두 신문이나 인터넷 등의 매체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색깔있는 글을 발표하고 있다.

 

이 책이 독특한 것은 평소 다양한 소재로 글을 쓰는 필자들이 자신의 글쓰기 자체를 되돌아보고 있어서다. 그들은 편집자의 요구에 맞춰 이 책에서 `어떻게 쓰는가' 라는 부문에 초점을 맞춘다. 글쓰기의 노하우라고 했지만, 정확히 `직업별 글쓰기 론' 정도가 맞다. 삶의 체험 현장처럼 이 책은 `글쓰기 체험현장' 을 표방한다. 그들의 글쓰기는 아마추어가 범접할 수 없는 전문성을 드러낸다. 그 난이도 높은 세계에서 그들은 나름 글쓰기의 고충과 기쁨을 고백체의 문장으로 선 보인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다양한 영화 잡지를 옮겨다니며 글쓰기를 다듬어 왔다. 동료기자들에게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자주 듣던 어느날, 자신의 글이 데스크에서 자주 손질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대학원생 티를 못벗고 평론투의 글이 허영기로 가득해 난해했던 거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글이 지나치게 과시적이고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영화평을 쓸 때 논리적 분석이 아닌, `표면에서 얻은 인상의 실마리를 끈질기게 파고들어 뭔가 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를 선보이는 것이 목표다. 영화을 본후 기계적 논리에 대입하기 보단, 감성의 덩어리를 부풀려 내는 일과 더불어 `멋 부리지 말고 간명하게 쓰자' 하는게 최종적인 그의 글쓰기론이다.

 

기자 안수찬은 글쓰기의 비법 한가지를 소개한다. 바로 `끊어치는 것이다' 끊어치기를 글쓰기의 배터리라고 표현한다. 문장을 주어 - 목적어 - 서술어라는 기본단위로 하나의 문장을 끝내야 한다. 끊어치기는 만병통치약이다. 그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끊어치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끊어치기 예찬은 쉴새 없다. 문장을 끊어치면 손가락 대신 생각과 마음이 글을 끌고 간다. 끊어 치면, 자아의 느낌과 생각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처음 느끼고 뜻했던 바대로 문장을 배치하고 글을 이어갈 수 있다. 끊어치면, 독자는 필자의 세계에 보다 쉽게 몰입한다. 긴 문장은 독자의 시선과 호흡을 방해한다. 안수찬 기자의 끊어치기론은 글쓰기 교과서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내용이다. 현장 전문가에게 다시 들으니 확신이 선다.

 

"이쯤에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는 유장하고 화려한 문장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들의 길을 따르면 안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훌륭한 자아'를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뭘 어떻게 써도 좋은 향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매한 자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무조건 끊어 쳐라. 간단하고 빠르게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다." 37-38쪽, 안수찬, <나는 어떻게 쓰는가>

 

시인 유희경은 시를 읽고 쓰는 게 어려운 이유를 해설한다. 시 혹은 시인은 발화telling해서는 안되고, 그저 보여주어야showing한다. 시가 뜬구름 잡는 식으로 세계를 형상화 하는 것은 바로 설명이 아닌 보여주고 있어서다. 이 짧은 논평은 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미술 평론가 반이정은 글쓰기의 과정이란 `분석 대상과 텅 빈 모니터를 번갈아 응시하면서 "이 정돈 쓸 수 있어"와 "갈피가 안 잡혀서 못할 것 같아"라는 상반된 고백을 내면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듣는 일이다'고 표현한다. 하여, 글쓰기란 자신을 향한 협박이자 격려가 된다고 풀이한다. 글쓰기를 숙명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백배 공감할 고백이다.

 

특히 인상적인 두 명의 필자가 있었다. 18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 최근 은퇴해 칼럼니스트로 살아가는 임범과 <국가대표>와 <미녀는 괴로워> 등의 시나리오 집필에 참여한 작가 김선정이다. 먼저 임범은 18년 기자 생활을 하며 안 써본 글이 없고, 수많은 기사를 써 보았지만 제일 쓰기 힘든 글로 칼럼을 지목한다. 그는 마감이 다가오면 3,4일 전부터 원인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고, 소재를 못 찾아 마감 전남 밤을 꼬박 지새거나 잠을 청해놓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토로한다. 글쓰는 자의 비애가 따로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글을 쓰고도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는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 게다. 시나리오 작가 김선정은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선배 감독으로부터 들은 한 마디 말을 되새긴다.

 

"선정아, 지금 네가 쓸 수 있는 것, 딱 거기까지가 오늘의 너야, 그걸 인정해야 해 " 208쪽

 

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글이 왜 이 모양이야, 하고 불평하기 전에 한번 되새겨야 할 조언 아닌가 ? 중국 작가 위화는 글쓰기를 `경험'에 비유한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듯이, 직접 써보지 않고서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고 말한다. 무언가를 쓰기 전까지 우린 어제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의 필자들은 마치 글쓰기의 매력과 그 고통을 동시에 즐기고 있는 사람들 같다. 그들은 매번 글을 쓸때 마다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절망한다. 이 절절한 고백을 듣게 된 것은 차라리 위안이 됐다. 글을 십 수년 씩 쓰는 전문 작가들도 우리처럼 글 때문에 울고 웃는구나. 이걸 작가들의 육성으로 확인하는 일은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내가 지원한 사보기자는 자신의 업무 외에 각 부서에서 콘텐츠 기사를 발굴하는 보조 기자다. 직장내의 부업인 셈이다. 원고료는 들어오겠지만 큰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귀찮은 일을 지원했나? 그냥 좋아서다. 그날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과 보낸 한 나절이 참 기억에 남는다. 모두 글쓰기의 열망이란 공통 분모 때문일까? 차 한 잔을 놓고서도 쉴새 없이 쏟아지던 이야기들과 짧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몇 해 내가 블로그에 차곡차곡 써 올린 글 들 덕분에 해가 갈수록 감투 하나씩을 얻었다. 그간 글쓰기는 사적인 영역에서 내가 키워온 필살기였다. 이제 그런 사적인 즐거움이 모여, 어느덧 공적 글쓰기에 도전하게 됐다. 나름 성장이라면 성장이다. 그리고 성장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은 기쁘다. 서평과 영화평, 여행글을 가끔 쓰던 내가 기사문을 써 낼 수 있을지 아직 자신이 없다. 하지만, 어떤 장르의 글을 쓰건 좋은 글의 조건은 같다. 이 책에서 기자 안수찬은 그걸 `사람을 즐겁게 기쁘게, 슬프고 애달프게 하는 글, 즉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라 표현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 필자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그 방법론에 집중한다. 직업적 글쓰기는 전문성과 열정을 동시에 갖추고, 고료에 맞는 원고를 산출해내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글을 밥으로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특별한 내공을 갖추어야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모든 직업적 필자들의 내공은 길러지는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철저히 통용되는 공간이 글쓰기의 영역이다. 글의 힘이 막강할 수록 전문 필자에 대한 선망은 커가기 마련이다. 황홀한 글쓰기의 세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작가들은 훌륭한 본보기이자 동병상련의 파트너가 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글쓰기를 단련하는 과정에 지름길은 없다. 세상에 쉽게 쓰인 글도 없다. 세상 모든 필자들은 오늘도 하얀 모니터 혹은 원고지 위에서 소리없는 전쟁을 치른다. 하여, 이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전문필자들의 처절하고 화려한 무용담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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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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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작가란 책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것은 특수한 인간관계다. 직접 대면하지 못했지만 한 인간의 영혼을 깊이 경험하는 일이 곧 책읽기다. 사람은 만나서 술잔을 기울여 이야기를 해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는게 아니다. 책을 통해 만난 모든 저자는 곧 독자의 스승이 된다. 지난 4월 저자 구본형의 부고를 듣던 날 내 마음에 일었던 놀라움은 그 특수한 관계로부터 온 것이다. 한번도 그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구본형의 독자였다. 한 권의 저서를 몇 해 전 읽었다. 그가 꽤 유능한 저자이자, 직장인들의 멘토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후속작들을 지금껏 일독하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그는 향년 59세로 이제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하지만, 내 후회는 일시적인 것이 됐다. 그가 그 짧은 생을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 남겨둔 책들은 꽤 풍성했고, 또 앞으로 오랜시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줄 것이다. 그는 품질좋은 책들을 이승에 남겨둔거다. 구본형은 1980년에서 2000년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한국IBM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가 직장을 떠난 것은 46살 쯤이었다. IMF의 영향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 그는 변화경영연구소라는 1인 기업을 설립하고, 기업과 직장인을 타켓으로 한 경영혁신과 자기경영에 관한 다양한 책을 써 냈다. 연구소를 통해선 변화경영을 접목해 직장인들의 업무 혁신과 미래비전을 실현하는 프로그램들도 운영했다. 놀라운 건 그가 연구원 제도를 통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을 `저자'로 길러냈다는 데 있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쉰살이 되던 어느날 아침의 각오를 고백한 적이 있다. 공자가 지천명(知天命 - 하늘의 뜻을 안다)이라 호명한 나이다. 50대에 이루고픈 10가지 희망사항은 이런 거다. 첫째, 향후 10년간 1년에 책 한 권씩을 써내자. 둘째, 일년에 두 번은 10일간 꼭 장기 여행을 떠나자. 셋째,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이바지 하는 방법을 찾아내자. 그 나머지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이 소원들을 실현시켜 나가는데 시간을 쏟았더니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고 있더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구본형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20년을 살고, 어느날 갑자기 삶을 바꾼게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그는 새벽 4시에 기상하고 아침 7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오랜 시간 실천했다. <구본형의 필살기>라는 책에선 인생 후반부를 저자와 경영전문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투자했던 새벽 3시간의 기적으로 표현한다. 그가 써 낸 책들은 직장인들이 공감하고, 차용할 부분이 넘친다. 내가 그의 저서를 한 편 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이전과 다른 삶을 상상하는 그의 메세지에 매료당한 건 순전히 그 내공 덕이다. IMF 당시 출간되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첫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제목 자체가 책의 일관된 메세지에 다름 아니다.

 

"가치를 만드는 사람만이 언제나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치의 개념은 언제나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변화를 생활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다. 아울러 그 변화의 방향을 알고,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59쪽,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IMF 당시 수많은 직장인들은 직장을 잃었다. 평생 직장이라 생각하던 자신의 자리를 국가 부도라는 사태 앞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직장인들 앞에서 벌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전환이자 변화다. 그 시대에 어떤 메세지가 필요했을까? 안정된 직장이 주는 아늑함에 오래도록 잠긴 사람일수록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게 아니다. 언제나 영웅호걸은 위기에 등장하기 마련인가? 구본형의 이 책이 변화라는 패러다임을 내걸고 직장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상상력을 부여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그는 이 책을 두 부문으로 양분한다. 책의 상당 부분을 기업의 변화 경영과 혁신 기법에 대한 교훈으로 채우고 있다. 자기계발서라기 보다는 기업혁신 이론서같은 느낌이 든다. 왜 저자는 자기계발서를 표방한 책속에서 기업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전반부를 읽어나가며 의아했다. IMF는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고, 다음 기업을 침몰시켰으며, 다시 개인을 퇴출시켰다. 국가,기업,개인 모든 시스템이 변화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구본형은 기업 혁신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변화를 다루고, 개인의 변화를 다루면서 기업 경영의 혁신을 이야기하는 서술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큰 줄기는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무너진 삶을 복원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세우고 어떤 미래를 상상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변화를 바라면서도 두려워한다. 변화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으며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결국 변화의 시기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 변화를 하나의 기회로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구본형은 변화에 당당해지기 위해선, 지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먹고 살기 바빠서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루기만 한다면 보다 나은 삶은 오지 않을 것이라며 경고한다. 여전히 그는 미래에도 하찮은 일로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구본형은 `자신을 위해 사용한 시간만이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도록 한다'고 조언한다.

 

"당신에게는 시간이 없다. 만일 이미 마흔이 넘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를 위해 술을 마실 시간은 있지만 술을 마시고 비정한 상사를 욕할 시간은 없다. 세상을 탓하고 주위를 돌아보며 욕을 할 시간도 없다. 정부의 무능을 비난하고 경영자의 탐욕을 탓할 시간도 없다. 무능한 정부는 정권을 잃고, 탐욕이 경영의 목적이었던 경영자는 도산할 것이다. 그리고 전문화되지 못한 개인은 직업을 잃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메세지다." 343쪽

 

구본형의 이 책은 평생직장이라는 `상식'이 무너져 내린 시기에 등장했다.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시련 앞에 직장인들은 망연히 세상의 비정함을 탓했다. 하지만, 구본형이 던진 변화라는 메세지를 통해 많은 직장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IMF 그 이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 이 책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IMF 처럼 사회가 급박한 도전에 직면한 시절은 아니다. 오랜 수련을 통한 내공, 인문과 철학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본 바탕에 둔 자기계발서는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많은 화두를 던진다. 이 책이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 앞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문을 열고 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살면서 어느 순간 변화의 시간은 반드시 올 것이다. 안정된 직장이 환상이 된 후기 신자유주의 시대라서가 아니다. 변화야 말로 삶의 본질이라서다. 우리는 언제든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살아가야 한다. 세상에는 익숙한 것과 작별함으로써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새로운 삶 앞에 당당해지기 위해선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구본형은 이 책에서 `비전은 아직 살아 있는 당신이 남은 미래를 위해 짜놓은 황홀한 각본"이라는 말을 한다.

 

이 책을 읽어가며 가장 마음에 들어 새겨둔 말이다. 지금껏 읽은 훌륭한 책과 그 저자들은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곧바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길을 알려주고, 나는 작게라도 변화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섰다. 저자 구본형과 그의 저서들이 그 좋은 사례다. 오늘도 많은 직장인들이 주어진 일, 시킨 일만 하며 소극적 삶을 살아간다. 구본형은 그걸 낙타의 삶이라 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싣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건너야 하는 존재다. 이 낙타의 삶에서 우린 하기싫은 일을 감당하며 하루를 버티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부가 시간이 흘러 위풍당당한 사자로 `변화'한다. 사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사자의 삶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2013년 5월 21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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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2.0 이야기에서 답을 찾다 - 스토리로 배우는 미래 경영 트렌드
곽숙철 지음 / 틔움출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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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은 경영자들의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우린 피터 드러커나 게리 해멀 같은 경영학자들의 책을 볼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경영자들이 아닌, 경영자의 부하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이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듯 경영은 CEO들에게만 유익한 주제가 아니다. 이미 30%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자영업자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분포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경영 노하우가 일반 상식에 가닿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직장인들은 언제까지나 말단 직원으로 있지 않다. 그들도 때가 오면 중간 관리자로 승진할 것이고, 언젠가는 CEO가 될 수 있다. 경영은 말단 직원에서 CEO까지 회사에 소속된 모두가 알아야할 지식이 되었다. 이것이 21세기 경영학이 위치한 자리다.

 

`이노스토리멘토'라는 특이한 직명을 갖고 있는 저자가 있다. 이것은 이노베이터(혁신가)와 스토리(이야기)와 멘토를 조합한 합성어다. 혁신을 스토리로 말하는 멘토, cnE 혁신연구소 소장이자 <그레이트 피플>의 저자 곽숙철이다. 30년 동안 LG 전자에 근무했고, 이제는 개인의 변화와 조직의 혁신에 관한 연구로 집필, 강연 활동을 하며 인생 2.0을 살고 있는 분이다. 그의 여정은 20년 동안 IBM에서 근무하다 퇴사후 변화경영연구소를 개소하고, 수많은 집필과 강연 활동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던 경영컨설턴트 故 구본형을 닮았다. 구본형이 자기계발서의 고전들을 발표하며, 변화경영의 대가로 살았다면 곽숙철은 `이야기'를 경영 기법에 접목시키는 재능을 통해 대중에게 보다 가깝고 쉽게 다가간다.

 

전작 는 직장 초년생의 좌충우돌 사회생활에 스토리로 감명과 교훈을 주어 난관을 돕고 끌어주는 한 멘토의 활약상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해외에 번역 판매되는 성공을 이뤘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즉 예화는 특별하고 간명하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이솝우화처럼 익숙지 않고 지루하게 장황하지 않다. 신작 <경영 2.0 이야기에서 답을 찾다>는 이야기와 경영 2.0의 자연스런 조합을 이룬 작품으로 그의 이야기 멘토로서의 재능이 돋보이는 책이다.

 

경영 2.0은 무엇인가 ? 미래 경영의 방향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2008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하프 문 베이(Half Moon Bay)에선 미래 경영을 논의하기 위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주제는 `Inventing the Future of Management'였고, 목적은 미래 경영, 즉 경영 2.0의 과제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피터 드러커를 잇는 경영학의 대가 게리 해멀을 비롯한 헨리 민츠버그, 프라할라드, 피터 센게, 제프르 페퍼 등 저명한 경영학자들과 고어사의 테리 켈리, 구굴의 에릭 슈미트, 홀푸드의 존 맥케이, IEDO의 팀 브라운 등 세계 경영학의 석학과 대표 경영자 36명이 집합한 대규모 토론회였다. 이들은 컨퍼런스를 거친 후, 미래 경영(경영 2.0)의 과제 25가지를 도출해 낸다. 그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숭고한 목적을 추구하는 조직을 구축하라 Ensure that management's work serves a high purpose.

3. 비니지스 언어와 관습에 인간성을 부여하라 Humanize the language and practice of business.

6. 상상력을 더욱 고취하라 Further unleash human imagination.

9. 과거와 단절하고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라 Dramatically reduce the pull of the past.

13. 아이디어와 인재, 자원 배분을 위한 내부 시장을 만들어라 Create internal markets for ideas, talent, and resources.

16. 자율성의 범위를 확대하라 Expand the scope of employee autonomy.

25. 경영의 철학적 토대를 재건하라 Reconstruct management's philosophical foundations.

 

스물다섯가지 과제는 다소 벅차다. 그들이 도출해 낸 미래 경영 기법은 다시 정리, 요약될 필요를 느낀다. 이 일을 곽숙철은 이 책에서 6가지 핵심 키워드로 정리한다. 그것은 사람,자율성,상상력,실행력,공감,혁신이다. 저자는 여섯가지 주제에 알맞는 이야기(예화)를 싣고, 경영 기법에 대한 핵심 주제문을 담아낸 후, 그걸 다시 석학의 저서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 냈다. 독자는 신경영 기법을 이야기에서 교훈 삼고, 저자의 논설을 통해 이해한 후, 다시 경영 구루의 저서를 통해 공부할 기회를 얻는다. 이 한 권의 경영 서적이 최신 경영의 노하우를 공부하는 수십가지의 길로 안내한다. 곽숙철은 이야기를 통해 경영 2.0의 신세계로 안내하는 멘토의 역할을 이 책에서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노스토리멘토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이 책의 충실성과 효용성이 답한다.

 

책 속으로 보다 깊이 들어가보자. 사람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3장 <리더의 급선무는 인재관리>를 보면 경영의 보편적 응용력을 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바빠서 우물 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하러 간 한국인이 겪은 일이다. 그 지역 원주민들은 먼 곳으로 물을 길러 가는 일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걸 보다못한 선교사가 우물을 파자는 제안을 한다. 추장은 부족 회의를 열었고 그들이 도출한 결과는 예상외의 답이었다. " 다들 물 길러 다니느라 바빠서 우물을 팔 시간이 없어요" 이 책에는 이런 통찰력 가득한 예화 수십편이 담겨 있고, 또 그에 걸맞는 저서들이 적재적소에 걸쳐 소개된다.

 

세상일에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 리더, 경영자, 국가지도자 할것없이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은 인재를 뽑아 쓰는 것이다. 리더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건 바로 사람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기관을 대표하는 인물로 뽑아쓴다면 어떻게 될까? 인사에 있어 사사로운 정이나 리더의 고집보다 중요한 것은 검증된 실력과 도덕성 아닐까? 그게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그 모든게 부정될 때 회사나 국가의 구성원은 납득할 수 없고, 물론 그 기관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우린 정치권에서 벌어진 황당무계한 인사참사를 목격한 바 있다.

 

"이 가운데 리더가 가장 많은 힘을 쏟아야 할 일은 인재 채용이다.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뽑아 우수한 인재로 키운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30쪽, 곽숙철 <경영 2.0, 이야기에서 답을 찾다>

 

소설가는 소설만을 읽어선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 작가적 독서야말로 잡식성 독서다. 교양인의 독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편식에 가까운 독서 행위를 즐긴다. 내게 경영학은 큰 관심의 영역은 아니다. 그럼에도, 편식하지 않기 위해 경영과 경제 서적을 읽는다. 조직에 구성원이 된다는 것, 또 자영업자가 되어 자기 사업을 꾸려보는 일, 모두 경영과 경제에 맞물려 있는 일이다. 심리,역사,철학 모두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아마추어인 우리가 관심갖고 공부할 때는 반드시 멘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경영기법을 알기 쉽게 이야기로 풀어 쓴 이 책은 최신 경영 노하우를 공부하려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저서가 될 것 같다. 앞으로 이노스토리멘토 곽숙철의 이야기와 경영을 접목한 흥미로운 경영 서적들을 계속 보았으면 한다. 재능있는 자기계발서 저자 구본형이 떠나간 자리를 실력있는 저자들이 채워주길 희망한다.

 

 

 

 

 

2013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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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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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인생을 알기 위해서다. 인생이 그런 것들로 잘 풀릴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 인생의 비밀을 캐기 위해 우린 점을 치고, 철학을 하고, 수도를 한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귀족으로서 방탕한 삶을 살아오다 노년에 이르러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일평생 돈과 명성을 갈구하던 그가 <참회록>이란 저서에서 남긴 뼈아픈 문장들은 `인생' 자체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에 대한 것이었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동서고금의 모든 지식과 지혜로운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참회록>의 결론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고 인간의 운명과 타인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언제나 이렇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기 마련이다.

 

소설 읽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다. 한동안 꾸준히 읽어왔던 순수문학을 멀리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게으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읽을만한 작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작은 사유다. 요즘 우리 젊은 작가들은 소설을 너무 작위적이고 가볍게 쓴단 느낌을 준다. 독창적인 면과 더불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지 않는 문학은 독자의 외면을 받기 쉽다. 문학이야말로 삶에 대한 통절한 아픔과 고민의 산물이어야 한다. 요즘 작가들의 경험부족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최근 내 소설 읽기에 다시 힘을 불어넣어준 것은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과 중국 작가 위화의 전작읽기라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인생>의 다른 번역 제목은 `(活着활착), 즉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중국어는 인생(人生)과는 좀 다른 의미를 담는다. `뿌리내려 생존하는 것'이란 의미에 가깝다.

 

위화의 작품들은 이번이 세번째다. 다시 느끼지만 위화는 문학속에 고난의 중국 근현대사를 자주 배경으로 넣곤 했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푸구이라는 한 노인네가 자신의 일생을 농촌을 방랑하는 한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액자소설의 형식이다. 푸구이는 젊은 시절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지주의 아들이었지만, 놀음과 여색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다 집안이 몰락한다. 그에게 착하고 지혜로운 아내 `자전'이 있었는데 이 되먹지 못한 남편의 곁을 지켜주며 그와 일평생을 함께 한다. 푸구이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고, 문화 대혁명을 겪으며 지주의 처형을 지켜본다. 큰 흐름에서 보자면 작가 위화는 중국의 굴곡진 현대사가 한 개인의 삶과 운명을 어떻게 뒤틀려 놓았는지 묘사한 듯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논평과 변화에 대한 구체적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 그래 독자는 오직 푸구이의 삶을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으로 독해할 수 있다.

 

문제는 푸구이의 삶이 온갖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다. 시작은 가산을 탕진한 푸구이가 몰락하고 전쟁터로 끌려간다. 구사일생으로 고향 마을에 되돌아온 그에게 또다른 위기가 닥친다. 그들에겐 두 여식이 있었다. 첫째 딸아이 귀머거리 펑샤와 둘째 아들 유칭이다. 가난 때문에 어린 딸 아이를 남의 집에 맡기기로 결심하고 펑샤를 이웃 마을에 입양 보내는 장면은 그네 가족이 겪어내는 첫번째 고통이다. 마치 한국의 산업화 시기를 연상시키는 이 가족의 비정상적 입양 형태는 다시 가족이 뭉치는 것으로 해소된다. 두번째, 고통은 아들 유칭이 엉터리 의사에게 헌혈을 하다 병원 침상에서 죽고 만 일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유칭을 잘 키워보고자 언제나 엄하게만 굴었던 푸구이는 아들을 묻고 오던 밤, 길 위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네 가족의 고통은 그치지 않는 죽음의 행렬이다. 딸 펑샤는 어렵게 시집을 가지만 아이를 낳다 죽고, 아내 자전은 지병을 앓다 병사한다. 사위 얼시는 일을 하다 사고사 하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붙이 손자 쿠건은 배고픔에 콩을 몽땅 집어 먹은 후 죽고 만다. 이 지난한 가족사가 슬픔과 운명의 가혹함으로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 "얼시는 그 병원에 들어가면, 목숨 보전하기 힘들단 말이야.". 유칭, 펑샤가 둘 다 그 병원에서 죽었는데, 사위마저 거기서 죽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생각해보게. 내 평생 그 작은 방에 죽어 누운 사람을 셋 봤는데 그게 다 내 가족이었다네, 나는 이미 늙어서 그런 기막힌 지경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 266쪽, 위화 <인생>

 

푸구이는 이제 자신과 닮아 늙고 병든 소 한 마리를 구해, 농사일을 하며 살아 간다. 고통과 불행으로 이어진 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왜 작가 위화는 한 가족의 불운한 역사를 장편 속에 담아낸 것일까? 흔하지 않지만 또 평범할 수도 있는 이 불행으로부터 작가가 궁극적으로 표현내 내고자 한 주제는 뭘까? 작가는 서문에서 제법 유의미한 문장 한 줄을 남긴다. 그는 개인과 그 개인이 처한 `운명'을 `우정'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운명을 부정할 수 없다. 싫고 좋을 수는 있어도 그 다양성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운명애(愛)라는 말은 이때 타당한 표현이겠다.

 

그리하여, 위화는 결론적으로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며, 삶을 살아내는 원동력이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내는 데서 나온다'며 인내의 미덕을 설파한다. 푸구이가 그 오랜 시간동안 역사와 정치 환경을 감내하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날카로움에 불평하지 않는 건 바로, 삶 그 자체를 사랑하고 인내하는 철학을 갖고 있어서다. 그런데 과연 인내가 역사,정치적인 인간의 삶에 답을 주는가? 역사적 진보와 인간의 권리가 충전되는 조건을 우린 알고 있다. 차라리 그건 인내보다는 다른 삶에 대한 상상과 꿈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반항에 기인했다. 여기서 우린 <허삼관 매혈기>나 <인생>에 공통적인 위화의 태도를 엿본다. 사회, 정치 환경에 반항하는 인간보다는 순응하는 인간, 그 안에서 고통과 곤경에 처한 인간을 사심없이 보여주는자로서 작가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한계는 어쩌면 중국의 자유롭지 못한 정치상황에 기반한 창작활동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인내'의 가치는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다 알고,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통달한 듯 한 사람들은 확신에 차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의 처한 운명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인생과 죽음을 알 수 없다. 그걸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힘에 의지하거나, 교조주의에 빠져 경직된 사상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모른다는 것, 무지 자체가 인간에게 겸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린 신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고, 삶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며 공부하길 원한다. 그 때, 인내 즉 견디어 내는 일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성공한 모든 사람들, 푸구이 처럼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라 젊은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들려주는 사람들은 참고 견디어온 사람들이다. 즉, 운명의 쓰고 단물을 모두 삼킨 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인 게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중략..)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279쪽

 

모진 일생의 고통을 견디어 내고 가진 건 없이 병든 소 한마리를 키우며 농사일을 하는, 푸구이 노인네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사회정치 환경에 반항하지 않는 순종의 삶은 지나친 유약함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삶에 의미 부여하기를 즐기는 우리가 의외로 그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쉽게 절망하고 모든걸 포기하곤 하지 않은가? 우린 그 어떤 이유도 아닌, 주어진 운명, 부여된 삶 자체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위화의 주장을 고맙게 마음속에 품어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이 변화무쌍한 인생가운데 확실성 하나를 고르자면 바로 인내하는 삶이 가져다줄, 분명한 결론이다. 가혹한 운명일지언정 다시 일어서 걸어가리라. 어쩌면 위화의 소설은 지금 절망하는 자의 손에 들려줄 필요가 있다.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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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인문학 -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
서동욱 기획 / 반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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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다. 언젠가 꾸준히 해 놓은 영어가 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입사 하던 때, 대학시절 따 놓은 몇 개의 자격증이 가점을 부여했듯이 영어라는 마법의 언어도 내 직장내 직위를 한 단계 상승시켜줄지 아는가 말이다. 영어공부를 포기한 이유는 그 지지부진함에 있다. 십 수 년을 하고도 제자리걸음에다 항상 불안할때마다 다시 시작하곤 했던 공부는 사실 입사시험을 치르고 나선 일찌감치 포기했어야 옳았다. 사실, 영어공부는 즐거움이 아닌 실용적 목적에서 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특별히 긴요하지도 않는 공부가 어찌 행복을 가져다 줬겠는가? 그 이후, 남는 시간을 잡다한 책을 읽는데 소비했다. 직장생활과 독서, 내 삶이 단조로워진 것은 그 때 이후다.

 

한국인만큼 유행을 좇는 국민이 없다. 특히 여자들의 옷은 유행에 민감하다. 거리를 스쳐 지나는 여인들의 복색에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입는 옷을 상상할 수 있다. 옷에 관심없는 나같은 사람에겐 천편일률적 길거리 패션은 개성과 자아를 잃어버린 이상한 취향으로 비춰진다. 학문이라고 예외가 없다. 수 년 전에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들이 대세를 이루더니 최근엔 `인문학 공부'니 `부활'이니 하면서 다시 인문학은 독서시장에서 주요한 마케팅 부문으로 자리잡았다. CEO들은 인문학을 읽고 연구하며, 상품에 인문학의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호들갑이다. 경영자는 더 이상 장사꾼 마인드가 아닌 인문적 마인드가 담겨야 하고, 유명한 자계서 저자를 불러들여 인문학을 공부한다던 CEO도 있었다. 사실, 그것까진 좋았는데 노조 탄압으로 최근 뉴스에 등장한다. 사람들의 인문학에 대한 변덕은 왜 죽을 쑤듯 잦을까?

 

인문학은 무엇이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불가능한지, 현재 한국 인문학의 수준은 어떠한지 알려주는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인 서동욱이 기획하고 십 수 명 저자들의 글 한 편씩을 묶어낸 <싸우는 인문학>(2013, 반비펴냄)이다. 이 책은 인문학의 논의를 네가지로 정리한다. 다음과 같다. 1. 팔리는 인문학 2. 잃어버린 인문학 3. 싸우는 인문학 4. 가능성의 인문학. 저자들은 크게 인문학이란 주제 아래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 에서 "인문학자에게 지옥은 무엇인가" 라는 기괴한 주제에까지 다양한 글을 풀어 낸다. 참여 저자만 22명에다 그들의 직업도 기자, 대학교수,출판기획자,심리학자,평론가 등 다채롭다. 과히 잘 차려진 우리 인문학의 만찬상이다.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는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라는 글에서 인문학이 애플의 혁신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던 잡스의 육성에 담긴 반인문적 아이러니를 고발한다. 애플이 인문학을 디자인과 제품 혁신에 도입했다는 말은 오직 상품에 한정한 미사여구다. 애플의 하청 기지인 중국의 폭스콘 노동자들의 자살이 사회 문제가 되어도, 애플 상품은 그 자체로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한 명품으로 인식된다. 즉, 이때 잡스가 인문학을 끌어들인 이유는 `노동이라는 고역이 부재하는 것처럼 상상하게 하는 우아한 가림막'의 역할을 인문학이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잡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 경영에 인문학을 접목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모든 CEO들의 약점이다.

 

신정근 성균관 대학 교수의 <동양 고전은 왜 처세서로 읽히는가>는 한국 독서시장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동양고전독법에 문제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나이와 동양 고전을 조합한 제목을 달고 나온 처세서들이 즐비하다. 과연 <논어>나 <손자병법>을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이 인간관계와 처세에 응용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일까? 신정근은 동양철학은 본질적으로 국가,기술,타자(화이),언어,본질,진리,이상사회를 탐구의 주제로 삼아왔다고 말한다. 고대 동양 사상가들이 경서에서 관심가져 온 것은 `국가의 퇴행성을 경고하고 이상사회의 도래를 견인하는 책임의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독자들은 `본래의 맥락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고전을 읽고 뭔가 그 안에서 실용주의 관점을 재구성'하는 의도를 품는다. 자기계발에 여념없는 현대 독자가 고전을 제 좋을대로 해석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셈이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의 글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는 영화와 인문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흥미로운 논설이다. 영화가 단순한 오락 차원을 넘어서는 이유을 그는 공간의 재해석인 미장센과 시간의 재생산인 편집이 개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주의 감독들은 흔히 `사실을 반영하는 데 멈추지 않고 해석'함으로써 영화에 인문학을 심는다. 그는 이미지의 일회성과 반복성, 죽음과 재생 가운데 영화의 운명이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짐승 같은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는 <오이디푸스>의 윤리를 영화속에서 근친상간이란 소재로 재해석하며, 홍상수에게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일회적 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어떤 내용"으로 풀이된다. 이 글은 오락에 머물 수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어떻게 인문학과 연계되며 감독의 철학이 반영된 작가주의로 승화할 수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 책을 펴는 순간 삶이 시작되듯 영화가 시작되면 한 인물은 살아 있는 인격체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의 삶은 증발되며, 이는 다시 영화가 상영 될 때 반복된다. " 195쪽, 강유정,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수 편의 글 가운데 몇 편을 맛보기로 살펴 봤다. 하지만, 이 외에도 상당히 주목할 만한 논의가 가득하다. 책의 부제가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인 이유는 최근 사회,정치적 상황속에서 인문학의 위치을 조명하고, 그 분석틀로 세상을 해석하는 신선한 글들로 채워졌기 때문이겠다. 걔중엔 안철수 현상의 원인이나 MB의 천박한 사익(私益)정치를 논한 글도 있고, 프랑스 문학이나 한국시의 위상을 평한 글도 있다. 그 다양성은 분명 즐겁고 유익하다. 하지만, 개별적 나무의 구체성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지향하는 숲 속 인문학의 웅장함과 풍요로움이다. 이 많은 주제들을 소화하면서 독자들은 인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왜 필요한지 그 가능성과 한계를 깨닫게 될 터이다.

 

이 책에는 인문학을 정의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서문에서 기획자 서동욱은 인문학은 `인간다움' 즉 후마니타스(Humanitas)로 그 작명자는 인문학을 탄생시킨 그리스인이 아닌 로마인이었으며, 동양에 유입돼 `인문학(人文學)으로 옮겨지게 됐다고 밝힌다. 한양대 교수 표정훈은 인문학은 `인생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시도하는 것'이자 곧 `사람과 텍스트' 또는 `인생과 텍스트'라고 정의한다. 동국대 이상헌 교수는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 주어야 하는가>라는 글속에서 인문학은 `늘 밖으로 대상으로 향하는 과학과 달리 안으로,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반성적 학문'이며, 인문학의 목적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자기 이해를 풍요롭게 하는 학문'으로 정리한다. 그러한 정의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닿는 글이 있었다. 바로 비평가 故 김현의 문장 가운데 `사람 人' 자 하나를 추가해 재해석한 표정훈의 논설이다.

 

"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인)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장에 이르자 내가 첫 문장에서 언급했듯, 십 수년 해 오던 영어공부를 접고, 무용하고 잡다한 책 읽기에 올인한 무척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 변명 거리를 하나 갖게 됐다. 나의 지지부진한 영어공부는 `밥벌이의 수단'으로서 나를 `억압'해 왔던 것은 아닐까? 김현의 문장이 진실이라면 내 책읽기는 무용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책 속에서 돈 한 푼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의 생계를 튼튼히 해줄 수단은 어쩌면 높은 토익 점수일지도 모른다. 나는 영어공부를 포기할 때 강을 건넌자가 뗏목을 버리는 심정이라 자위했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넉넉한 수입과 영혼의 자유다. 하지만, 그 둘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불가능성과 불안속에서 하나의 균형을 되살리기 위해 밥벌이의 수단 하나를 팽개친 건 아니었을까?

 

노조를 탄압하고, 노동자의 죽음을 무시하는 CEO들이 고급 백화점에서 사치품을 고르듯, 인문학을 경영과 접목한다고 떠들 때 우리는 인문학의 본래 가치를 착각해선 안 된다. 인문학은 간명히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탐독하는 일이다. 문사철(文史哲)을 학습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이다. 하지만, 공부하는 것에서 그치면 곤란하다. 독서 또한 수단일 뿐, 본질은 아니다. 세계와 나의 관계, 나와 세계의 본질을 연구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개인과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 인류가 진보한 것은 과학기술과 그 실용적 가치관 때문일까? 진화생물학에서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우린 그 말이 거짓임을 안다. 편리함과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은 언제든 자기자신을 파괴할 힘도 함께 키워왔기에 말이다. 핵무기와 환경오염, 그리고 전쟁과 기아, 종교간 대립과 범죄가 그 증좌다.

 

인문학은 잘못된 정치와 정치인, 그리고 탐욕에 깃든 자본주의를 감시하고, 전쟁보다 평화를 대립보다 화합을 가르친다. 모든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 예술가로 선임된다면, 세계는 오늘 곧장 평화를 되찾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도자들이 인문학이 가르치는 인간 중시, 예술이 가르치는 미학적 가치를 알고 있다면 이 세계가 오늘만큼 불안하진 않을 듯 하다. 더불어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육체와 감각적 탐욕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다. 인문학은 그 자체로 무용하지만, 세계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고 악과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충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 나는 그렇게 밥벌이와 무관한 `쓸모없는' 책읽기에 열중하며 산다. 아니 살고 싶다.

 

 

 

 

 

 

2013년 4월 10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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