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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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해 읽은 박범신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명확한 주제의식이 드러났다. <촐라체>에는 히말라야의 6440m 수식빙벽을 오르는 두 청년이 등장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루함을 뒤로 하고 거대한 설산을 오르면서 존재와 내면의 공허를 일소하려 한다. 등반 소설이지만 존재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투지를 보여준다.  <은교>에선 17살 은교를 욕망의 시선으로 품어안는 노시인 `적요'가 등장한다. 그는 무엇하나 부럽지 않은 대시인의 명성을 쌓았지만 생의 끝자락에서야 자신이 욕망에 충실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예순 아홉 시인이 17살 소녀를 보는 은밀한 시선은 사랑인가, 욕망인가.  <은교>는 생동하는 욕망의 민낯을 대범하게 보여주며 독자 자신들의 `은교'를 되돌아보게 한다.  존재의 본질과 욕망의 실체를 찾는 박범신의  여정은 이제 어디에 도달한 것일까. 

 

<소소한 풍경>(자음과 모음, 2014)은 일정부분 <촐라체>와 <은교>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한차원 더 극복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소설을 읽는 가운데 세계와 삶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학이 한낱 시간 때우기용 독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유용한 소일거리임을 증명하는 작품이랄까.   소설의 제목이 소설을 지배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야말로 `소소한'이란 형용사에 부합하는 면이 많다.  인물부터 플롯까지 소설을 이루는 모든 것이 `소소하다'.  심지어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장소가 `소소 시'일 정도다.  소소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뭉뚱그려 보여주려는 의도였을까. 우리와 닮은 인물과 풍경들은 어떻게 새로운 의미와 감동으로 되살아나는가.  책장을 덮으면 다른 세계에 당도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겐 이름이 없다.  화자도 그렇고 주변인물도 마찬가지다.  대표 화자인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나의 제자였던 또다른 화자는 `ㄱ'이라 불린다. ㄱ이 대학시절 사랑했던 사람은 `남자1'이다.   그리고 소소 시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뤘던 두번째 남자는 ㄴ이며 그들과 함께 했던 여성은 'ㄷ'이라 불린다.  이름조차 생략한 이유를 독자들은 작가의 말에서 발견한다. "생의 어느 작은 틈은 여전히 검푸른 어둠에 싸여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비밀'이다.(중략..) 그러니 읽고 나서 부디 그들을 기억에서 지워주기 바란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졌을지 모르는 불멸에의 꿈도 그렇다."  작가의 말에는 이 소설의 지향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그들을 잊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 그들의 `비밀'과 `불멸에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졸업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ㄱ은 나에게 전화을 걸어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라고 묻는다.  그 전화를 받고서야 ㄱ이 소설 수업에서 발표한 <우물>이란 독특한 작품을 기억해 낸다. 그 소설은 `그녀만 쓸 수 있는 소설로서 몽환의 덩어리'였다.  일종의 암호책 같기도 해서 합평 수업에선 악평이 줄을 이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물>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불안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 ㄱ은  종적을 감추었다. 남자1과 ㄱ이 교제를 시작하는 것은 그 때 였다.  ㄱ은 그렇게 문학의 길과 멀어졌다. 10년이 흘러 재회한 ㄱ은 이미 남자1과 한번 이혼한 상태였다.  남자1은 사랑하는 것과 지배하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첫번째 사랑은 상처로 남았다. ㄱ이 그 시점에 정착한 도시가 소소 시다.  이후, ㄱ이 인디밴디의 베이스 ㄴ과  우연하게 동거를 시작했다. 연변 출신 처녀 ㄷ이 나타난 것도 그 즈음이다. 한 명의 이혼녀와 `더플팩' 떠돌이 남 ㄴ 그리고 북쪽에서 온 처녀 ㄷ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모호한 상태로 `덩어리'가 되어 소소시 ㄱ의 빌라에서 머물게 된다.

 

" 죽음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면, 신은 왜, 우리에게 애당초 사랑의 불꽃을 주었을까요."    211쪽, 박범신 <소소한 풍경> 

 

ㄱ와 ㄴ 그리고 ㄷ이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섹스에 대한 암시적 표현이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ㄱ과 ㄴ, ㄱ과 ㄷ, ㄴ과 ㄷ 그리고 ㄱ,ㄴ,ㄷ이 모두 덩어리질 때가 있다. 이 기이한 관계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박범신의 전작 <은교>의 파격적 사랑과 욕망을 넘어선다고 표현해도 좋을까.  그들을 묶는 관계의 끈은 지극히 약하다. 세상의 오염된 시선도 빗겨간다. 그들의 관계는 오직 그들 사이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스런 공간에서 그들이 행한 사랑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뿐이다.  그러니 조금도 그 관계에 `변태'라든가 `그릇된 욕망'이란 수식어를 넣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저 "함께 생의 내밀한 길을 통해 마침내 영광스런 신의 영지에 도달했던 것이라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ㄴ은 ㄱ의 집 마당에 우물을 판다. 그것은 훗날 밝혀지지만 식수용이 아니라 자신이 묻힐 묘지였다.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한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는 우물 안에서 발견된 그의 얼굴이었다. ㄴ이 죽자, 그들의 공동체는 해체된다. ㄷ은 다른 도시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티켓다방의 종업원으로 취직한다. ㄱ은 ㄴ의 시신이 발견됨으로써, 살인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는다.  그들이 덩어리가 된 채, 보낸 지상의 짧은 시간은 겨울과 봄 두 계절이다.  그곳에서 행한 섹스와 흘려보낸 모호한 시간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곳에서 그들이 꿈꾼 것은 순수함이다.  순수한 사랑, 순수한 죽음, 순수한 시간, 순수한 관계.  그건 인간을 끊임없이 규정하는 밖의 세계, 오염시키는 언어, 상처와 가시로 남겨진 생애, 그 반대편에서 한순간이나마 덩어리로서 지향한 `순수한' 혼연일체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세 사람 외에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그들의 마음 속에 비밀로만 존재했던 숨겨진 오아시스같은 공간이었다.

 

"죽음이라는 말만으로 너희 세 사람의 관계, 그 덩어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어. 너는, 너희는 순수한 영혼을 가졌어. 중요한 키워드는 그거라고 난 생각해. 이를테면 죽음이, 너희의 영혼을 최대한 순수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는 거야.(중략..) 남자1은 죽음, 혹은 고통으로 오염된 반면, 너희는 그것으로 너희를 씻은 거지. 그렇게 씻고 나면 최적의 순수성으로 앞날을 내다보게 돼 "  298쪽

 

그들이 소소 시에 모여들어, 덩어리를 이루고 순수함을 꿈꾼 것은 `생의 가시'들에 찔린 생채기 때문이다. ㄱ은 어린 시절 오빠를 잃었다. 다시 오빠의 추모공원에 다녀오던 부모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빠를 따라갔다'.  ㄱ은 그 상처를 잊고자 소설가로 살고 싶었지만 남자1을 만나 이른 결혼이 그 상처를 보듬어 줄 것으로 착각했다. ㄴ은 5.18 계엄군의 총에 형과 아버지가 살해당한다. 그 이후,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가 일했던 곳마다 재해로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조지 해리슨을 꿈꾸며 기타를 배우고 밴드에 들어갔지만 그마저도 매몰차게 거부당한다. ㄷ은 탈북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강에 흘려보냈다. 이젠 어린 자신을 겁탈하려던 조선족 사씨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는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 소소 시에 이르기 전까지 그들의 인생여정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더군다나 사랑했던 사람들의 비극적이자 비정상적인 죽음은 남은 이들의 영혼에 가시를 돋게 한다. 가시는 타인이 아닌 자신을 찌르고 상처주게 마련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가시를 안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탐색한다. 그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을 때는 가장 평화롭고 순수했으며 행복했다.  하지만, 한 덩어리는 쪼개질 숙명을 갖고 있다. 자신들의 삶 속에 가시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젠가 서로를 찌르고 상처줄 것이기 때문이다.  ㄴ이 우물을 파고 자신의 가시와 함께 사라진 것은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도 그 가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초월을 꿈꿔서다. ㄷ은 가장 세속적으로 가시와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몸을 팔아 연변의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는 ㄷ은 "아저씨가 간 길보다 남아 있는 길이 훨씬 더 더럽다는 것, 오염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ㄱ은 "소설이야말로 사람들 몸뚱어리 속에 박힌 가시들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라는 스승의 깨달음을 긍정한다. 하여, "손끝에서 문장이 자유자재 춤추는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둔 강에의 오랜 홀림을 이길 수 있는" 작가의 길을 택한다.  

 

"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취급할 때에도 기필코 나는 `사랑에 관해 소리치고 있어'야 한다. 분명하다. 사람들이 `개처럼 취급' 할 때에도 `사랑에 관해 소리치'는, 그런 문장을 찾고 싶다.  삶의 당위를.  그러나 너무 늦게 내가 길을 떠나려 하는 것은 아닐까. "  300쪽

 

`비밀'과 `불멸에의 꿈'은 특별하지 않았다. 소설의 주축을 이루는 ㄱ,ㄴ,ㄷ의 삶은 `소소하다'고 표현해야 옳다. 이들의 삶은 익숙한 죽음과 맞닿아 있고 온갖 시련과 고통에 노출 돼 있지만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이미 살고 있다.  항상  해맑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들이 해맑은 것은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극복의 방법을 웃음에서 찾았기 때문 아닐까.  이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영혼에 자리잡은 가시들은 항상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이다.  어느것이 진짜 답인가.  책장을 덮으며 자신에게 묻는다.   죽음, 타락, 그리고 문학적인 승화.  소설의 끝에서 ㄱ은 뒤늦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 나의 진정한 문장은 내가 단독자로서 찾아야 한다"(315쪽)   그리고 다짐하듯 ㄱ은 하나의 각오를 드러낸다. " 문장으로 반드시 당신을 이기고 싶다 "  여기서 `당신'이 지칭하는 것은 `나'로 표상되는 스승일 것이다. 더불어, 삶이 안겨주는 모든 가시들, 고통들, 상처들일 게다.  

 

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소소한 인물과 소소한 이야기로 우리 삶을 그려내는 이 작품은 `소소한 감동'을 건네준다. 이 평범한 삶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역설적으로 그건 어떤 사소한 인생과 일상도 결코 `사소하지 않고 특별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등장인물들의 덩어리진 행위에는 음탕함이 깃들어 있지만 그것조차도 퇴폐적으로 비춰지지 않게 하는 힘이 박범신 문장의 내공이다. 삶이 아무리 거칠고 누추하더라도 시어는 더럽혀지지 않는 법이다.  문장에는 언제나 현실을 초월하는 마력이 존재한다.  소소하고 익숙한 풍경에서 삶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내고, 비밀을 풀어내는 문장들이 소설 <소소한 풍경>을 채운다. 그런 문장들을 통해, 잠시라도 우린 계산적이고 낯익은 세계를 탈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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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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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위대한 책이다.  인류 역사속에서 성서만큼 영향력 있는 책은 없었다.  기독교가 인류에게 전파되는 과정을 보라.  숱한 박해와 핍박이 신자들과 함께 했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죽음을 넘어설 말씀이 그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을 버리고도 따르고자 한 가르침이 담긴 책은 흔치 않다.  복음이 한 문화권을 잠식해 공인되는 과정은 비슷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더욱 절박한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  젤롯(zealot)이란 단어가 있다. `열심'을 의미한다.  신앙적으로 흔히 열성적인 사람, 혹은 광신적인 신자를 표현한다. 이 용어는 1세기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열심당(Zealots)에도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 시대,  평화가 아닌 무력을 통해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레자 아슬란은 미국의 종교학자다.  1972년생인 그는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났다.  1979년 이란 혁명을 거치며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그가 미국의 주류 종교인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한 과정은 자의반, 타의반이다.  1980년대 미국 사회에서 모슬렘으로 사는 일은 화성인 취급을 당하기에 제격이었다.   9.11를 겪기 전이지만, 미국 사회는 타자들에 관용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신앙을 키웠지만,  훗날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며 그의 기독교 신앙은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할 책 한 권을 썼다.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라는 전제를 깔고 신앙의 대상이 아닌 1세기 유대 역사 속 예수의 흔적을 추적한다.

 

예수를 역사안으로 초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예수의 생애와 자취를 신약성서 외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세기의 팔레스타인 땅 유대의 정치적 위치는 유럽과 지중해 전 지역을 아우르는 제국, 로마의 주변적인 속국이었다. 더군다나 예수라는 인물은 그 유대땅 가운데서도 `가난한 갈릴리 농촌마을 나사렛의 시골뜨기' 출신이었다.  로마제국의 걸출한 역사가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고 언급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여, 레자 아슬란은 역사문헌이 전무한 상황에서 예수를 복원하는데 일종의 우회로를 통한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보도하고 있는 예수의 공생애를 따라가며 실제 1세기 유대 땅의 정치,사회 지형을 로마의 공인된 역사와 교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망가진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공인된 로마의 역사속에서 유추된 예수의 삶은 설득력이 있다.

 

퍼즐조각을 이어붙이는데 아슬란은 두가지 `성역'에 손댈 수밖에 없었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과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이다.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고 하여 오류가 없다는 믿음이다. 반면, 아슬란은 적지 않은 역사적 오류와 의도적 왜곡이 신약성서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는 신앙공동체의 고백을 기록한 책으로 예수의 언행에 관한 직접 목격담이 아니며, 살아 생전에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이 기록한 책도 아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의 기록은 기원 후 70년 직후로 예수가 죽고 40년이나 흘러서 기록되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많은 부분을 빠트렸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기원후 90년에서 100년 사이에 마태와 누가 기자는 개별적으로 독자적인 전승을 덧붙여 복음서를 새롭게 쓴다.

 

신약성서가 예수 사후 수십년에서 1세기가 지난 후,  당대 수집된 다양한 문헌을 통해 조합되었다는 점과 그것을 기록한 이들이 역사적 인물보다는 신앙적 대상으로 예수를 묘사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아슬란은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예수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단 두가지라고 확언한다.  첫째, 예수가 1세기 전반에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중 운동을 일으킨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러한 예수를 로마 당국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아슬란은 이 두가지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역사적 예수)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낸 순한 목자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가정이다.  즉, 예수가 실제로는 유대지도층과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혁명가의 모습일 거라는 추정이다.

 

20년간, 아슬란은 예수의 삶을 연구했다. 그 최종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그는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상'을 수정한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고, 또 육신으로 오신 하느님이었다. 그는 세상의 일에 초연한 사람이었다.  신약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예수가 발딛고 살았던 세계의 역사를 잘 느낄 수 없다.  그는 시간적으로 짧고, 공간적으로 좁은 1세기 로마 제국의 유대 땅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격이 다른 생명의 언어로 말하고,  죽은이를 살려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선보인다.  대속(代贖)의 의미를 지닌 장엄한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펼쳐진다.  그것은 역사가 아닌 `계시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현실의 예수는 포악한 로마제국 아래의 핍박받던 유대인을 이끈 지도자였다.  일본의 야만적인 통치를 경험한 우리는 무력에 점령당한 속국의 지위와 그 민족의 비참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묻게 된다.  왜 복음서 속 예수에게서 그러한 유대 민족의 궁핍한 역사가 느껴지지 않는가.

 

아슬란은 예수가 결코 당대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었다고 믿는다.   로마군의 폭력앞에서 과연 예수는 평화와 사랑을 최우선으로 가르쳤던 유순한 지도자였을까.  어쩌면 역사적 예수는 `열심당(젤롯)'만큼 과격한 민족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1세기, 유대 땅의 역사가 너무나 엄혹했기 때문에 그러한 가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 2,000년이 흐른 오늘날, 바울이 만든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집어삼켜버린 셈이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를 배회하던 혁명적 젤롯에 대한 기억,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권위에 반발한 매혹적인 설교자에 대한 기억, 로마에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한 민족주의자에 대한 기억은 역사의 뒤편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 308쪽   지배자인 로마의 입맛에 맞는 종교를 만들기 위해, 바울은 예수에게서 정치적 색채를 지워버렸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메세지다. 

 

예수는 진정 어떤 존재였을까.  객관적 역사문헌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설명은 가설에 기반한다.  아슬란은 종교학자다. 그가 복원한 예수는 그럴 듯 하지만, 한낱 소설일 수도 있다.  신앙의 영역에 지성과 합리주의의 잣대를 가져오는 허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압제에 저항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유대민족의 지도자와 만날 수 있다.  바울이 지우려고 애쓴 `과격분자 예수'도 충분히 존경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역사와 신앙은 진실을 공유한다.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는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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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시리즈
마르코 카타네오.자스미나 트리포니 지음, 김충선 옮김 / 글램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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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은 많은 기구를 거느린 국제연합체다.  세계정부들의 정부이기도 한 이 연합체는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국가간 이합집산을 통해 각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세계 평화를 궁극적 목적으로 지향하는 단체다.  인류는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깨달은 평화,안보, 경제적 공동번영의 보편적 가치들을 오늘날 유엔을 통해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엔은 인류의 가장 이상적인 가치들을 공인하는데 앞장섰다. 1948년 발표된 `세계인권선언' 이 그 좋은 예다.  인권에 관한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이 선언문에는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의 권리가 다 포함됐다.  시민,정치,자유권적 기본권, 생존권, 노동권 등이 이 선언을 통해 국제적 동의를 받는다.  유엔의 또하나 중요한 성취는 바로 `유네스코'의 설립이다. 이 기구는 교육,문화,과학의 보급을 통해 세계시민의 교류와 평화를 촉진하려는 문화적 성격을 갖고 출발했다.  지난 인류의 역사가 전쟁과 정복의 역사인 것에 비해, 이 단체의 이념은 세계시민으로서 문화적인 교감과 발전을 꿈꾼다. 

 

오늘날 유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기구로 성장한 유네스코는 1972년에 `세계유산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은 국경을 넘어, 세계에 흩어진 가치있는 유무형의 자산을 인류의 자산으로 승격시키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것을 지키고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유산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 보존, 계승되어야 할 가치있는 자산을 통칭한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을 3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문화유산이다. 기념물, 건축물, 기념 조각 및 회화, 고고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가운데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을 말한다.  둘째 자연유산이다.  무기적 또는 생물학적 생성물들로부터 이룩된 자연의 기념물로서 관상상 또는 과학상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것을 통칭한다.  셋째, 복합유산이다.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산을 일컫는다. 

 

세계유산은 2013년 6월 기준으로 160개국, 981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문화유산은 759점, 자연유산 193점,복합유산 29점이 등재 돼 있다. 파괴에 노출된 세계유산은 44점으로 보호가 필요한 실정이다.  2012년 9월 세계유산협약 가입국은 190개국이다.  한국은 1988년 102번째로 이 협약에 가입했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 ·불국사(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학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으로 총 10건이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에 흩어진 유물과 자연을 유산으로 선정하는 과정은 엄격하다.  한 국가내에서 소중한 자산이더라도,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중요성을 갖지 못하면 선정되지 못한다.  각 국가는 많은 로비와 홍보를 통해 자국 내 문화,자연유산을 유네스코에 등재키 위해 숱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유네스코 유산 등재는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만큼, 선별된 유산의 가치는 특별할 수밖에 없고 그 순간부터 인류의 보호와 관심이 뒤따른다.   한국 내의 세계유산만 보더라도 역사적 가치와 완성도, 자연물의 희귀성과 신비함이 그걸 말해 준다. 세계유산 자체가 인류 문명의 지적 성취와 위대함을 증거한다. 우리가 세계유산을 섭렵하고, 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하는 이유다.  글램북스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새롭게 내 놓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시리즈 3권>은 권 당 100점씩, 300여점에 달하는 세계 유산을 고화질의 사진 도판과 여행기에 준하는 흥미로운 해설로 담아낸 기획이다.   편집 자체가 유네스코가 지향하고 있는 유산의 분류체계를 따르고 있다.  이 책들은 세계유산을 3가지로 정리했다.  세계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그리고 세계고대문명이다.   

 


이 시리즈에 사진과 글을 제공한 두 명의 저자는 프랑스 내 잡지사에서 편집자와 기자로 일하고 있다. 마르코 카타네오는 <Le Scienze>지의 편집자로 일하며 여행과 사진찍기를 좋아한다. 자스미나 트리포니는 여행전문기자로, 직업상 자주 여행을 다니며 인도, 동남아시아, 중동 지방의 고유문화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뛰어난 사진과 박식하고 통찰력 있는 해설은 이 두 작가의 내공을 증명하며, 책의 깊이와 완성도를 동시에 끌어올렸다. 시리즈의 어느 책, 어느 페이지를 넘겨도 뛰어난 화질과 화각안에 잡힌 전경 사진과 개별 사진들이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각 유산은 지도상의 위치가 표기돼 현장감을 살렸고, 독자의 위치감각을 잃지 않게 했다.  유적에 얽힌 내력과 전승되는 이야기, 여행객이 유념해야 할 점, 감상 등이 상세히 나열된다.  각 유적마다 화려한 도판이 제공되고, 사진에 관한 해설은 무척 충실하고 자체로 충분하다. 


요즘엔 백과사전이 인기가 없다. 필요하면 모든걸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 시대라서다. 시리즈 3권의 무게만 하더라도 10킬로그램은 나갈 것 같고, 책의 판형도 서재에 세워서 꽂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다.  이렇게 큰 판형으로 만든 것은 각 유산이 현장감을 드러낼 수 있도록 고화질 도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적의 현장감과 웅장함이 대형 도판 사진들에서 전해오는 것은 기본이다. 전자책을 선호하지 않은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책은 만지고 보는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들은 여전히 글쓰기를 펜으로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컴퓨터로 글을 쓰면 글이 나오질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내겐 책 읽기가 바로 그렇다.


스마트폰, 데스크탑, 노트북, 테블릿 등 어느 것도 잘 사용하고 최신 기술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내게 독서란 `종이 책'을 읽는 과정이다. 종이책은 무겁고, 전자책에 비해 비싸지만 숱한 장점을 제공한다.  종이 책이 갖고 있는 시각적인 안정감, 손으로 책을 만지작 거리며 책을 읽을 때 전해지는 감성, 언제든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고, 메모를 할 수 있는 편의성 등은 포기할 수 없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글램북스의 <유네스코 시리즈>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유익함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세계 여행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유적들을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간접 관람의 기회가 된다.   여행작가을 꿈꾸는 이들에겐 무척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사진구도 혹은 여행지를 묘사하는 방법과 실제를 익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 문명과 자연에 관해 교향과 지식을 쌓고자 하는 독자에겐 교양인문서로 활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집안에 소장용 백과사전이 없는 요즘의 아이들에겐,  문화와 자연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익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계고대문명>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역사공부요, <세계자연유산>은 지구환경과 세계지리를 정리할 기회가 될 것이고,  <세계문화유산>은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와 예술을 공부하는데 참고할 수 있다. 

 

집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펴볼만한 책은 흔치 않다. 함께 책을 읽는 일 자체가 가족간의 대화와 소통의 재료가 된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적 유산들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이 책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즐겁고 유익한 독서경험을 선물할 것이다.  종이책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장점을 갖고 있는 이 시리즈물은 소장과 학습용으로 활용 가치가 무한하다.   챕터마다 통일성 있는 구성으로 읽기에 편하고, 풍부한 자료사진과 사진별로 추가적인 해설자료가 제공되며, 여행기처럼 읽기 쉬우면서도 유물과 역사, 유물과 문명을 교차하는 서술로 세계유산을 깊이 있게 접근한다.  하여,  인류의 문화와 고대 문명, 지구환경과 자연을 아우르는 이 시리즈물의 유익과 가치는  오직 소장하는 독자들의 몫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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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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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하나의 주제를 깊이있게 파고드는 데 재주가 남다른 작가다. 스위스 태생이면서 영국에 적을 두고 있는 이 작가의 책들은 평이하면서도 기발하다. 전작 <여행의 기술>이나 <일의 기쁨과 슬픔> 같은 책을 읽으며 많은 독자들은 그의 박식하면서도 예술적인 문체에 반했을 것 같다.  <여행의 기술>은 여행의 의미를 서구 역사와 문화, 예술로 빗대 풀어 쓴 책이다.  이 책은 우리들의 흔한 여행에 예술(ART)적 관점을 유지하며 여행에 관한 새로운 정의, 즉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닌 `무엇을 느꼈는가' 라는 점에 포커스를 맞춘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지극히 실험적인 저술이다.  일과 떨어질 수 없는 현대인에게 `일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보통은 기꺼이 일의 현장에 몸을 던져본다.  

 

그가 어떤 주제를 파고드는 방식은 무척 성실하고 독창적이다. 역사와 예술, 또 철학과 미술, 정치를 분석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의 글에는 서구인의 삶이 녹아들어 있지만, 곧바로 그것은 보편으로 편입된다. 서구주의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문명의 한계 때문일 게다. 하여 그의 저술은 국경을 허물어 버리고 `세계인'의 마음을 사라잡기에 알맞다. 그는 문명을 관찰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우리 시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응시한다.  역사와 예술에 박식한 그의 문체는 유럽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불안>(이레 펴냄,2005년)은 특유의 박식하고 유려한 문체가 빛나고 있는 보통의 저작이다.  불안은 현대 문명안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친숙한 감정 상태다.  그러나, 보통이 이 책에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지위'에서 발원하는 자본주의 소시민의 불안이다.

 

사회적 동물이란 근본적 한계를 가진 것이 인간이다.  집단에 소속되고 그 안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짓는 것은 인간의 삶이다.  사람은 개인이 아닌 사회에 포섭될 수밖에 없는 운명 때문에 그 집단 내의 지위를 무시할 수 없다.  한 집단내에서 평가가 한 사람의 `자아상'을 결정하며, 세상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순간 삶은 무의미해진다.  현대인에게 지위는 쓸모 있고, 사랑받을 만한 중요한 존재라는 보증과도 같다.  그러니 지위에 대한 갈망은 현대인의 일생을 지배하고 `불안'을 잉태한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에 두고, 그 해법을 다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에서 찾는다.  일목요연한 분석을 통해 보통이 노리는 것은 불안의 상태가 인간의 역사안에서 어떻게 변주돼 왔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일별해 보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작업은 인간을 억압하는 악몽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암중모색이라고 할까?

 

불안의 감정 상태가 역사를 통해 변주돼 왔고, 그 극복의 방법이 시대별로 다채롭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불안'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적 조건과 숙명일테다.  중세시절 인간의 신분은 성직자, 귀족, 기사, 농민 등으로 정해져 있었다.  한번 정해진 계급은 변경이 불가했기에 지위에서 오는 불안은 크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가 한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로 기능한 것은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다.  평등의 개념이 전파되고, 지능과 능력이 우선시되는 능력주의 사회에 들어서자 부와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책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현대 자본주의가 이윤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게 되면서, `노동의 진정한 목적이 이제 인간이 아닌 돈'으로 바뀐다.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임금노동자는 상시적 구조조정의 상태에 놓이며, 지위에 대한 불안에 휩싸였다. 

 

소비적 관점에서 인간은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의 삶의 편의성은 중세 귀족의 그것을 넘어선다. 발전된 사회와 높아진 소득에서 오는 착시효과는 지속되지 못했다. 곧바로 풍요로움과 함께 자라난 욕망은 우리를 새로운 궁핍함으로 인도한다.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돈이 들기 때문이다.  해서,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현대 소비사회가 유지되는 비결은 정반대다.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해 상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욕망 충족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불안'이 탄생한다.  자신의 풍요를 느낄 사이 없이, 오직 궁핍으로 직행하는 일이 생긴다. 

 

"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  268 쪽

 

알랭 드 보통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서술한다.  기원 전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가진 것 없고, 사회적 직분도 없었지만 오직 이성의 힘에 따라 외부적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소크라테스가 장터에서 모욕을 당한 것을 본 행인이 물었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답한다. "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 예술은 속세의 가치평가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부자이고 품행이 단정한 것은 곧바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은 물질적 부나 사회적 지위와 아무 관련이 없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밝힌 하나의 우울한 에피소드는 `정치적 불안'을 제거하는 과정에 힌트를 준다. 1920년대, 울프는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입장하려다 신사 차림의 문지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 칼리지의 펠로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을 가져오지 않으면 여자는 도서관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울프는 여자들의 평등한 권리과 고등교육을 박탈당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성공한 작가이자 귀족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벗고, 기독교에 귀의한 과정은 `죽음'에 대한 응시 덕분이다.  그가 <참회록>에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죽음 앞에 자신이 이룬 모든 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죽음의 경고(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통해 삶의 불안을 일소한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당대의 사회를 회피하고 자신들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하고자 시도한 집단이 있었다.  `보헤미안'이다.  그들이 회피하고자 한 것 또한 지배계급이 파생하는 `불안'이었다.

 

"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  384쪽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은 내 서가에서 오랜시간 잠들었다.  출판연도가 2005년인 것으로 보면, 분명 내 서가에서 5년은 잠들었던 게 분명하다.  요 며칠, 읽을 책을 골라보기 위해 서가를 훑어보다 <불안>이란 제목이 선명한 이 붉은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어느 순간 그때 그때의 기분 상태로 변했다. 요즘 내 감정상태를 설명하는 듯한 책 제목에 끌렸다.  보통에 따르면, 삶은 불안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나의 불안이 해소되면, 새로운 불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불안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상태지만, 그 원인을 개인에게만 찾을 순 없다.  불안의 본체와 연결된 탯줄의 끝자락엔 사회가 있다.  정치와 경제가 곧바로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의 삶의 질과 행복을 좌우한다.

 

정치가 형편없이 조악하면 당연히 그 사회가 형편없어지고 그 개인의 상태가 조악해 진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은 법이다.  정치가 조작과 부실과 무능으로 점철되면 한 사회에 소속된 인간들의 도덕적 잣대와 가치도 흔들리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이 받게 돼 있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무책임한 선장은 누가 만들었는가?  한 개인을 탓하기 전에, 그 사회를 돌아봐야 하고 그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눈여겨 봐야 한다.  정의보다 능력이, 인간보다 효율성을 앞세운 정치와 경제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진 않았을까?  정직하지 않지만 일은 잘하는 리더나 노동의 질 보다는 기업의 경쟁력이 최고라는 인식은 지배계급이 심어준 착시적 관념이다.  정직하지 않은 리더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고, 인간보다 돈을 모시는 경제는 생명을 경시할 뿐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진실'이지 않은가?

 

불안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알랭 드 보통은 선언했다.  또, 그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 근대성, 자본주의, 현대의 정치와 경제로 돌리고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주장이다.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그것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은 모든 인간의 의무다.  여기에 개인의 역할이 있다.  기독교나 철학, 예술에 집착하고 의지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훌륭한 처방전이다. 반면, 보헤미안으로 살아가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고 무책임하다.  정치를 바꾸는 일은 어렵고 긴 노력이 요구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불안에서 그치면 무익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면 인간은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 관한 사유를 통해,  우리들이 집착하고 추종했던 서구문명의 `민낯'을 보여줬다.  인간은 지금 행복하지 않고 `불안'하다.  지금,  누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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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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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스토옙스키와 만났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이후니까 15년이 훌쩍 넘어선다. 이 문제적 작가의 작품들은 너무 묵직하고 심오해서 젊은 시절의 내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지금도 가끔 무겁게 말하고 쓰는 `습관' 을 갖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이런 독서의 영향 때문일테다.   요즘에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이란 일단 다양성을 핑계로 `오합지졸'을 면치 못한다.  마치 백화점 쇼핑을 하듯 책 한 권을 먹어치우곤 다시 내 서재의 이곳저곳을 염탐한다.  그리고 맘에 드는 책을 한 권 달랑 골라내는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젊은 시절처럼 한 우물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경향과는 확실히 멀어졌다.  도스토옙스키와의 갑작스런 재회가 문득 내 젊은 시절의 독서취향과 조금 가벼워진 지금의 독서경향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 게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무척 난해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훗날 발표되는 그의 대작들을 이해하는데 `철학적 서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철학적 서문이라니?  그 말에 백번 동감이다.  1장만 놓고 보자면, 소설이 아니라 철학이라 불러도 좋겠다.  지하생활자는 줄기찬 독백을 늘어놓는다.  관청에 근무하다 먼 친적 중 하나로부터 6천 루불이란 유산을 받은 후, 주인공은 지하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이 20년 전 얘기다. 1장 `지하실'은 고백체의 문장으로 지하생활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2장 `진눈깨비 때문에'는 20년 전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시간적으로 역순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1장에서 작가는 철학인지 넋두리인지 알 길 없는 고백을 길게 이어놓는다.  결코 유쾌하지 않다. 매우 일방적이다.  첫 문장부터가 그렇고 마지막까지 이 캐릭터는 삐딱선을 탄다.    

 

"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사실 어디가 아픈지조차도 잘 모른다. " 9쪽,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무척 자학적이고 냉소적인 문장이다.  젊은 독자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문장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년을 넘어선 독자들에겐 그의 삐딱선이 불안하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본래' 싫어했고, 인간의 선함을 믿지 않는다.   그는 무기력을 사랑하며 문명을 믿지 않고 사람들을 증오한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원조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원형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는 진보적인 인간들에 걸맞게 병적으로 진보적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곧바로 진보적인 인간은 겁쟁이고 동시에 노예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겁쟁이이자 노예인 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꼬집는다.  정상적인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이란 ` 감각의 다양성을 발달' 시키는 수단이지만, 결국 `피를 보는 것에서 쾌락을 찾는 데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지하생활자는 문명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합법적 전쟁을 비꼬고 있다.  

 

2장으로 들어서면서, 독자들은 주인공이 지하로 도피한 이유를 조금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가 `실제 생활'에서 몇가지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들의 작은 행동에서도 분노와 자존심의 손상을 느낀다. 그의 열등감은 2장 소재가 된 대인관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규칙이다.  우연히 어깨를 맞닿은 장교와 훗날 결투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생활에서 날이 서 있다.  이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또다른 관계들에서도 마찬가지다.  2장에서 주인공은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지만 그곳은 그가 환영받을만한 곳이 아니다. 돈이 많고, 권력욕에 넘치고, 여자들과 농치기 좋아하는 그 그룹에서, 그는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워보고자 돈을 구해 식사모임에 참석하지만 조롱과 모욕을 받고, 복수를 결심한다.  곧이어 구겨진 자존심을 세워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다. 창녀 `리자'와의 만남이다.

 

주인공은 처음으로 이 소설에서 자신보다 낮은 자, 비천한 사람과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무시를 받았다. 심지어 자신의 하인인 `아뽈론'에게 조차 암묵적인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  리자에게, 도덕적이자 윤리적인 연설을 뽐낸다.  그녀가 창녀촌을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지성적인 언변으로 풀어낸다. 그는 자신의 `소외'와 `고립'을 지적인 우월감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리자에게 던진 충고는 대단히 유익하고, 건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 그게 중요하다. 그 전, 자신의 친구 모임에서 받은 모욕과 무시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고분고분한 청자 `리자'를 통해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리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지하생활자'에 대항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196쪽

 

이 소설에서 의아한 것은 `불우한 인간'인 지하생활자의 알듯 모를 듯한 당당함의 정체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결국 지하생활자는  `지상의' 보통 사람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 잘 살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지하로 숨어들어 20년을 밖의 세계와 떨어져 지내며 오직 책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아 지냈다. 열등한 그가 밖의 사람들 속에서도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의 우위를 그가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놓는다.  수치심 따윈 없다.  세상에 그보다 더 불행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그는 생활이 아닌 `두뇌'로 존재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육체의 열등을 지성의 우위로 돌파하는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작가와 주인공을 혼동하기 일수인 순박한 독자들의 오독까지를 감수하며,  용기있게 1인칭으로 작품을 써냈다.  마치, 작가 자신이 지하생활자를 대변하고 있는 듯이 말이다.

 

지하생활자의 거침없는 발언은 관찰자의 여유로움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20년간, 그는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지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패덕'과 거리감을 뒀다는 의미다.  그는 잘난 인간들이 만든 지상의 세계에 대해 책임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참한 세계의 꼬락서니가 어떻든,  그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리고 사실, 지하생활자로 자숙해야 할 잘난 인간들은 너무 많다.  지하생활자는 사람들의 동정은 받을지언정, 그 패악과 거리를 둔 사람이다. 더군다나, 지상의 사람들은 참된 `실제의 삶'이란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거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그걸 참아내지 못하고 `감독받거나 지시받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정신적으로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하며 자신의 치부까지도 드러내놓기를 꺼려하지 않는 주인공은 진정한 자유의 영역안에 거주한다.

 

그렇다면 지상과 지하를 연결해 줄 인간이 필요하다.  그는 지상의 그 못난 인간들처럼 어리석지도, 또 지하의 생활자처럼 자기중심적이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 인간이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바로 `창녀 리자'다.  역설적으로 이 소설속에서 가장 타락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등장하지만 거의 발언하지 않고 `청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지하생활자는 그녀를 한갓 열등감의 보복 대상으로 여기는데 그치지만, 그녀의 침묵과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지하생활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  지하생활자는 그 누구보다 그녀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  한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돈과 권력도 지하생활자의 무기인 `지성'도 아니었다.  비록 사회의 가장 낮은 구석에 있지만,  상처받은 누군가를 감싸안을 수 있는 넓은 포용력, 곧 리자가 소유한 `사랑'이다.  이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연상시킨다.  창녀 소냐는 살인자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어둠에서 건져내 빛으로 인도한다. 

 

" 그래서 조금 전에 나는, 그녀가 내게 <동정적인 말들>을 들으러 왔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그녀를 꾸짖고 부끄럽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결코 <동정적인 말들>을 들으러 내게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러 온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191 쪽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난해한 소설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사회, 정치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로서는 이 작품의 다양한 패러디와 작가가 감추어둔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것은 문학비평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낸 음침한 세계와 파격적인 인물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19세기의 러시아 사회를 몰라도 가능한 일이다. 역사와 사회를 지워버리더라도, 이 소설 텍스트는 충분히 여러가지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일 게다. 지하생활자는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자존감과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현실의 비참함을 이겨내는 것은 오직 책으로 대표되는 지성의 힘이었다. 그는 이 작품속에서 `책'을 지하생활자가 연명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도 내포한다고 믿는다.  그는 책을 통해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울 용기를 얻었고 그릇된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됐다. 

 

<참회록>을 쓴 이후의 톨스토이 작품이 전과 갈라선다면, <지하로부터의 수기>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대작(大作)의 길로 나갔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어가는데 이 작품이 이정표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만큼 다층적인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작품이다.  하여, 비평가들은 간단히 이후 작품에 대한 `철학적 서문'이라고 이 작품의 의미를 포착했던 것이다.  이 작품속에서 등장한 주인공의 냉소와 여러 경향은 훗날 그의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희석되고 나름의 방향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죄와 벌>의 인간회복의 열망,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신학적 논쟁, 작가를 괴롭힌 가난과 질병, 그리고 죽음 가까이에 가본 자의 경험과 내면적 깊이까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가볍고 흥미롭고 교훈적인 소설들에 익숙한 요즘의 내게,  도스토옙스키의 이 작품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의 파란이었다.   어떤 소설이 이런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고전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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