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
서민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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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칼럼에서 좀체 유머를 찾기가 힘들다.  칼럼니스트들은 대개 직설적으로 글을 쓴다.  글은 반듯하고 문장은 유려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매번 같은 칼럼을 그렇게 읽으면 좀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다음 칼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오는 것은 역시 반어와 유머 코드가 담겨 있는 글이다.  비판의 대상을 칭찬하는 듯 하면서 `까는 글'을 쓰는 반어적 칼럼의 대명사이자 가장 위력적인 자폭 유머를 구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참 개념있게 글을 잘 쓰는 칼럼니스트가 등장했다.  기생충 전문가이자 의대 교수, 그리고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인 서민 씨다.

이분 칼럼을 그간 신문 지상에서 빼놓치 않고 읽어왔다.  일단 칼럼이 재밌고 기발했다. 가장 보수적인 색채가 농후할 것 같은 교수이자 의사 출신이지만 이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노사모 출신'이란 `과거'를 갖고 있다. 이명박 정권 때 신문 칼럼으로 떴다면 최근엔 그 저력을 바탕으로 TV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어느날 TV에서 이분을 보고 깜짝 놀랐고 반가웠다. 드디어 떴구나!  진보적인 칼럼을 썼던 인사가 박근혜 정부에서 예능에 캐스팅 됐던 것도 반가웠지만, 특유의 유머와 끼를 어떻게 풀어낼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TV 예능에서 그의 존재감이 기대만큼 크지 못해 안타까웠다.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였을까.  그의 유머와 끼가 글 속에서만큼 잘 살진 못했다고 생각한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서민을 인터뷰한 책이 나왔다. <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인물과 사상사,2104년)에서 만난 그는 독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명성이나 체면을 생각하는 의대 교수이자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은 안중에 없다. 故 이주일을 능가하는 자폭 유머의 신세계를 보여주는 인터뷰집이라 할 만 하다.  사람에게 모두 자신만의 컴플렉스가 있기 마련이다.  서민에겐 외모가 바로 자신의 삶을 짓눌렀던 바윗덩어리였던 듯하다.  검사였던 아버지에게 외모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고 친구들에게 소외당했던 기억이 어린 시절의 그였다면,  그 모든 태생적 악조건을 극복한 것은 연구를 통해 터득한 유머라는 재능과 공부에 대한 지독한 열정과 성취였다.

누군가의 외모를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서평에서조차 꺼림칙한 일이다. 사실 난 서민이 못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정도면 개성적인 마스크가 아닌가 말이다.  하여, 사실 지상파 예능에서 그가 유머러스한 말빨을 구사하면서도 어깨가 움츠러진 모습에선 못마땅했다.  인터뷰의 초반 장들에서 인터뷰어 지승호는 독자들의 흥미를 북돋으려 했는지, 외모와 개인사에 많은 비중을 들어 질문한다.  한번의 결혼 실패, 그것도 상대는 미모의 여의사였단다.  반전은, 그녀가 서민을 좋아했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생각에 맘에도 없는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훗날 그는 아내에게 `고자'라는 이유로 이혼 소송 법정에 불려나왔다.  물론 `고자' 란 혐의는 뒷날 의학적 검증을 거쳤고 무고로 판명났다.  재혼해 지금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그에게 과거는 감추고 싶은 상처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자백'은 거침없다.

두번째 결혼 조건은 아이를 갖지 않는 것과 개를 기르는 것.  인터뷰 내내 미모의 아내에 대한 `자랑질'에 괜한 질투가 날 지경인데, 아무튼 행복하다는 그의 진심을 대변하는 듯했다. 의사로서 연구소에서 군복무를 대신하던 시절, 1년 365일 가운데, 360일 술을 마셨다던 그의 농담같은 이야기,  두번째 결혼 후 몇 년 만에 위암 선고로 죽을 뻔 했던 기억,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아내의 요구로 끊었다던 그의 이야기를 끝으로 서민은 독자와의 거리감를 심하게 좁혀 버린다.  기생충학과 교수 답게 인터뷰의 중간 지대는 기생충 이야기로 이어진다. 인구 200만 명 이상이 기생충에 감염되지만 의대생들조차 기생충에 관해선 무지하고, 국내 기생충 학자가 50명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서민의 바람은 의외였다. 

"의과대학에서 기생충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맞다고 봐요.  루게릭병이라고 있는데요. 그게 빈도가 10만 명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굉장히 드문 질환입니다.  그런 병에 대해서도 배우면서 백만 명 이상의 감염자가 있는 기생충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130쪽, 지승호 <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 

그의 개념있는 이야기는 의료민영화와 진주의료원 폐쇄론에 대한 반대 소신으로 이어진다.  미국이 부러워하는 국민의료보험 체계를 와해시키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반드시 막아야 하며 `정부가 정말 민영화를 하려고 든다면, 이거는 머리띠 매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고 독자를 선동하기도 한다. 인터뷰어 지승호의 홍준표 경상남도 지사의 진주의료원 폐쇄 결정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답한다. 

" 공공 병원이 왜 필요하냐 하면, 돈 많은 사람은 그런 데 안가잖아요.  삼성, 아산 병원을 가지. 없는 사람들이 싼 진료비 때문에 공공 병원을 가거든요. 그 사람들이 가는 병원을, 적자라는 이유로 문을 닫는다는 것이 너무한 거죠. 그렇게 따지면 국립의료원도 진작 없어져야 했고, 다른 공공 병원도 다 없어져야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우리나라 병원의 절대다수가 민간 병원이고 외국에 비해 공공 병원이 부족한 편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아무리 떠들어도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 참 갑갑하죠. 그게 가까운 미래에 자기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241쪽

내가 서민을 알게 된 것은 경향, 한겨레에 실린 칼럼을 읽은 이후다. 글도 좋았지만 글을 다 읽고 난 후, 그의 직함을 보면 직함에서조차 반어가 느껴졌다.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그가 칼럼에서 비판한 인물들이 어떤 이유에선지 기생충과 비교되곤 했으니까. 그는 내 기억에 개념있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이 인터뷰집을 읽고 난 후, 그에 대한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외모나 개인사는 독자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 같다.  칼럼니스트는 칼럼으로 평가받고 예능인은 말빨과 유머로 평가받는 법이다. 누구에게나 경쟁력은 있다.  서민은 대중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세가지 무기가 있다. `개념, 유머, 그리고 인간미'다.  그의 인터뷰집을 읽고 그가 무척 소탈하고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진보적 색채는 보수주의가 강한 의사 사회에서 별종에 속할 테지만, 그렇다고 물불 안가리는 진보적 투사가 아닌 딱 `개념 있는 시민' 수준의 눈높이로 독자를 즐겁게 한다.  이명박 정권 때 시국 선언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시국 선언을 한 교수에게 불이익을 줄까봐'라고 답하더니 지금 조금 쎈 사회비평 글을 쓰지 않는 이유를 `정권의 노여움을 사 구속되면 개는 누가 기를 것인가'라고 하며 독자를 빵 터지게 한다.  그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서재에 `마태우스'란 필명으로 꾸준히 서평을 올려 `알라딘을 평정'한 경력이 있는 독서광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의사 가운데 블로그에 글을 써 `평정' 수준까지 올라간 인물은 그밖에 없다. 그는 글을 올리며 이웃 블로거들과 열심히 소통중이다. '방송은 몸에 안맞아 평생 못할 것 같고 글쓰기가 평생의 취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특장점인 `개념과 유머, 인간미'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잘 알지 못한다.  박식과 명성은 흔하다.  하지만, 그것은 가면일 뿐임을 누구나 안다.  맨얼굴이 아닌 화장미가 대중에게 착시효과를 건네줄 순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서민의 파격적인 인터뷰집의 파장은 가족에게조차 만만치 않을 듯하다. 책의 말미 에필로그에서 서민은 맛배기로 <한겨레>인터뷰를 보고 크게 놀란 어머니에게 걱정인지 유머인지 한마디를 남겨놓았다. "어머니, 인터뷰가 아예 책으로 묶여나왔습니다. 미리 죄송합니다."(341쪽, 에필로그) 서민의 유머는 마지막까지 독자를 웃겼다.  살아 생전 거침없이 바른 말 잘 했던 `개념 가수' 신해철이 안타깝게 세상을 등졌다.  슬프고 아깝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단 한 명 `개념 교수이자 의사'인 칼럼리스트 서민이 있다.  스스로 `듣보잡'이라 말하는 그를 팍팍 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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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이후, 인생길 - 독서 100권으로 찾는
한기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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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실제로 세상은 많이 변했다.  10년 전 스마트폰은 상상할 수 없었다.  요즘 스마트폰 보급율은 2013년 기준 73%나 된다.   개인적으로도 10년 전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  10년 전, 나는 변변치 못한 직장을 퇴사하고 시골에서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직업도,애인도, 결혼도, 출산도, 집도, 자동차도 상상할 수 없는 처량한 청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곤 비정규직을 전전했다. 월급은 적었고 차별은 일상사였다. 지금은 그 때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졌다.  안도감을 드러내거나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과 그 어둠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운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다.  운이 없었다면, 기회를 잡지 못했을테고 지금 숱한 청년들이 같은 고민으로 아파하듯이 내 인생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밑바닥 청춘을 지나오면서도 내겐 든든한 자존감이 있었다. 가끔 여행을 떠났고 여행을 떠날 땐 책 몇 권은 꼭 챙겨 넣었다. 주머니에 돈이 궁했지만 지금처럼 책 몇 권 사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현실이 척박했지만 책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시골에 내려왔을 때, 내 가방에 잔뜩 들어있던 책은 이외수의 전집이었다. 책속에서 젊은 시절 이외수의 가난과 외로움을 만났다. 그 쓸쓸한 소설을 읽고보니 내 위치는 `꽃자리' 같았다.  다시 일어서야 할 용기 같은 걸 얻었다.  빈털터리 청춘에게 자존감을 선물했던 것은 바로 `책'이었고 책 속에서 만난 누군가의 삶이었다. 10년 전과 달라진 것은 많지만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책읽기다.  고민과 궁핍의 종류가 달라졌을 뿐, 삶은 고뇌를 주는 것이고 여전히 나는 책을 통해 길을 찾는다. 

 

교양도서(고전) 100권, 관심분야 도서100권으로 누구나 삶을 재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출판 마케터와 출판 평론가로 30년 동안 출판계에서 종횡무진해온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이다.  그는 신작 <마흔 이후, 인생길>(다산초당,2014년)에서 독서 200권을 통한 100세 시대 은퇴설계 방법과 마흔 이후의 인생 2막 40년을 준비하는 독서론을 설파한다.  독서 200권은 결코 많지도 적지도 않다. 지난 10년간 내가 느리게 읽고 써낸 서평은 겨우 300편 남짓이다. 10년간 꾸준히 읽어왔는데도 그 정도다.  그는 "어떤 분야든 입문서에서 전문서까지 100권만 읽으면 전문가 못지 않은 안목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이후, 고전 100권을 더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을 근본부터 이해하기 위해서란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인문학으로 약칭되는 것이 고전 100권이다.

 

마흔 이후가 됐든, 은퇴후가 됐든, 사람은 정말 책 200권으로 삶을 재설계 할 수 있는 걸까.  삶을 바꾸는 데 책은 어떤 역할을 하며 대체 사람들은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저자는 출판평론가로 일해오며 수많은 책을 읽고 출판 시장의 흐름을 짚어왔다.  이 책엔 저자가 출판계에 발을 들여논 시점부터 세상을 쥐고 흔든 책이 소개되며, 그 책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 분석하는 안목이 드러나 있다. 저자에게 책을 읽는 일은 출판시장의 동향을 통해 사회를 읽고 사람들의 심리를 읽고 그들의 궁핍을 읽고 미래를 읽는 일이었다. 또, 그것은 감추어진 책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었고 한 권의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삶을 바꿀 수 있는지 파악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가 그 오랜 시간 책을 읽어오며 얻은 확신은 책이 사람의 인생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일반 교양은 원래 `리버럴 아트(liberal arts), 즉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학문'이라고 부릅니다.  교양은 어떤 상황에서도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세상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방법론을 담고 있기에 인간성이나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인맥을 형성하게 만듭니다. 좋은 지인, 좋은 친구가 늘어나면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는 법이 아닌가요? " 11쪽, 한기호 <마흔 이후, 인생길>

 

책과 동고동락한 30년 내공을 통해 저자는 책 200권을 섭렵한 독자가 자신의 삶을 재설계할 수 있는 근거와 방법을 풀어낸다. 저자에 따르면, 고도 성장기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대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다.  열아홉에 `스카이'에 입학하고, 졸업후 대기업에 입사하기만 하면 퇴직까지 고용이 보장되며,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도 순풍에 돛단배 같아서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은? 한해 석,박사만 수만명을 배출하지만 스카이가 아니라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들다.  60세 정년은 옛말이고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으로 고용이 흔들린다.  운 좋게 정년을 다 채운다해도 60세 이후, 100세까지 40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왔다.  인생 2막에 대한 준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30대는 싸고 품질 좋지만 조립해서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스웨덴 가구 이케아를 닮았다 해서, `이케아 세대'라 불린다. 고용불안에 지치고 미래가 암담해 절망에 빠진 이케아 세대는 취업,연애,결혼,출산,양육이라는 정규코스를 거부하고 `지금 이 순간 잘 사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부모세대는 스펙을 쌓으라고 강요했지만 이젠 스펙으로도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그들은 성공을 꿈꾸며 자기계발서를 탐독한 세대기도 하다.  학교는 어떤가.  스마트폰으로 인류가 생산한 모든 지식과 접속할 수 있는 시대에 아이들을 하루 16시간씩 형틀에 묶어놓고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외우게 하는 것이 교육의 실상이니, 학교를 폐쇄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진국의 대졸자들은 인도나 중국같은 신흥국의 대졸자에게 고급 노동력을 염가할인하는 역경매 방식, `글로벌 옥션'으로 일자리를 빼앗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학벌과 스펙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을 양산해내는 교육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 세상이 원하는 인재의 가치 기준이 바뀌어가고 있단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지식과 스펙은 산업구조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전공지식과 스펙이 무용지물이 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세상은 이제 `엑스퍼트'가 아닌 `프로페셔널'을 요구한다. 정보나 단순 지식을 검색하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지식을 편집하고 통찰하며 거기서 중요한 컨셉을 끌어내는 힘은 오직 다양한 책을 읽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차별적 능력이다.  

 

" 정보에 대한 접근 능력이 아무런 경쟁력이 되지 않는 시대에는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정보를 끄집어내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해 가치를 발생시키는 능력의 소유자만이 시대를 주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 또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으며 중요한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망각하는 능력, 즉 콘셉트를 제대로 뽑아내는 훈련을 제대로 한 사람만이 갖출 수 있습니다. "   261쪽 

 

입사한 후 습관처럼 영어 공부를 했다. 내가 영어 공부를 그만두고 오직 무위할 것 같은 책읽기에 올인 한 시점은 입사 후 5년이 지나서였다. 영어가 특별히 필요치 않아서기도 하지만 20년을 공부해도 제자리 걸음이었던 영어를 버리고 선택한 책읽기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직장 생활하며 더 많은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서평을 쓸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읽기와 쓰기는 한 권의 책에서 중요한 정보를 골라내고 그것만을 내것으로 섭취하는 연속된 훈련이었다.  내가 백수로 지내던 청년기 책읽기는 자존감을 건네준 통로였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사람은 좋은 일자리, 많은 돈, 큰 평수의 아파트, 사치스러운 자동차 같은 걸로 가치를 잴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행여, 그것을 잃는다 해도 존재의 가치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삶을 포기하는 이유가 때로 그것 아닌가. OECD 최고 자살율이 이를 뒷받침한다.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인생을 오독하지 않는 법이다.  노숙자들이 인문학을 공부하고부터 삶을 180도 바꿨다는 얘기가 뉴스거리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숙자에게 통하는 독서교육의 효과라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얼마나 클 것인가. 저자는 30만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을 짓고 그 옆에 학교를 세워 하루에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 `독서 모델 학교'를 만들겠단 포부를 책의 말미에 드러낸다.  상상력과 존엄성을 잃어버린 한국 교육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킬 수단은 공독(共讀​)임을 저자는 간파했다. 지금껏 독서는 취미나 점수 따기 경쟁의 도구로 전락했다. 진정한 독서는 평생 계속되어야 하고, 그것은 목적성이 아닌 무위적인 독서여야 한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보유한 청춘도 고작 대기업에 입사해 정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지금 교육엔 희망이 없다.  어떤 역경에도 어떤 문제에도 담대히 맞설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책이다. 하여,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 문제보다 한 권의 위대한 고전을 읽히는 것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몇 배는 더 가치 있는 일이 된다. 

 

<마흔 이후, 인생길>에서 저자는 책읽기야말로 총체적 난세를 벗어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선포한다. 만약 오늘 내게 불행이 다가온다 해도 내 곁에 책이 있는 한, 나는 잠시 흔들리고는 다시 책을 잡을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행복과 불행에 덜 민감해졌다.  그것은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란 `체념'과 운명은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과 어쩌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을 건네준 것이 책읽기라서다.  저자는 책읽기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한 권의 사소한 책이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며 단 200권의 책을 통해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확언한다.   지난 10년간의 직장생활을 되돌아보니 내게 남겨진 것은 늘어난 얼굴 주름과 흰머리 그리고 예금 통장의 갯수 그리고 내가 읽고 소화한 책들 뿐이다.  10년간 읽어온 책이 삶을 바꿨고 지금도 바꾸고 있다.  꿈을 선물하고 꿈을 키워하게 한 것도 책이었다.   책, 그것은 평범한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기회이자 인생길의 터닝포인트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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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 책을 쓰는 사람이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
임승수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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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 사는 일은 즐겁다.  세상은 읽어야 할 책들로 넘쳐난다. 가만히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래 난 이해하지 못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낼 방법을 모를 뿐이다. <팡세>를 지은 철학자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조용히 혼자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인간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참된 삶과 만날 수 있다고 파스칼은 덧붙인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삶으로 가는 필수 코스다. 그런데, 독자로 사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  바로 저자 되기다.

 

책읽기는 죽는 순간까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지만 또다른 꿈이 자라났다.  언젠가 내 책을 쓰고 말겠다는 야무진 꿈이다.  그건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꿈'이지만 매일 책을 접하며 이 꿈의 실현을 한번도 잊은적은 없다.  올해 글쓰기 관련서들을 많이 접하려 하는 것은 몇 해 독서 경험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내 독서 스타일이 본래 `골고루 잡식' 아닌가.  어떻게 저자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기가 막히게 생생한 경험담은 없을까.  로또를 사는 심정으로 매번 책을 읽었다.  지금껏 살펴본 책들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결론은 항상 `교과서' 적이다.  그런데, 드디어 저자 되는 그림이 잡히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임승수의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한빛비즈,2014)다.

 

이 책에는 밑바닥 독자에서 꼭대기 베스트셀러 저자로 `등극'한 이가 들려주는 헝그리하면서 쫄깃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임승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몇 해 전 내 서가에 들어와 지금껏 잠자고 있는 책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가 바로 그다. 그는 15권의 책을 펴냈고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난 모르겠다. 그것보다 얼마 전 이분이 해외 토픽감 뉴스를 만들어 낸 적이 있다. 대학에서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란 교양강의를 맡은 그를 재학생 모씨가 국정원에 신고한 것이다.  민노당 출신에다 강의가 반미적이자 반자본주의적이란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요즘 대학생들의 수준을 의심케 만드는 사건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자로서 그는 어떻게 인생역전을 이뤘을까.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부 출신에다 대학원에서 반도체소자 연구로 석사까지 받은 공학도였다. 글쓰기와는 별 상관없는 젊음을 보낸 그는 벤체 기업에 입사해 5년을 다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인문사회 분야 저자로 삶의 진로를 수정한다.  스스로 고백하길 "책 쓰기는 고사하고 A4 용지 한 장 채우기도 버거운 글치 공학도" 였단다.  그런 그가, 2006년 이후 8년간 인문 사회분야에서 단독, 및 공저로 15권의 책을 써내며, 2013년엔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가장 주목해야 할 저자 `뉴 파워라이터' 20인에 뽑혔다.  이 책은 그런 화려한 변신의 과정을 충실히 따라가며 복원하고 저자 되기의 구체적 과정들을 담아 낸다.

 

" 나이가 마흔이 넘으니 연료가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다는 조바심이 부쩍 든다.  그렇다면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차를 멈춰 더욱더 원하는 곳으로 곧장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돈에 시간을 팔지 않으면서부터 행복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책 쓰기'가 바로 그런 삶이다. " 9쪽, 임승수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보기에 따라선 화려한 인생역전으로 보이지만 실상도 그럴까. 독자들의 환상을 깨주고 싶었는지 임승수는 도입부에 자못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과연 책써서 밥먹고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초판 1쇄 2천부를 발행해 그것이 모두 팔렸다고 가정하고 저자가 받을 수 있는 돈은 약 300만원 남짓이란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을 쓰겠다는 모든 저자가 베스트셀러를 꿈꿀 것이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매년 4만 권의 단행본 가운데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서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확률적으로 죽을 힘을 다해 책을 쓰고도 300만원 받고 망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는 돈을 벌고자 한다면 차라리 장사를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책을 쓰는 이유는 뭘까. `책을 쓰지 않았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을 쓰고 베네수엘라 정부의 공식초청으로 생애 첫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그가 그곳에서 머문 호텔 방은 500만원 짜리였단다. 책을 낼 때마다 다양한 매체에 저자 인터뷰와 책 기사가 실렸고 또 연이어 다방면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 했단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았다면 그가 이런 경험을 해봤겠는가.  해서,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쪽박 찰 위험을 무릅쓰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책쓰기는 그에게 `돈에 시간을 팔지 않으며' 후회없는 인생을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책쓰기가 자기을 세상에 드러내는 최고의 통로였다.   하여, 그는  새 책 작업에 들어갈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한다.   " 이 원고가 책으로 출간되어 초판 1쇄도 다 팔리지 않을 정도로 쫄딱 망하더라도 책을 쓴 것에 대해 후회가 없겠는가."(25쪽)  

 

저자가 전하는 책을 쓰는 노하우 몇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책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차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설계도다.  책을 쓰기 전에 제대로 된 목차를 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작정 글을 시작하면 책의 균형이 깨지고 용두사미가 될 수 있다. A4용지 100장을 쓰면 단행본 300페이지의 책이 되는데, 100장을 쓰겠다고 덤비지 말고 A4용지 4장짜리 글 26개를 쓴다 생각하면 작업하기가 쉽다.  둘째, `살아지는' 삶이 점점 줄어들고 `살아내는' 삶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글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 자기 인생에서 쓸 거리가 생겨난다. 여기서 `살아지는' 삶이란 수동적인 직장 일과 같은 것이다. 보다 능동적인 삶의 경험을 늘려가야 책을 쓸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셋째, 자기만의 컨텐츠를 확보해야 사람들이 모인다.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출판 시장은 그 아류들로 채워지기 일수다. 유행의 꽁무니를 쫓지 말고, 자기 관심사를 갖고 유행을 선도해야 한다. 출판분야의 블루오션은 누구도 생각지 않는 저자의 관심분야가 될 수 있다. 연필깍기의 달인이 연필 깍는 방법을 다채롭게 서술한 책도, 미국에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누가 이런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저자 되기의 필수요소다.  넷째, 출판사에 무턱대고 투고하지 마라.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당신의 천페이지짜리 원고를 읽을 시간이 없다. 단 한 페이지 기획서로 편집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The one page proposal>을 지은 페트릭 G. 라일리는 기획서 1장 짜리 개요서를 써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 1 Page Proposal은 나의 성공 비결 중 하나요. 당신에게도 매우 귀중한 성공 비결이 될 수 있소.  거래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한 쪽 이상의 분량을 읽을 만큼 시간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문 법이오.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소"234쪽

 

최고 대학과 최고 인기 있는 학부를 나온 그가 전통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인문 사회 분야' 저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는 로또를 주기적으로 산단다. 헝그리한 삶에서 좀 탈출하고자 해서겠다.  그런데,  로또 1등에 당첨되고도 저자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왜냐면, "쫄딱 망한다 해도 진정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요즘 그는 강연과 인세로 월수 300 정도의 비정규적 수익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는 "돈에 자기의 인생" 즉 시간을 팔고 싶지 않아서 저자가 됐다고도 했다. 또 나이 마흔이 넘으니 시간이라는 연료가 부족하단 것에 조바심이 인다고 한다.  난 아직 책 한 권 내지 못한 저자 지망생이지만, 이 말들이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블로그에 주기적으로 서평 몇 꼭지를 올리는 것도 직장 생활하며 남는 시간을 투자하는 내겐 힘에 벅찬 일이다. 탄탄한 밥줄인 직장을 포기할 순 없으니, 내가 저자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지난 몇 해를 살펴보니 그래도 나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독자에서 벗어나 공적인 글들을 요즘 쓸 기회를 갖게 됐다.  인세는 아니지만 심심찮게 원고료라는 부수입도 생겼다.  몇 해 전, 그저 책만 볼 때와는 분명 달라진 삶의 풍경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 없음을 걱정하라​"고 했다.  시간 없음도, 직장 생활도 모두 핑계일 수 있다.  내 능력이 부족하니 여전히 무언가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아직 내겐 `목구멍까지 차올라 도저히 내뱉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책을 쓰는 과정, 어떻게 저자가 되는가, 라는 실용적인 경험담 위주로 쓰여진 이 책은 실력은 있지만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예비 저자들에게 나름 큰 도움을 줄만한 저작이다.  그러나 누구도 저자가 되는 지름길을 대신 걸어줄 순 없다. 책을 읽는 것은 조용한 공간에서 내면의 고독과 맞서는 능동적 행위다. 그곳에서 파스칼은 인간이 `참된 자신'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책을 쓰는 것은 자신의 심연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 그곳에서 자아의 금맥을 캐내는 가장 주체적인 행위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있지만, 아무나 저자가 될 수 없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채굴한 진짜 금만이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저자 되는 길은 멀고 험해야 정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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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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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세 명의 무신론자가 있다.  첫째,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대중과학자 칼 세이건이다.  둘째, <만들어진 신>의 저자이자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다.  그리고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다. 이들 저서를 일독하며 내 마음은 제각각이었다. 종교적 열정에 심취했을 때 읽은 도킨스의 저서에는 거부감이 가득했다.  종교와 멀어졌을 때 만난 세이건과 러셀의 논리에는 공감할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지난 반생을 되돌아보니 나는 종교와 반종교 사이를 오갔다.  지금 내 종교적 정체성은 불가지론이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사물의 실재인 절대자나 신은 인간의 지식으론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다. 하여 신이 없다고 확신하거나 있다고 주장하는 쪽과는 성질이 다르다.

 

이런 상태는 보기에 따라 양다리 걸치기나 줏대 없는 세계관 쯤으로 폄하할 수 있다.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 때문이다.  나는 여러 종교에 호감을 품었다.  교회에 다닌적도 있고 불교적 세계관에 끌린 시절도 있었다. 그 생각은 발전해서 모든 종교가 그 나름 가르침이 있고 배울점이 있으며 다양한 종교는 형식만 다를 뿐, 하나의 진리를 향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종교 사이의 분쟁과 모순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진리는 하나가 분명한데,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세계관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싸움은 피할길 없고 역사가 보여주듯이 인류는 종교적 차이로 전쟁과 살육을 반복해 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는 같은 뿌리였던 천주교를 비난하고, 이슬람은 기독교와 2천년간 대립해 왔으며, 불교는 석가모니가 죽자 그의 사상을 따르지 않고, 우상과 분파를 세웠다.

 

모든 종교는 평화와 사랑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가르친다.  그런데도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종교인들은 언제나 서로 싸우고 피흘렸을 뿐이다.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짧은 글 한 편은 1927년 3월 6일 영국 비종교인협회 런던지부의 배터시 읍공회당에서 강연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러셀은 이 강연에서 자신의 종교관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2천년간 기독교인들이 지배한 유럽 땅에서 비록 그 열광이 조금은 식어버린 이후라지만 비기독교적 종교관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난과 논쟁이 평생 러셀을 따라 다녔지만 그는 결코 종교인들의 신념에 굴복하지 않고, 종교없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합리주의 세계관을 지켜냈다.  이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사회평론, 2005년)는 러셀이 평생 연설과 기고를 통해 반종교적 가치관을 드러낸 글을 엮었다. 

 

세상은 시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누가 날 만들었는가'란 질문의 종착지엔 반드시 신이 설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학이 내세우는 제1원인론의 실상이다. 러셀은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도 똑같이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절대자이기에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마찬가지로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러셀은 `사물에는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 상상력의 빈곤'이라 말하며 제 1 원인론의 비논리적 결말을 지적한다. 대중 과학자 칼 세이건도 <코스모스>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칼 세이건이 러셀을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제1원인론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색을 논리로 시작해 신학으로 마무리 짓고 있어서다. 

 

"신이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만일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떨까?  또 한편으로,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코스모스>, 칼 세이건

 

러셀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되는 과정상의 문제도 지적한다.   절대자를 향한 확실한 증거나 이론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극소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이 받아들이는 종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종교이기 마련이다."(19쪽)  인간에게 종교는 환경적 영향의 부산물과 같다. 이란에 태어난 사람이 이슬람교를, 캄보디아에 태어난 사람은 소승불교를, 러시아에 태어난 사람은 그리스 정교를, 이탈리아에 태어난 사람은 로마카톨릭의 신자가 될 확률이 분명히 높다.  러셀은 불교,힌두교,기독교,이슬람교 이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가 제각각이니 논리적으로 봐도, 하나만 빼고는 진실일 수 없음이 자명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20세기 수학과 논리철학의 귀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안정에 대한 욕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교 생활에 전념한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이 주술적 의미의 `기복신앙'에 빠져든 것만으로도 이는 분명하다.  러셀은 이것을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 표현한다.  러셀은 예수의 도덕적 성격에 중대한 결함이 한가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예수가 지옥을 믿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34쪽)  비신자들도 성경 혹은 경전을 권위에 압도당해 읽기 마련이다. 우리도 분명 그런 생각을 했을 테지만 그냥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러셀은 경전을 읽을 때도 자신의 합리주의적 관점을 적용한다.  그것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지식인은 진정 어떤 태도로 세계를 검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중세가 종교심판소의 고문과 마녀들의 화형을 실행했을 정도로 잔인했던 이유를 러셀은 신약성서 속에 나타난 예수의 언행에 일정 부분 책임을 돌린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려거든 부모,형제, 자매를 버릴 각오를 하라 했고 제철이 아닌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화과를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게 했으며,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의 말을 남겼다.  러셀은 신약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언행의 상당 부분이 훗날 기독교의 무관용과 잘못된 근본주의 종교관의 제1인 원인이라 지적한다.  인류역사에서 이런 무관용은 대개 종교적 차이로 발생했다. 역사는 중세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이교도에게 벌인 살육을 `한바탕 축제'에 비유하곤 한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 세상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35쪽

 

러셀이 기독교 자체를 비판한 것, 종교에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은 역사와 상식, 즉 합리주의에 기반한 철학적 태도 덕분이다.  하여 러셀은 역사상 인류는 종교를 통해 행복해졌는가, 그들의 삶이 더 나아졌는가 묻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이상 시를 쓸 수 없을 거라던" 1,2 세계대전을 겪은 러셀이다.  그곳에서 종교는 어떤 일을 했는가.  히틀러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 집단 학살한 것은 종교에서 시작된 차별 관념 때문이다.  중세 종교재판소의 고문과 마녀들에 대한 화형식은 기독교 교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역사였다.  그는 "인간의 정서적 발전, 형법의 개선,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우가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인류의 진보를 막아왔고 삶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억압해 왔음을 러셀은 폭로한다.  

 

독자는 러셀의 극단적인 반기독교적 논리를 모두 수긍할 순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의 논리가 떠오른다.  인간의 인식능력엔 한계가 있고 생각은 바뀔 수 있다.  전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은 평생 무신론자로 살았지만 일흔이 넘어 신실한 종교인으로 돌아왔다.   종교를 갖지 않고도 사람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 라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에 주목해보자.   러셀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이단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삶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었다.  그것은 결코 반종교적인 삶이 아니다.  그는 평생 많은 독자와 시민들의 존경을 받을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활발한 사회참여를 보여주었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종교에 예속된 인간이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학자였다.

 

그가 훌륭한 삶의 조건으로 내건 "사랑과 지식"은 늘려갈수록 좋은 것이다.  종교인이란 울타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그 두가지를 키워갈 수 있다.  러셀의 전체 종교에 대한 부정과 비난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가 종교의 대안으로 내건 `사랑과 지식'이란 명제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이라고 해서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라크를 침략해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테러와 보복전은 민족보다 종교라는 이질성으로 범죄를 합리화 하는 측면이 강하다. 이슬람 세계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천년 넘게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 하나로 인종청소에 맞먹는 범죄를 상대에게 저질러왔다.

 

이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그들 종교는 대립한다.  종교인들은 종교적 가르침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 그러면서,  종교간 대립과 반목을 부추긴다.   과학은 우주의 기원이란 의문을 풀지 못했다. 첨단 과학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종교는 분명한 설명을 내놓는다. 하지만, 종교도 역사를 거치며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왔다.   그들이 비난한 과학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학만이 아니라, 종교 자체이기도 하지 않을까.  무엇이 진실인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  종교적 가르침을 믿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는 것이다.'  내겐 종교가 없다.  무엇이 진리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지금 내가 도달한 임시적인 결말이다. 무지(無知)는 불가지론의 중요한 결말이지만 내 생각엔 불완전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결론이란 생각도 든다.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나는 러셀이 표현한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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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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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다고 깊이가 있는 건 아니다. 가볍고 쉬운 글 속에 깊이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 오규원의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그렇다.  문장은 짧고 평이하다.  화려한 수식과 비유도 섞여 있지 않다.  그처럼 글을 써 소설가가 될 수 있다면, 누구들 도전해 보고 싶다. 문장에서 독자를 주눅들게 하지 않으니 맘편히 이야기에 몰입한다.  서사는 늘어지지 않는다.  속도감이 페이지를 타고 과속하기 일수다. 독자는 어느덧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훑고 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는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추리소설과 미스터리 서사를 통해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는 작가다.  그의 작품들에는 평범하지 않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 교훈들은 사회와 개인의 문제의식으로 동의할 수 있는 깊이를 추구한다.  10년간 작가의 손을 통해 개작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몽환화>(비채,2014)는 이 모든 장점들이 응집돼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보기드물게 두 개의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프롤로그 1과 프롤로그 2는 별개의 이야기로 독립성이 있다. 각개의 프롤로그는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전혀 다른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 동력이 충분하다. 첫번째는 잔혹한 살인극이고 두번째는 사춘기 소년의 실패한 짝사랑이다.  작가는 이 두가지 다른 이야기를 갖고 하나의 미스터리 소설를 엮어내는 마법을 보여줄 것이다.  이 별개의 서사가 씨줄과 날줄로 `어떻게' 엮이는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가는지,  그런 과정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를 독자는 주시해야 한다. 속임수와 우연, 비논리적인 전개는 통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모든 난관을 제거하고 독자의 미소와 다시 만나게 될까.

 

프롤로그를 넘은 소설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하나의 `죽음'을 서술한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요 인물중 하나인 전직 국가대표 여자 수영선수 `아키야마 리노'의 사촌 도리이 나오토의 자살 사건이 그것이다.  나오토는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하고 천재성을 발휘하며 음악적으로 성장하던 가운데, 유서 한장 남기지 않고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 내린다. 리노는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할아버지 슈지와 재회한다.  슈지는 유전자를 조작해 세상에 없던 꽃을 만드는 바이오테크놀러지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날 이후, 슈지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손녀 리노는 할아버지가 다양한 꽃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꽃 블로그를 만들어 선물하려 한다.  그런데, 슈지는 블로그에 `노란 나팔꽃' 만은 싣지 말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얼마 후 슈지는 강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은 특수한 꽃입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식물입니다.'"  114쪽

 

나오토의 자살,  할아버지 슈지의 죽음,  그리고 노란 나팔꽃 !   미스터리를 엮을 재료는 모두 등장했다.  이제, 그 재료를 요리할 인물이 나올 차례다. 소설의 초반, 일사분란하게 등장한 죽음이 미스터리의 추동엔진으로서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주요 인물인 리노와 소타는 비슷한 또래의 일본 젊은이다.  전직 수영선수였던 리노는 올림픽 대표에 오를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선수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발병한 공황장애로 심리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난 후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꿈을 버린다. 프롤로그에서 짝사랑의 주인공이었던 소타는 일본에서 전도유망한 학과였던 원자력 공학과 학생이지만, 311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쇠퇴기로 접어든 원자력 발전의 밝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방황한다.  리노와 소타는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사회,경제적 난관에 봉착한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대표한다.

 

사건을 도맡은 형사 `하야세'는 아내와 이혼한 상태로 혼자 살아간다.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수년만에 아들은 하야세에게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사건 해결의 주체가 되어주길 소망한다.  편의점에서 도둑으로 몰릴 뻔한 하야세의 아들은 몇 해 전 슈지의 증언으로 누명을 벗었다. 사건 해결이 소원한 아들과 아버지의 재회로 연결되도록 이야기를 엮은 작가의 뜻깊은 의도가 읽히는 부분이다.  가족애와 의리를 드러내는 설정은 소타의 어머니와 배다른 형, 요스케의 배려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몽환화에 얽힌 고통스런 과거를 갖고 있는 소타의 어머니(프롤로그 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 아기)와 형 요스케는 어떻게든, 가족의 불행하고 아픈 과거가 막내 소타에게까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도록 노력한다.   보편적인 가족애과 동시대의 청년들의 좌절과 희망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이 미스터리 소설을 차별화 한다. 

 

" 아티스트에게 벽이란 없어. 그렇게 느낀다면 그만두는 편이 나아. 진화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아.   즐기면 되는 거야.  나도 말이야. 수십 년이나 같은 일을 하고 있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어.  하지만 그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해. 내 관객은 만족해주니까. "  371쪽

 

일본 에도시대는 흔히 강호시대(江戶時代)라고도 불린다.  정권의 본거지가 오늘날 도쿄인데 그곳의 옛 이름이 `강호'였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는 무사 계급의 최고 지위에 있던 쇼군이 권력을 잡고 전국을 통일 지배하던 시기였다.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1603년부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해체되고 국왕 체제로 전환한 1867년까지 260년 간의 봉건시대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에 노란 나팔꽃은 흔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나팔꽃을 재배했다. 더불어 나팔꽃 씨앗을 먹는 유행이 번졌다. 노란 나팔꽃에는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었고, 그것이 사회문제로 불거질 위험에 처하지 막부 정권은 노란 나팔꽃의 유통을 적극적으로 막아섰다.  차츰 시장에서 노란 나팔꽃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막부의 관리하에 몽환화라 알려진 이 꽃은 은밀히 재배 된다.  그후, 마취약으로 쓰이기도 하고 현대에 들어선 범죄 자백 보조제로 쓰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이같은 몽환화로 알려진 노란 나팔꽃의 위험성을 소재로 삼았다.  

 

때로는 예술가의 영감의 재료로 사용되며 위대한 작품을 낳는 일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환각 작용을 일으켜 살인 등 강력범죄를 부추기는 위험 물질이 되기에 이른다.  에도 시대에 번성했던 노란 나팔꽃이 왜 지금엔 모두 자취를 감추었는가.  이 하나의 모티프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311 동일본 대지진의 방사능 오염 사고와의 연계점을 찾았을 것이다.  관상용으로도 매력 만점이자 의료,수사에 도움이 되는 몽환화라지만 사람들의 무절제함에 노출되면 광폭한 살인과 폭력을 낳는 몽환화. 막부 정권의 통제에도 여전히 은밀히 유통되는 마약적 성질. 오늘날 원자력과 방사능은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되곤 한다. 신화 속 판도라처럼 인간들은 원자력이라는 금단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소설 속 살인 사건은 역사속 잊혀진 것으로 알려진 노란 나팔꽃의 위험한 등장을 경고한다.   원자력과 몽환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 군.' 다카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는 거라면 그대로 두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이어받아야 하잖아?  노란 나팔꽃의 씨앗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감시를 계속해야 해. 그것이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켜버린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해.  도망칠 수 없지.'"  409쪽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경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도 키예프시 남방 130km 지점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총 4기 원자로 가운데 마지막 4호 원자로가 폭발했다. 당시 직,간접 피해 인구는 300만명, 그 가운데 어린이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체르노빌 원전 반경 30km 주변 인근 100개 마을이 거주 불능 및 사용 불가능 지역으로 선포됐다. 인근 12개 주 2천개 마을이 방사능 피해를 입었고 방사능 구름대는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을 관통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현에 위치해 있던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이 유출됐다. 3년이 지났지만 후쿠시마 원전은 여전히 수습되지 못하고 방사능을 해양과 공기중으로 내보내고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기인 자신의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을 이렇게 자평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이제, 한국을 보자.  설계수명 30년을 훌쩍 넘긴 노후한 고리 핵발전소 1호기는 어찌된 영문인지 2017년까지 재가동 승인을 받았다.  이 좁은 한반도에만 23개의 핵발전소가 운용중이다.  `원전마피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한국 원전은 잦은 고장, 부품비리, 사고 은폐로 얼룩져 있다.  그럼에도 얼마 전 한수원 공사 사장은 언론인터뷰에서 "전문가들이 정밀 점검을 통해 안전하다고 결론을 냈다면, 이를 믿고 경제성을 따져 더욱 안전하게 운영하면 된다" 고 기염을 토했다.  그 `경제성'이란 약방의 감초인가보다.  대통령은 얼마전 세월호 참사 사과 담화를 발표하며 오전엔 하염없이 눈물을 짓더니,  오후엔 중동에 한국 기술로 짓는 원자로 설치행사에 참여한다며 바삐 비행기에 올랐다. 같은날 언론은 "대통령 중동 원전 세일즈 시작"이라며 떠벌렸다.  한반도에서 원전 사고가 난다면 그 피해는 상상불가다. 원전은 인류에게 판도라의 상자가 분명하며,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몽환화, 그 노란 나팔꽃' 이 아니었겠는가.

 

책장을 덮으면 비로소 히가시노 게이고의 촘촘한 플롯의 정체가 드러난다.  모든 사건과 인물, 그리고 소품 하나까지 `몽환화'와 연결 돼 있다.  좋은 소설이란 강이 바다로 흘러 하나되듯 부분과 전체가 따로 놀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 적합한 상찬일 듯 하다. 소설의 모든 요소가 혼연일체를 이뤄 핵심 사건을 해결하고 거대한 주제의식의 표출로 행진한다.   청년 문제, 가족애, 그리고 다시 그들이 꿈을 찾고 회복되는 과정이 살인 사건으로 움츠러진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공급한다.  더불어, 미스터리 물에서 시대를 비판하고 감시하려는 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몽환화>는 미스터리로 끌리고 잃어 버린 꿈을 북돋으며 잘못된 한 시대를 날카롭게 은유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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