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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도스토옙스키와 만났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이후니까 15년이 훌쩍 넘어선다. 이 문제적 작가의 작품들은 너무 묵직하고 심오해서 젊은 시절의 내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지금도 가끔 무겁게 말하고 쓰는 `습관' 을 갖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이런 독서의 영향 때문일테다. 요즘에 내가 읽고 있는 책들이란 일단 다양성을 핑계로 `오합지졸'을 면치 못한다. 마치 백화점 쇼핑을 하듯 책 한 권을 먹어치우곤 다시 내 서재의 이곳저곳을 염탐한다. 그리고 맘에 드는 책을 한 권 달랑 골라내는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젊은 시절처럼 한 우물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경향과는 확실히 멀어졌다. 도스토옙스키와의 갑작스런 재회가 문득 내 젊은 시절의 독서취향과 조금 가벼워진 지금의 독서경향을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 게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무척 난해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훗날 발표되는 그의 대작들을 이해하는데 `철학적 서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철학적 서문이라니? 그 말에 백번 동감이다. 1장만 놓고 보자면, 소설이 아니라 철학이라 불러도 좋겠다. 지하생활자는 줄기찬 독백을 늘어놓는다. 관청에 근무하다 먼 친적 중 하나로부터 6천 루불이란 유산을 받은 후, 주인공은 지하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이 20년 전 얘기다. 1장 `지하실'은 고백체의 문장으로 지하생활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2장 `진눈깨비 때문에'는 20년 전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시간적으로 역순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1장에서 작가는 철학인지 넋두리인지 알 길 없는 고백을 길게 이어놓는다. 결코 유쾌하지 않다. 매우 일방적이다. 첫 문장부터가 그렇고 마지막까지 이 캐릭터는 삐딱선을 탄다.
"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사실 어디가 아픈지조차도 잘 모른다. " 9쪽,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무척 자학적이고 냉소적인 문장이다. 젊은 독자들에겐 구미가 당기는 문장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년을 넘어선 독자들에겐 그의 삐딱선이 불안하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본래' 싫어했고, 인간의 선함을 믿지 않는다. 그는 무기력을 사랑하며 문명을 믿지 않고 사람들을 증오한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원조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원형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는 진보적인 인간들에 걸맞게 병적으로 진보적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곧바로 진보적인 인간은 겁쟁이고 동시에 노예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겁쟁이이자 노예인 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꼬집는다. 정상적인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이란 ` 감각의 다양성을 발달' 시키는 수단이지만, 결국 `피를 보는 것에서 쾌락을 찾는 데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지하생활자는 문명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합법적 전쟁을 비꼬고 있다.
2장으로 들어서면서, 독자들은 주인공이 지하로 도피한 이유를 조금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가 `실제 생활'에서 몇가지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들의 작은 행동에서도 분노와 자존심의 손상을 느낀다. 그의 열등감은 2장 소재가 된 대인관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규칙이다. 우연히 어깨를 맞닿은 장교와 훗날 결투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생활에서 날이 서 있다. 이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또다른 관계들에서도 마찬가지다. 2장에서 주인공은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지만 그곳은 그가 환영받을만한 곳이 아니다. 돈이 많고, 권력욕에 넘치고, 여자들과 농치기 좋아하는 그 그룹에서, 그는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워보고자 돈을 구해 식사모임에 참석하지만 조롱과 모욕을 받고, 복수를 결심한다. 곧이어 구겨진 자존심을 세워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다. 창녀 `리자'와의 만남이다.
주인공은 처음으로 이 소설에서 자신보다 낮은 자, 비천한 사람과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됐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무시를 받았다. 심지어 자신의 하인인 `아뽈론'에게 조차 암묵적인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 리자에게, 도덕적이자 윤리적인 연설을 뽐낸다. 그녀가 창녀촌을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지성적인 언변으로 풀어낸다. 그는 자신의 `소외'와 `고립'을 지적인 우월감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리자에게 던진 충고는 대단히 유익하고, 건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 그게 중요하다. 그 전, 자신의 친구 모임에서 받은 모욕과 무시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고분고분한 청자 `리자'를 통해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리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지하생활자'에 대항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 196쪽
이 소설에서 의아한 것은 `불우한 인간'인 지하생활자의 알듯 모를 듯한 당당함의 정체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결국 지하생활자는 `지상의' 보통 사람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 잘 살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지하로 숨어들어 20년을 밖의 세계와 떨어져 지내며 오직 책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아 지냈다. 열등한 그가 밖의 사람들 속에서도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의 우위를 그가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놓는다. 수치심 따윈 없다. 세상에 그보다 더 불행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그는 생활이 아닌 `두뇌'로 존재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육체의 열등을 지성의 우위로 돌파하는 인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작가와 주인공을 혼동하기 일수인 순박한 독자들의 오독까지를 감수하며, 용기있게 1인칭으로 작품을 써냈다. 마치, 작가 자신이 지하생활자를 대변하고 있는 듯이 말이다.
지하생활자의 거침없는 발언은 관찰자의 여유로움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20년간, 그는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지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패덕'과 거리감을 뒀다는 의미다. 그는 잘난 인간들이 만든 지상의 세계에 대해 책임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참한 세계의 꼬락서니가 어떻든, 그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리고 사실, 지하생활자로 자숙해야 할 잘난 인간들은 너무 많다. 지하생활자는 사람들의 동정은 받을지언정, 그 패악과 거리를 둔 사람이다. 더군다나, 지상의 사람들은 참된 `실제의 삶'이란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거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그걸 참아내지 못하고 `감독받거나 지시받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정신적으로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하며 자신의 치부까지도 드러내놓기를 꺼려하지 않는 주인공은 진정한 자유의 영역안에 거주한다.
그렇다면 지상과 지하를 연결해 줄 인간이 필요하다. 그는 지상의 그 못난 인간들처럼 어리석지도, 또 지하의 생활자처럼 자기중심적이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 인간이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바로 `창녀 리자'다. 역설적으로 이 소설속에서 가장 타락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서 있는 그녀는, 등장하지만 거의 발언하지 않고 `청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지하생활자는 그녀를 한갓 열등감의 보복 대상으로 여기는데 그치지만, 그녀의 침묵과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지하생활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 지하생활자는 그 누구보다 그녀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 한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돈과 권력도 지하생활자의 무기인 `지성'도 아니었다. 비록 사회의 가장 낮은 구석에 있지만, 상처받은 누군가를 감싸안을 수 있는 넓은 포용력, 곧 리자가 소유한 `사랑'이다. 이 장면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연상시킨다. 창녀 소냐는 살인자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어둠에서 건져내 빛으로 인도한다.
" 그래서 조금 전에 나는, 그녀가 내게 <동정적인 말들>을 들으러 왔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그녀를 꾸짖고 부끄럽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결코 <동정적인 말들>을 들으러 내게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러 온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191 쪽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난해한 소설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사회, 정치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로서는 이 작품의 다양한 패러디와 작가가 감추어둔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것은 문학비평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낸 음침한 세계와 파격적인 인물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은 19세기의 러시아 사회를 몰라도 가능한 일이다. 역사와 사회를 지워버리더라도, 이 소설 텍스트는 충분히 여러가지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일 게다. 지하생활자는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자존감과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현실의 비참함을 이겨내는 것은 오직 책으로 대표되는 지성의 힘이었다. 그는 이 작품속에서 `책'을 지하생활자가 연명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도 내포한다고 믿는다. 그는 책을 통해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울 용기를 얻었고 그릇된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됐다.
<참회록>을 쓴 이후의 톨스토이 작품이 전과 갈라선다면, <지하로부터의 수기>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대작(大作)의 길로 나갔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어가는데 이 작품이 이정표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만큼 다층적인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작품이다. 하여, 비평가들은 간단히 이후 작품에 대한 `철학적 서문'이라고 이 작품의 의미를 포착했던 것이다. 이 작품속에서 등장한 주인공의 냉소와 여러 경향은 훗날 그의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희석되고 나름의 방향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죄와 벌>의 인간회복의 열망,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신학적 논쟁, 작가를 괴롭힌 가난과 질병, 그리고 죽음 가까이에 가본 자의 경험과 내면적 깊이까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가볍고 흥미롭고 교훈적인 소설들에 익숙한 요즘의 내게, 도스토옙스키의 이 작품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의 파란이었다. 어떤 소설이 이런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고전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