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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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해 읽은 박범신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명확한 주제의식이 드러났다. <촐라체>에는 히말라야의 6440m 수식빙벽을 오르는 두 청년이 등장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루함을 뒤로 하고 거대한 설산을 오르면서 존재와 내면의 공허를 일소하려 한다. 등반 소설이지만 존재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투지를 보여준다.  <은교>에선 17살 은교를 욕망의 시선으로 품어안는 노시인 `적요'가 등장한다. 그는 무엇하나 부럽지 않은 대시인의 명성을 쌓았지만 생의 끝자락에서야 자신이 욕망에 충실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예순 아홉 시인이 17살 소녀를 보는 은밀한 시선은 사랑인가, 욕망인가.  <은교>는 생동하는 욕망의 민낯을 대범하게 보여주며 독자 자신들의 `은교'를 되돌아보게 한다.  존재의 본질과 욕망의 실체를 찾는 박범신의  여정은 이제 어디에 도달한 것일까. 

 

<소소한 풍경>(자음과 모음, 2014)은 일정부분 <촐라체>와 <은교>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한차원 더 극복하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소설을 읽는 가운데 세계와 삶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학이 한낱 시간 때우기용 독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유용한 소일거리임을 증명하는 작품이랄까.   소설의 제목이 소설을 지배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야말로 `소소한'이란 형용사에 부합하는 면이 많다.  인물부터 플롯까지 소설을 이루는 모든 것이 `소소하다'.  심지어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장소가 `소소 시'일 정도다.  소소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뭉뚱그려 보여주려는 의도였을까. 우리와 닮은 인물과 풍경들은 어떻게 새로운 의미와 감동으로 되살아나는가.  책장을 덮으면 다른 세계에 당도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겐 이름이 없다.  화자도 그렇고 주변인물도 마찬가지다.  대표 화자인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나의 제자였던 또다른 화자는 `ㄱ'이라 불린다. ㄱ이 대학시절 사랑했던 사람은 `남자1'이다.   그리고 소소 시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뤘던 두번째 남자는 ㄴ이며 그들과 함께 했던 여성은 'ㄷ'이라 불린다.  이름조차 생략한 이유를 독자들은 작가의 말에서 발견한다. "생의 어느 작은 틈은 여전히 검푸른 어둠에 싸여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비밀'이다.(중략..) 그러니 읽고 나서 부디 그들을 기억에서 지워주기 바란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졌을지 모르는 불멸에의 꿈도 그렇다."  작가의 말에는 이 소설의 지향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그들을 잊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 그들의 `비밀'과 `불멸에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졸업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ㄱ은 나에게 전화을 걸어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라고 묻는다.  그 전화를 받고서야 ㄱ이 소설 수업에서 발표한 <우물>이란 독특한 작품을 기억해 낸다. 그 소설은 `그녀만 쓸 수 있는 소설로서 몽환의 덩어리'였다.  일종의 암호책 같기도 해서 합평 수업에선 악평이 줄을 이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물>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불안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 ㄱ은  종적을 감추었다. 남자1과 ㄱ이 교제를 시작하는 것은 그 때 였다.  ㄱ은 그렇게 문학의 길과 멀어졌다. 10년이 흘러 재회한 ㄱ은 이미 남자1과 한번 이혼한 상태였다.  남자1은 사랑하는 것과 지배하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첫번째 사랑은 상처로 남았다. ㄱ이 그 시점에 정착한 도시가 소소 시다.  이후, ㄱ이 인디밴디의 베이스 ㄴ과  우연하게 동거를 시작했다. 연변 출신 처녀 ㄷ이 나타난 것도 그 즈음이다. 한 명의 이혼녀와 `더플팩' 떠돌이 남 ㄴ 그리고 북쪽에서 온 처녀 ㄷ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모호한 상태로 `덩어리'가 되어 소소시 ㄱ의 빌라에서 머물게 된다.

 

" 죽음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면, 신은 왜, 우리에게 애당초 사랑의 불꽃을 주었을까요."    211쪽, 박범신 <소소한 풍경> 

 

ㄱ와 ㄴ 그리고 ㄷ이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섹스에 대한 암시적 표현이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ㄱ과 ㄴ, ㄱ과 ㄷ, ㄴ과 ㄷ 그리고 ㄱ,ㄴ,ㄷ이 모두 덩어리질 때가 있다. 이 기이한 관계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박범신의 전작 <은교>의 파격적 사랑과 욕망을 넘어선다고 표현해도 좋을까.  그들을 묶는 관계의 끈은 지극히 약하다. 세상의 오염된 시선도 빗겨간다. 그들의 관계는 오직 그들 사이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스런 공간에서 그들이 행한 사랑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뿐이다.  그러니 조금도 그 관계에 `변태'라든가 `그릇된 욕망'이란 수식어를 넣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저 "함께 생의 내밀한 길을 통해 마침내 영광스런 신의 영지에 도달했던 것이라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ㄴ은 ㄱ의 집 마당에 우물을 판다. 그것은 훗날 밝혀지지만 식수용이 아니라 자신이 묻힐 묘지였다.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한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는 우물 안에서 발견된 그의 얼굴이었다. ㄴ이 죽자, 그들의 공동체는 해체된다. ㄷ은 다른 도시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티켓다방의 종업원으로 취직한다. ㄱ은 ㄴ의 시신이 발견됨으로써, 살인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는다.  그들이 덩어리가 된 채, 보낸 지상의 짧은 시간은 겨울과 봄 두 계절이다.  그곳에서 행한 섹스와 흘려보낸 모호한 시간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곳에서 그들이 꿈꾼 것은 순수함이다.  순수한 사랑, 순수한 죽음, 순수한 시간, 순수한 관계.  그건 인간을 끊임없이 규정하는 밖의 세계, 오염시키는 언어, 상처와 가시로 남겨진 생애, 그 반대편에서 한순간이나마 덩어리로서 지향한 `순수한' 혼연일체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세 사람 외에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그들의 마음 속에 비밀로만 존재했던 숨겨진 오아시스같은 공간이었다.

 

"죽음이라는 말만으로 너희 세 사람의 관계, 그 덩어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어. 너는, 너희는 순수한 영혼을 가졌어. 중요한 키워드는 그거라고 난 생각해. 이를테면 죽음이, 너희의 영혼을 최대한 순수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보는 거야.(중략..) 남자1은 죽음, 혹은 고통으로 오염된 반면, 너희는 그것으로 너희를 씻은 거지. 그렇게 씻고 나면 최적의 순수성으로 앞날을 내다보게 돼 "  298쪽

 

그들이 소소 시에 모여들어, 덩어리를 이루고 순수함을 꿈꾼 것은 `생의 가시'들에 찔린 생채기 때문이다. ㄱ은 어린 시절 오빠를 잃었다. 다시 오빠의 추모공원에 다녀오던 부모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빠를 따라갔다'.  ㄱ은 그 상처를 잊고자 소설가로 살고 싶었지만 남자1을 만나 이른 결혼이 그 상처를 보듬어 줄 것으로 착각했다. ㄴ은 5.18 계엄군의 총에 형과 아버지가 살해당한다. 그 이후,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가 일했던 곳마다 재해로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조지 해리슨을 꿈꾸며 기타를 배우고 밴드에 들어갔지만 그마저도 매몰차게 거부당한다. ㄷ은 탈북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강에 흘려보냈다. 이젠 어린 자신을 겁탈하려던 조선족 사씨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는 엄마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 소소 시에 이르기 전까지 그들의 인생여정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더군다나 사랑했던 사람들의 비극적이자 비정상적인 죽음은 남은 이들의 영혼에 가시를 돋게 한다. 가시는 타인이 아닌 자신을 찌르고 상처주게 마련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가시를 안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탐색한다. 그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을 때는 가장 평화롭고 순수했으며 행복했다.  하지만, 한 덩어리는 쪼개질 숙명을 갖고 있다. 자신들의 삶 속에 가시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젠가 서로를 찌르고 상처줄 것이기 때문이다.  ㄴ이 우물을 파고 자신의 가시와 함께 사라진 것은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도 그 가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초월을 꿈꿔서다. ㄷ은 가장 세속적으로 가시와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몸을 팔아 연변의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는 ㄷ은 "아저씨가 간 길보다 남아 있는 길이 훨씬 더 더럽다는 것, 오염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ㄱ은 "소설이야말로 사람들 몸뚱어리 속에 박힌 가시들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라는 스승의 깨달음을 긍정한다. 하여, "손끝에서 문장이 자유자재 춤추는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둔 강에의 오랜 홀림을 이길 수 있는" 작가의 길을 택한다.  

 

"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취급할 때에도 기필코 나는 `사랑에 관해 소리치고 있어'야 한다. 분명하다. 사람들이 `개처럼 취급' 할 때에도 `사랑에 관해 소리치'는, 그런 문장을 찾고 싶다.  삶의 당위를.  그러나 너무 늦게 내가 길을 떠나려 하는 것은 아닐까. "  300쪽

 

`비밀'과 `불멸에의 꿈'은 특별하지 않았다. 소설의 주축을 이루는 ㄱ,ㄴ,ㄷ의 삶은 `소소하다'고 표현해야 옳다. 이들의 삶은 익숙한 죽음과 맞닿아 있고 온갖 시련과 고통에 노출 돼 있지만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이미 살고 있다.  항상  해맑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들이 해맑은 것은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극복의 방법을 웃음에서 찾았기 때문 아닐까.  이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영혼에 자리잡은 가시들은 항상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이다.  어느것이 진짜 답인가.  책장을 덮으며 자신에게 묻는다.   죽음, 타락, 그리고 문학적인 승화.  소설의 끝에서 ㄱ은 뒤늦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 나의 진정한 문장은 내가 단독자로서 찾아야 한다"(315쪽)   그리고 다짐하듯 ㄱ은 하나의 각오를 드러낸다. " 문장으로 반드시 당신을 이기고 싶다 "  여기서 `당신'이 지칭하는 것은 `나'로 표상되는 스승일 것이다. 더불어, 삶이 안겨주는 모든 가시들, 고통들, 상처들일 게다.  

 

답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소소한 인물과 소소한 이야기로 우리 삶을 그려내는 이 작품은 `소소한 감동'을 건네준다. 이 평범한 삶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역설적으로 그건 어떤 사소한 인생과 일상도 결코 `사소하지 않고 특별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등장인물들의 덩어리진 행위에는 음탕함이 깃들어 있지만 그것조차도 퇴폐적으로 비춰지지 않게 하는 힘이 박범신 문장의 내공이다. 삶이 아무리 거칠고 누추하더라도 시어는 더럽혀지지 않는 법이다.  문장에는 언제나 현실을 초월하는 마력이 존재한다.  소소하고 익숙한 풍경에서 삶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내고, 비밀을 풀어내는 문장들이 소설 <소소한 풍경>을 채운다. 그런 문장들을 통해, 잠시라도 우린 계산적이고 낯익은 세계를 탈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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