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기적 - 죽음과 삶의 최전선, 그 뜨거운 감동스토리
캐릴 스턴 지음, 정윤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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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 80센트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우리돈 2천원이 못되는 금액으로 말이다.  달리 말해 그 돈이 없어 매년 14만명의 신생아와 3만명의 산모가 사망한다.  아프리카 빈국 시에라리온의 실상이다. 이 나라에선 비위생적 환경의 출산이 일상사다.  탯줄을 자를 때 철제 조각이나 더러운 칼을 쓰는데, 이 경우 파상풍 감염 위험이 높다. 가난해서 백신을 맞을 돈도 없고, 의료지식이 없어 살균 소독에 대한 개념도 모른다.  만약, 시에라리온 가임기 여성에게 3회에 걸쳐 예방접종을 맞게 하면 매년 17만명의 죽을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하루 2만 6천명의 아이들이 사망한다.  이 나라처럼, 깨끗한 물이 없고 영양이 부족하고, 백신 접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데, 이들 나라에선 인명은 `1달러 80센트'인 셈이다.  돈 2천 원이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하지만 하루 평균 소득이 1달러에도 못 미치는 나라에서 2천원은 큰 돈이다.  구호기구 유니세프는 도움이 필요한 적재적소에 구호요원과 물자를 지원해 이 생떼같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유니세프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돕는 일이다. 가난하건 부자건, 엄마의 마음은 한결 같다. 그 엄마의 마음을 가진 유니세프 미국기금 CEO 캐릴 스턴이 지은 책 <제로의 기적>(정윤희 옮김, 프린티어, 2013년)은 지금 서점가의 자선냄비이자,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이 책 한 권을 구입할 때마다 수익금 2천원이 이 아이들을 살리는데 쓰인다.

 

캐릴 스턴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빈곤국가 아동들의 엄마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녀 앞에 엄마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 미국인이 쓴 책인데 정서가 한국적이다. 몸빼 바지 입은 동네 아줌마처럼 따뜻한 입담이 느껴지는 책이라니 놀랍다.  아프리카 모잠비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고, 구호 현장엔 한번도 가본적이 없던, 나이 50줄의 아줌마 캐릴 스턴은 반인종주의연맹이란 미국내 유대인 조직에서 일하다, 더 다양한 경험을 쌓아보고자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미국기금에 지원하게 된다. 그 이후, 7년 동안 전세계 아동 구호의 현장을 쉴새없이 뛰어다니며 눈물과 감동의 순간들을 만났고 그걸 사람들과 나누고자 책을 펴냈다.

 

책 제목인 <제로의 기적>에는 특별한 의미와 소망이 담겨 있다. 스턴은 홍보팀과 유니세프 기금 모금을 위해 구호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게 바로 `제로의 힘을 믿어요(I believe in Zero)'였다.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사망하는 아이들의 수를 `제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깨끗한 물, 적절한 영양, 필수 백신 접종 등,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혜택조차 누리지 못해 사망하는 아이들이 세계엔 부지기수다.  평범한 우리가 그들을 돕지 못한 건 경제적 문제가 아닌 관심의 부족으로 봐야 옳다. 하루 2만 6천명의 아이들이 사망하는 이 지구촌의 현실을 목도하고, 유니세프의 캐릴 스턴은 그 숫자를 제로로 만들겠단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기적은 곧 현실이 됐다. 숱한 기부금이 모였고, 3억개의 백신을 통해 1억명의 산모와 아이를 살린 것이다.

 

" 유니세프 조사에 따르면 도덕성이 높은 국가에 100만 달러의 지원금을 보내면, 사망률을 최대 60퍼센트 이상 줄일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후원과 헌신이 더해진다면 유니세프는 모든 아이를 도울 수 있다. 유니세프 직원들은 사망률을 `줄이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제로'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119쪽, 캐릴 스턴 <제로의 기적>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일은 그 단어가 가진 뉘앙스만큼 근사하고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아동구호가 필요한 지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전쟁과 테러로 치안이 불안하고, 풍토병과 야생동물의 위협, 예기치 않은 안전사고를 걱정해야 한다. 이 모두를 각오하고 구호요원에 지원했다 해도 현장이란 숱한 배움을 전해주는 교실이다.  책임감과 권위로 뭉친 CEO란 직함은 현장에선 무용지물이다. 더군다나 벌레가 무서워 야영조차 꺼려왔던 스턴에게 세계의 오지를 누비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듯 하다. 그럼에도, 그는 무려 7년간 이 일에 헌신해 왔다.  자신의 눈 앞에서 살릴 수 있었던 아이를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현장의 한 순간이, 그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워줬다.

 

우린 가끔 TV에서 세계적인 배우나 유명인이 구호현장에 참여해 활동하는 장면을 본적이 많다. 그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솔직히 그 현장에선 그들의 두눈에 흐르던 눈물이 설정인냥 생각되던 적이 많았다. 그렇게 유명인들이 또하나의 포장지를 자신의 이미지에 덮씌운다 생각하곤 했다.  우연하게 유니세프 미국기금 CEO에 오른, 캐릴 스턴은 횡재를 만난 듯 했다. 하지만, 구호의 현장에서 그가 느낀 것은 죽음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이 국경과 이념, 피부색을 뛰어넘어 보편적이고 자연스런 본능이란 사실이다. 누구나 생명이 오고가는 현장에 서면 휴머니스트가 되지 않곤 못 배긴다.

 

"  "나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신께서 내게 손을 주셨어요. 이 눈도 주셨고요. 난 이 손과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멋진 두건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은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신께서 우리에게 손과 눈을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에 우리 손으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친 채 살아간다. 케냐에서 만난 추장은 가진 건 없지만 세상을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있었다. 우리도 아이들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신이 주신 손과 눈의 능력을 발휘해 그들의 시간을 돌려주어야 한다."  267쪽

 

구호활동을 통해 삶과 세계를 새롭게 배웠다고 스턴은 고백한다.  이 책 속 에피소드 한 편 마다에 진실과 사랑이 깊게 묻어난다. CEO가 쓴 글이 아닌 현장의 말단 요원이 쓴 것처럼 글이 담백하고 소박하다. 구호 현장의 비참한 환경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일어난 아픈 기억들을 치유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모잠비크의 열악한 출산환경에서 만난 로사의 헌신적 모성애를 통해, 자신의 축복받은 엄마로서의 삶을 되돌아 보고, 매년 17만 명의 산모와 아이가 파상풍으로 죽는 현실에서 몇 해 전 갑작스레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한다. 가족의 죽음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구호현장의 진한 눈물들은 증거한다.  우리는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캐릴 스턴 유니세프 미국기금 CEO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아픔과 상처에 눈물 흘리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기적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기적을 대개 그런식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유니세프의 구호현장에선 매일 기적이 일어난다.  솔직히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위대한 기적이 어딨겠는가?  세계 최악의 출산 환경을 갖고 있는 모잠비크, 내전과 가난이 점령한 수단의 다르푸르와 시에라리온, 지진의 재앙이 덮친 아이티, 페루 극빈층의 고달픈 삶, 아동 노동이 일상화된 방글라데시. 유니세프를 지원하는 세계인들의 힘이 모여,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유니세프의 눈부신 활약을 담담히 기록한 8편의 에피소드는 독자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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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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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은 경계의 단어들이다. 절망의 곁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사라진 순간 절망으로 넘어간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 두 단어 사이를 오가기 마련이다. 20대 시절 반복해 읽곤 했던 한 권의 책이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산문집 <시지프의 신화>였다. 반복해 읽다보니 책 속 문장들이 문득 입안에서 절로 튀어나오곤 했다.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카뮈의 문장 한 토막이 생각났다. 20년이 다 된 책 한 권의 힘이라고나 할까?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의 첫 머리를 `자살'이라는 무척 우울한 주제로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작가도 산문집의 첫 문장을 자살 같은 어두운 단어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용기있고 정직한 태도인지 그 때 나는 몰랐다.

 

"자살에는 많은 동기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가장 표면적인 이유가 가장 유효한 것은 아니다. 신문은 종종 `슬픔'이나 `불치의 병' 등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 이러한 설명은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절망적인 사람의 한 친구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하지나 않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자가 죄인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中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그들의 절망 때문이 아니라 이웃과 친구들의 `무관심한 어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뭘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말 한 마디가 타인에겐 치유의 명약이거나 생명을 박탈하는 독약이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새롭게 출간한 소설에서 바로 타인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용기를 얻고 살아갈 희망을 건져내는지 그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방과 후>같은 작품들로 유명한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다. 추리소설은 흉폭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 사건을 풀어내는 과정을 담기 마련이지만, 독특하게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절망을 치유하는 희망의 도구로서 환상추리 기법이 응용된다.

 

30년도 더 된 한 폐가에 도둑 3명이 침입한다. 그들이 몰래 잠입한 곳은 30여 년 전에 나미야 유지씨가 잡화점을 운영하던 곳이다. 도둑 셋은 하룻밤 피신이나 해볼까 기대하고 이곳을 찾았지만, 오래된 우편함 상자에 편지봉투가 툭 하고 떨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폐가의 우편함과 대문에 걸린 우유상자를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도둑셋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30년 전,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줬다. 처음엔 가볍게 아이들의 장난같은 상담에 답장을 담장에 붙여주는 방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진지한 고민이 할아버지의 우편함에 쌓이기 시작하고 잡지를 통해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사례가 유명세를 탄다. 도둑셋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30여년 시간차를 두며 고민 편지를 주고받는 과거의 사람들과 잡화점 할아버지의 기묘한 환상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우리 같은 놈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돈도 없지, 가방끈 짧지, 백그라운드도 없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쩨쩨하게 빈집이나 털고 다니는 정도야. (중략..)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로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31쪽,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제 앞가림 못하는 얼치기 삼인조 도둑 셋이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일은 가능할까? 소설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달토끼'라는 여인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애인과 올림픽 메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생선가게 뮤지션'은 생선가게를 가업으로 물려받을 것인지 막막한 음악가의 길을 갈 것인지를 두고 나미야 잡화점의 문을 두드린다. 비틀즈를 사랑했던 아이 `폴 레논'은 사업이 망해 야반도주를 하는 부모님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두고 도덕성과 가족애 사이에서 방황한다. `길 잃은 강아지'는 회사원과 호스티스 일을 병행하며 살고 싶다고 나미야 할아버지께 묻는다. 모두가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에게 온 편지들이라지만, 답장은 얼치기 삼인조 도둑이 한다. 자신들이 고백하듯이 그들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좀도둑'일 뿐이다.

 

그럼에도 고민 상담을 하는 이들은 저마다 나미야 잡화점의 답장속에서 용기를 얻고 답을 찾는다. 이유가 뭘까? 상담자들은 모두 저 나름의 답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나미야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그들이 편지를 보내오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답에 확신을 얻기 위함이라고 그는 풀이한다. 타인의 언어가 가진 위력은 여기에 있다. 절망의 답을 내놓는 이들에게 희망의 단초를 이끌어내고, 자신의 결정을 믿지 못하는 이에게 힘을 북돋는 일 ! 그것은 카뮈의 표현대로 절망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하지 않는 일과 같다. 도둑들이 보내는 답장은 때론 거칠고, 직설적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한다. 그 마음은 순수하고 가상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상담자로서 최대의 장점도 갖고 있다. 결국 삼인조 도둑은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문학을 통해 희망과 치유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팠을까? 이 소설의 소재가 된 사람들의 고민은 국경을 넘어 보편의 세계에 가닿는다. 사랑과 꿈, 가족, 직업 등, 일본의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청년들도 공감할 소재가 가득하다.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도둑들조차도 타인에게 희망의 언어를 선물할 수 있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담보한다. 한 도시이긴 하지만, 나미야 잡화점에 편지를 주고받는 모두가 소설속에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도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누군가의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되고 햇볕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나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447 쪽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훈훈하고 달달한 에피소드 다섯 편이 담겨 있다. 그 안에서 우린 하나씩의 고민을 안고 절망하는 청년들의 맨얼굴과 만난다. 그들의 고민은 낯설지 않다. 환상추리 문학의 규정된 틀을 깨고, 이 소설은 `기적'을 통해 `희망'을 선물하는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선물은 특별하지 않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던진 `말 한마디'와 무심히 지어보인 `어떤 표정'이 바로 희망이다.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카뮈의 말처럼, 우리의 말과 표정은 오늘 내 곁의 누군가를 살리거나 죽게 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기적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재생한다. 이 소설은  탄탄한 플롯, 아름다운 이야기, 스며드는 감동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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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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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제주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자에게 제주는 낯선 풍광을 선물했다.  4월 제주의 바다는 잔잔했고, 육지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한라산과 세계 최장 용암동굴 만장굴, 성산 일출봉, 기묘한 해안절벽인 주상절리와 폭포수, 그리고 소가 드러누워 있는 지형에서 유래한 우도 등. 4박 5일간의 여행 가운데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이 제주를 속속들이 보고자 했다. 그럼에도, 섬을 떠나던 날 아쉬움이 밀려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제주에 대해 내가 본 것은 그저 풍광이지 역사가 아니었다.  난 제주를 마치 중국인 관광객이나 된 듯 이곳저곳 보고 즐기는 데 소비했을 뿐이다.

 

제주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제주는 4.3이란 현대사의 흉터를 그 산하에 새겼다.  제주는 20세기 한국민이 당한 일제 수탈의 고통과 6.25를 정점으로 한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품고 있는 땅이었다.  제주가 아름다운 풍광으로 소비되기 전에, 그 땅에서 질긴 생명을 이어온 민초들의 굵곡진 삶과 역사를 먼저 기억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제 1 회 제주 4.3 평화문화상이 제정된 후 첫 수상작인 <검은 모래>(구소은 지음, 은행나무,2013년)가 집중해 그려낸 것은 20세기의 제주라는 시,공간과 그곳에 몸 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즉, 제주의 우도 출신 잠녀, `구월'로부터 시작된 4대의 삶과 그 시대였다.

 

구월은 태생적으로 온통 불리한 여건의 삶을 살 운명이었던가 보다. 제주 출신 여성이란 것에서, 평생 물질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태어나자마자 나라를 잃은 신세로 전락했다. 일본 어민들은 제주 앞바다에 나타나 어업 침탈에 열을 올렸고, 그들이 만든 해녀조합에 돈을 바쳐야 그마저 물질이 가능했다. 고향땅에서 물질이 어렵자 잠녀들은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라는 연락선을 타고, 먼 일본땅으로 출가물질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물질 솜씨를 닳은 구월은 빼어난 잠녀로 성장한다. 어선을 두척이나 보유한 박상지를 남편으로 맞았을 때만 해도 그녀의 삶은 순탄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해금과 동생 기영을 낳고 난 후 그들은 우도를 떠나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4대에 걸쳐 조국과 고향을 떠나 경계인으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고향 땅, 우도의 해변에는 검은 모래가 있었다. 사람들은 제주말로 그걸 `검멀레'라 했다. 구월네 가족이 정착한 일본 섬 미야케지마의 한국인 정착촌 미이케우라의 해변에도 검은 모래가 있었다. `검멀레' 뿐만 아니라 식민지 제주섬과 다를 바 없이 조선의 이주민 잠녀와 가족들은 차별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다. 삶의 구차함과 더불어 역사 또한 그네들의 평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통에 나가사키에 일을 보러 떠난 해금의 아버지, 박상지는 미군의 원폭투하로 생사불명의 인사가 된다.  해방 후 6.25 전쟁은 해금의 짝이 될 뻔 했던 한태주를 남북의 싸움터 한 가운데로 불러들인다. 그가 단 하룻밤의 정으로 남긴 자식이었던 건일(켄)은 훗날 자신의 뿌리를 증오하며 어머니 해금과 담을 쌓는다. 

 

역사에 발담근 인물군상들의 비극적 운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 한국인들을 처리할 목적으로 일본은 북한과 교포 송환 계획을 체결한다. 결국 해금의 동생, 기영은 북한행을 선택하지만 그곳에서 숙청의 운명을 맞는다. 제주 섬 우도를 떠난 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게 된 잠녀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그녀들의 짝은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다.  남편을 잃고, 동생을 잃는다. 가족과 불화하고 차별과 억압의 일생을 보낸다.  평화롭지 못했던 시대탓을 해야 할까?  기구한 개인의 운명을 탓해야 할까?  

 

"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 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 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해금은 미유에게가 아니라 창 너머, 켄의 정원 너머 더 먼 곳을 향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먼 고향 땅을 눈으로 밟고 있는지도 몰랐다."  321쪽, 구소은 <검은 모래> 

 

고통과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억이란 과거를 대상으로 한다.  현재는 살아내는 것일 뿐, 기억하진 않는다. 내가 제주에 4박 5일을 머무르며, 단 한 번도 제주의 역사를 생각하지 못한 건,  `과거와 기억'에 대한 우리들의 인색함을 드러내준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현재의 우리가 과거 사람들의 삶과 역사안으로 발딛고 소통하는 일이다.  하여, 이 소설속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해금의 손녀이자 켄의 딸인 `미유'다.  구월네 4대 가운데, 미유는 가장 현대적인 인물이다. 그는 극우 일본인의 후손인 `지로'와 사귀지만 재일 한국인의 후손이란 이유로 이별을 겪는다. 하지만, 미유는 아버지 `켄'처럼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할머니 해금이 일본에 정착한 후 살아온 삶을 궁금해 할 뿐이다.

 

미유는 해금과 제주 해녀들의 부침많은 인생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일본에서 차별 받는게 할머니와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이 나고 자랄 곳을 미리 정할 순 없다. 그가 할머니의 삶을 더 많이 알고 싶은 것은, 오직 그네들이 겪어온 지난 과거의 모진 삶이야말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드러날 때, 우린 용서해야 할 사람과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해금은 할머니의 삶이 빼어난 물질 솜씨 만큼이나 성실하고 건강했음을 깨닫는다.  최선을 다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시대, 제주에서 태어나, 잠녀로서 살 운명속에 놓인 여인들은, 살기 위해 먼 타국으로 떠나와야 했다. 더군다나 나라를 잃어버린 것도, 원폭에 남편이 죽어버린 것도, 전쟁의 한복판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도, 그녀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트럭기사 미야케지마 섬 청년 일본인 `토모야'는 해금의 분향단에 고개를 숙이고 그를 추모한다. 작가는 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미유와 토모야의 설레이는 미래를 마지막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국적과 이념을 넘어 진실을 아는 자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이다. 지금도 일본의 양식있는 시민들은 위안부 문제나 식민지 수탈, 독도문제 등 과거사를 일본정부를 대신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숱한 사건들이 지금껏 해결되지 못한 것은 진실을 고백하고, 낱낱이 기억하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 교과서를 교과부가 승인한 문제를 비롯, 5.18 역사 왜곡이 일부 보수세력을 통해 버젓이 자행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구소은의 <검은 모래>는 우리 세계에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우린 이 소설을 통해, 제주 잠녀들의 모진 삶과 그럼에도 바다를 벗삼아 생을 일구어온 민족의 생명력 넘치는 혼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 우도와 미야케지마 섬, 미우케우라의 검은 모래 위에 지금 따뜻한 햇볕이 평화롭게 쏟아지고 있다.  그 모래밭을 지나 한국과 일본의 잠녀들이 물질을 나갈 것이다. 바다는 무심히 파도로 일렁일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평화로운 바다를 파괴하는 인간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파괴의 시대가 오면 구월의 4대처럼, 또다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반복되고,  죽임과 죽음의 운명이 이어질 것이다.  그 불행한 미래를 막아내는 일은 `미유'같이 젊고 명민한 독자의 몫이라 믿는다.  미유는 증오가 아닌 포용, 비난이 아닌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더불어 진실을 발굴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제주에 다녀온지 7년이 지났다. 다시 제주를 찾는다면 갈 곳이 많다. 한라산을 꼭 종주해 보고 싶다. 7년 전, 입산 통제 때문에 입구에서 발을 돌렸던 아쉬운 경험 때문이다. 무엇보다 관광지로만 돌았던 일정은 접고, 제주의 역사를 미리 공부하고, 4.3 평화기념관을 가장 먼저 가보고자 한다.  광주에 갈 때마다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들르지 않은 자신을 죄스러워 한적이 많다. 그 땅의 아름다움을 말하기 전에, 그 땅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는 일은 뒷 세대의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명이다. 우리의 불온한 과거를 기억하고, 낱낱이 밝혀 역사에 기록할 때 다시는 그런 오욕과 죄악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오로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는 넬슨 만델라의 외침은 하여 여전히 새롭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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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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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은 베스트셀러 소설 <7년의 밤>의 작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독자가 아니었다. 신작 장편 <28>과 작가 정유정은 하여 내게 몹시 낯설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신작에 대한 언론의 극찬은 호기심을 불러왔다.  책장을 덮고나니 그런 평가가 과잉은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간호대학을 나와 소설가로 대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천부적 재능이 있거나 재야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다.  나는 정유정에 관해 후자쪽에 한 표를 던진다.  소설을 읽어보니 기교로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주제의식을 품고 있다. 그 주제를 빈틈없고 밀도 있는 서사안에서 끌고 나가는 힘이 출중하다. 

 

그의 소설 문장은 새롭다.  잘 팔리는 작가 신경숙의 문장은 정교하지만 답답하다. 서사보다는 내면과 자아에 치중한다. 반면 정유정은 자아 같은 건 관심도 없다. 자아가 아닌 온통 사건과 그 전개에 몰입한다. 그러니 독자들은 자연스레 이야기에 빠져든다. 책을 덮고 나니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하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가의 탄생이다. 주제의식은 독자들의 공감을 살 만 하다. 몇 해 전 우린 가축 구제역으로 살처분 된 동물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알고 있다.  허나, 거기에 연민의 시선을 던진이가 몇이나 될까?  작가는 가축을 음식재료로 밖에 사고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럴 자격은 대체 누가 건네준 것이냐며 따진다. 

 

동물애호가들이 환호할 만한 소설이냐?  물론 그렇다. 하지만 소설의 상징 폭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이 작품은 재난 소설의 일반적 문법을 충실히 따라간다. 독자들이 식상해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작품의 무게와 주제는 알베르 카뮈가 2차 세계대전과 자신의 부조리 철학을 담아낸 소설 <페스트>에 비견될 만 하다. 동물에게서 전파된 전염병(`페스트'는 쥐, `28'은 개)과 사람들의 감염과 몰살, 그리고 한 도시의 폐쇄(오랑과 화양), 살아남은 이들의 투쟁과 저항이란 서사적 구조는 <페스트>와 닮았다.  이 두 작품의 결정적 차이는 은유와 상징의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다.

 

정유정의 소설 속 개들은 인간의 친구이자 도구라는 이중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살처분 되는 개들을 구하는데 전념하는 주인공 재형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세계 최대의 개썰매 경주 `아이디타로드'에 우승의 꿈을 품고 출전한 재형은 결국 알래스카의 설원에서 썰매개들을 늑대들에게 잃고 만다. 과거 썰매개들은 재형에겐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들을 희생냥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 깊은 트라우마가 개와 동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고, 재형은 인수공통전염병이란 공포안에서도 철저히 개들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남는다.

 

반면, 대부분의 인간의 곁에 존재하는 개들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개들은 식용으로, 투견으로, 애완용으로 그저 용도가 다를 뿐이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동물조차 이런 대우를 받는다. 하여, 도시가 폐쇄되고 개들을 통해 `빨간눈 전염병'이 번져 나가자 사람들은 키우던 모든 개들을 그저 구덩기에 파 넣고, 거리로 쫓아 내기에 바쁘다.  작가는 생명이 파괴되고 세상이 미쳐가는 광경을 인간과 동물의 관점으로 동시에 서술한다.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되는 자신의 동료들을 보는 개들의 아픔과 고통은 인간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개들에게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잃은 구조대원 기준과 짝사랑했던 개, 스타를 잃은 링고의 분노와 처절한 복수전의 비장함에 어디 차이가 있는가?

 

" 춥고, 숨차고, 귀가 아프고 어깨가 덜그럭덜그럭 떨렸다. 몸 안에서 터지는 참혹한 울음 때문에, 분노와 자책에서 오는 절망으로, 저 생때같은 생명들을 차떼기로 쓸어다가 생매장할 권리를 누가 인간에게 주었더란 말인가 "   220쪽, <28> 정유정

 

하지만, 전염성이 강한 인수공통 전염병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방역은 신속한 가축 살처분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와 죽음이 뒤따라야 한다. 난 작가 정유정이 이 방재대책의 잔혹함에 대해 이 소설을 빌어 항의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일차원적인 사고다. 작가는 가장 잔혹한 상황을 설정했을 뿐이다. 소설과 똑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이 세상 그 누가 동물의 살처분에 대해 이 소설의 동물애호가 재형처럼 행동할 것인가?  난 그것이 합당하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작가는 구태여 이런 비유와 설정을 소설속에서 그리고 있을까?

 

그것이 동물에게만 가해질 수 있는 공포와 잔혹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인간을 향해 벌이는 또 다른 인간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 부르고 그 성질을 악마성이라 부른다. 결국 인간이 동물처럼 학살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경고했다.  서울 근교의 도시 화양은 봉쇄당한다. 처음엔 그것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라 보았다. 하지만, 군대와 장갑차가 투입되고 화양을 탈출 할 수 있는 모든 도시 경계선이 봉쇄당하는 순간 그것은 화양 밖의 인간들이 화양 시민을 향해 벌인 잔혹한 살처분이 되고 만다. 이 역설이 바로 소설의 주제의식에 가닿고 있다.

 

자신의 쾌락과 이기적 목적을 위해 동물을 학대하고 죽이는 소설 속 동해가 있다.  개 도살자는 부모도 같은 방법으로 죽인다.  화양을 봉쇄하고 군대를 동원해 봉쇄선을 벗어나는 인간들을 향해 발포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의 잔혹함이 동물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군대는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주인잃은 개들을 향해 발포하고, 그들을 실어 야산의 구덩이에 집단 매장한다. 화양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 군대는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개들과 인간의 운명이 같아지는 이 소설의 후반부는 결국 인간의 악마성과 시대의 잔혹함에 대한 고발이자 비판으로 읽힌다.

 

"링크엔 신원 파악조차 되지 않은 시신들이 수없이 누워 있었다. 저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쓰레기 매립지로 갈 예정이었다. 사람과 개는 결국 같은 운명을 맞고 있는 셈이었다."   352쪽

 

알베를 카뮈는 소설 <페스트>의 후반부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는다. 페스트가 종말을 고한 순간 들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다.  페스트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행복한 이 거리를 다시 습격해 올 것이다.  묵시록적 세계관이다.  정유정은 소설의 말미를 한 문장으로 끝맺는다. "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479쪽). 인간성에 대한 작가의 체념이다. 카뮈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 우린 여전히 부활한 페스트들과 사투를 벌인다.  그것이 역사였다. 정유정의 문장은 인간혐오가 아닌 악마성에 대한 증오라 생각한다.  경호를 받으며 거리를 배회하는 악마성의 현현을 목격하고 있는게 우리 시대다.

 

이 소설을 읽으며 1980년 5월 18일의 광주가 생각났다. 소설의 설정과 소설 내 지명은 광주의 도심과 5.18의 당시 상황과 유사하다.  백운교차로, 남구 진원동(진월동), 군인들의 무차별적 집단 발포, 산속의 암매장, 남부봉쇄선(5.18 당시 광주는 봉쇄당했다)  왜곡된 언론 보도,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등.  그저 한갓 독자의 기시감일 뿐일까?   정유정의 소설에서 왜 난 상처받은 한 시대와 활보하는 악마성의 본질이 연상되는걸까?  그것을 난  뻔뻔하고 질긴 양심과 심판받지 못한 한 시대를 향해 날리는 작가의 날선 은유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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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4-02-08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28>을 읽고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 블로그를 둘러 보았습니다. 님보다 더 훌륭한 서평을 남긴 분이 드물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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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작가다.  웃고 넘길 만한 시시껄렁한 영화에서조차 정치적 색채를 찾아내려 하는 나같은 독자에게 확실히 하루키는 비호감이다. 20여 년 전 두번 읽은 <상실의 시대>부터 오늘의 이 작품에까지 확실히 하루키는 비정치적이자 반사회성 짙은 소설을 쓴다.  한 시대와 그 사회에 대한 통쾌한 풍자와 반항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하루키를 읽어선 안 된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작가의 글은 맥 없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 주축을 이루며, 장식적인 형용사와 허튼소리로 채워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웰의 글을 발견하고 내가 흔쾌히 공감한 것은 소위 작가라면 작품안에서 동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하루키는 예외적인 작가다. 그의 소설이 치중하는 것은 일상의 세계다.  연애와 섹스, 음악과 음식,  개인의 경험과 사소한 이야기를 중시한다.  작가는 한 시대의 양심이니, 시대를 비판하고 정치의 세계를 성찰하며 대중을 대신하여 권력과 부도덕의 세계에 항거해야 한다, 는 주장은 하루키에겐 그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키는 쓰고 싶은 소설을 쓸 뿐이다.  그의 공상과 사색이 지향하는 방향은 철저히 `소설의 자유'다.  하루키의 경쟁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원한다.  그 점이 또한 무겁고 의미있는 그 무엇을 소설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한국의 소설가들이 하루키를 외면하려 드는 이유다.

 

3년만에 발표된 하루키의 신작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붓가는대로 소설을 시작했고 우연하게 인물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놀랍게도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세계를 형성하며 인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는 죽어 있는 인물이 없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 하나에까지도 생명력을 갖게 한다.  이러한 재능은 소설가 가운데서도 그리 흔치 않다.  다자키 쓰쿠루는 무척 평범한 인물이다. 재력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가 그렇다.  주인공은 고교시절 그룹을 이뤘던 친구들로부터 어느 순간 외면을 당한다. 그것은 쓰쿠루를 상실과 고독감 속으로 내몰게 된다.  소설은 이제 그가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를 찾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하루키는 이 궁금증을 소설의 전반부에 툭 던져놓고 독자들을 줄곧 책의 마지막까지 잡아둔다.  쓰쿠루가 짝사랑했던 `시로'는 아름답고 신비한 인물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모든 장치들을 그는 소유하고 있다.  리스트의 소곡집 ` 순례의 해' 가운데 시로가 즐겨치던 곡은 향수란 뜻을 가진 `르 말 뒤 페이' 였다.  이 곡은 줄곧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며 시로의 존재감을 음악과 연계시킨다. 시로의 의문에 쌓인 삶과 죽음 그리고 다자키 쓰쿠루에 대한 잘못된 비난 등 모두가 이제는 진실을 가릴 수 없는 그 너머에 존재한다. 스무살 어느 해 다자키 쓰쿠루를 죽음과 절망으로 내 몬 사람과 그 사연은 이 우주의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를 묶고 있는 끈이다.

 

색채가 없는 것은 쓰쿠루 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무척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사람들이 주목받는 세계가 가진 특성 때문이다.  스무 살 시점에 다자키 스쿠루처럼 인생의 발걸음을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에게 스무살은 우주와 세계, 그리고 자신을 다시보게 하는 감성의 본향이다.  스무살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영원히 그 본향과 멀어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쓰쿠루의 상실감과 절망감은 친구로부터의 소외가 아닌 사실 이 근본적 한계가 원인일 수 있다. 또, 그것이 독자들이 이 사소한 사건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보편적 기억을 되살려주며 거기서 공감의 덩어리를 움켜쥘 수 있게 하는 소설은 흡인력을 불러온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364쪽,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쓰쿠루가 연인 `사라'의 도움으로 먼 과거의 인물들과 사연들을 찾아 떠난 데는 결국 `자유'의 문제가 결부 돼 있다.  스무 살 근처에서 정지된 쓰쿠루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그를 거부했던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 오직 쓰쿠루만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의 삶 가운데서도 `과거'에 결박당한 상태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자키 쓰쿠루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과거의 상처들과 화해하는 방법을 예시한다.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 잔잔한 일상과 영혼의 심해를 탐험하는 듯한 문장들은 독자들을 친절히 이 여정으로  안내한다.  하루키의 진가는 바로 사람들의 보편적 기억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다듬는 그 풍부한 감성과 세심한 언어들에 있음을 독자들은 또다시 깨닫는다.

 

하루키는 1970년대를 거치며,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뒀다고 설명한적이 있다. "독립적인 인간은 반정치적"이란 말도 남긴다.  그것은 일본학생운동의 좌절감이 작가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하루키의 탈정치성은 오히려 정치적인 메세지를 되돌려준다.  빛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다.  정치와 권력이 사라진 세계는 무엇을 남기는가?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고 그 세계의 현현(顯現)을 목격한다. 모략과 음모가 사라진 곳에서 `살아 있는 인물과 감성의 세계'가 시작된다.  이것이 하루키의 세계이자 그 지향점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목적없이 발 들여논 세계를 그저 둘러보고 걷다 빠져나오면 알맞다.  그의 소설은 처음과 끝이 정해진 하나의 견고한 세계며, 그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언제나 신비로운 경험이다. 우연하게 시발하여 형성하는 하루키의 세계는 그 진지한 문장 가운데 보편의 옷을 입는다. 하루키의 인물들과 우리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평범한 세계를 특별한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확장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고,  비열한 정치에 오염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필터의 기능에 충실하다. 작가는 정치적이고 반권력적이어야 한다는 조지 오웰의 작가론에 반하는 하루키의 소설 쓰기는,  결국 길을 우회하여 일그러진 현실의 정치를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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