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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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인생을 알기 위해서다. 인생이 그런 것들로 잘 풀릴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 인생의 비밀을 캐기 위해 우린 점을 치고, 철학을 하고, 수도를 한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귀족으로서 방탕한 삶을 살아오다 노년에 이르러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일평생 돈과 명성을 갈구하던 그가 <참회록>이란 저서에서 남긴 뼈아픈 문장들은 `인생' 자체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에 대한 것이었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동서고금의 모든 지식과 지혜로운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참회록>의 결론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고 인간의 운명과 타인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언제나 이렇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기 마련이다.

 

소설 읽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다. 한동안 꾸준히 읽어왔던 순수문학을 멀리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게으름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읽을만한 작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작은 사유다. 요즘 우리 젊은 작가들은 소설을 너무 작위적이고 가볍게 쓴단 느낌을 준다. 독창적인 면과 더불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지 않는 문학은 독자의 외면을 받기 쉽다. 문학이야말로 삶에 대한 통절한 아픔과 고민의 산물이어야 한다. 요즘 작가들의 경험부족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최근 내 소설 읽기에 다시 힘을 불어넣어준 것은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과 중국 작가 위화의 전작읽기라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인생>의 다른 번역 제목은 `(活着활착), 즉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중국어는 인생(人生)과는 좀 다른 의미를 담는다. `뿌리내려 생존하는 것'이란 의미에 가깝다.

 

위화의 작품들은 이번이 세번째다. 다시 느끼지만 위화는 문학속에 고난의 중국 근현대사를 자주 배경으로 넣곤 했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푸구이라는 한 노인네가 자신의 일생을 농촌을 방랑하는 한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액자소설의 형식이다. 푸구이는 젊은 시절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지주의 아들이었지만, 놀음과 여색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다 집안이 몰락한다. 그에게 착하고 지혜로운 아내 `자전'이 있었는데 이 되먹지 못한 남편의 곁을 지켜주며 그와 일평생을 함께 한다. 푸구이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고, 문화 대혁명을 겪으며 지주의 처형을 지켜본다. 큰 흐름에서 보자면 작가 위화는 중국의 굴곡진 현대사가 한 개인의 삶과 운명을 어떻게 뒤틀려 놓았는지 묘사한 듯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논평과 변화에 대한 구체적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 그래 독자는 오직 푸구이의 삶을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으로 독해할 수 있다.

 

문제는 푸구이의 삶이 온갖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다. 시작은 가산을 탕진한 푸구이가 몰락하고 전쟁터로 끌려간다. 구사일생으로 고향 마을에 되돌아온 그에게 또다른 위기가 닥친다. 그들에겐 두 여식이 있었다. 첫째 딸아이 귀머거리 펑샤와 둘째 아들 유칭이다. 가난 때문에 어린 딸 아이를 남의 집에 맡기기로 결심하고 펑샤를 이웃 마을에 입양 보내는 장면은 그네 가족이 겪어내는 첫번째 고통이다. 마치 한국의 산업화 시기를 연상시키는 이 가족의 비정상적 입양 형태는 다시 가족이 뭉치는 것으로 해소된다. 두번째, 고통은 아들 유칭이 엉터리 의사에게 헌혈을 하다 병원 침상에서 죽고 만 일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유칭을 잘 키워보고자 언제나 엄하게만 굴었던 푸구이는 아들을 묻고 오던 밤, 길 위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네 가족의 고통은 그치지 않는 죽음의 행렬이다. 딸 펑샤는 어렵게 시집을 가지만 아이를 낳다 죽고, 아내 자전은 지병을 앓다 병사한다. 사위 얼시는 일을 하다 사고사 하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붙이 손자 쿠건은 배고픔에 콩을 몽땅 집어 먹은 후 죽고 만다. 이 지난한 가족사가 슬픔과 운명의 가혹함으로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 "얼시는 그 병원에 들어가면, 목숨 보전하기 힘들단 말이야.". 유칭, 펑샤가 둘 다 그 병원에서 죽었는데, 사위마저 거기서 죽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생각해보게. 내 평생 그 작은 방에 죽어 누운 사람을 셋 봤는데 그게 다 내 가족이었다네, 나는 이미 늙어서 그런 기막힌 지경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 266쪽, 위화 <인생>

 

푸구이는 이제 자신과 닮아 늙고 병든 소 한 마리를 구해, 농사일을 하며 살아 간다. 고통과 불행으로 이어진 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왜 작가 위화는 한 가족의 불운한 역사를 장편 속에 담아낸 것일까? 흔하지 않지만 또 평범할 수도 있는 이 불행으로부터 작가가 궁극적으로 표현내 내고자 한 주제는 뭘까? 작가는 서문에서 제법 유의미한 문장 한 줄을 남긴다. 그는 개인과 그 개인이 처한 `운명'을 `우정'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운명을 부정할 수 없다. 싫고 좋을 수는 있어도 그 다양성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운명애(愛)라는 말은 이때 타당한 표현이겠다.

 

그리하여, 위화는 결론적으로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며, 삶을 살아내는 원동력이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내는 데서 나온다'며 인내의 미덕을 설파한다. 푸구이가 그 오랜 시간동안 역사와 정치 환경을 감내하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날카로움에 불평하지 않는 건 바로, 삶 그 자체를 사랑하고 인내하는 철학을 갖고 있어서다. 그런데 과연 인내가 역사,정치적인 인간의 삶에 답을 주는가? 역사적 진보와 인간의 권리가 충전되는 조건을 우린 알고 있다. 차라리 그건 인내보다는 다른 삶에 대한 상상과 꿈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반항에 기인했다. 여기서 우린 <허삼관 매혈기>나 <인생>에 공통적인 위화의 태도를 엿본다. 사회, 정치 환경에 반항하는 인간보다는 순응하는 인간, 그 안에서 고통과 곤경에 처한 인간을 사심없이 보여주는자로서 작가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한계는 어쩌면 중국의 자유롭지 못한 정치상황에 기반한 창작활동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인내'의 가치는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다 알고,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통달한 듯 한 사람들은 확신에 차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의 처한 운명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인생과 죽음을 알 수 없다. 그걸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힘에 의지하거나, 교조주의에 빠져 경직된 사상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모른다는 것, 무지 자체가 인간에게 겸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린 신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고, 삶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며 공부하길 원한다. 그 때, 인내 즉 견디어 내는 일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성공한 모든 사람들, 푸구이 처럼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라 젊은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들려주는 사람들은 참고 견디어온 사람들이다. 즉, 운명의 쓰고 단물을 모두 삼킨 후,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인 게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중략..)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279쪽

 

모진 일생의 고통을 견디어 내고 가진 건 없이 병든 소 한마리를 키우며 농사일을 하는, 푸구이 노인네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사회정치 환경에 반항하지 않는 순종의 삶은 지나친 유약함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삶에 의미 부여하기를 즐기는 우리가 의외로 그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쉽게 절망하고 모든걸 포기하곤 하지 않은가? 우린 그 어떤 이유도 아닌, 주어진 운명, 부여된 삶 자체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위화의 주장을 고맙게 마음속에 품어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이 변화무쌍한 인생가운데 확실성 하나를 고르자면 바로 인내하는 삶이 가져다줄, 분명한 결론이다. 가혹한 운명일지언정 다시 일어서 걸어가리라. 어쩌면 위화의 소설은 지금 절망하는 자의 손에 들려줄 필요가 있다.

 

 

 

2013년 4월 26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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