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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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희망'과 `절망'은 경계의 단어들이다. 절망의 곁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사라진 순간 절망으로 넘어간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 두 단어 사이를 오가기 마련이다. 20대 시절 반복해 읽곤 했던 한 권의 책이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산문집 <시지프의 신화>였다. 반복해 읽다보니 책 속 문장들이 문득 입안에서 절로 튀어나오곤 했다.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카뮈의 문장 한 토막이 생각났다. 20년이 다 된 책 한 권의 힘이라고나 할까?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의 첫 머리를 `자살'이라는 무척 우울한 주제로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작가도 산문집의 첫 문장을 자살 같은 어두운 단어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용기있고 정직한 태도인지 그 때 나는 몰랐다.

 

"자살에는 많은 동기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가장 표면적인 이유가 가장 유효한 것은 아니다. 신문은 종종 `슬픔'이나 `불치의 병' 등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 이러한 설명은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절망적인 사람의 한 친구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하지나 않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자가 죄인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中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그들의 절망 때문이 아니라 이웃과 친구들의 `무관심한 어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뭘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말 한 마디가 타인에겐 치유의 명약이거나 생명을 박탈하는 독약이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새롭게 출간한 소설에서 바로 타인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용기를 얻고 살아갈 희망을 건져내는지 그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방과 후>같은 작품들로 유명한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다. 추리소설은 흉폭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 사건을 풀어내는 과정을 담기 마련이지만, 독특하게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절망을 치유하는 희망의 도구로서 환상추리 기법이 응용된다.

 

30년도 더 된 한 폐가에 도둑 3명이 침입한다. 그들이 몰래 잠입한 곳은 30여 년 전에 나미야 유지씨가 잡화점을 운영하던 곳이다. 도둑 셋은 하룻밤 피신이나 해볼까 기대하고 이곳을 찾았지만, 오래된 우편함 상자에 편지봉투가 툭 하고 떨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폐가의 우편함과 대문에 걸린 우유상자를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도둑셋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30년 전,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줬다. 처음엔 가볍게 아이들의 장난같은 상담에 답장을 담장에 붙여주는 방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진지한 고민이 할아버지의 우편함에 쌓이기 시작하고 잡지를 통해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사례가 유명세를 탄다. 도둑셋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30여년 시간차를 두며 고민 편지를 주고받는 과거의 사람들과 잡화점 할아버지의 기묘한 환상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우리 같은 놈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돈도 없지, 가방끈 짧지, 백그라운드도 없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쩨쩨하게 빈집이나 털고 다니는 정도야. (중략..)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로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31쪽,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제 앞가림 못하는 얼치기 삼인조 도둑 셋이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일은 가능할까? 소설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달토끼'라는 여인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애인과 올림픽 메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생선가게 뮤지션'은 생선가게를 가업으로 물려받을 것인지 막막한 음악가의 길을 갈 것인지를 두고 나미야 잡화점의 문을 두드린다. 비틀즈를 사랑했던 아이 `폴 레논'은 사업이 망해 야반도주를 하는 부모님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두고 도덕성과 가족애 사이에서 방황한다. `길 잃은 강아지'는 회사원과 호스티스 일을 병행하며 살고 싶다고 나미야 할아버지께 묻는다. 모두가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에게 온 편지들이라지만, 답장은 얼치기 삼인조 도둑이 한다. 자신들이 고백하듯이 그들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좀도둑'일 뿐이다.

 

그럼에도 고민 상담을 하는 이들은 저마다 나미야 잡화점의 답장속에서 용기를 얻고 답을 찾는다. 이유가 뭘까? 상담자들은 모두 저 나름의 답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나미야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그들이 편지를 보내오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답에 확신을 얻기 위함이라고 그는 풀이한다. 타인의 언어가 가진 위력은 여기에 있다. 절망의 답을 내놓는 이들에게 희망의 단초를 이끌어내고, 자신의 결정을 믿지 못하는 이에게 힘을 북돋는 일 ! 그것은 카뮈의 표현대로 절망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하지 않는 일과 같다. 도둑들이 보내는 답장은 때론 거칠고, 직설적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한다. 그 마음은 순수하고 가상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상담자로서 최대의 장점도 갖고 있다. 결국 삼인조 도둑은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들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문학을 통해 희망과 치유의 메세지를 전달하고 팠을까? 이 소설의 소재가 된 사람들의 고민은 국경을 넘어 보편의 세계에 가닿는다. 사랑과 꿈, 가족, 직업 등, 일본의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청년들도 공감할 소재가 가득하다.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도둑들조차도 타인에게 희망의 언어를 선물할 수 있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담보한다. 한 도시이긴 하지만, 나미야 잡화점에 편지를 주고받는 모두가 소설속에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도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누군가의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되고 햇볕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나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447 쪽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훈훈하고 달달한 에피소드 다섯 편이 담겨 있다. 그 안에서 우린 하나씩의 고민을 안고 절망하는 청년들의 맨얼굴과 만난다. 그들의 고민은 낯설지 않다. 환상추리 문학의 규정된 틀을 깨고, 이 소설은 `기적'을 통해 `희망'을 선물하는 따뜻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선물은 특별하지 않다. 내가 오늘 누군가에게 던진 `말 한마디'와 무심히 지어보인 `어떤 표정'이 바로 희망이다.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카뮈의 말처럼, 우리의 말과 표정은 오늘 내 곁의 누군가를 살리거나 죽게 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기적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재생한다. 이 소설은  탄탄한 플롯, 아름다운 이야기, 스며드는 감동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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