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작가다.  웃고 넘길 만한 시시껄렁한 영화에서조차 정치적 색채를 찾아내려 하는 나같은 독자에게 확실히 하루키는 비호감이다. 20여 년 전 두번 읽은 <상실의 시대>부터 오늘의 이 작품에까지 확실히 하루키는 비정치적이자 반사회성 짙은 소설을 쓴다.  한 시대와 그 사회에 대한 통쾌한 풍자와 반항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하루키를 읽어선 안 된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작가의 글은 맥 없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 주축을 이루며, 장식적인 형용사와 허튼소리로 채워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웰의 글을 발견하고 내가 흔쾌히 공감한 것은 소위 작가라면 작품안에서 동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하루키는 예외적인 작가다. 그의 소설이 치중하는 것은 일상의 세계다.  연애와 섹스, 음악과 음식,  개인의 경험과 사소한 이야기를 중시한다.  작가는 한 시대의 양심이니, 시대를 비판하고 정치의 세계를 성찰하며 대중을 대신하여 권력과 부도덕의 세계에 항거해야 한다, 는 주장은 하루키에겐 그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키는 쓰고 싶은 소설을 쓸 뿐이다.  그의 공상과 사색이 지향하는 방향은 철저히 `소설의 자유'다.  하루키의 경쟁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원한다.  그 점이 또한 무겁고 의미있는 그 무엇을 소설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한국의 소설가들이 하루키를 외면하려 드는 이유다.

 

3년만에 발표된 하루키의 신작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붓가는대로 소설을 시작했고 우연하게 인물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그것은 놀랍게도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세계를 형성하며 인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는 죽어 있는 인물이 없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 하나에까지도 생명력을 갖게 한다.  이러한 재능은 소설가 가운데서도 그리 흔치 않다.  다자키 쓰쿠루는 무척 평범한 인물이다. 재력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가 그렇다.  주인공은 고교시절 그룹을 이뤘던 친구들로부터 어느 순간 외면을 당한다. 그것은 쓰쿠루를 상실과 고독감 속으로 내몰게 된다.  소설은 이제 그가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를 찾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하루키는 이 궁금증을 소설의 전반부에 툭 던져놓고 독자들을 줄곧 책의 마지막까지 잡아둔다.  쓰쿠루가 짝사랑했던 `시로'는 아름답고 신비한 인물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모든 장치들을 그는 소유하고 있다.  리스트의 소곡집 ` 순례의 해' 가운데 시로가 즐겨치던 곡은 향수란 뜻을 가진 `르 말 뒤 페이' 였다.  이 곡은 줄곧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며 시로의 존재감을 음악과 연계시킨다. 시로의 의문에 쌓인 삶과 죽음 그리고 다자키 쓰쿠루에 대한 잘못된 비난 등 모두가 이제는 진실을 가릴 수 없는 그 너머에 존재한다. 스무살 어느 해 다자키 쓰쿠루를 죽음과 절망으로 내 몬 사람과 그 사연은 이 우주의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를 묶고 있는 끈이다.

 

색채가 없는 것은 쓰쿠루 뿐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무척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사람들이 주목받는 세계가 가진 특성 때문이다.  스무 살 시점에 다자키 스쿠루처럼 인생의 발걸음을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에게 스무살은 우주와 세계, 그리고 자신을 다시보게 하는 감성의 본향이다.  스무살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영원히 그 본향과 멀어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쓰쿠루의 상실감과 절망감은 친구로부터의 소외가 아닌 사실 이 근본적 한계가 원인일 수 있다. 또, 그것이 독자들이 이 사소한 사건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보편적 기억을 되살려주며 거기서 공감의 덩어리를 움켜쥘 수 있게 하는 소설은 흡인력을 불러온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364쪽,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쓰쿠루가 연인 `사라'의 도움으로 먼 과거의 인물들과 사연들을 찾아 떠난 데는 결국 `자유'의 문제가 결부 돼 있다.  스무 살 근처에서 정지된 쓰쿠루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그를 거부했던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 오직 쓰쿠루만이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의 삶 가운데서도 `과거'에 결박당한 상태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자키 쓰쿠루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과거의 상처들과 화해하는 방법을 예시한다.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 잔잔한 일상과 영혼의 심해를 탐험하는 듯한 문장들은 독자들을 친절히 이 여정으로  안내한다.  하루키의 진가는 바로 사람들의 보편적 기억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다듬는 그 풍부한 감성과 세심한 언어들에 있음을 독자들은 또다시 깨닫는다.

 

하루키는 1970년대를 거치며,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뒀다고 설명한적이 있다. "독립적인 인간은 반정치적"이란 말도 남긴다.  그것은 일본학생운동의 좌절감이 작가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하루키의 탈정치성은 오히려 정치적인 메세지를 되돌려준다.  빛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다.  정치와 권력이 사라진 세계는 무엇을 남기는가?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고 그 세계의 현현(顯現)을 목격한다. 모략과 음모가 사라진 곳에서 `살아 있는 인물과 감성의 세계'가 시작된다.  이것이 하루키의 세계이자 그 지향점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목적없이 발 들여논 세계를 그저 둘러보고 걷다 빠져나오면 알맞다.  그의 소설은 처음과 끝이 정해진 하나의 견고한 세계며, 그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언제나 신비로운 경험이다. 우연하게 시발하여 형성하는 하루키의 세계는 그 진지한 문장 가운데 보편의 옷을 입는다. 하루키의 인물들과 우리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평범한 세계를 특별한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확장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고,  비열한 정치에 오염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필터의 기능에 충실하다. 작가는 정치적이고 반권력적이어야 한다는 조지 오웰의 작가론에 반하는 하루키의 소설 쓰기는,  결국 길을 우회하여 일그러진 현실의 정치를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